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세 생태학자, 스스로 生 마치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입력 : 2018.05.11 03:00
호주의 데이비드 구달 박사
안락사 허용되는 스위스 찾아가 "죽음을 위해 먼 길을 왔다"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 나를 기억하려는 어떤 추모 행사도 갖지 말라. 시신은 해부용으로 기증해라."
안락사를 통해 스스로 삶을 마치겠다고 선언했던 호주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104·사진) 박사가 10일(이하 현지 시각) 스위스 베른의 한 병원에서 이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숨졌다고 안락사 지원 단체인 '엑시트 인터내셔널'이 밝혔다.
이날 정오쯤 구달 박사는 의료진과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사량에 해당하는 신경안정제 주사를 맞고 운명했다. 주사액을 정맥 안으로 주입하는 밸브는 구달 박사 스스로 열었다. 모든 과정은 영상으로 녹화됐다. 엑시트 인터내셔널 창립자 필립 니슈케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 구달 박사는 불치병이 아니라 고령을 이유로 안락사를 택한 최초의 사례"라고 말했다.
전날 기자회견에서 구달 박사는 "6년 전부터 시력이 몰라보게 떨어졌고 더 이상 삶을 이어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추하게 늙는 것(Ageing Digracefully)'이라고 적힌 셔츠를 입고 있던 구달 박사는 "이제 삶을 마감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취재진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노래'를 묻자, 그는 베토벤 교향곡 '합창'에 나오는 '환희의 송가'를 꼽으며 마지막 소절을 흥얼거렸다.
식물 생태학의 권위자로 꼽히는 구달 박사는 191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1948년 호주로 건너가 생태계 연구에 빠져들었다. 1953년 멜버른대에서 박사 학위를 딴 다음 호주·영국·미국 5개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36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세계의 생태계' 시리즈를 출간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대학에서는 1979년 퇴직했지만 호주의 오지 곳곳을 찾아다니며 연구를 이어갔다. 그는 90세가 되어서도 테니스를 할 만큼 건강한 체질을 타고났지만 100세 무렵이 되면서 건강이 빠르게 악화됐다.
대부분 국가에서 연명 치료를 중단하는 존엄사는 허용되지만, 독극물 주입처럼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안락사는 스위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소수의 국가에서만 허용된다. 구달 박사는 "호주가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어서 죽음을 위해 스위스까지 먼 길을 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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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病 없이 안락사 택한 104세
김태익 논설위원
입력 : 2018.05.12 03:11
이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로 흔히 미국의 자연주의자 스콧 니어링(1883~1983)을 꼽는다. 니어링은 여든에 자신의 '죽을 계획'을 글로 써놓았다. "나는 죽을 때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어떤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존중받으며 가고 싶다"…. 니어링은 백 살 생일이 다가오자 죽음을 예감한 듯 단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3주 만에 눈을 감았다. 니어링의 아내는 "그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듯 편안하게 갔다"고 썼다.
▶몇 년 전 본지에 수필가 허숭실씨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마지막 여행'이란 에세이를 보내왔다. 그의 아버지는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고 달포가량 전국을 여행했다. 사업할 때 어려움을 같이한 사람들을 만나 고마움을 표했다. 자신에게 등 돌려 서먹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했다. 병세가 악화됐지만 진통제를 맞지 않았다. "오래 앓는 것은 가족뿐 아니라 환자에게도 고역"이라고 했다. 보름 동안 곡기를 끊더니 잠든 아기처럼 세상을 떴다. 허씨는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저승사자가 달려들기 전에 저 세상으로 발걸음 옮기셨다"고 했다.
▶한 여론조사에서 "오래 살고 싶으냐"고 물었다.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시 "90이 넘도록 살고 싶으냐"고 물었다. 18%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중요한 것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다. 삶의 질이 떨어지면 수명 연장일 뿐이다. 남의 신세 지지 않고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아야 한다.
▶호주 104세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의 죽음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그는 앓는 병도 없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지면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달은 "죽는 것보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게 진짜 슬픈 일"이라고 했다. 구달은 치사(致死) 약이 들어간 정맥 주사기에 연결된 밸브를 자기 손으로 열었다. 죽기 전 마지막 듣고 싶은 음악으로 베토벤 9번 교향곡의 '환희의 송가'를 꼽고, 읊조렸다.
▶구달은 단지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해 죽음을 택했다. 그의 죽음은 삶의 존엄성을 위한 선택이란 면에서 볼 때 의사의 연명 치료를 거부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의 '자살'을 미화할 것까지는 없지만 숙연하고 비장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구달의 죽음은 고령화 시대 사람은 '언제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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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마지막 여행
허숭실 수필가
입력 : 2010.08.30 22:57 | 수정 : 2010.08.31 10:19
아버지는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사업하며 빚진 사람들
사기 치고 떠났던 이들을 만나 마음의 빚을 풀었다
'내가 병들면 삶을 더 이상 연장시키려 하지 말라'
평소 말씀대로 먼 길을 떠났다
인간이 평등하게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문은 죽음이다. 노화와 질병, 그리고 죽음은 피하고 싶지만 굳이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어떻게 잘 죽느냐'이다. 어느덧 나도 일흔 넘은 노령이 되다 보니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채비를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피부병의 일종인 소양증으로 한 달이나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어 종합검진을 받다가 담도에 종양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담도암은 지방을 소화시키는 담즙이 간에서 십이지장으로 이동하는 담도에 생긴다. 종양제거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게 되자, 아버지는 한사코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아버지가 치료를 안 받으시면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우리 가족 모두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뜻은 단호했다. 담도암이 예후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퇴원 후 산책을 다닐 만큼 회복되자 아버지는 회사 일을 정리하고 훌쩍 여행을 떠났다. 달포 만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마음의 짐을 풀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동안 사업할 때 도와주셨던 사람들, 고락을 함께했던 회사 직원과 친구들을 만나 고마움을 전했다고 한다. 함께 사업하다가 배신해 당신을 만나길 두려워했던 사람들까지 찾아가 오히려 위로금까지 주고 오셨다고 했다.
여행을 다녀온 아버지는 손·자녀들까지 다 불러 목사님을 청해 고별예배를 드렸다. 당신의 장례를 위한 준비 절차도 적어 목사님께 드렸다. 아버지는 오남매를 기르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느라 고생 끝에 먼저 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무엇보다 당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장남의 아들들을 걱정하셨다. 그 손자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매월 일정액을 받을 수 있도록 회사 지분을 공증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집까지 팔아 회사에 투자했기 때문에 재산은 오로지 회사 지분만 있었다. 우리 4남매에게도 "너희들이 하고 싶은 일을 다 시켜주지 못한 게 지금도 미안하다"고 하셨다. 유언이라며 "베풀어야 할 때는 절대 놓치지 말고 사랑을 나누라"는 말을 남기셨다.
외손자에겐 '선행(善行)'이라는 글을 써주시고 낙관을 찍으며 당신의 호를 '소세화(小說話)'로 지은 뜻을 풀이해 주셨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따르기 마련이니, 될수록 말을 적게 해야 한다고 이르셨다.
항암치료를 포기한 아버지는 여섯 달쯤 지나면서 고통스러워 했다.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됐다는 의사의 진단이었다. 아버지는 병원을 다녀오신 뒤부터 음식을 들지 않았다. 진통제도 먹으면 의식이 몽롱해진다며 거부하셨다. 물 한 모금조차 넘기지 않으려고 했다. 어떻게든지 치료를 받도록 아버지께 애원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중풍으로 몸을 가눌 수 없어 6년간 누워 계실 때부터 아버지는 "오래 앓는 것은 가족만 아니라 환자에게도 큰 고역이다. 내가 병들면 생명연장을 위해 애쓰지 말라"고 했다. 음식을 먹지 않은 것은 그 말의 실천인 것 같았다.
"이제껏 부모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못 하고 살아왔는데 이제 마지막 순간에 와서 아버지 말씀을 따라야 한다니…." 마치 '청개구리'처럼 된 우리 형제들은 모두 난감해졌지만, 아버지와의 마지막 배웅만은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방의 창을 열라 하시고 조용히 누워 계셨다. '욥의 부스럼' 같은 세상에서 75년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기쁨, 그보다 훨씬 더 많았던 슬픔과 고난을 말하셨다.
아버지는 그동안 생사를 알 수 없던 친척들을 사십 년 만에 중국에서 만났을 때가 가장 기뻤다고 하셨다. 일제 때 독립운동을 위해 고향을 등지고 내몽골에 간 아버지 일가들이었다. 이산의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어찌 그런 재회의 기쁨을 실감할 수 있으랴. 아버지는 일흔 되던 해에 그 이야기를 담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아버지는 삶에 대한 애착과 희망을 미련 없이 버리고, 저승사자가 먼저 덤벼들기 전에 저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아버지의 안색은 점차 노랗게 변하고 눈자위는 깊어만 갔다. 아마도 아버지는 청년 시절 내몽골에서 말을 타고 달리던 때를 꿈꾸는 듯했다. 내몽골에서 태어난 아버지, 그리고 해방 후 어머니와 나 그리고 남동생 넷이서 함께 돌아온 고국. 공무원으로 일하시던 시절, 일가친척 하나 없이 평생 외롭게 살며 명절 때면 눈물짓던 날들….
엷은 미소가 어린 아버지의 얼굴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보름 동안 곡기를 끊으신 아버지의 몸은 어린아이같이 가볍고 조그마해졌다. 아버지는 고이 잠든 아기처럼 우리들의 팔에 안겨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수의를 준비하지 말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베로 온몸을 정성스레 감싸 드렸다. 아버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디아스포라의 삶을 내려놓고 영원의 본향으로 돌아가셨다. 벌써 16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존엄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신 아버지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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