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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2호-제1212호, 94.07.29 지정)
제1202호 : 농암이현보종손가소장문적(聾巖李賢輔宗孫家所藏文籍)
이 문적류들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며 시조작가로 유명한 농암 이현보(1467∼1555)와 그의 종손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교지 고문서와 전적류, 회화류 등이다.
이현보는 연산군 4년(1498) 문과에 급제한 뒤 내직으로 예문관검열, 사간원정언과 외직으로 밀양과 안동, 충주 등지의 지방관을 지냈다. 이후 형조참판, 호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고 1542년 76세 때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말년을 고향에 돌아와 지냈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소재로 삼아 시조를 지은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 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고문서류인 교지는 총 23매로써 연산군 4년(1498)∼명종 15년(1560) 사이의 것으로 이현보(14매), 이파(1매), 이문량(8매)과 관련된 교지들이다. 전적류로서는『애일당구경첩』으로 모두 2책으로 되어있다. 한책은 당시 명사들의 친필로 쓴 시를 모아 하나의 첩으로 만든 것이고,『애일당구경별록』은 생일가를 포함한 국문가사 등 이현보의 작품과 행적을 별도로 모아 편성한 것이다. 또한 회화류의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는 이현보가 동부승지로 재직시 승정원 관원 10명과 계모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제1203호 : 죽유오운종손가소장문적(竹牖吳澐宗孫家所藏文籍) 고령 고창오씨죽유공파종중
이 문적류들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였던 오운(吳澐,1540∼1617)의 종손가에서 보관되어 왔던 고문서와 전적들이다. 오운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1566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 충주목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 휘하에서 활약하였고, 1599년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지냈다. 『죽유문집』의 저서를 남겼다.
이 오운 종손가에 약 4백여 년간 전래한 고문서와 전적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문서로는 명종∼영조년간의 재산과 노비의 분배기록인 분재기 18매와 관에서 발급하는 문서로 개인이 요청할 경우 어떤 사실을 확인하여 인정하는 문서인 입안문서 1매, 호구관련 기록인 호적단자 21점, 오운과 후손들의 교지 85점, 오운이 죽은 뒤 광해군이 그의 죽음을 기리며 내린 제문 1점 등이 있다.
총 7종 110점으로서 이 고문서들을 통해 오씨 문중의 재산상태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경제사 연구, 가족제도 및 신분제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전적류로서는 『대학장구대전』1책 목판본과 『동문선』5책 훈련도감자본, 『노주연송덕시』1책 갑인자본, 『한구소시(韓歐蘇詩)』2책 필사본, 『매촌동약(梅村洞約)』1책 필사본 등 총 7종 12책으로, 서지학연구 및 향약과 사문학 서예를 연구하는 역사적 자료로 귀중한 책들이다.
제1204호 : 의겸등필수월관음도(義謙等筆水月觀音圖) 한국불교미술박물관
관음은 여러 모습으로 중생 앞에 나타나 고난에서 안락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수월관음도에는 그가 사는 정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크기가 가로 105.5cm, 세로 143.7cm로, 머리에 크고 높은 보관을 쓴 관음의 얼굴과 이목구비가 둥글고 예쁘게 묘사되어 화면 중앙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건장한 신체로 벌어진 어깨와 넓고 큰 하체를 가지고 있다. 옷은 녹색과 붉은색이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으나 약간 색이 바래져 보인다. 관음의 오른쪽 바위 위에는 버들가지가 꽂힌 화병이 있고 왼쪽에는 한 쌍의 대나무가 있는데 이것들은 고려시대 그림과 유사한 구도이다. 고려와 비교할 때 이런 배치구도는 비슷하지만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관음의 모습과 옷의 색깔, 바위의 형태 등은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조선시대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영조 6년(1730)에 18세기 최고의 승려화가인 의겸이 그린 이 수월관음도는 당대 최고의 작품이며,특히 고려 때에는 수월관음도가 많이 그려졌으나 조선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매우 귀한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1205호 :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제67,77>(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周本
<卷第六十七,七十七>) 인천 가천박물관
당나라의 실차난타가 번역한『화엄경』주본 80권을 고려 현종 때 목판에 새긴 초조대장경이다. 권67·77의 2권을 닥종이에 인쇄한 목판본으로 종이를 이어붙인 두루마리 형태이며, 2권 모두 표지와 첫째장·본문 등이 약간씩 없어졌다. 제목 아래 ‘신역(新譯)’이란 표시가 있어 이 책이 주본임을 알 수 있다. 책 내용은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인의 고승을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을 막기위해 판각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으로, 해인사대장경보다 글씨가 힘이 있고, 새김이 정교한데, 매 행(行)의 글자수가 14자로 해인사본의 17자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
간행기록이 없지만 종이질이나 인쇄상태 등으로 보아 11세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1206호 : 초조본십주비파사론<권제17>(初雕本十住毗婆沙論<卷第十七>) 가천박물관
십주비파사론은 보살이 수행하는데 있어 계율을 지키는 방법과 보살의 마음가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으로 화엄경에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고려 현종 때(재위 1011∼1031)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고자 만든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로,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십주비파사론 17권 가운데 마지막권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종이를 길게 이어붙여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보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세로 30㎝ 가로 47.3㎝의 종이를 28장 이어 붙인 것이다.
이 책도 장수를 표시하는데 있어 ‘장(丈)’자를 쓰고 있고 책 끝에 간행기록이 없으며, ‘경(敬)’자의 마지막 한 획이 생략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초조대장경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인쇄상태와 종이질 등을 고려해 볼 때 11세기에 찍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제1207호 : 산거사요(山居四要) 가천박물관
태사령 양우의 『산거사요(山居四要)』를 원나라 학자 왕여무가 증보·편집한 것으로, 4권 1책이다.
이 책에서는 산촌(山村)에 사는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알아야 할 네가지 요결을 사항별로 분류하여 기술하였다. 즉 총 4요결을 74항목으로 나누고 각 항목 아래에 해당사례 및 대증(對證:증거 조사를 하는 것), 처방 등을 서술하고 있다. 간행된 때는 우리나라 사람이 쓴 머리글이나 맺음말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보존 상태로 보아 조선 성종대로 보인다.
이 책은 건강을 지키는데 필요한 의약서적으로, 조선 전기 의학서적간행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 山居四要 : 산에서 사는 사람이 알아야 할 4요결 (섭생,양생,위생,치생) >
제1208호 : 춘추경좌씨전구해<권제60∼70>(春秋經左氏傳句解<卷第六十∼七十>) 가천
이 책은 조선 세종 13년(1431)에 경상도관찰출척사(慶尙道觀察黜陟使) 조치(曺致)와 도사(都事) 안질(安質)의 주선으로 참의(參議) 박분(朴賁)의 가장(家藏) 선본(善本)인 좌씨전(左氏傳)을 구해서 청도지군사(淸道知郡事) 주소(朱邵)의 책임하에 청도(淸道)에서 출간한 것이다. 제목록(諸目錄)에 보이지 않고 전부(前部) 권1-59까지가 결본(缺本)이며, 발문(跋文)에도 간행사실만 간략히 기록되어 있고 편제(編制) 등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발문(跋文)에 의하면, “우리 동방(東方)이 문교(文敎)가 크게 행해져서 경서 ·사서가 다 갖추어졌으나,『좌씨전(左氏傳)』만은 간행되지 못하여 춘추(春秋)를 공부하는 사람이 상고할 길이 없었다. 신해년(辛亥年)(1431)에 감사(監司) 조치(曺致), 도사(都事) 안질(安質)이 선본(善本)을 두루 구하여 나에게 그 일을 부탁하였는데 그해 중추(仲秋)에서 시작하여 중동(仲冬)에 이르러 조성(告成)하였다 ”하였다. 곧 판각(板刻)은 세종 13년(1431) 8월(月)에 마치고 인쇄는 선덕(宣德)6년(1431) 11월에 개판(開板)한 것으로 나타난다.
제1209호 : 우주두율(虞註杜律) 가천박물관
이 책은 중국 당나라의 시성(詩聖)인 두보의 칠언율시를 중국 원나라의 학자 우집(虞集)이 주(註)를 붙이고 해설을 한 것을 성종 1년(1470)에 당시 청주목사 권지가 청주목에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의 글씨는 괴산군수 박병덕이 썼고 교정은 이경방이 보았다. 또한 책을 간행한 연월이 발문을 쓴 연월보다 1년 앞서며, 서(序)·발(跋) 및 간기 등이 완전하다. 이 책은 서지학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1210호 : 청량산괘불탱(淸凉山掛佛幀) 한국불교미술박물관
석가의 모습이 단독으로 그려진 괘불로,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진행할 때 예배의 대상으로 사용하던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이 그림은 가로 4.5m, 세로 9m의 크기로 거대한 화면에 꽉 차게 정면을 향하여 서 있는 석가의 모습을 그렸다.
석가는 보살처럼 화려한 장식을 하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얼굴은 비교적 풍만하고 이목구비는 작고 가늘지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우람한 체구와 좌우로 벌린 발이 인상적이다. 녹색과 붉은색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옷은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특히 둥근 장식과 꽃무늬들은 이 그림을 한층 더 장엄하고 정교해 보이도록 한다.
조선 영조 1년(1725)에 그려진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약간 바래지고, 떨어져나간 부분도 있지만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화려한 보살모습을 한 석가모니불을 그린 당대를 대표하는 괘불로 손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제1211호 :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 동두천 자재암
이 책은『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에 송나라의 중희(仲希)가 자신이 지은『현정기』를 붙여 다시 편찬한 것으로,『반야심경소현정기』라 부르기도 한다. 목판에 새긴 후 닥종이에 찍어낸 것으로, 세로 31㎝, 가로 19.1㎝의 크기이다.
책머리에는 금강경의 전문(箋文:글의 뜻을 해명하거나 자기의 의견 등을 적어서 그 책에 붙이는 작은 쪽지)인 금강경심경전(金剛經心經箋)이 붙어 있다. 전문에 의하면 금강경은 조선 세조 10년(1464) 간경도감<刊經都監: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책 끝에는 조선 세조 10년(1464) 효령대군과 한계희 등이 왕명을 받아 간경도감에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책은『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보물 제771호)와 같은 책이나 책 첫머리에 금강경의 전문이 붙어 있는 것이 다르다.
또한 보존 상태도 보다 양호하며, 교정을 하였다는 뜻으로 ‘교정인(校正印)’이라 쓰여진 도장이 찍혀 있는 점도 다르다.
제1212호 : 식성군이운룡선무공신교서외관계문서(息城君李蕓龍宣武功臣敎書外關係
文書) 청도 재령이씨 지암종중
선조가 선조 37년(1604)에 임진왜란 때 옥포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동계 이운룡(1562∼1610)에게 내린 상훈교서와 교지 등 2점이다.
이운룡은 선조 18년(158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옥포만호 등의 벼슬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이 도망치려는 것을 막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하도록 건의하여 옥포해전에서 적함 50여 척을 쓰러뜨리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이순신의 추천으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이끌었다.
교서는 이운룡이 옥포해전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하고 승리한 무공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즉 이운룡을 선무공신 3등으로 정하고 포상으로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관직의 1계급 진급과 부모 처자도 1계급씩 올리되 자식이 없을 경우 조카나 여조카까지 1계급씩 올려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손인 큰아들이 세습하여 그 녹을 잃지 않게 하여 영원히 도울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교지는 선조 29년(1596) 이운룡을 절충장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하는 사령장이다.
(제1213호-제1214호, 95.01.10 지정)
제1213호 : 밀양천황사석불좌상(密陽天皇寺石佛坐像)
경상남도 밀양 천황산 얼음골에 자리잡은 천황사 경내에 모셔져 있는 불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난 석불좌상이다.
파손된 것을 새로 만든 머리 부분을 포함하여 체구는 인체비례와 유사한 편인데 우아한 어깨, 당당한 가슴, 날씬한 허리에 얇은 옷의 표현으로 사실성을 높여주고 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옷은 얇은 층단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우아하고 사실적인 형태는 8세기 중엽의 불상들과 상통하는 면이지만, 얇은 층단식 주름의 세련된 표현은 8세기 후반의 특징을 보여준다.
대좌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보이는 독특한 사자좌(獅子座)인데, 상대·중대·하대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는 둥근 원판형 윗부분을 약간 높여 정교한 연주문(連珠紋)을 새기고 그 아래에 연꽃무늬를 2겹으로 조각하였다. 중대에는 2줄의 띠를 새긴 얕은 원형받침이 있다. 하대는 복판연화문 위에 11마리의 사자를 환조로 새기고 있는데 정면에는 향로같은 공양구를 끼웠을 것으로 보이는 구멍받침이 있다.
8세기 후반의 가장 우수한 석불상의 예일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사자좌를 가진 석불좌상으로 크게 주목되며, 학술적으로도 신라 조각사에서 반드시 취급되어야 할 중요한 불상으로 여겨진다.
제1214호 : 파계사영산회상도(把溪寺靈山會上圖)
석가가 영축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크기는 길이 340㎝, 폭 254㎝이며 비단 위에 채색되었다.
중심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를 두고 좌우대칭으로 여러 보살과 무리들이 석가를 에워싸고 있다. 주로 녹색과 붉은색을 사용해 밝고 화려하며 옷에 칠해진 금빛이 매우 찬란하다. 이 그림은 다른 영산회상도와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조선시대 불화에서 석가여래의 광배는 몸뒤의 신광과 머리의 두광을 함께 표현하는데 비해 이 그림은 신광만을 표현했다. 둘째, 부처님의 옷에 밭 전(田)자 무늬가 그려져 있지 않았고 셋째는 부처의 오른쪽 발목에 꽃잎장식이 보이지 않는 점이 그러하다. 능숙한 붓놀림과 화려한 채색 등이 매우 돋보이는 18세기 초를 대표하는 불화이다. 이 영산회상도는 조선 숙종 33년(1707)에 왕실에서 뜻을 모아 제작한 것으로 자료적인 가치도 매우 높은 작품이다.
(제1215호 -제1216호, 95.03.10 지정)
제1215호 : 이색초상(李穡 肖像) 한산이씨대종회
고려말 3은(三隱) 중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원래 관복차림과 평상복차림의 두 종류가 있었으나 현재는 관복차림만 전해진다. 관복차림의 그림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모두 4본 5점이 전해진다.
1654년 허의와 김명국이 옮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가로 85.2㎝, 세로 143㎝ 크기의 예산누산영당본(禮山樓山影堂本)은 관리들이 쓰는 사모를 쓰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모에는 회색줄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했으며, 얼굴에는 옅게 붉은 기운을 넣어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고려말 관복을 충실하게 표현하였고, 옮겨 그린 것이지만 당시 일류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회화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은 가로 25㎝, 세로 25.8㎝ 크기의 소본(小本)과 가로 81.6㎝, 세로 149.8㎝ 크기의 대본(大本)이 전해진다. 소본은 누산영당본과 같은 시기인 1654년 그린 것으로 현재는 반신상이지만 잘려나간 곳을 감안하면 전신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본은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로 1711년에 옮겨 그려 임강서원에 모셔 두었다.
가로 85.2㎝, 세로 150.7㎝ 크기의 문헌서원본(文獻書院本)은 목은영당본과 동일한 형식으로 1755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이다. 목은영당본에 비해 수염처리와 옷의 묘사 등의 표현기법이 떨어지는데 이는 화가의 기량 차이 때문인 것 같다.
가로 78.7㎝, 세로 146.3㎝ 크기의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헌종 10년(1844)에 옮겨 그린 것으로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규모이며, 뛰어난 화가에 의해 옛 그림 화풍이 잘 표현된 초상화이다.
현재 이색영정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 일류화가에 의해 새로 옮겨 그려진 4본 5점 모두 수준이 높고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하며, 역사상 중요 인물을 그린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1216호 : 손소초상(孫昭 肖像) 경주 손성훈
손소(1433∼1484)선생을 그린 초상화이다. 손소 선생은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적개공신에 오르고 후에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거쳤다. 초상화의 크기는 가로 105㎝, 세로 160㎝이며 비단 위에 채색하였다.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고 있다. 갈색선으로 이목구비를 표시했고 흰색의 속옷 소매가 보인다. 왼쪽 다리부분의 안감과 녹색의 속옷이 보이며 의복선은 각지게 처리했다. 흰 가죽신을 신고 있는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방치되어 떨어져나간 부분이 많지만, 그림의 색체나 윤곽 그리고 글은 비교적 뚜렷하다.
이 손소 초상화는 적개공신 때의 모습을 10년 후인 성종 7년(1476)에 그린 것으로 조선 초기 공신도상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며,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어 그 의의가 더욱 큰 작품이다.
제1215호 | 제1216호 |
(제1217호-제1219호, 95.04.03 지정)
제1217호 : 신편산학계몽(新編算學啓蒙) (재)아단문고
중국 원나라의 주세걸이 처음 편찬한 산학서(算學書:셈에 관한 책)를 조선 전기에 을해자로 찍어낸 책으로 총 3권 3책이다.
우리나라의 산학은 고려시대에는 국자감과 경사육학에 박사와 조교를 두어 8품이상의 양반자제들에게 가르쳤고, 조선시대에는 취재(시험을 통해 재주 있는 사람을 뽑는 것)를 통하여 선발된 중인들에 의해 세습되었다.
이 책은 조선 성종 때 간행된 것으로 보이며, 『경국대전』에 나오는 것과 같이 『양휘산법』, 『상명산법』 등과 함께 조선시대 셈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채용고시에 쓰였다. 내용은 전답의 형태와 면적을 환산하는 법, 곡물과 작물 등의 단위 등 당시의 각종 도량형 단위에 대한 문답식해설 등이다. 본래 중국의 산학서이나 오직 한국에서만 계승되었으며,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산수관련 서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도량형제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제1218호 : 둔촌잡영(遁村雜詠) (재)아단문고
고려말 학자인 둔촌 이집(李集,1314∼1387)의 문집으로 상·하 2권 1책이며, 조선 태종 10년(1410) 7월 간행된 것이다. 이집은 고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유명하였다. 신돈의 미움을 사 영천으로 도피하였다가 1371년 신돈이 죽자 개경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여주 천녕현에서 시를 지으며 묻혀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책머리에는 하륜(1347∼1416)의 서문(序文)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책을 간행하게 된 경위와, 하륜과 고려말 이성계에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던 삼은(三隱)과의 교류관계, 둔촌 이집의 인품과 학문 등이 나타나 있어 당시의 명신들이 연령을 초월하여 학문적으로 친밀하게 사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1219호 :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재)아단문고
대방광불원각수다라요의경은 줄여서 ‘원각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우리나라 승려들의 교과과목으로 채택되어 불교 수행의 길잡이 구실을 하는 경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의 지눌이 깊이 신봉하여 ‘요의경’이라고 한 뒤 크게 유행하였다.
5권을 2책으로 묶어 간행한 것으로 크기는 권 상이 세로 27㎝, 가로 18.2㎝ 권 하가 세로 27.8㎝, 가로 18.2㎝이다.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간행한 책들과 같은 형식인데, 다만 본문을 한글로 풀지 않고 토만 달아 놓았다. 세조 11년(1465)에 정란종의 글씨를 동활자(銅活字)로 만들어서 조합하여 원각경을 찍으려 했지만 억불정책에 의한 영향으로 토만 달게 된 것이다. 이 활자본은 매우 희귀하여 원각경 외에 금강경, 벽암록, 당서 등이 알려지고 있다.
제1219-1호 :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권상1-2,하1-1∼2-2>(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卷上一之二,下一之一∼二之二>) (재)아단문고
제1219-2호 :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권상2-2,권하3-1·권하3-2(大方廣圓覺脩多羅了義經
卷上二之二, 卷下三之一·卷下三之二) 김민영
제1220호 : 명안공주관련유물(明安公主關聯遺物) 강릉시립박물관, 1995.06.23 지정
조선 현종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1664∼1687)와 그가 거처하던 명안궁과 관련된 전적류, 고문서류, 유물 등이다. 명안공주의 본명은 온희(溫姬)로, 숙종 5년(1679) 오태주와 결혼하였다.
전적류는 현종과 명성황후, 숙종의 한글 편지 등이 수록된 어필첩과 각종 판본, 오태주 일가의 글씨를 모은 유묵첩, 영조의 환갑을 맞이하여 왕세손과 신하들이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모음집 등이 있다. 고문서류로는 각종 물품단자와 진정서이고, 유물들은 궁중에서 명안공주에게 보낸 생활용품들이다. 특히, 명안공주 작명단자는 왕실의 것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와같이 여러 관련된 유물들은 그 종류가 다양해 당시 공주궁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며, 서예연구는 물론 예술적인 가치가 있고, 당시의 궁중생활사 및 사회·경제사연구의 사료로서 소중한 자료들이다.
(제1221호-제1227호, 95.07.19 지정)
제1221호 : 김진초상(金璡 肖像) 안동 한국국학진흥원
청계 김진(1500∼?)의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109㎝, 세로 142㎝이다. 김진은 조선의 학자로 중종 20년(1525)에 과거에 합격하여 이조판서까지 오른 인물이다.
모시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이 초상화는 오른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모습으로 두 손은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머리에는 높고 테가 넓은 전립을 썼으며 녹색의 옷을 입고 있다. 얼굴은 몇 개의 선으로만 처리했고 눈매는 매우 가늘다. 명상에 잠긴 듯한 얼굴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학자로서의 면모를 암시하고 있다. 깔고 앉은 호랑이 가죽의 방석은 부피감이 없고 매우 평면적이지만 그림이 어색하지 않다. 묵선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갈색선, 붉은 선 등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선조 5년(1572)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인물을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선생의 성격이나 기품이 잘 나타나 있다. 이현보 선생의 초상화와 함께 안동지역의 사대부상을 대표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제1222호 :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한솔종이박물관
고려 중기의 고승인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고려 희종 5년(1209)에 저술한 책으로 조선 성종 17년(1486) 광주 무등산 규봉암에서 간행하였으며, 1권 1책이다.
지눌은 8살 때 구산선문 가운데 사굴산파에 속했던 종휘에게 나아가 승려가 되었다. 당시 불교사회의 종파간 대립을 멀리하고 자유롭게 공부하였으며, 고려 명종 12년(1182) 승과에 급제한 후에는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석한 승려들과 함께 정혜결사를 맺었다. 지눌의 사상은 교종과 선종을 따로 나누지 않고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여 참선하면 그 요령을 얻게 된다는데 있다.
이 책은 보조국사 지눌이 사상적으로 가장 원숙했던 시기에 집필한 책으로 지눌의 선(禪)사상이 결집된 한국철학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찰강독의 교과서로 현재까지 교육되고 있다. 이 판본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보물 제1148호로 지정된 판본과 동일한 연대이기는 하나 이보다 더 깨끗하고 책 끝에는 대걸(大傑)의 발문이 붙어있다.
제1223호 : 집주금강반야바라밀경<하>(集註金剛般若波羅密經<下>) 한솔종이박물관
이 책은 금강경에 대한 여러 명의 풀이집을 모아 편집한 것으로, 전체 32분(分) 가운데 제15분(分)부터 제32분(分)까지 수록되어 있다. 태종 17년(1417)에 나무에 새겨 닥종이에 찍어낸 것이며, 크기는 세로 27㎝ 가로 17.5㎝이다.
책의 끝부분에는 경전이 지향하는 바를 적은 글과 영경사(永慶寺)의 도과법사(道顆法師)가 돌에 새겨 찍어낸 것을 원본으로 했음을 밝히는 글이 있다. 이어 본문의 교정표·육조대사의 서문·간행경위를 적은 기록이 있는데, 간행기록 외에는 원본에 붙어 있던 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제1224호 : 불조삼경(佛祖三經) 한솔종이박물관
불조삼경은『불설사십이장경』,『불유교경』,『위산경책』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사십이장경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장 먼저 전래된 경전이고, 불유교경은 부처님의 최후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이며, 위산경책은 중국 위상종의 창시자인 위산영우의 말씀을 적어 놓은 것이다. 이 책은 고려시대에 간행된 1책으로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이다.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16.3㎝, 가로 23.7㎝이다.
책머리에 있는 몽산화상이 쓴 글을 통해 고려 후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글씨체로 보아 송나라 시대에 새긴 판을 원본으로 하여 다시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책 끝부분에 이색이 쓴 글에서는 고려 우왕 10년(1384)에 지봉(志奉), 지도(志道), 각온(覺溫) 등이 김씨의 시주로 다시 펴낸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글자의 새김이 정교하고 인쇄 상태가 선명하며, 개인의 시주로 책을 인쇄했다는 점과 송나라 글씨체를 본떠 만들었다는 점 등에서『불설사십이장경』(보물 제695호)과 동일한 판본으로 보인다.
제1224-2호 : 불조삼경(佛祖三經) 범어사
제1225호 : 묘법연화경<권제7>(妙法蓮華經<卷第七>) 중앙승가대학교
이 책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32.5㎝, 가로 23㎝이며, 2책으로 만든 권7의 내용 중 뒷부분에 해당한다. 세조 때 불경을 한글로 풀어 쓰는 작업을 위해 설치한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것이다. 본문과 계환(戒環)이 해석을 달아 놓은 부분은 한글로 풀어쓰고 있으며, 책 끝에는 만들게 된 경위를 적은 김수온(1333∼1382)의 글이 있다.
세조 9년(1463)에 간경도감에서 목판에 새긴 것을, 성종 3년(1472)년에 인수대비가 세조·예종· 의경왕·인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에서 찍어낸 것이다. 당시 인수대비가 찍어낸 29종의 불경 중 묘법연화경이 간경도감에서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1226호 : 조흡도총제부동지총제왕지(曺恰都摠制府同知摠制王旨) 육군박물관
태종 6년(1406) 윤(閏) 7월 13일 국왕이 무신인 조흡(曺恰,?∼1429)을 가선대부 좌군도총제부동지총제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사령왕지이다. 조흡은 고려 후기 문하시중을 지내고 창성부원군에 봉해진 조민수의 손자로, 정종 2년(1400) 방간의 난에서 공로를 세워 태종 1년(1401)에 공전을 사급받는 한편 무관의 요직에 발탁되어 그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이 문서는 총 7행에 걸쳐 초서체로 세로로 썼으며, 연월 위에는 ‘조선국왕지인’이란 새보(璽寶:임금의 도장)가 찍혀있다.
왕지는 세종 말기부터 교지로 바뀌고 여기에 찍히는 직인도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에서 ‘시명지보(施命之寶)’로 바뀌었다.
이 문서는 조선 전기의 문서양식, 새보사용의 변천과정 연구 및 인사행정제도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제1227호 : 식물본초(食物本草) 가천박물관
음식물로 병을 예방하는 내용을 담은 전문의학서적으로, 중종 21년(1526)에 중국 명나라 요문청(姚文淸) 등의 서문을 붙여 간행한 것을 중종∼명종년간(1526∼1556)에 다시 갑진자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수(水)·곡(穀)·채(菜)·과(果)·금(禽)·수(獸)·어(魚)·미(味) 등 8류(類)로 나누어 상권과 하권에 수록하였다. 상권에는 수·곡·채·과 등 4류 212조가, 하권에는 금·수·어·미 등 4류 175조가 수록되었다. 각류(各類)에서는 조목마다 해당식물의 맛, 본성, 이익, 해독 등을 적어 설명하고 말미에는 각류의 식물에 대한 총론을 적고 있다.
이 책은 도서목록에 아직까지 보이지 않던 것으로 희귀한 의학서적이며, 따라서 서지학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1228호-제1233호, 95.12.04 지정)
제1228호 : 청자음각반룡문주자(靑磁陰刻蟠龍文注子) 리움박물관
고려시대 만들어진 청자 주전자로 높이 21.1㎝, 아가리 지름 6.7㎝, 밑지름 8.4㎝이다. 하늘에 오르기 직전 땅에 앉아있는 용(반룡) 모양을 새겼다고 하여 반용문주자로 불린다.
크기에 비해 아가리 지름이 넓으며, 전체적으로 안정된 형태를 이루고 있는 몸통과 손잡이가 있는 병모양의 주전자이다. 물을 따르는 주구와 몸통은 번개무늬 띠를 2곳에 둘러 크게 3등분 되어 있다. 반용문은 몸통의 위쪽 2부분에 앞·뒤로 한 마리씩 모두 4마리가 새겨 있는데, 한마리는 아가리가 긴 삼각형의 얼굴이며, 다른 한마리는 사각형이어서 암수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가리 지름이 넓고 목부분은 짧고 굵은 병모양의 몸통과 밖으로 벌어진 낮은 굽, 손잡이 상부의 꺽음, 힘차게 뻗은 아가리에서 금속제 주전자를 모델로 했다고 보여진다. 정교하게 처리된 번개무늬와 반용문에서 12세기 전반에 제작된 우수한 청자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주전자는 지금까지 그 유래가 알려지지 않은 특이한 형태로 전라남도 강진의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제1229호 : 분청사기조화절지문편병(粉靑沙器彫花折枝文扁甁) 리움박물관
조선시대 만들어진 두 면이 납작한 높이 20.5㎝, 아가리 지름 5.0㎝, 밑지름 8.3㎝인 편병이다.
이 병은 물레로 둥글게 만든 다음 앞·뒤를 두들겨 평평하게 만든 것으로, 몸통이 풍만하며 비교적 두껍게 백토를 발랐다. 문양을 보면 아가리 주위에는 연꽃무늬로 띠를 둘렀고, 몸통의 앞·뒤 평평한 면에는 연꽃을 표현하였고, 좌우에는 풀을 새겨 넣었다. 엷은 녹색의 유약이 전면에 고르게 잘 녹아들어 투명하며, 굽이 높고 밖으로 약간 벌어져 안정감을 준다.
조선시대 작품으로 풍부한 양감과 문양이 잘 어울리는 중요한 자료이다.
제1230호 : 백자상감연·당초문병(白磁象嵌蓮·唐草文甁) 용인 호암미술관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29.9㎝, 아가리 지름 6.9㎝, 밑지름 8.5㎝의 연질백자이다.
연질백자는 표면이 단단하지 않으며, 유약이 쉽게 떨어진다. 아가리는 나팔같이 밖으로 벌어져 있다. 좁아진 목부분을 지나면서 서서히 팽창하여, 몸 아랫부분이 팽배되었다가 좁아져 굽에 이른다. 어깨부분에는 덩굴무늬를 중심으로 아래·위 2줄의 횡선을 흑상감했고, 몸통에는 먼저 3곳에 연꽃을 배치하고 충분한 여백을 두면서 덩굴무늬를 사이사이에 흑상감하였다. 상감한 선의 굵기가 일정하여, 단정하고 깔끔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병은 백자상감초화문편병(국보 제172호), 백자상감모란문병(보물 제807호)과 형태와 문양이 유사하여, 조선백자의 계보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