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계의 여성 이라크의 서쪽 요르단의 북쪽에 위치한 곳에 시리아가 있다.시리아 내륙 한 가운데 팔미라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지금은 볼품없는 폐허에 불과하지만 왕년에는 "동쪽 나라의 여왕"으로 시리아,팔레스티나,바빌로니아,페르시아,소아시아,이집트 등을 한 손에 거머쥔 갈색의 여왕 제노비아의 궁전이 있던 곳이다.
"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성이라면 과연 누구일까? "
사람마다 그것을 꼽는 것은 다를 것이다.
프랑스를 구한 오를레앙의 소녀 잔다르크를 꼽는 이도 있을 것이고. 고대 이집트의 매력이 충만한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꼽는 이도 있을 것이다.
안토니우스안토니우스와의 불타는 사랑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며 "그녀의 코가 조금만 더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 옛날에는 "시바의 여왕"도 있다.
2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에티오피아의 선조는 그녀와 유대왕 솔로몬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랑의 씨앗이라고한다.
당나라 현종황제는 양귀비의 색향에 빠져 나라를 망치는 원인으로도 되었으나 현종 제의 양귀비에 대한 애틋한 정은 백낙천의 시 장한가에 잘 나타나 있다.
이밖에도 쟈코뱅 당에 처형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앙뜨와네뜨. 나폴레옹의 처 죠세핀, 불운의 스코트랜드 여왕 메리와 그 녀를 처형한 영국의 여왕 엘리자사베스 등이 있다.
그러나 제노비아처럼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여성은 그리 많지 않다.
2.사막의 여왕
기원 3세기경 시리아 동부 사막에서 제노비아라는 계집아이가 태어났다.
아라비아의 집시(유목민)의 추장 삿빠이를 아버지로 자신이 클레오파트라의 후손이라고 자랑하는 아름다운 그리스 여성을 어머니로 하여.그녀가 태어난 곳은 종려나무가 무성한 오아시스에 설치한 낙타의 털로짜서 만든 천막 안이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유목민의 천막이다.
제노비아는 어릴 때부터 재색이 뛰어나 삿빠이의 부하들도 "이렇게 예쁜 아이는 처음 본다"고 감탄하곤 했다.
그녀는 아랍인 특유의 청갈색 피부를 아버지에게서 그리고 그리스 풍의반짝이는 까만 눈동자를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크면 꼭 클레오파트라처럼 예뻐질 거야"하고 어머니는 늘 자랑을 했다.
제노비아는 예쁘다는 것뿐이 아니었다.
강건한 육체와 용맹심을 가지고 있었다.
열두 살 때에 벌써 어느 남자도 못 당할 만큼 낙타를 능숙하게 타고 얼마 않있어 아버지 대신 집시 족의 지도자가 되였다.
그 즈음 시리아의 사막에는 특별히 이름난 오아시스가 있었다.
팔미라라고 하는 곳으로 시리아의 동쪽 절반을 지배하였다.
이곳은 큰 대상들이 다니는(실크로드)길의 요로 이다.
동방에서 운반되는 물자는 일단 이곳 팔미라로 집결하고 이곳 시장을 거쳐서 서쪽의 로마제국으로 중계된다.
그리스,아랍,유대,시리아의 상인들이 몰려들어 저택을 짓고 비단,융단,대추야자,곡물 등을 쌓아 두는 큰 창고를 세웠다.
시민들은 팔미라를 지키기 위해 마을을 둘러싸는 장장 11킬로의 성벽을 쌓고 성안에는 문에서 문으로 돌로 된 둥근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어 널찍한 아케이드를 만들었다.
신전과 궁전에는 더 많은 원주를 세워 사람의 눈이 닿는 곳에는 어디에나 조각을 한 기
둥의 숲을 이루게 하였다.
기원 250년. 망망한 사막의 한복판에 세워진 종려나무와 돌기둥이 조화를 이룬 원주의 도시 팔미라야 말로 사막의 기적이요 재력과 번영의 상징이었다.
로마인은 이 크나큰 부에 탐을 내어 군대를 보내서 이 부유한 오아시스를 탈취하고 자기의 영토로 삼았다.
그러나 팔미라의 주민들 중에는 자유를 사랑하는 아랍인이 다수 있었다.
그들은 기회를 보아 폭동을 일으켜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이름으로 팔미라를 통치하던 아랍의 젊은 귀족 오데나사스도 내심 그와 같은 생각으로 비밀리에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는 반란군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암암리에 시내를 빠져 나와 사막에 왔다가 우연히 집시의 추장 삿빠이와 그의 딸 제노비아를 만났다.
오데나사스는 예쁘면서도 품위가 있고 뛰어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낙타를 잘 타는 집시 소녀 제노비아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의 아버지 삿빠이의 허락을 얻어 그녀와 결혼을 하고 사막에서 성대한 결혼 피로를 한 다음 팔미라의 궁전으로 돌아와 살았다.
역사상 이와 같이 뛰어난 여왕을 갖게 된 나라는 없었다.
제노비아의 나이는 18세에 불과하였으나 미인이 많기로 소문난 팔미라에서도 한층 돋보이게 아름다웠다.
검은 눈동자의 그녀를 따를 미인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국사를 논하는 대신들도 그녀의 지혜에 놀라고 장군들은 그녀의 용감성에 감탄하였다.
제노비아는 로마의 횡포를 지극히 싫어하였으므로 오데나사스와 결혼한 그날부터 남편을 도와 팔미라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위해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면 아랍 군인의 훈련에 앞장서고 작전계획에 참가하고 마상에서 며칠씩 견뎌 내는 연습도 하고 야영에도 참가하고 사병들과 식사를 같이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제노비아는 자신이 훈련시킨 군대를 직접 지휘할 기회가 왔다.
당시 페르시아는 시리아의 동쪽에 있었는데 날로 번영하는 팔미라를 탈취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이것을 안 오데나사스는 제노비아에게 페르시아군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녀는 다년간 훈련시킨 정병을 이끌고 야간에 몰래 사막을 진군하여 페르시아군의 야영지를 기습 공격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페르시아군은 지리멸렬하여 도주하였다.
제노비아는 페르시아군을 깊이 쫓지 않고 때는 지금이다 하고 말발굽을 돌려 시리아의 북부에 산재하는 로마군을 습격하여 이를 철저히 쳐 부셨다.
시리아 대 사막에 산재하던 군소 국가들은 이러한 대승리에 놀라서 앞을 다투어 팔미라군에게 가담하게 되었다.
팔미라는 훌륭한 명군과 뛰어난 여왕을 받들어 어느 나라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강
국으로 변했다.
그 절정의 시기에 오데나사스가 암살되었다.
그러나 굳건한 제노비아는 비탄 속에서 일어나 남편의 유지를 계승,아들을 명목상 군주로 내세우고 자신이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동방의 여왕" 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시리아의 독재자가 된 제노비아는 자신이 정복할 나라를 찾았다.
저 멀리 서남 방에 땅은 기름지고 문화가 발달한 이집트가 있다.
이집트는 그녀의 조상 클레오파트라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녀는 나일 강변에 7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단 한번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집트 전토를 손아귀에 거머쥐었다.
이제는 제노비아에게 대항할 자는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백낙타를 타고 자주색 피풍을 휘날리면서 사막을 종횡으로 치달려 싸우고 또 싸워서 이기고 또 이겼다.
시리아,팔레스티나,바빌로니아,아라비아,페르시아,소 아시아,이집트는 한낱 유목민 병 컁틸“ 무릎을 꿇고 그녀를 최고 군주로받아들였다기원 270년 랩국은 왕년에 차지했던 국토의 태반을 그녀의 아름답고도 강력한 갈색의 손아귀에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의 여성으로서 이와 같이 광대한 지역을 손수 정복하고 지배한 사람은 그 전에도 이후에도 찾아볼 수 없다.
3.로마와의 싸움
팔미라는 존경과 부와 영광을 한 몸에 차지하여 아시아에서의 로마임을 약속받은 양하였다.
새로운 궁전이 세워지고 거대한 사원,신전이 줄이어 세워졌으며 성문의 안팎으로는 언제나 짐을 가득 실은 대상의 무리가 모여들었고 제노비아의 궁전에는 유럽과 동방의 이름난 미술가,시인,학자들의 방문이 잦았다.
제노비아 여왕은 이와 같은 영화와 광휘를 한 몸으로 안았다.
그녀는 황금 투구를 쓰고 창을 들고 전차를 타고 수도 성내를 순찰했다.
도민들은 그녀를 찬미하고 박수를 보내었고 특히 군인들의 인기는 대단하여 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만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만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팔미라의 전투에서 패전한 로마군은 그후 다른 지역에서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력을 축적하여 기회를 보아 팔미라군을 격파하고 다시 한번 동방의 지배권을 회복할 야심으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노비아도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고 군비를 증강하고 점령지에는 새로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여 장차 있을 마지막 한판승부에 대비하여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로마는 최정예를 자랑하는 원정군을 파견하여 제노비아 군을 일거에 괴멸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제노비아군의 우수성을 알지 못하였다.
양군이 맞붙은 결과는 로마군의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로마군은 한번의 패전으로 단념하지를 않고 제2군을 내보냈다.
지휘관은 로마 제일의 명장 아우렐리아누스장군 이었다.
제노비아는 아우렐리아누스 휘하의 정병을 만나 처음으로 적다운 적을 만났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왕년에 흑해서부터 나일강까지 그 용맹을 떨치던 제노비아의 낙타 부대도 오리리안 군에게 패배하는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
제노비아는 싸우면서 전선을 축소하여 살아남은 부하를 모아 팔미라의 성내로 후퇴해서 성문을 굳게 닫고 항복보다는 주검을! 하는 각오로 성을 사수하기로 하였다.
아우렐리아누스장군은 만 평화적으로 항복하여 성을 내놓는다면 도시에는 손상을 입히지 아니하고 여왕의 목숨도 보장하겠다고 교섭하였으나 제노비아는 이를 완강히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