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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평뉴타운3-2지구토지주협의회 원문보기 글쓴이: 하얀별
<부록 2> 문화자원과 문화재
은평뉴타운의 문화재와 역사문화
1. 은평뉴타운 문화재 지표조사의 문제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7월 건교부가 개발제한구역 조정정책을 발표하면서 1971년 7월부터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던 진관내외동의 그린벨트가 풀렸다. 그리고 이명박 서울시장이 취임한 후 2002년 10월 서울시는 은평 지역에 대한 난개발 방지와 강남북 지역 균형개발 차원에서 은평 뉴타운 개발계획을 수립 발표하였다.
은평 뉴타운 건설지는 100만평이나 되는 넓은 지역이다. 은평 뉴타운 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 은평 뉴타운 주관 업체인 SH공사는 문화재 지표조사를 상명대 박물관에 단독으로 맡겼다. 보통 100만평 정도 되는 넓은 지역이면 문화재 지표조사를 한 박물관에 주는 것이 아니고 2~3개 박물관에 나누어서 주는 것이 상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상명대 박물관은 2003년 3월부터 현장조사를 했는데 애초에는 10일 정도를 예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업지구에 구릉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주거지역에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나대지가 많아 당초 예상보다 많은 시일이 걸려 5월 20일 은평 뉴타운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2003년 5월 20일 발간한 상명대 은평 뉴타운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은평 뉴타운 지역과 바로 붙어 있는 근린공원들을 은평 뉴타운 사업대상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때 성저십리, 즉 도성에서 십리까지는 나무를 벨 수도 없었고 묘를 쓸 수도 없었다. 은평구에서는 갈현동까지가 성저십리에 해당했다. 박석고개가 경계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석고개 구파발 쪽, 즉 은평 뉴타운 지구는 성저십리 바로 바깥에 해당했다. 박석고개 남쪽, 왕릉이 있는 서오능 쪽 산은 일반인이 묏자리를 쓸 수 없었다. 또 삼각산은 조선왕이 거처하는 경복궁의 조산이기 때문에 묘를 쓸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박석고개 북쪽 작은 산들에 묏자리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진관근린공원과 갈현공원이다. 진관내외동으로 둘러싸여 있는 진관근린공원은 바로 박석고개 북쪽이다. 공원 전체가 조선사대부들의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선 초중후기 분묘가 산포되어 있다.
조선시대 분묘는 성저십리 바깥에 주로 조성되었다.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은 서울 동북쪽에 조성된 조선시대 분묘군이고, 2002년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서울의 서북쪽 성저십리 바깥에 조성된 조선시대 분묘군이 진관근린공원과 갈현공원 분묘들이다. 서울의 남쪽은 한강이어서 묘를 쓸 수 없었고, 북쪽은 북한산이 솟아올라 있어 묘를 쓸 수 없었다. 때문에 동북 쪽과 서북 쪽 낮은 산들을 따라 분묘를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분묘 벨트라고 할 수 진관근린공원과 갈현공원은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과 마찬가지로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어야 한다.
2. 은평뉴타운 역사문화 활성화 문제
2-1. 은평뉴타운 역사문화의 길 1
- 진관내동 통일로변 역사문화
은평뉴타운 내 역사문화의 길 코스로 통일로 변을 따라가는 방법은 박석고개에 올라 박석고개의 의미를 살펴보고, 바로 박석고개 정상에 있는 박석고개 성황당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박석고개 성황당 바로 옆에 있는 유리공장에는 옛날 박석고개 성황당 옆에 있었다는 비의 받침이 아직 남아있다. 박석고개 성황당 터에서 10분정도 반대편 고개를 오르면 사현사 석조여래좌상을 볼 수 있다. 사현사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전망이 일품이다. 사현사터에서 내려와서 통일로를 조금 걸으면 물푸레골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물푸레골 마을은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에 의해 조성된 마을로 서오능 근린공원 계곡을 따라 쭉 안쪽으로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물푸레골에서 복개된 하천 따라 걸으면 방아닷골, 탑골에 닿는다. 탑골의 석불입상과 석불은 멀리 통일신라까지 연대가 올라가는 것으로 1960년대 조성된 석불입상 모신 자씨각은 소나무와 한편의 동양화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탑골 옆 흥창사에는 6.25 전쟁의 비극을 가지고 있는 은언군 묘비가 있으며, 탑골의 석불입상과 자연스레 코스가 이어진다. 흥창사에서 통일로 따라 10분정도 걸으면 은평구의 정신적 상징 밥할머니 상을 볼 수 있다. 밥할머니상에서 북한산 노적봉을 바라보는 광경이 좋다. 다시 통일로를 되돌아 와서 은평뉴타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헐리는 서울에서 제일 아름다운 마을 한양주택을 볼 수 있으며, 한양주택 옆에는 하우스 틈에 숨죽이고 있는 금암기적비와 하마비를 볼 수 있다. 금암 기적비에서 나와 창릉길을 따라 조금 나와서 구파발 삼거리 방향으로 걸어 올라오면 1970년대 안보유적 방호벽을 만날 수 있다. 진관내동 통일로변 역사문화의 길도 훌륭한 역사문화를 느낄 수 있는 코스이다.
1) 박석고개(薄石峴)
박석고개는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할이었던 성저십리의 경계가 되는 유서깊은 고개이다. 박석고개는 북한산 산맥이 서오능의 주봉인 효경봉으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 고개로 조선시대에는 북한산 지기가 손상되지 않도록 박석까지 깔았던 곳이다. 현재에는 생태적 관점에서 북한산의 녹지축이 끊이지 않고 효경봉 쪽으로 이어지게 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2) 박석고개 성황당
진관외동 476-7번지에 박석고개 성황당이 있었다. 지금 현재는 476-7번지 위에 샤시로 임시 당집을 마련해놓았다. 이번 은평뉴타운 건설과정에서 1970년대 초에 도로건설 과정에서 강제로 헐린 박석고개 성황당을 그대로 복원하지 못하더라도 지금 샤시 당집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보는 것이 필요하다.
3) 사현사 석조여래좌상(沙峴寺 石造如來坐像)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470-3호에 사현사라는 절집이 있는데 여기에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사현사라는 절이름은, 본래 이 절이 홍제천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홍제천의 옛 이름이 사천(沙川), 즉 모래내였다. 모래내 옆에 있는 절집이니까, 모래언덕 절이 되었다. 본래 위치는 홍제동 296번지, 현재 유진상가가 있는 위치에 있던 절이었다. 1970년 김현옥 서울시장 시절 시가지 확장 공사로 인해 보물 166호인 고려시대 5층 석탑은 국립 중앙박물관이 가져가 버렸고, 사현사는 석조여래좌상만을 가지고 홍제동 105-3번지로 옮겼다. 하지만 1994년 옮긴 자리에 현대인왕산아파트가 들어서자 다시 은평구 진관외동 479-3번지로 쫓겨 왔다. 현재 사현사는 정식 절집 형태로 인가도 받지 못하고, 민간집에 석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 형편이다. 이번 은평뉴타운 건설 과정에서 정식 절집의 형태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사현사 석조여래좌상은 이제 은평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4) 물푸레 골 당나무
물푸레골은 은평뉴타운 105만평 마을 중에서 계곡따라 가장 길게 들어선 마을이다. 1950년 6.25전쟁 후 피난민이 정착하면서 풀푸레골을 따라 길게 마을이 들어섰다고 한다. 진관내동 75번지에는 수령 100년 이상된 물푸레골 당나무가 있다. 마을 이름의 기억 보전을 위해서도 잘 보전할 필요가 있다.
5) 탑동의 석불입상 및 석불
“탑동의 유물로 보았을 때 고려시대 이전 사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석불 자체의 옷주름 표현방법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고려시대로 추정된다."(상명대, 은평 뉴타운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p.136)
"탑동에서는 요즈음에도 금줄을 치고 탑제를 지내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제관이 제일 먼저 아침에 목욕을 재계하고 탑 주변을 청소한다. 그리고 돼지고기, 삼색과실, 포, 백설기, 술 등을 제물로 준비하고 열두 발의 왼 새끼줄(12달 의미)로 탑신을 겹으로 두른다. 정상적인 새끼줄은 오른쪽으로 꼰다. 금줄은 왼 새끼다. 잡신이 그곳을 침범하려다가 왼새끼를 보고 놀라 두려움을 느껴 도망간다고 한다. 금줄에는 청솔가지, 백지, 숯 등을 끼운다. 그리고 탑제를 지낼 때에는 부녀자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탑 주위를 돌면서 집안의 평안을 기원한다."(이성영, 재미있는 새 은평이야기, p180)
탑동의 탑제가 은평뉴타운이 건설되고 서도 계속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문화유산의 보전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이런 마을문화가 마을 토박이들이 사라지면 따라서 사라지는 것은 공동체의 문화가 상실되는 것이다. 은평뉴타운 개발 이후에도 이런 문화를 보전하고 계승하도록 서울시, 은평구청은 물론 마을의 새로운 주민들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6) 흥창사 은언군(恩彦君) 묘비
흥창사 내에 있는 은언군 탑비는 1950년 6.25전쟁의 비극을 갖고 있는 비이다. 이 비는 대전차 방해시설물, 방호벽과 함께 연계된 문화재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은언군의 본래 위치였다는 진관근린공원 동남쪽 언덕에는 은언군의 묘소가 사라지고 없다. 본래 위치가 어디였는지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은언군의 비를 제자리에 복구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흥창사에 그대로 두면서 뒷면에 칠로 훼손된 부분을 원상태로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7) 밥 할머니 석상
밥할머니상은 행주대첩에서 행주치마를 입고 싸웠던 여성들이 특별한 여성들이 아니라 고양 일대에서 살던 민초 여성이었음을 말해주는 귀중한 설화이다. 행주산성의 인근이라 할 수 있는 은평구에 있던 여성들도 행주산성에 들어가서 싸웠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밥할머니 상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용감하게 나선 조선 여성의 용맹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체야 어떻든 그 의미만으로도 은평구의 자랑인 유적이다.
8) 금암참터
대표적 파발망(擺撥網)이었던 서울―의주간 파발을 보면 총 41참(站) 1,050리(里)였다. 서울―기영참(돈화문 밖)에서 시작해서 23리 떨어진 곳에 검암참(양주), 검암참에서 22리 떨어진 곳에 벽제참(고양), 벽제참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분수원참(파주)을 두었다. 서울 돈화문 밖에서 41개 참이 의주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 참마다 건물이 있었다. 이번 뉴타운 건설과정에서 시굴조사를 하면 검암참 유허지가 밝혀질 것이다. 검암참 유허지가 발견되면 그 일대를 벽제역터처럼 사적으로 지정해야 할 것이다. 서울-의주 파발은 통일로 따라 남과 북이 계속 유적조사를 하여 유허지를 발견해야만 하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9) 금암기적비와 하마비
금암기적비는 정조대왕 5년 정조대왕이 직접 쓴 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정조의 할아버지, 즉 영조가 세자이던 시절, 서오능에 있는 영조의 아버지의 숙종의 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다 길이 늦어 금암발참에서 하루밤 묵었을 때 창릉천에서 일어났던 소도둑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가를 적고 있다. 이야기 내용도 좋고 오늘날에 읽어도 교훈적이다. 이런 훌륭한 비가 비닐하우스 틈에 끼여 방치되었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금암기적비 옆의 하마비는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다행히 원상이 상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 다행스런 일이다. 이번 은평뉴타운 건설과정에서 금암기적비와 하마비의 금암참터 역사공원 속에서 잘 보존될 것이다.
10) 방호벽
“1979년부터 서울 요새화 계획의 일환으로 착공되었던 수도권 전역의 방어벽이었다.”(서울 20세기, 서울학 연구소, p276)
1970년대 초 강남개발이 시작된 것도 제2의 6.25와 같은 사태를 만나면 강북에 집중된 인구가 어떻게 한꺼번에 한강을 도강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2의 6.25에 대한 대비는 박정희 정부 시절 행정수도 구상으로 이어졌다. 행정수도 구상에서 수도권 사람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서울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정부는 강조했다. 이러한 서울 시민 불안감 해소 정책으로 서울 요새화 계획이 나왔다. 이 서울 요새화 계획의 일환으로 방호벽이 수도권 서북방을 따라 요새처럼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은평구 진관내동에 있는 방호벽은 냉전시기의 유물이자 6.25전쟁의 상처가 만들어낸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이다. 방호벽은 냉전시대를 알려주는 문화재로 역사적으로 보전가치가 있는 시설물이다.
2-2. 은평뉴타운 역사문화의 길 2
-진관내동 진관근린공원과 못자리골 역사문화
진관근린공원은 구파발 전철역에서 현재 은평뉴타운 모델하우스 자리 옆으로 오르면 된다. 은평미디어 고등학교 뒤편에 있는 숙빈 최씨 아버지 묘를 보고, 동쪽을 조금 걸으면 임상궁의 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길을 돌아 나와서 못자리골 내려가는 길로 접어들면 영천 이씨 묘역을 만날 수 있다. 영천이씨 묘역에서 못자리골 지장사 방향으로 내려오면 이원증 목사묘터를 만날 수 있고 못자리골 가장자리를 따라 돌면 관음사 옆에 있는 사신당을 찾을 수 있다. 진관근린공원에서 조선시대 초중후기 매장문화재를 살피고, 못자리골 숲을 감상하면서 사신당, 버려진 우리의 당문화를 살피는 길은 2~3시간 행복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1)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 아버지 최효원 신도비
진관외동 은평웹미디어 고등학교 뒤 쪽에 나있는 산길로 5분 정도 올라가면 1734년에 세운 영조의 친모 숙빈 최씨의 아버지 최효원(崔孝元) 신도비를 만날 수 있다. 최효원 신도비를 보면 머리 부분과 받침대의 조각이 정교하다. 영조10년에 자신의 장인어른의 묘비를 세운 것이라 일반 신도비보다 더 정성을 기울인 것 같다. 비문에 보면 증 영의정(贈 領議政)으로 되어 있다. 증 영의정(贈 領議政)은 임금의 장인에게 사후에 주어지는 벼슬이다.
최효원 묘에서 동쪽으로 20m 정도 가면 최수강(崔壽崗) 묘가 있다. 최수강 묘 앞에는 1763년에 건립된 최수강(崔壽崗) 비가 있다. 최수강은 최효원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수강 비 앞에는 SH공사 뉴타운 용지 팀에서 꽂아 놓은 팻말이 있다. 그 팻말에는 “은평 뉴타운 사업 지구 내 포함된 분묘로서 이해관계인(관리인)께서는 우리 공사로 연락바랍니다. 연락처 : (02) 3410-7880~3) SH공사 뉴타운 용지팀”이라고 적혀 있다. 최효원 묘는 진관근린공원 중간 허리를 넘어서 상단부에 있다. 여기까지 절개된다고 생각하면 진관근린공원이 상단부 머리부분만 남아 있을 우려가 있다. 은평 뉴타운 제1지구 이원증 목사묘 처럼 제대로 된 학술조사도 없이 또 새벽에 기습적으로 파헤쳐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관근린공원 동서남북은 은평 뉴타운 지역이다. 진관근린공원은 은평 뉴타운이 건설되고 나면 은평 뉴타운의 중앙공원 구실을 할 것이다. 은평 뉴타운 중앙공원이 생태만 살아있는 공원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공원이라면 은평 뉴타운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줄 것이다. 은평 뉴타운은 생태도시에 걸맞게 문화도 살리는 방향으로 뉴타운을 건설해야 한다. 진관근린공원의 매장문화재에 대한 정밀한 학술조사가 먼저이다. 학술조사 결과를 두고 지역 주민의 공청회를 거쳐 진관근린공원의 매장문화재 처리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600년, 500년 된 문화재를 어떻게 학술조사도 없이 함부로 옮길 생각부터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효원 신도비는 은평구의 자랑스러운 문화재이다. 그런 문화재를 옮길 때는 은평구 시민들에게 먼저 묻는 것이 순서이다. 건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시대는 지나갔다. 건설도 하고 문화도 살려야 한다.
2) 임상궁 비
진관외동에 있는 은평웹미디어 고등학교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진관근린공원 능선으로 올라가서 10분 정도 동쪽으로 걸어가면 땅에 쓰러져 있는 비석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비의 주인공은 상궁 임씨(1635~1709)이다. 상궁 임씨 비의 모양새를 보면 비 몸체의 덮개는 없으며 비 몸체와 비 받침대로만 이루어져 있다. 비 몸체 형태는 윗부분이 동그랗게 되어 있다. 이런 비의 형태를 월두형비신∙비대형(月頭形碑身∙碑臺形)이라고 한다. ‘월두형비신’ 이름이 재미있다. 우리말로 하면 ‘반달 모양 비 몸체’ 정도 되겠다.
임상궁은 13세 때 7세인 현종을 모시기 시작해서 명성왕후 3년 상까지 39년 동안 현종과 왕비를 모셨다. 임상궁 나이 51세 때 아직 살아 있던 인조의 둘째 부인을 모시다, 56세 때 왕궁을 벗어나 자신이 키웠던 숙종과 세 공주들 중 막내 공주 집에서 집안을 주재하는 집사로서 19년을 더 살다가 75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조선 중기, 조선 여인들에게는 가장 숨 막힐 듯한 시대에 살아갔던 양반 가문의 한 여자의 일생이 이 비문에 새겨져 있다. 원손궁과 세자궁에서 일하던 궁녀는 대부분 양반 가문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양반 가문에서는 왜 자신의 딸을 궁녀로 보냈을까? 임금의 성은을 혹시라도 입는 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으랴하는 집안의 욕심이 먼저 였을 수도 있겠다. 또 보모상궁 자체가 다음 세대 왕을 키우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의 가문의 영광일 수도 있겠다.
집안의 영광은 영광이지만 평생 결혼도 하지 못하고 실수 한 번 허용되지 않는 살벌한 궁에서 조신한 처신으로 수도자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궁녀의 아픔은 또 얼마나 컸을까? 우리는 T.V 사극에서 궁녀를 자주 보았지만 그들의 구체적 일생을 실제 기록으로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진관근린공원 동남쪽 언덕에 죽어서도 왕이 계신 경복궁을 바라보고 있는 상궁 비를 보면서 한 많은 상궁의 삶에 대해 과장과 가식 없이 접할 수 있는 실질적 기회를 우리는 가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비문을 갖춘 상궁 비는 임상궁 비가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그만큼 귀한 비이다.
진관외동에 흩어져 있는 조선시대 분묘문화의 석물들 중 가장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이 임상궁 비이다. 이 임상궁 비를 은평구청에서는 뉴타운 건설 이후, 새로 지을 은평 역사사료관에 내려서 전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현장에다 두면 도굴꾼에 의해 비가 도난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문화재는 현장을 떠나면 생명력과 생동감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현장에 보전하는 것이 최선이다. 은평 뉴타운이 건설될 동안 만 문제가 되지, 그 이후 은평 뉴타운이 건설되고 진관근린공원이 은평 뉴타운의 중앙공원이 되고 산책길에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 의해 안전하게 감시될 것이다. 임상궁 비문의 마지막에 ‘서교 신혈리 동남쪽 언덕에 장사지내니 부모와 조상의 선영이 있는 곳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은 진관근린공원 동남쪽 끝, 현장에서 읽어야 현실감이 살아온다. ‘역사 문화재는 그것 자체가 갖고 있는 역사적 상상력과 자연이 주는 원초적 감동과 정취가 있을 때 가치가 있다’고 유명한 한국문화사가는 말했다. 임상궁의 묘비는 잘생겨서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왕이 계신 궁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 비가 주는 자연적 어울림을 동반한 역사적 상상력 때문이다.
3) 영천이씨(永川 李氏) 묘역
진관근린공원 중앙에서 못자리골로 내려가는 길에 영천이씨 묘역이 있다. 현재 묘 7기가 모셔져 있다. 영천이씨 문중에서는 여기를 형제 판서 묘역이라 한다. 여기 묘역의 특징은 조상의 묘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래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일 위에는 선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이린의 묘가 있고, 아래에 이린의 동생 이선의 묘, 그 아래의 이린, 이선 형제의 할아버지 이구손의 부부묘,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린, 이선 형제의 아버지 되는 이순증의 묘가 모셔져 있다.
4) 이원증 목사 묘터
이원증(李元增)은 한산 이씨로 이색의 증손자이다. 제주 목사를 했다. 그의 아들 이영은(李永垠)은 1434(세종16)~1471(성종2)에 살았던 문신으로 세조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던 문신이었다. 이원증은 세종 때 사람으로 황희 정승과 동시대의 사람이다. 이원증 목사 묘는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황희 정승의 묘와 양식이 비슷하다. 실제로 사진은 비교해보면 양식은 비슷한데 황희 정승 묘는 기단이 두 단이고, 이원증 목사 묘는 한 단이다. 규모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는 벼슬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원종 목사 묘는 세종 때, 즉 조선 전기 매장문화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분묘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못자리 골에 위치한 정3품 이원증 목사묘와 정2품 묘가 2005년 4월 초에 기습적으로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져 버렸다. 어디로 이장되었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못자리 골에서는 세종 당시 15세기 청자편, 15세기 기와편, 16세기 백자편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분명 못자리 골에 세종 때 사람이 살았음이 분명하고 그냥 사람이 아니라 청자와 백자를 쓰고, 기와집을 짓고 살았음이 분명하다. 15세기에 청자를 쓰고, 16세기에 백자를 썼던 사람들이 은평구에 조선시대 때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들이다. 그러면 이 청자를 썼던 사람들과 이원증 목사 묘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런 의문들이 은평구 지역사에서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원증 목사 묘 주변에는 아담한 송림이 조성되어 있다. 이 송림은 또 언제 조성된 것일까? 이런 생태적인 질문들은 은평구 학생들에게 많은 환경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지역문화재의 가치는 이런 것인데, 이런 지역적 가치를 배울 기회를 이원증 목사묘를 파헤침으로써 영원히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이원증 목사묘 안에 어떤 역사적 사실이 숨어있는지 고고학적으로 발굴할 수 있는 기회조차 빼앗아 버렸다. 은평뉴타운 2,3지구에서는 이런 문화재 파괴행위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못자리골 사신당
"사신당은 본래 서대문구 홍제4동 38번지 청구아파트 옛 서울여상 근처에 있었는데, 1966년 통일로 확장공사로 인해 맞은편 홍제2동 50번지로 옮겨져 30여년 이상 방치되어 왔다. 그러다가 현재의 당주인 김형순씨가 1993년 불광 2동 웃산 불광사 옆으로 이사했다가 2년 6개월만인 1995년 10월 못자리 골로 이사 와서 30여 평 규모의 건물을 당으로 삼고 탱화와 무구를 옮겨와 안치하고 있다.
현재 사신당에는 여러 무속도가 있는데 이들 중 사신도, 최영 장군도, 뒤주대왕도, 삼불제석도 등 4점과 봉축 현판이 2005년 2월 11일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서쪽 마당 한쪽에는 무악재에서 옮겨온 남서낭당, 여서낭당이라 불리는 당목이 오색 천에 둘려져 서있다. 서울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봉축 현판을 보면 ‘기축(己丑) 중하(中夏)’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종 26년(1889) 음력 5월에 왕실로부터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비가 전국 유명 사찰이나 원당 서른여섯 군데에 시주한 기록을 보면 사신당은 사신성황당으로 나온다. 사신당은 고종 때 왕실전용 굿당이라고 할 수 있다."(은평구의 문화유산, 은평문화원, p76)
이런 역사와 위치를 가지는 사신당이 현대로 오면서 도로확장에 밀려서 은평구 진관내동 못자리 골까지 밀려온 것이다. 현재 사신당 옆 관음사는 은평 뉴타운 후에도 보전된다고 한다. 관음사와 바로 이웃하여 있는 사신당이 보전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관음사가 보전된다면 토지이용 상으로 보더라도 사신당은 그대로 보전하더라도 문제가 없다고 본다. 이땅의 성황당 문화는 거의 소멸 직전에 있다. 이렇게 귀중한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보전하는 것은 은평구의 문화를 더욱 풍족하게 할 것이다.
3-3. 은평뉴타운 역사문화의 길 3
-진관외동 역사문화
구파발 전철역에 내려서 금성당에 들렀다가 진관외동 하천길을 따라 마고정터를 거쳐 기자촌 사거리로 방향을 잡고 기자촌을 먼거리에서 조망하면서 진관사길 입구에 도착하는 방법은 진관외동을 거쳐 진관사 입구길에 도착하는 좋은 방법이다. 진관사의 주봉은 응봉이다. 진관사를 구파발 역에서부터 걸어가면 북한산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의 원경을 조망하면서 걸을 수 있다. 응봉은 처음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진관사 입구가 되면 나타난다. 금성사도 따로 떼어놓고 보면 다쓰러져 가는 조선조 말 건물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진관사 가는 길 속에 하나의 유적으로 보면 연계되는 유적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진관외동 142번지 진관사길 입구에서 조금 가면 화의군 묘소가 있다. 화의군 묘소 주변에 소나무 숲이 아름답다. 지금은 찾는 이가 많지 않지만 진관사 가는 길을 조성하면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훌륭한 유적이다. 화의군 묘소에서 영산군 묘소까지 가는 길은 본격적인 진관사 탐례길이다. 지금은 지나다니는 차들 때문에 사람들이 안전하게, 조용하게 걸을 수 없는 위험한 길이 되어버렸다. 3-2지구까지 은평뉴타운이 조성된다면 이 길에 인도를 조성해야한다. 은평뉴타운이 건설되고 진관외동 하천이 복구된다면 진관사 가는 길을 구파발역에서부터 조성한다면 좋은 역사문화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검보다리
진관외동 하천은 이번 뉴타운 건설 과정에서 1970년대 초 복개되었던 것이 복원될 전망이다. 이 복원과정에서 진관외동 하천과 통일로가 만나는 지점에 조선 후기 진관외동 젯마을에 사는 경주 정씨 정광혁 공이 세운 총길이는 6m, 폭5m의 규모의 검보다리가 있었다. 공사 과정에서 이 검보다리의 유구를 정밀조사하는 것이 요청된다.
2) 신도초등학교
신도공립보통학교로 1928년 12월 1일 개교. 처음엔 4년 학제였고, 1937년 3월 6년제 첫 졸업했다. 은평구의 첫 초등학교였다. 신도초등학교의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 미니어처라도 만들 필요가 있다.
3) 금성당(錦城堂)
신도초등학교 옆 진관외동 272번지에는 금성당이라는 당집이 있다. 금성당 건물은 지은 지 150년 가량 되는 조선후기 건물로 추정된다. 은평 뉴타운 지역에 있는 유일한 조선조 건물이다. 뉴타운이 건설되었을 때 진관외동의 역사를 유일하게 증언할 수 있는 민간가옥이다. 은평사료관 건설 예정지인 탑골에 이전 복원한다는 말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금성당의 역사성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그 건물이 위치하고 있는 역사성은 원위치에 있을 때 생명력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금성당은 인근에 위치한 화의군 묘와 연계가 되는 유적이다. 전국에 금성대군을 신으로 모시는 당이 몇 군데 조성되어 있고, 단종복위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신으로 까지 모셔지게 되었는지 민속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많은 유적이다.
4) 화의군파(和義君派) 묘역
화의군파 묘역은 진관외동 산58번지에 있다. 화의군은 세종대왕 후궁 영빈강씨 소생으로 사육신 사건 때 절개를 지키다 유배되었고,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펴고 죽었을 때 단종을 지키려는 상소를 올리다 사약을 받은 인물이다. 화의군 묘소와 금성당은 금성대군으로 연결되는 유적이다. 화의군 묘소의 소나무숲이 참 아름답다. 유적은 연계될 때 빛을 발한다. 이번 은평 뉴타운 조성 과정에서 진관사까지 가는 진관외동의 역사의 길이 조성된다면 은평구민이 즐겨 찾는 훌륭한 유적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5) 진관외동 52-3호 느티나무 숲
이 느티나무 숲은 영산군 둘째 사위인 경주정씨 정충인공의 진관외동 정착내력을 간직한 숲이다. 이곳에 있는 느티나무는 5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서울시내에 이렇게 느티나무가 잘 조성된 곳도 거의 없다. 화의군 묘역과 영산군 묘역을 자연스레 연결시켜주는 숲이다. 은평 뉴타운 건설 과정에서 느티나무 공원으로 조성한다면 경주정씨의 역사와 함께 살아있는 공원이 될 것이다.
6)영산군파(寧山君派) 묘역
영산군(1490~1538)은 1490년(성종21년)에 성종과 숙용심씨(淑容沈氏)사이에서 태어났다. 중종 때 유배를 받고 돌아와서 이곳에 정착했다. 화의군 묘소처럼 영산군 묘소도 잘 찾지 않는다. 진관사를 전부 차를 타고 가기 때문이다. 이번 은평 뉴타운 조성 과정에서 진관사까지 가는 역사의 길이 조성된다면 은평구민이 즐겨 찾는 유적지가 될 것이다.
7) 숙용심씨(淑容沈氏) 묘표 및 환원기념비
숙용심씨 묘표는 아들 영산군의 묘소가 진관외동에 있었기 때문에 진관외동에 모셔졌다. 숙용심씨의 묘표를 찾는 과정은 그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이다. 이런 드라마는 많은 학생들이 알아야 하는 드라마이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하는 교훈이다. 하지만 은평구에 있는 학생들도 여기에 이런 유적이 있는지 모르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은평뉴타운 건설 과정에서 역사문화의 길을 조성한다면 많은 학생들이 찾을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3. 작은소리학교 문제
작은소리학교는 은평구 진관외동 지역에서 1997년부터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전통문화예술을 교육시키고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지신밟기 등을 하면서 잊혀져 가는 마을 대동굿을 오늘에 되살러 오고 있는 진관외동 지역문화단체이다. 그리고 전통문화예술을 통해서 노약자를 위로해주기 위해 지역 내의 곳곳을 찾아다니며 활동하는 비영리민간단체이기도 하다. 또한 문화관광부,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등 정부 지자체의 각종 사업을 주관해 오고 있는 단체이기도 하다(문화관광부 주최 작은소리학교 주관 청소년 광대학교 2005/ 서울특별시 주최 작은소리학교 주관 제7회 서울시 청소년 전통예술한마당 <청소년 마을굿 2005>/ 작은소리학교 주최 서울문화재단 후원 제2회 서울시 청소년 어릿광대 축제 <잡색굿 2005> 등의 행사 주관 주최).
작은소리학교는 이미 대부분 사라진 우리 전통문화예술에 대해서 다시 의미를 부여하고, 전통문화예술로 은평구 마을 주민과 함께 즐기고, 더 나아가 서울시민들과 함께, 서울의 청소년들과 함께 하기 위해 헌신하는 곳이다. 작은소리학교는 소멸되어 가고 소외된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고 또 소음(騷音) 때문에 도시에 정착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우리의 훌륭한 전통인 농악을 집중적으로 양성하고 있다. 이런 전통문화단체가 은평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은평구민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전통문화단체 하나가, 문화단체가 집중되어 있지 않는 은평구 지역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은소리학교는 전통문화를 계승한다는 일념으로 갖은 어려움을 견뎌내고 은평구 진관외동에 뿌리를 착실하게 내리는 과정에 있었다. 그 과정에 하늘에서 날벼락이 치듯이 은평 뉴타운이 발표되었고, 지금은 종교단체나 유치원과 같은 공공성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작은소리학교의 문화적 공공성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소리학교가 하는 일이 종교단체나 유치원보다 공공성이 약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은평 뉴타운은 생태적인 도시, 21세기적인 도시를 건설하겠다고 한다. 지역의 문화자원과 열심히 활동하는 지역문화단체를 살리지 못한다면, 은평 뉴타운은 21세기 도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작은소리학교는 은평 뉴타운의 하나의 명물이 될 수 있고, 장차 은평 뉴타운에 입주 하는 새로운 주민들에게 전통을 일상적으로 접하게 할 수 있는 훌륭한 지역문화단체이다. 은평 뉴타운 과정에서 반드시 살려져야 할 은평구의 문화자산이다. 작은소리학교는 지금 은평 뉴타운 지역에서 다시 활동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은평 뉴타운 지역 내에 전통문화예술 분야의 활동이 가능한 터를 제공해 주거나 또는 현재 작은소리학교가 있는 터전을 그대로 존치시켜 주기를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전통문화를 말살하는 은평 뉴타운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이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자료출처 : 은평뉴타운 도시개발사업 사회영향평가 연구 최종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