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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국가경영 |
도서분류 : 사회와 사상 총서 지은이: 이지경외 옮긴이 : 면 수 : 368 값 : \20,000 출간일 : 2006/10/04 판 형 : 신국판 ISBN : 89-423-3068-1 검색수 : 5 번째 검색 |
책 의 줄 거 리 ( 머 리 말 ) |
세종과 세종시대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정보는 아주 제한되어 있다. 세종대왕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우리 역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인물로 존경받지만,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 말고는 각별하게 세종에 대해 깊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여의도공원에 세워진 세종대왕 좌상 앞에 자녀들을 데리고 가서 그들이 세종대왕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 만큼 세종에 대해서 잘 말해 줄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 사실, 우리의 고대사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등장했다 사라졌다. 그 가운데에는 세종뿐 아니라 정말 훌륭한 귀감이 될 만한 리더십을 보인 정치 지도자들이 얼마든지 많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친 뒤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폄하하고 말살시키려 했던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사관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주요한 인물들의 업적과 리더십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평가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주로 구미나 일본, 그리고 중국의 인물들이 대화의 소재가 되거나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곤 했다. 우리의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물론이고 경영학이나 군사학 분야에서도 리더십 훈련과 교육에 관한 자료들은 대부분 수입서적들에서 그 이론적 근거와 실천모델을 구해 왔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유교국가로서 유일하게 500여 년이나 지속되었던 조선시대의 국가경영을 포함한 전통적 역사경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또 우리의 근대화 경험에 대한 줏대 있는 인식과 평가가 보편화되고 있다. 그리고 ’88올림픽 과 2002년 월드컵이 성공리에 끝난 뒤, 우리의 전통문화와 역사적 경험에 대한 건강한 자긍심이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자리 잡아가고 있다. 또 그들 덕분에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도 새로이 각광받고 있다. 또한 아시아는 물론 세계 여러 곳에서 불고 있는 ‘한류’ 바람도 우리의 전통을 재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가 2년 동안 수행했던 ‘세종의 국가경영 연구’ 프로젝트를 기초로 6회에 걸쳐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세종의 리더십>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것도 이같은 시대적 흐름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이참에 그동안의 연구를 좀더 다듬어서 책을 내기로 뜻을 모았고, 지식산업사 김경희 사장님의 남다른 애정과 호의로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시작된 것은 2004년 9월이다. 그렇지만, 그 해 봄학기부터 연구책임자인 필자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당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학술연구교수로 있던 박현모 박사가 맡은 ‘세종실록강독모임’에 참여했다. 박박사는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조(正祖)의 성왕론으로 정치학박사를 받은 촉망받는 조선시대 전문학자이다. 그리고 이 강독모임을 통해 필자는 세종을 제대로 알기 시작했고, 왕조였던 조선시대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이상할 정도로 왕들에 대해 소홀했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평가가 부정적이거나 사대부 중심에 머물러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필 자는 정치리더십을 전공하는 정치학자로서 언젠가 조선시대의 전통리더십을 연구해야 한다는 하와이대학 정치학과 시절의 지도교수였던 글렌 페이지(Glenn D. Paige) 박사의 권고를 기억해 냈다.그리하여 필자는 박현모 박사와 함께 ‘정치리더십으로 본 세종시대 연구’를 주제로 하는 연구프로젝트를 준비했고, 당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학술연구교수였던 박영도 박사, 부산 영산대의 부남철 교수와 배병삼 교수, 지금은 한국해양연구소 연구위원인 유미림 박사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연구하다 서울대 국사학과로 옮긴 문중양 박사, 현재 고려대 북한학연구소의 연구교수로 있는 이지경 박사, 그리고 전통연구에 대한 대단한 열정으로 한국외국어대에서 여성학을 강의하던 강숙자 박사 등이 이 프로젝트의 취지에 동의하고 공동연구자로 참여했다. 연구자들은 지난 2년 동안 10여 차례 이상의 크고 작은 워크숍을 가졌으며, 2회의 학술회의를 통해 자신의 연구를 꾸준히 다듬었다. 연구 참여자 가운데 몇몇은 연구결과를 영어로 작성하여 2005년 7월 영국 셰필드대학에서 있었던 유럽한국학회(AKSE)에서 발표했으며, 이 자리에서 원로이신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교수님을 포함한 여러 학자들의 비판과 귀중한 충고를 들을 수 있었다.그리고 연구자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사계열의 초빙교수이신 박병호 교수님과 어문계열의 이광호 교수님을 초청하여 특강을 들었다. 또 연구팀은 당시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조선 초기의 정치사상 연구로 학위를 받은 정재훈 박사를 초청하여 세종의 왕세자 교육에 대한 특강을 듣기도 했고, 그 인연으로 정박사의 글을 이 책에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2년 남짓 연구하고 출판을 준비하는 동안 연구자들은 주변의 많은 분들로부터 격려와 지원을 받았다. 먼저 이 연구프로젝트가 바탕이 되어 문을 연 세종국가경영연구소의 고문으로 모셨던 이홍구 전 총리님, 조순 전 부총리님, 구범모 본원 명예교수님, 이성무 본원 명예교수님, 이택휘 전 서울교대 총장님, 신용하 백범학술원 원장님, 유영익 연세대 명예교수님, 정기숙 대구미래대 이사장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따뜻한 격려와 지도는 연구지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또 이화여대 명예교수이시고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초대회장이셨던 박충석 선생님과 2대 회장이셨던 이택휘 선생님은 때때로 연구자들의 자문에 응하시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3대 회장이셨던 국민대 김영작 선생님과 현재 4대 회장이신 서울대 김홍우 교수님, 그리고 차기회장이신 건국대 신복룡 교수님께서도 학회활동을 통해 연구자들에게 물심양면의 지원을 해주셨다. 이 기회를 빌려 필자는 모든 연구자들을 대표하여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드리고자 한다. 끝으로 필자는 이번 연구과제를 진행하는 동안 열심히 참여해 주신 공동연구자 한 분 한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이분들의 열의와 정진이 아니었더라면 이 책이 나올 수 없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면서도 세종국가경영연구소의 살림살이와 행사보조에 성실하게 임하면서 이 책의 출판을 도왔던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의정혜영 선생과 노흥래 조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연구와 출판과정에서 각종 규정과 절차를 슬기롭게 처리해 주신 본원 연구행정팀의 임은선 선생님과, 지식산업사 편집진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2006년 한글날을 기다리며 연구책임자 정 윤 재 삼가 씀. |
서 평 / 저 자(편 집 부)로부터의 글 |
목 차 |
차 례 머리말 _3 [여는 글] 정치리더십으로 본 세종시대 연구 ;정윤재 _9 세종의 왕자 교육 ;정재훈 _29 세종의 불교 신앙과 유교정치 ;부남철 _53 세종의 한글 창제의 정치 ;유미림 _79 지방관 임기 논쟁을 통해 본 세종의 리더십;배병삼 _121 세종의 유교 예치(禮治) 경영 ;강숙자 _161 세종의 조선 음악[國樂] 경영 ;강숙자 _193 세종의 공론 형성과 국가경영 공법(貢法) 도입과정을 중심으로;박현모 _221 세종의 공세적 국방안보 대마도 정벌과 파저강 토벌을 중심으로;이지경 _251 세종의 유교적 법치 인정(仁政)과 법의 관계를 중심으로;박영도 _279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에 대한 검토 ;문중양 _315 [맺는 글] 세종의 정치리더십과 세종시대 연구 ;정윤재 _353 |
저 (역) 자 약 력 |
정윤재-한국학중앙연구원교수 겸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소장
세종은 토론의 달인이었다 [조선일보 이한수기자]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훌륭한 임금’이라는데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지만 실제로 그가 어떻게 정치를 했는지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드물었다. 역사학자와 정치학자 10명이 참여한 이 책은 아마도 정치 리더십이란 관점에서 세종의 현실정치를 분석한 첫 책일 것이다. 세종의 왕자교육(정재훈), 한글창제의 정치(유미림), 공론형성과 국가경영(박현모), 공세적 국가안보(이지경), 유교적 법치(박영도) 등을 통해 ‘태평성대’를 만든 세종의 정치 리더십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연구책임을 맡은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장은 각 연구자들의 논문을 바탕으로 여섯 가지 세종의 리더십을 지적한다. 이에 따르면 세종은 놀라운 균형감각으로 사건이 발생하기 전 예방적 조치를 취했으며, 토론과 대화를 통한 ‘숙의(熟議)의 정치’를 진행했다. 반면 세종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책이라면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하는 추진력과 ‘줏대’(identity)를 가진 지도자였다. 세종이 ‘무엇’(what)을 했는가를 넘어 ‘어떻게’(how) 했는 가로 관심을 옮긴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한수기자 hslee@chosun.com ) |
세종국가경영연구소장인 정윤재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정치학)가 이끄는 공동연구진 10명은 세종의 왕자교육, 세종의 불교 신앙과 유교 정치, 한글창제의 정치, 지방관 임기논쟁을 통해 본 세종의 리더십, 세종의 유교 예치경영과 조선음악 경영, 세종의 공론 형성과 국가경영, 세종의 공세적 국방안보, 세종의 유교적 법치,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등을 연구했다. 필진은 모두 세종은 정직하며 근면하고, 과단성ㆍ공정성을 두루 갖춘 지도자였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사심없이 공정하게 상벌을 운영했으며 원칙을 지킨 지도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정윤재 교수는 '맺는 글'에서 세종의 국가경영을 ▲공법(貢法) 제정과정에서 신하들과 백성, 중앙과 지방의 여론을 고루 들은 '균형감각' ▲백성의 불만이 적극적으로 표출되기 이전에 필요한 정책들을 마련하는 등 '예방적 조치'를 취하는데 성실했다는 점 ▲여러 형태의 토론과 대화, 꼼꼼한 현황파악을 동반하는 '숙의정치'(熟議政治) 실현 ▲강력한 추진력 ▲내외의 지식과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용하면서도 줏대가 반듯했던 점 ▲유교적 민본주의에 충실했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한다. 368쪽. 2만원. 1.[경향신문 2005-05-25 18:12]
지금까지 리더십 연구는 주로 서양 정치인·경영인을 대상으로 연구되었다. 그러나 최근 참여정부가 개혁과 혁신을 강조하면서 우리 전통에서 국가 경영의 리더십 사례를 찾는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25~27일 잇따라 열리는 세종과 김구의 리더십 연구 학술대회도 최근의 학계 분위기를 반영한다. 지난 4월1일 창립된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소장 정윤재)가 개소를 기념해 27일 개최하는 ‘세종의 국가경영과 한국학의 미래’는 세종의 리더십을 통해 국가경영 방식을 고찰하는 학술대회다. 정윤재 소장은 총론 형식의 주제 발표를 통해 세종의 리더십 연구는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기지속된 데 대한 원인을 탐구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그의 위민(爲民)적 국가경영이 현대 국가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박현모 중앙연구원 교수는 세종이 17년 간의 긴 토론을 거쳐 ‘공법’(貢法)으로 세제를 개혁했던 사례를 들어 세종이 ‘숙의’(熟議)와 ‘공론’(公論)을 중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고 밝힌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는 세종이 ‘맹자’ ‘대학’ 등의 사상을 정치에 접목시켜 인정(仁政)을 펼친 점에 주목, 세종 리더십의 특징으로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정치적 해석능력’을 꼽는다. 이밖에 박영도·이지경·유미림·강숙자(중앙연구원), 문중양(서울대), 부남철(영산대) 교수 등 한국사·정치학·과학사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세종의 국가경영 전략을 발표하고, 이홍구 서울국제포럼 이사장과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기조강연을 한다. (031)708-5281 2.세종은 중화 문물에 버금가는 유교적 문명국가를 달성하는 것을 치세의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풍속은 날로 흉포해져 범죄가 늘어나고 급기야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범죄까지 생겼다. 세종은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기존의 방법이 범죄 예방에 효과가 없다고 생각했다. 행실의 모범자를 그림으로 그려 본받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한문과 이두로 된 법조문은 내용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의 학술을 받아들이고 사대 외교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우리 구강 구조에 맞춰 형성된 문자가 필요했다. 여기에 우리가 이적(夷狄)으로 무시하던 여진·일본·몽고·티베트 등이 모두 고유의 문자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세종에게 충격을 주었다. 문자를 따로 지니는 것은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이라고 신하들은 반대 논리를 폈다. 이와 달리 세종은 이적도 지닌 문자를 우리가 지니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적 자존심이 훼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종은 자신이 구상한 국가경영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백성과의 직접적인 소통의 필요성을 인식했는데, 훈민정음이 바로 그 소통 수단이었다. '반나절이면 익힐 수 있는' 정음은 결과적으로는 국가의 명령체계를 아래로 전달하기 쉽게 함으로써 통치의 효율성을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다. 세종 연간의 일련의 문화정책이 모두 정음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사업이라는 점은 세종이 정음을 구상하던 단계에서부터 활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이런 효율성을 지닌 문자의 창제를 왜 비밀리에 추진했는가. 그것은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세종은 신하들이 중국과의 사대 관계를 들어 반대할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개적이고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정책 수행에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사후에도 세자가 일관성 있게 정책을 지속하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자의 신진 친위세력을 만들어 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경우 필시 훈구세력의 저항이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신하들이 내세운 중국과의 관계 악화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이 사대정책을 준행하는 한 중국은 내정의 자율성을 보장했다. 더구나 중국 사상의 올바른 수용과 사대 외교를 위해 문자를 만든다는 데 반대할 명분은 없다. 정음 사업을 세종은 세자와 소수의 근신만으로 비밀리에 수행했다. 일종의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했다. 성삼문·신숙주·이개·이선로·박팽년·최항 등이다. 이들은 한글이 창제되기 한 해 전(1442년·세종 24년) 겨울 임금에게 특별휴가를 받아 복정산에서 함께 과업을 수행했다. 창제 한 해 전에 임무를 부여했다는 점은 세종이 이미 사전에 초안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들은 정음에 관한 구체적인 실무작업을 했을 것이다. 한글 창제 전후 세종은 세자와 안평대군, 진안대군으로 하여금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게 했다. 이러한 인사정책은 이 작업에서 소외된 세력의 저항을 불러들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세종은 자신의 인사정책과 정책 수행에 대한 비판을 정공법으로 타개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자신의 정책이 무엇보다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에 의거해 반대세력을 논박했다. 세종 리더십의 핵심은 명분만 내세우는 수사(修辭) 정치와 책략 정치가 아니라 정책의 비전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데 있다. 정책 수행에 대한 저항에는 오직 실력으로만 승부하게 했다. "네가 운서(韻書·『고금운회』 등 중국의 음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겠느냐"(『세종실록』 인용:최만리의 반대상소에 대한 세종의 반박)는 말은 확고한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다. 실력은 함께 정책을 수행하는 신하에게도 요구됐다. 우리의 운서를 만들기 위해 성삼문과 신숙주를 중국인 황찬에게 13번이나 보내 조언을 구하게 한 것이라든지, 정음을 만들고 나서 3년 동안 해례서를 만들게 한 일은 이론적 보강에 만전을 기하려는 철저함과 치밀함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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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연보 ◈ 1397년(1세) 4월 10일(양력 5월7일) 태종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탄생하다. ◈ 1408년(12세) 2월 충녕군에 책봉되고 결혼하다. ◈ 1412년(16세) 5월 충녕대군에 진봉되다. ◈ 1418년(22세) 6월 왕세자로 책봉된다. ◈ 1418년(22세) 8월 10일 왕위에 오르다. ◈ 1419년(23세, 세종 원년) 6월 대마도를 정벌하다. ◈ 1420년(24세, 세종 2년) 3월 집현전의 기구를 확장, 궁중에 설치하다. ◈ 1421년(25세, 세종 3년) 3월 주자를 만들어 인쇄술을 개량하다. ◈ 1423년(27세, 세종 5년) 9월 조선통보 화폐제를 창설하다. ◈ 1430년(34세, 세종 12년) 12월 [농사직설]을 전국에 펴내다. ◈ 1430년(34세, 세종 12년) 12월 아악보를 이룩하다. ◈ 1431년(35세, 세종 13년) 3월 [태종실록] 편찬을 마치다. ◈ 1431년(35세, 세종 13년) 4월 광화문을 세우다. ◈ 1432년(36세, 세종 14년) 1월 [팔도 지리지]를 편찬하다. ◈ 1432년(36세, 세종 14년) 6월 [삼강 행실도]를 편찬하다. ◈ 1433년(37세, 세종 15년) 6월 사군을 설치하여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게 하다. ◈ 1433년(37세, 세종 15년) 8월 혼천의(천체 측정기)를 제작하다. ◈ 1434년(38세, 세종 16년) 7월 동활자 갑인자와 물시계(새로운 자격루)를 사용하다. ◈ 1434년(38세, 세종 16년) 10월 앙부일구(해시계)를 제작하다. ◈ 1435년(39세, 세종 17년) 7월 경복궁 안에 주자소를 설치하다. ◈ 1437년(41세, 세종 19년) 4월 일성정시의(주야측우기)를 만들다. ◈ 1437년(41세, 세종 19년) 9월 여진을 정벌하고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이 두만강에 이르게 하다. ◈ 1441년(45세, 세종 23년) 8월 측우기를 제작하여 이듬해 5월에 측우하는 제도를 실시하다. ◈ 1442년(46세, 세종 24년) 8월 [고려사]를 편찬하다. ◈ 1443년(47세, 세종 25년) 11월 전제를 정하는 관서(전제 상정소)를 설치하다. ◈ 1443년(47세, 세종 25년) 12월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고 언문청을 설치하다. ◈ 1445년(49세, 세종 27년) 4월 [용비어천가]를 짓다. ◈ 1446년(50세, 세종 28년) 9월 [훈민정음](한글)을 반포하다. ◈ 1447년(51세, 세종 29년) 7월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하다. ◈ 1447년(51세, 세종 29년) 8월 숭례문(남대문)을 개축하다. ◈ 1447년(51세, 세종 29년) 9월 [동국정운]을 편찬하다. ◈ 1448년(52세, 세종 30년) 7월 궁 안에 불당을 건립하다. ◈ 1449년(53세, 세종 31년) 12월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하다. ◈ 1450년(54세, 세종 32년) 2월 17일(양력 3월 16일) 승하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