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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이 푸르던 여름이 지나고 이슬이 찬 공기를 만나 서리가 되며, 단풍이 짙어지고 여름새와 겨울새의 교체시기에 해당하는 한로가 지났습니다. 한로기간에는 오곡백과를 수확하고 기러기가 모여들고 참새가 줄어들고 조개가 나돌며 국화꽃이 노랗게 피어난다 했습니다 10월 23일이 지표면에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고 11월7일이 입동이니 유례없이 다사다난했던 갑오년도 저물어 갑니다
평소에 우리 대전정통풍수지리연구회를 아껴주시는 풍수학인 여러분! 가내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오는 11월 2일(일요일)에 우리연구회에서 세종시주변의 명승지를소암선생님을 모시고 답사하고자 하오니 아래의 내용을 참고하시어 동참하실 학인께서는 연락을 바랍니다.
-아 래- 일 시 : 2014년 11월 2일 답사예정지 : 세종시 주변(하단 자료참조) 집 결 장 소 : 대전 탄방역 (지적공사앞) 08:00까지 참 가 비 : 삼만원(\30,000) 준 비 물 : 간편복장. 필기구 연 락 처 : 010-2836-2200 임광묵 ***차량운영관계로 10월 23일(목) 까지 예약접수합니다.
답사지 : 1. 전의이씨 시조 이도묘 2. 박팽년 조부 박안생묘 3. 약천 조계원 선생묘역 4. 고복저수지 (중식 - 매운탕) 5. 오봉산 숭모단(강화최씨중시조) 및 산책 6. 시간이 되면세종시 민마루 전망대와 초려 이유태선생묘소 일부 일정 변경될 수 있습니다 ( 2014년 11월 02일 세종시 일원)
1. 전의 이씨(全義李氏) 시조 이도(李棹) 묘 전의 이씨(全義李氏) 시조 이도(李棹)의 묘는 충남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 599 에 있다. 천안에서 1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행정 삼거리에서 공주와 대전 가는 길로 갈라진다. 여기서 좌측 1번 국도 대전 쪽으로 들어서 직진하면 철로 위 고가차도를 지나 경부선 철로와 평행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조금만 더 가면 우측으로 차단기가 있는 철로를 건너 양안리, 외오류로 가는 길이 있는데 여기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신도비와 묘소가 있다. 이도의 처음 이름은 이치(李齒)였다. 충남 공주 출신으로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코자 남하하여 공주에 이르렀을 때 홍수로 금강이 범람하여 진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때 배를 만들어 도강(渡江)을 주도한 인물이 이치다. 견훤을 물리친 왕건은 이치의 공로를 높이 사 배의 노라는 뜻의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도(李棹)는 삼한개국익찬공신삼중대광태사(三韓開國翊贊功臣三重大匡太師)에 책록되고 전산후(全山侯)에 봉해졌으며, 말년에 군사요충지인 전의현에 운주산성(雲住山城)을 쌓고 이곳에서 살다 죽어 후손들이 전의(全義)를 본관으로 삼고 오늘의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전설에 의하면 그의 선조는 공주 금강의 가난한 뱃사공으로 언제나 친절하게 손님을 모셨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배 삯을 받지 않고 건네주어 자비롭다는 소문이 나 있었고 특히 공주 부근의 거지들을 잘 보살펴주어 그들의 존경을 받아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루한 승복을 걸친 늙은 떠돌이 중이 와서는 급히 강을 건너자고 하였다. 뱃사공 이씨는 그 스님이 급한 볼일이 있나 싶어 급하게 노를 저어 강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중은 배에서 내리지도 않고 다시 강을 건너자고 하였다. 뱃사공은 사연을 물어보지도 않고 되돌아 강을 건너 주었다. 그러자 또 중은 강을 건너자고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하루종일 했지만 사공 이씨는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중이 하자는 대로 해주었다. 그러자 그 스님이 크게 감탄하고는 말하기를 "과연 소문대로 덕이 많은 분이구려. 보아하니 상중(喪中)인 것 같은데 묘 자리는 보아둔 것이 있소?"라고 물었다. 이씨는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 3년이 지났으나 아직 좋은 묘 자리를 찾지 못해 임시 방편으로 집 뒤에 모셔 두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노승은 자기가 자리를 하나 일러줄 터이니 꼭 그대로 시행하고 다짐하였다. 스님이 일러준 자리는 공주강 북쪽 산중턱에 있었는데 훗날 반드시 묘를 이장하자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니 아주 파지 못하도록 석회 1천 포를 써서 단단히 묻으라고 지시했다. 노승은 뱃사공 이씨의 덕을 시험하면서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하루종일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며 산을 살폈던 것이다.뱃사공 이씨는 중이 잡아준 자리에다 아버지 시신을 이장하고 중이 시키는 대로 거지들의 도움을 받아 무덤을 단단히 했고 중이 써준 표석 하나도 같이 묻었다. 이 묘를 쓰고 그 자손들이 번창하여 부자가 되었고 공주 지방의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그 중 이치는 왕건을 도와 삼한을 통합하는 큰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십여 대가 지나서 조선조 광해군 때 명풍(名風)으로 이름 높은 박상희가 찾아와 묘 자리를 본 후 후손들에게 "이 자리는 산 뒤의 맥이 내려오다 끊겼기 때문에 일시 발복은 했을지 모르지만 곧 일족이 멸할 나쁜 자리니 즉시 이장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후손들은 풍수의 달인이라고 알려진 박상희의 말이 그럴 듯 하여 그의 말대로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하기 위하여 묘를 팠다. 그러나 단단한 석회로 묻어놓아 파기가 힘들었다. 겨우 한 층을 걷어내자 그 속에 글씨를 새긴 돌이 나왔다. "남래요사 박상희 단지일절지사 미만대영화지지(南來妖師 朴相熙 單知一節之死 未萬代榮華之地)" 즉 남쪽에서 요상한 지관 박상희가 와서 단지 용맥 일절이 죽은 것만 알고 만대영화지지라는 것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박상희와 후손들은 깜짝 놀랐고 선조의 용의주도한 글귀에 감탄하면서 그대로 다시 묻었다. 이 묘는 지금도 금강변인 공주시 시목동 공주대교 북단에 "전의이씨시조선산(全義李氏始祖先山)"이라는 비석과 함께 있으며 전국의 풍수 애호가들이 답사지로 빼놓지 않는 곳이다.뱃사공 이씨가 이도(李棹)의 몇 대 선조인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므로 전의 이씨들은 이도를 1세조로 하여 지금까지 1천 년의 문중 역사를 자랑한다. 전의 이씨는 고려조뿐만 아니라 조선조에서도 정승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 7명, 공신 6명, 문과 급제자 178명을 배출한 명문가다. 특히 이도의 11대손 이정간(李貞幹)은 효성이 지극한 사람인데 사헌부 요직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 중 노모 봉양을 위해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의 나이 80세에 노모는 100세였는데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희롱하며 노모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재롱을 부렸다. 이 말을 전해들은 세종은 그를 정2품으로 올리고 친필로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의 글귀를 하사하였다. 이 글씨가 세종대왕의 친필로 유일하게 전해 내려오는 것이며 전의 이씨 문중은 이를 대대로 가훈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이도(李棹) 묘는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이다.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룡이 보은 속리산에서 한남금북정맥을 분맥하여 죽산 칠현산에서 다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리게 된다. 칠현산(516.2m)을 출발한 금북정맥 대간룡은 안성 서운산(547.4m)과 천안 성거산(579.1m), 태조산(421m), 경암산(319.1m)으로 이어져 경부고속도로 천안삼거리 휴게소 아래 고개를 건너 고려산을 만든다. 다시 전의면 덕고개 철로와 1번 국도를 넘어 국사봉(402.7m)을 만들고 차령을 넘어 봉수산(364.4m)로 이어져 행룡을 계속한다. 이도 묘의 주룡은 덕고개를 넘어 여러 산들을 기봉하면서 남쪽으로 오다가 한 용맥을 분맥하여 방향을 북쪽으로 회전하면서 자신이 행룡해 온 금북정맥 대간룡을 바라보고 가다가 들판을 만나 행룡을 멈추고 혈을 결지하였다. 군부대가 있는 주산에서 북쪽을 향하여 내려오는 주룡(主龍)의 행룡(行龍)과정은 매우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 질서 정연하게 기복(起伏)을 하면서 용의 균형을 유지하고 생기를 보호하기 위해 개장천심(開帳穿心)을 하는가 하면 과협(過峽)마다 아름다운 영송사(迎送砂)와 공협사(拱峽砂)가 있어 바람이나 물의 침범으로부터 주룡의 생기를 보호해주고 있다. 북향으로 혈을 결지하기 때문에 남쪽인 뒤가 높지 않도록 하여 햇볕을 차단하지 않는다. 주룡을 보호하기 위해서 양옆 가깝게 청룡 백호가 호종(護從)하는데 마치 귀인이 행차할 때 그를 경호하고 보필하기 위해서 근접 수행하는 경호원과 같다. 물 또한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용맥을 감싸면서 따라오는데 혈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조밀하여 주룡의 생기가 조금도 흩어지지 않는다. 용진처(龍盡處)에 이르러 커다랗고 둥근 입수도두(入首倒頭)를 만들어 정제하고 순화시킨 깨끗한 생기를 정축(停蓄)해 놓았다. 여기서 뻗은 선익(蟬翼)은 혈을 좌우에서 지탱해주고 혈에 응취된 생기가 옆으로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혈에 응취된 생기가 앞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순전(脣氈)이 두툼하면서 견고하게 있으며, 혈장(穴場) 아래 하수사(下水砂)는 우에서 좌로 휘어 감아주었다. 주산에서 내려온 주룡이 호랑이 등과 비슷하다면 입수도두, 선익, 순전이 있는 혈장은 커다란 호랑이 머리와 같아 전체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들판을 바라보고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 이와 같은 형국(形局)을 복호형(伏虎形)이라고 한다. 이때 호랑이 앞다리에 해당되는 것은 혈을 바짝 감싸주고 있는 청룡 백호다.
2. 박팽년의 조부 박안생묘 세종시 전동면 송성리 산4번지에 위치 의영고사 박안생(박안생 ?~1439)과 그의처 안동김씨의 묘역으로 상단에 부인 안동김씨, 하단에 박안생이 자리한 상하장(上下葬)이다. 박안생은 목사를 지냈으며, 단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중림(中林)의 부(父)이며 사육신 박팽년의 조부이다. 봉분은 기단석 위에 길이 1m 내외의 치석된 장대석으로 사면을 쌓은 후 봉토 하였으며 형식은 고려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해좌사향(亥坐巳向)이다. 석물로는 상석대신 사가형의 판석을 두었으며, 석축아래에는 근래에 만든 향로석과 시대가 다른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앞으로는 금관조복(金冠朝服)차림의 문인석 2쌍이 양옆에 각각 세워져 있다. 묘제와 석조물이 고려시대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세종시 묘역안내문에서 발췌) 순천 박씨는 신라 경명왕의 8자중 7번째인 강남대군 박언지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순천박씨의 시조는 그의 아들인 박영규인데 그가 박언지의 아들이다.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였지만 고려에 귀의하여 후백제 공략에 공을 세위 고려 삼한통합익찬공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었다.
3. 약천(藥泉) 조계원선생 묘역 세종시 전동면 송정리 140-6에 있다. 이곳에 조계원. 조진석. 조영시. 조원창이 묻혀있다. 충정공 형조판서 조계원선생(1592~1670)은 본관은 양주(楊洲)이고 자는(子長), 호는 약천(藥泉)이다. 인조때 호조판서를 지낸 존성(存性)의 아들이며 영의정을 지낸 신흠의 사위로, 백사 이항복의 문인이다. 1616년(광해군8년)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인조반정 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628년(인조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형조좌랑. 장령.수찬등을 지냈다. 1641년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으로서 볼모로 심양에 가있던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요구로 명나라 공격에 참가하게 되자 그를 시종했으며 귀국 후에 충청도관찰사 예조참의 도승지 등을 지냈다. 1654년(효종5)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경기감사 함경감사 형조, 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1664년(현종5) 개성부유수를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러 사직하고 보령에 은거하여 조정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다. 슬하에 둔 7형제 중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1671년(현종12) 장남 진석이 원종공신의 훈록을 받자 좌찬성에 종직되었다. 이어 1676년(숙종2)에는 다섯째 아들인 가석이 참의가 되자 영의정에 가증(加增)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조진석(1610~1654) 1610년(광해군2)~1654(효종5)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여삼(汝三) 호는 용은, 간죽. 형조판서 계원의 아들이며 신익성의 사위이다. 1634년(인조12)성균관 유생이 되고 1640년 창릉참봉을 거친뒤 전설사별검 사옹원직장 의금부도사를 역임하고 임실현감으로 부임하여 많은 치적을 올렸다. 164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51년(효종2)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으로 있을때 당시의 시폐, 특히 내수사의 모속자(冒屬者)등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득실에 관하여 상소하였던바 그 비판이 적절하다는 칭송이 많았다. 이어 겸춘추관기사관으로 인조실록청낭청에 임명되었으며, 1652년에는 공산현감. 황주판관으로 나갔다가 다시 정언으로 돌아왔다. 이어 병조정랑 지평을 역임하였고, 1654년 장령으로 있으면서 민회빈 강씨의 신원을 상소하였다가 대사헌 이시해등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병사(44세)하니 나라에서 관작을 복구하였다 이 묘역은 유혈의 혈장으로 당판이 타원형으로 상당히 긴 편입니다. 형기적으로 혈은 혈장의 중심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승금. 좌우선익 하수사등을 공부하기 좋은 자리입니다.
4. 고복저수지 * 저수지와 공원 그리고 먹거리까지...고복저수지(군립공원) * 면적 77만㎡의 대규모 농업용 저수지이다.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가물치·붕어·잉어·메기 등 어류가 풍부해 전국에서 많은 낚시꾼이 몰려들자 군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공원 지정면적은 184만㎡이며 오봉산의 자연림, 동굴(용굴), 사찰(신흥사), 야외조각 전시장 등이 있다. 주변 마을에는 포도, 복숭아, 배를 재배하는 과수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다양한 자연경관을 접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먹거리. 고복저수지 주변에는 한방오리와 메기매운탕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 등이 산재해 있어 미식가들의 입맛을 돋구어 준다. 주말에는 이 맛을 느끼려는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
5. 세종시 봉산리 향나무 와 숭모단 500년 문중 상징 '효심 깊은 나무' 강화 최씨 중용이 심어 보전 8대에 걸쳐 효부·열녀 배출 너른 가지·용틀임 줄기 인상적 ··· 길흉화복 점쳐 온 마을수호신 세종시를 구성하고 있는 전의현, 연기현, 금남면 등 3개 권역 중 전의 지역의 진산이 운주산(460m)이라고 한다면, 조치원의 진산은 읍 서남쪽에 위치한 오봉산(五峰山; 262m)이다(2012. 11.07. 운주산 운주산성 참조). 오봉산은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서 풍수지리상 제1봉은 목형봉(木形峰- 정상봉), 제2봉은 화형봉(火形峰- 牛角峰 또는 평상봉), 제3봉은 토형봉(土形峰- 聖主峰), 제4봉은 금형봉(金形峰- 主峰 또는 두루봉), 제5봉은 수형봉(水形峰- 平當峰)으로 5행을 갖추었다고 하며, 오봉산 동쪽 기슭의 봉산리란 마을이름도 오봉산에서 유래되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五行(木火土金水)을 다 갖춘 형태를 다 갖춘 형태를 오성연주사격(五星連珠沙格)이라 하며 장군이나 재상이 나오고 부자가 되는 좋은 자리라 한다. 오봉산은 높이가 262m에 불과하지만 평야에 위치하고 있어서 비교적 높게 보이는데, 산 중턱의 약수터는 기우제와 산제를 지내는 영험한 산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며, 예로부터 많은 시인들이 칭송하면서 연기 팔경(燕岐八景)중의 하나로 오봉산의 낙조(落照)를 말하기도 했다. 조선 성종 때 출간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오봉산에는 안선사와 흥천사란 절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절터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석불과 유물 일부만 불일선원과 연기향토사료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대전~천안간 국도 1호선 중 고려대 세종캠퍼스 앞 조치원여고 입구 편도 1차선 포장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오봉산 등산로 입구가 있는데, 주차장에서 등산로 쪽에 강화최씨 시조의 사당인 숭모단(崇慕壇)이 있다. 강화최씨의 시조는 최익후(崔益厚)이다. 최익후는 최충헌의 아들로 고려조 정당문학.상서좌우복야를 지냈다. 13세손 최순(崔淳)에 이르러 양주로 옮겼고 그의손자 최완(崔浣)이 말년에 조선 중종(1506~ 1544) 때 낙향하여 이곳에서 살다가 죽자 그의 아들 최중용(崔重龍)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향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최중용이 집안에 효열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면서 심은 향나무의 음덕인지 후손 중에는 8대에 걸쳐서 15명의 효자와 열부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약3.2m 높이의 향나무는 지상 50cm쯤에서 갈라진 커다란 가지와 원대가 서로 꼬고 꼬이면서 동쪽을 향하여 비스듬히 자라다가 동서 11.2m, 남북 11m가량 우산처럼 펼쳐진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나무 그늘은 약100여 명 정도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세종시에서는 향나무를 보호하고 또 길게 뻗은 나뭇가지가 땅에 닿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높이 1m정도의 축대를 장방형으로 쌓고 철책을 나지막하게 설치했으며, 20여 개의 받침목을 세워 주었다. 출처 : 네이버. 한국성씨보감.
6. 초려(草廬)이유태(李惟泰) 묘소와 신도비(神道碑) 세종특별자치시 어진동 324-2 소재 '초려역사공원 멀리서 보면 야트막한 구릉에 수목이 둘러싸고 있고, 묘역에 들어서면 아늑하고 넓은 개활지를 내다 볼 수 있는 명당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여기에 선생과 이옹(아들), 이단몽(손자)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선생의 묘는 직경 약 8m로 일반 민묘보다 다소 큰 편이며 앞에는 “초려선생지묘草廬先生之墓, 정부인평산신씨부좌貞夫人平山申氏祔左”가 새겨진 상석과 좌우에 망주석 2개가 놓여 있다. 묘역은 자손들이 정성스레 관리하여 상태가 양호하고 주변은 후손의 가옥과 배과수원으로 이용되었으나 현재는 세종시의 역사공원으로 조성중이다.
초려 이유태 (草廬 李惟泰 1607-1684) 선생은 경주를 본관으로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선조40년(1607) 충남 금산군에서 출생하여 18세부터 예학을 집대성한 김장생, 김집 부자에게 배웠으며, 이 노론의 중심인물로 성장한 동춘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과 교분을 쌓았다. 효종 즉위(1649)와 함께 시작한 북벌계획으로 김상헌 등 척화파와 산림학자들이 대거 등용하였는데 선생도 공조좌랑(정6품)을 제수받았으나 친청파와의 갈등으로 다시 사직하였다. 이후 여러차례 공조정랑, 지평, 시강원 진선, 집의 등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사계(沙溪)선생 고제3현(高弟3賢)으로 북벌(北伐)을 도모하던 효종으로부터 두 차례 밀지(密旨)를 받았던 산림5신(山林5臣)으로 현종 15년간 선비로선 최고의 예우를 받았던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윤길, 미촌 윤선거. 시남 유계선생과 함께 충청5현(忠淸5賢)가운데 한 분으로서 율곡 이이의 경세치용과 사계 김장생선생의 예학을 계승, 발전시킨 기호사림(畿湖士林)을 대표하는 유현으로 더욱 유명하다. 묘역에서 남쪽 100여m 거리에 선생의 신도비가 서 있다. 이 비는 고종20년(1883)에 건립되었고 방형대좌에 오석의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 양식의 옥개석을 올렸다. 비문은 김상현이 지었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
7. 택리지 저자 이중환의 조부 이영(李泳)의묘 세종시 고운동 산61에 위치 본관은 경기도 여주로 1657년(효종8)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예산현감과 이조참판을 지냈다. 대대로 관직생활을 한 명문가로 광해군때 북인으로 활약하던 이상의의 후손이며 아들 이진휴는 1682년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안동부사, 예조참판,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손(孫) 이중환은 조선후기의 학자로 그의 저술 [택리지(擇里志)]의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 복거(卜居)의 조건으로 삼은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네 가지를 지목한 것이다. 우리 국토를 두루 답사하면서 팔도의 자연과 환경, 인물을 세밀하게 정리하여 250여년 전 조선의 산천을 생생히 복원할 수 있게 한 학자 이중환. 이중환은 국토와 문화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우리 산천과 그곳을 살아갔던 인물들의 역사 및 당대 사람들의 정서까지 담아내고자 노력하였다.
백두대간 산맥도 백두산 -- 백두대간---- 매봉산(1,307) --- 태백산 문수봉(1,517)--조령산(1,025) ---대야산(931)--속리산(1,058) 분맥 한남금북정맥 ---충북구룡산에서 북으로 올라 칠장산(492)에서 분맥하여 남으로 금북정맥이 형성 성거산--고려산--국사봉(403)에서 가지를 뻗어 세종시 조치원으로 오봉산(262)을 이루고 또 한가지는 공주 국사봉(214)에서 전월산(282)으로 이어 세종시의 주산이 된다. |
첫댓글 댓글이 너무 늦었습니다. 참석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