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은 이세상이 선과 악으로만 되있다고 생각하는가? 참으로 단순무식한 흑백논리의 소치이다.
더욱이 그대들이 하는 석과 악의 구별이라는 것은 내가 하면 선이자 성령이고, 맘에 안드는 남이 하면 악이고 마귀가 아닌가?
그대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신에게 머리를 숙이려 하는가?
종으로서의 인생만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인생인가?
원죄? 도데체 무엇이 원죄라는 것인가? 사람이란 존재로 태어나는것이 죄란 말인가?
그럼 차라리 이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겠군. 기독교인들은 낙태를 반대할 자격도 없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서 자칫하면 예수를 안믿어서 영원한 지옥의 불길속에 빠질수도 있는데 왜 태어나는가? 그러고 보니까 바이블의 욥기에도 그런내용이 있더군. 뭐라고? 모른다고? 이런! 쪽팔린줄 아시길......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 문구는 협박이다. 전도가 아니다.
무신론자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만 일으키는 아둔하고 미련한자의 입에서 나오는 사탄의 협박이다.
허다한 복음주의, 문자주의, 근본주의 교회가 기독교와 맞지도 않는 불가지론, 범신론을 얼기설기 기독교식으로 짜맞추어 어리숙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자신들만의 성경 해석법으로 '자신의 뜻'을 '신의 뜻'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번장에서는 기독교의 의식개혁을 위해 여러 문제점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 예수 안믿는놈은 지옥에나 떨어져라!? / 적 그리스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전철역 앞에서 북을 치며 소리를 치는 사람들을 보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많은 개신교목사들은 종교적으로는 매우 배타적이어서 항상 기독교 이외에는 구원이 없음을 강조한다.
기독교, 더 정확히 말해서 개신교인들이 주장하는 천국은 '예수를 믿는 자만이 갈수 있는'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다.
단순히 선량해서도 갈수 없고, 정직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다해도 갈수 없다.
반면에,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살다간 사람이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단한가지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성경공부에서 초심자들이 가장많이 제기하는 질문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착하게 살다간 선행자들은 천국에 가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사실, 기독교인이라면 최소한 한번쯤은 보았을 그림이 하나있다.
한남자가 벼랑 끝에 서있고, 벼랑 건너편(천국)으로 건너가려 하지만 '원죄' 때문에 자신의 능력으로는 갈수가 없다.
선행, 도덕등의 다리가 놓이지만 너무 짧아서 건너편까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다리가 놓이자 비로소 남자는 건너편(천국)으로 건너갈수가 있게된다.
이런 내용의 그림이 그려진 전도지를 기독교인은 최소한 한번은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신자로써 이런 그림을 보고 있자면 참으로 유치한 생각이 든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우리종교 안믿으면 말짱 황이다!"라는 식의 주장은 사이비종교에서나 나올법한 교리이다.
개신교는 우리나라 최대규모를 가진 종교집단으로 덩치가 크게 불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도방식과 사고방식은 비윤리적인 사이비종교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유치한 사고방식을 따라하는 종교집단이 늘어가니 한심할 뿐이다.
아래는 안티기독교 사이트마다 돌아다니며 삽질을 했던 어느 종교인의 글이다.
"남사고 예언서 격암유록에 '괴질병으로 천명 조상 중 자손 하나가 살아남는다'.
마찬가지로 XXX를 안믿으면 개벽이 될때 괴질병으로 죽게 됩니다.
그러나 XXX를 믿으면 개벽이 될때 살아남는데 부디 지상천국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분은 안티기독교의 회원들이 이런 내용에 귀가 솔깃할줄 알고 글을 올린모양인데, 글이 올라오는곳마다 안티기독교인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우리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주요 이유중의 하나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반윤리적이고 저질적인 교리인데, 그것을 똑같이 따라하는 종교니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신교인은 위의 종교인의 글을 비난할 자격도 없다.
기독교의 "예수천국 불신지옥"교리나, 위에서 언급한 "XX개벽, 불신괴질"이나, 거기에서 거기다. 둘다 비윤리적이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꼴통교리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를것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런 교리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가?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장사속 때문이다.
물론, '믿음'인가, '선행'인가 라는 논쟁에서, '믿음'을 선택한 개신교의 시조 '마르틴 루터'의 간접적 영향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지금 한국에서 그런 교리를 고수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장사속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를 안믿어도 선하게 살다간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해 버리면, 전도에 차질이 빛어질분아니라, 기존의 교인들중에도 교회에 나오기를 그만두는 사람이 생길 것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할 것이다.
특히 사이비 종교집단일수록 "우리종교 안믿으면 큰일난다!"라는 것을 아주 강조한다.
교주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더욱더 많은 신도를 확보해야 하는데, "착하게 살다간 사람은 모두 천국갑니다"라는 김빠지는 전도를 한다면 신도들 숫자가 늘어나겠는가?
그래서는 않됀다. "도를 아십니까? 어이구, 얼굴은 훤칠한데 마(魔)가 끼었군요. 우리 XX진리교에 입문하셔서 마를 쫓아내세요", "5월5일날 지구의 종말이 옵니다. 그때가 되면 인류는 모두 사망하고 그들의 영혼은 똥냄새나는 정화조에 떨어집니다. 하지만 우리 교주님이신 이박사님께 세례를 받으신분은 극락에서 영생하실수 있습니다.", "어허! 조상귀신이 붙어있어! 굿을해서 귀신들을 쫓아내야해!"라고 해야한다.
다시말하자면 선행과 도덕과 양심에 의해 살아가야 한다는것이 지금 이 사회의 '보편적인 상식'이라고 할수 있지만, 사이비종교일수록 '보편적인 상식'을 거부하고 공포감(죽음,지옥,불행)을 조성하고,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자신들의 종교가 '유일한 것'임을 '아주 유난하게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신도들을 늘일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는 대한민국의 주요종교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윤리적이고 몰상식한 덩치만 큰 거대한 사이비종교집단에 다를바가 아니다.
올해 석가탄신일날을 기념하여 TV에서 다큐멘타리 한편이 방송되었다.
카스트제도가 아직도 살이있는 인도땅에서 불가촉천민들이 사는 마을에 학교를 짓고 봉사하는 한국의 스님과 불자들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안타까운일은 이중에 한명이 강도들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동료의 죽음에 경악한 불자들은 고국으로 돌아오려고 마음먹었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학교를 건축하고 있다고 한다.
돈한푼받지 않고 낮선 이국땅에서 목숨을 바쳐가며 봉사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인간은 원죄가 있기 때문에 어떠한 선행으로도 구원받을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개신교인들...
위에서 언급한 불자들, 그리고 목숨을 잃은 불자, 이분들은 '예수를 안믿었다'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지옥에 가야할까?
이 같은 질문에 기독교인들은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는 것이니 우리는 모른다"고 회피해 버린다.
그렇다면 차라리 입다물고 조용히 있으면 될것이지, 모른다는 인간들이 계속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떠들어 대고 있다.
"예수믿으면 천국가고, 안믿으면 불지옥에 떨어진다."라고 주장하는 이땅의 거대한 사이비종교집단의 신자들, 누가 그들에게 천국행 티켓을 당연스레 준것인가?
인간이 가야 할 보편적인 길을 걸어가자.
천국에 갈 욕심으로 신앙을 가지는 사람들의 욕심이 참으로 추해보인다.
그들은 예수가 말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망각해 버린것일까?
● 확신범과 양심범 / 분석가
많은 사람들이 단군상을 훼손한 목사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른 종교나 사상, 과학 이론을 비방하고 폄하하는 기독교인들은 같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곤 한다. 성남일화 축구단을 몰아내려고 집단 시위까지 하고 '붉은 악마'의 명칭을 가지고 끈질기게 시비를 거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원래 사악하고 못되먹어서 그런 것일까? 필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군상을 훼손한 목사나 그 밖에 몰상식한 못된 행위를 저지르는 많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그들의 죄는 그저 순진하고 무지몽매하다는 점일 뿐이지, 그들이 악의를 품고 그런 짓을 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즉, 확신범과 양심범의 구분이 그것인데, 똑같은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중에도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진짜로 종말이 온다는 착각속에 빠진사람은 양심범이고, 종말론을 이용해서 신도들을 능욕하는 자는 확신범에 해당된다.
마찬가지로 필자는 종교를 빙자해서 신도들의 돈을 갈취하고 여신도를 강간하는 글러먹은 목사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악심(惡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러한 종교 사기극은 기독교 자체의 결함과 맞물려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다. 사후세계의 상벌, 공포에 호소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종교 사기꾼들에게 매우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헌금통을 자연스럽게 돌리고(그것도 여러번) 십일조를 당연시하는 풍조는 종교로 사기쳐 돈벌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다. 무엇보다도 사기꾼들이 좋아할 만한 교리는 바로 불신과 의심을 죄악시하는 것이다. 비판과 자기정화의 기능은 바로 기존의 것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를 미리 차단하는 교리가 있으니 사기행위를 계속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세금(소득세)도 안내고 "종교의 자유"라는 보호막이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사업인가.
이에 반해, 타종교를 비방하고 공공장소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다니며 새벽에 몰래 단군상을 훼손하는 경우는 앞서의 확신범(=목사)의 경우와는 다르다. 종교 사기꾼들의 경우 그들의 양심에 따라서 못된 짓을 했다고 보기가 어려운 반면, 이 경우는 그들의 양심에 철두철미하게 따랐다고 본다.
새벽에 단군상을 훼손하러 다니는 일은 당사자 개인적으로 이익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도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는데 대해서 오히려 자랑스럽게 교회에서 떠벌린 점을 보더라도 그것이 양심에 따른 행동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는 그것이 선행이고 그의 신 앞에 떳떳한 행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탓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무지몽매와 어리석음, 순진함에 한에서이다. 만일 그가 기독교에 의한 독단적 맹신주의를 주입받지 않았다면 그는 단지 선량하고 순박한 사람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거짓된 신앙을 가져서 그런 짓을 한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식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몰상식한 짓을 하도록 만들어 놓고 나몰라라 하는 사악한 종교 밖에 안 된다. 잘못된 신앙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면 기독교는 과연 그에 대한 "대책"이 있을까?
과거 유럽의 기독교는 분명 "잘못된 신앙에 대한 대책"이 있었다. 그것은 잘못된 믿음을 가진 자들을 박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대책은 불가능하므로 기독교인들은 뭔가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타종교 비방, 이단 판정도 그에 대한 방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신도들에게 독단적 맹신주의를 더욱 주입시켜서 다른 믿음으로부터 자신의 믿음을 보호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신도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들 뿐이며 일이 터진 뒤에야 "잘못된 믿음"이라고 변명하는 무책임한 방법이다.
사실 신중한 태도와 판단은 사람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많은 실수를 예방해 준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 본성 자체에 대한 불신을 강조하므로 기독교인들은 신중함조차 내버리고 오로지 신에게 매달리려고 한다. 자신의 신중한 판단조차 의심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종교적 도그마에 충실한 것이다. 그들은 양심에 따라 살고는 있지만 그것은 종교 노예의 양심일 뿐이다.
따라서 필자는 반기독교인들이 근본주의, 맹신주의에 빠진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고 꾸짖기 보다는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단지 기독교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일 뿐이며, 이렇게 생각하는 태도가 "양심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반기독교 활동의 취지에도 잘 맞는다고 본다. 예수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 지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예수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전혀 없지만 다른 가르침보다는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예수가 아니라 내가 할 말이다.
"반기독교인 여러분, 기독교인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 지 모르고 있습니다"
● 기독교가 날조한 죄목 / 분석가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나라에 없었던 희한한 죄목을 날조하여 원래 없던 죄의식을 심어주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열거해 보기로 하겠다.
① 우상숭배
우상숭배는 죄가 아니다. 다만 나쁘게 말하면 멍청한 짓이고 좋게 말하면 순박한 행동이다. 내가 돌부처한테 천만번 절을 하건 인형쪼가리를 숭배하건 다른 사람한테 피해만 안주면 죄가 아니다.
비유를 들자면 연예인들을 졸졸 따라다니는 팬클럽이 죄가 아니라, 다른 연예인 팬클럽을 적으로 모는 배타적 행위가 죄다.
② 절
알다시피 절은 인사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인사법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친구간에도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맞대고 절했다. 기독교인들 중에 절하는 것을 죄라고 하는 애들이 몇이나 되는 지 모르지만 이렇게 떠들고 다니는 애들을 꽤 보았다.
골때리는 것은 정월에 세배도 하지 말라는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보통 "절하지 마시고 주안에서 승리하시길.."과 같은 글이 여기 저기 눈에 많이 띈다.
절은 절대 죄가 아니다. 속지 말도록 하자. 남한테 아무 피해를 안준다.
③ 원죄
원죄는 죄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발명한 황당한 죄목이다. 기독교인들이 말하기를 원죄는 대대손손 유전된다. 연좌제랑 비슷하긴 한데 좀 다르다. 연좌제는 죄인과 혈연관계나 특별관계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이고, 원죄는 죄인의 자식들 대대로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태어난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아기도 죄성이 드러난다고 떠드는 기독교인을 보았다. 그런 자가 부모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정신이 멀쩡하다면 아기의 귀여운 행동을 보고 죄성이 드러난다는 말을 할 리가 없다. 갓난아기가 하는 일이라고는 울거나 먹거나 싸는 일이다. 이 3가지 행동 중에 죄가 있다면 나한테 말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원죄를 말할 때, 한가지 놓치는 것이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원죄가 생겼다면 원선(?)도 분명히 있다. 인간이 절대선 야훼의 사랑스러운 창조물인데 원선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원죄가 원선을 모두 말소시켰단 말인가? 원죄만 강조하고 원선은 등한시하는 기독교의 속셈은 뻔하다. 죄의식을 심고 이것을 자극해서 신도수를 늘리고 더 많은 돈을 강탈해 가기 위해서다.
④ 본능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본능을 죄악시 했다. 그 찬란한 전통을 우리나라 개신교인들이 잘 이어 받았다. 특히 성욕에는 많은 죄목을 걸어 놓았다. 중세시대 카톨릭의 성인으로 추대된 聖어거스틴은 성(sex)을 원죄로 규정하였다. 그는 원죄가 없었으면 지금 같이 정욕에 이끌러 아기를 낳는 것이 아니라 냉정한 이성을 유지하면서 아담의 정액이 처녀막의 손상이 없이 하와에게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갈수 있었을 것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했다.
특히 지하철에서 전도질하는 광신자들은 주로 간음, 간통, 음란에 대한 죄의식을 강조한다. 음란한 생각까지 죄라고 떠들어 댄다. 듣고 싶지도 않은 자기의 간음했던 과거를 마구 떠벌리면서 이제는 예수믿고 회개해서 죄를 씻었다고 목청껏 외친다.
음란한 생각은 죄가 아니다. 음란한 생각이 바로 성욕이 아닌가? 누구나 하고 있고 해왔던 생각이다. 음탕한 생각을 남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죄다. 음탕한 상상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켜 변태나 색마 또는 정신병자라고 한다. 심리학적으로 그런 자들은 죄의식으로 억눌린 성욕을 분출하다가 그렇게 된 경우가 태반이라고 한다.
다만 상상은 상상으로 남겨두자. 거기까지가 무죄다.
● 맹목적 믿음의 폐해 / 분석가 & nocturne & 적 그리스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일단 믿어보라는 말을 하면서,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더 복되다는 말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맹목적 믿음이라고 한다.
맹목적 믿음이란 간단히 말해서 확인없는 믿음이다.
확인이란 증거나 사실을 논리적 과정을 통해 어떠한 명제를 믿을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인간의 이성이 관여하게 된다.
따라서 맹목적 믿음의 원인은 이성을 배제한 욕망이다.
기독교인들의 욕망은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 남겨 두지 못하는 욕구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 남겨두지 못하는 욕구는 호기심이라고도 한다.
호기심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세가지 방법이 있다.
① 인간은 원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니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 남겨둔다. 다시 말해서 호기심을 자제한다.
② 호기심을 이성으로 해결한다. 누구나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도록 확인 과정을 통해 호기심을 해결한다.
③ 이성을 배제하고 그럴듯하다 또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을 믿어버린다. 즉 맹목적으로 믿음으로써 호기심을 해결하고 안정을 찾는다.
②번과 같이 호기심을 이성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전문적인 사람들을 가리켜 학자라고 한다.
호기심을 그냥 내버려 두거나 이성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호기심을 해결하는 정당한 방법이다.
그러나 ③번 같은 방법을 쓰는 것은 일상적으로는 정당한 방법이 아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호기심의 해결을 위해 ③번을 애용한다. 이러한 방법은 보통 어린 아이를 달래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린애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난 어떻게 생겨났어?", 그럼 엄마는 거짓말을 한다.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또는 "황새가 물어 왔어", "배꼽에서 나왔단다" 그러면 어린애는 어느정도 호기심이 해결된다. 일단 그럴듯하니까 말이다.
산타할아버지나 망태할아버지, 동화속 이야기 같은 것들은 아이들의 터져나오는 호기심을 제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어차피 알게 될 것들인데 일일히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3번은 어린 아이들이 호기심을 해결하는 방법인 셈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아이들이 호기심을 해결하는 방식을 버리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방식을 권장하고 자랑하기도 한다. 맹목적 믿음이 심할수록 높은 신앙으로 칭찬받으며 의심은 배격된다. 바로 이 이점이 기독교의 핵심이면서 위험한 점이기도 하다.
얼마전 인도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를 보자. 인도인들이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서쪽을 흔드셨다고 외치는 기독교인들은 "그랬으면 좋겠다" 또는 "그럴듯하다" 같은 것들을 맹목적 믿음으로 호기심을 해결했다. 고대인들이 천재지변을 신의 노함으로 해석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진화론이나 과학을 부정하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은 과학으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모든것을 초월하는 절대자가 못하는 일이 없다는 것만 믿으면 호기심을 느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학이 모든 것을 알기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기도 하다. 과학은 자연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풀기 위함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3번과 같은 호기심 해결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성경이란 책은 원래 어떻게든 갖다 붙이고 끼워 맞추기 좋게 되어 있으므로 모두들 자신의 입장에 맞게 성경을 해석해 놓았다. 모두 그럴 듯한 해석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부끄러워해야할 성서구절은 한두곳이 아니다.
안티바이블에서 지적했듯이, 신체적 불구자는 물론 생리중인 여자까지도 더럽다고 규정하여 자기의 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판정한 야훼, 다른 신(우상)을 경배하자고 꼬셨다고 해서 그 집안과 부족의 모든 어린아이까지도 한명도 남기지 말고 학살하라는 야훼의 명령과 같은 구약의 구절들은 말 할 나위도 없고 신약에서 바울의 문서는 또 어떤가?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가르쳐서도 안된다,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하라, 모든 세상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절대 복종하라, 그래야 너희가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노예는 하나님이 정하신 신분이니 주인에게 절대 충성하고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도망갈 생각을 포기하라는 등의 구절이 과연 수치스럽지 않은가?
기독인들은 그들이 필요한 문구만을 성경에서 빌어쓰지 안티기독교인들이 지적하는 추잡한 성경구절에 대해 그것은 비유다, 네가 예수를 믿지 않아서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말뿐이다.
혹시 매직아이를 기억하고 계시는가?
그건 제대로된 시각구조로는 숨겨진 그림을 못보고 눈을 피로하게 하고 사팔뜨기로 만들어야지 숨겨진 그림이 보이는 것이다.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건 저렇게 해석하건 누가 옳고 누가 틀린것인지 모른다. 왜냐면 각자의 해석구조 안에서는 모두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이 선택한 자들만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 또한 "그럴 듯한 해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만 옳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주장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많은 전제를 깔아 둔다. 그러나 그 전제를 왜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못한다.
기독교인들은 맹목적 믿음과 진정한 믿음이 구분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인들이 맹목적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나라의 현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 기독교가 심어준 잘못된 의식 / 분석가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준 데 대해 기독교는 쓸데 없는 죄의식과 어휘개념의 혼란, 전통문화 왜곡, 배타성과 분열성 등을 심어 주었다.
일단 '신'이라는 말부터 생각해보자.
흔히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단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대자연을 신이라고 보는 사람도 무신론자 취급을 당하니 말이다.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바로 '신'이 기독교적 신으로 개념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흑백논리이다.
분명 신은 절대자요 초월적인 존재다. 정작 신의 존재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문제다. 이는 어휘의 뜻을 조작하여 잘못된 고정 관념이 생긴 예이다.
기독교인들은 우리 민족이 기독교가 수입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죄악을 범했고 신의 뜻에 따르지 않고 신과의 교제, 교감을 끊은 채 죄악의 굴레 속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자 거짓된 믿음이다. 우리 민족은 신의 뜻에 순응하며 살아왔고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
이러한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하나님"이라는 고유어가 이미 신을 지칭하고 있었다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하늘의) 순리에 따르리.",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천인 공노할 일", "민심이 곧 천심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등 언어 생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과연 우리 민족이 신과의 교제를 끊었다고 할 수 있는가?
다만 절대자에 대해 알 수 없으므로 알지 못한다고 했을 뿐이다. 사실 알지 못하는 것은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죄'를 뒤집어 씌우니 적반하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절대자에 대하여 함부로 넘겨짚은 신성 모독죄를 범하고 있다. 이미 '신'에 교리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교리에 '신'을 맞추는 죄악을 범하고 있다. 삼위일체가 무엇인가? 인간들이 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왈가왈부한 것을 이론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신은 삼위일체 이론이라는 주형에 찍어 놓은 석고상이 되어버렸다.
"신 앞에서 겸손하라"는 말은 따지고 보면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 민족은 함부로 신에 대해서 안다고 떠든 적이 없다. 그저 하나님의 순리에 따를 뿐이었다. 이것이 신에 대한 겸손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기독교는 오히려 신과 우리 민족과의 교감을 방해하고 괴리시켰으며 이간질쳤다. 우리 민족이 마치 신과 담쌓고 지낸 것처럼 인식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저질 개신교인들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항상 샤머니즘이나 기복신앙 또는 우상숭배와 결부시키기를 좋아한다.(사실 이것들은 개신교인들이 더 좋아한다.)
개신교인들은 조선을 건국한 단군에 대해서도 부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건국자를 이토록 모독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속의 신화는 실제있었던 이야기로 철썩같이 믿으면서 말이다. 개신교도들은 말도 안 되는 우상숭배의 죄목을 뒤집어 씌워서 단군상 목도 자르고 제사에도 시비를 걸어댄다. 그들은 전통문화를 미신이나 우상숭배로 몰아 붙여서 전통문화와 우리 민족을 이질화시켰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상 숭배는 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발명해 낸 죄목일 뿐 우리 민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새로운 것이다. 마치 우상을 만들어서 우상 자체를 숭배한 것처럼 말하는 기독교인들의 말도 거짓이다. 우상을 세우되 숭배한 것은 그 본질이였기 때문이다. 그 본질이 우상 그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개신교 국가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은 자유의 여신에 대한 우상 숭배란 말인가? 단지 자유를 수호하고 축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했던 것이다.
만약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에 있지않고 서울시에 있었다면 이것역시 때려부수자고 난리를 부릴 것이다. 미국인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국이 개신교만큼 꽉막히지는 않았다.
제사에 대해 시비거는 기독교인을 보자. 제사가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인가? 엄밀하게 유교적으로 말하자면 제사는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예를 다하는 것에 왜 시비를 거는 것일까? 바로 미신 또는 우상숭배의 소지가 다분하다는 기독교인들의 지적 때문이다.
흔히 제사에 관련한 미신은 귀신이 찾아와서 제삿밥 먹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매우 부차적인 문제다. 이것은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나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사람도 보기 힘들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미신은 유교 사회의 선비들조차 믿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매우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뻥튀기했다. 거기에 귀신에게 절을 한 죄와 허례허식의 죄도 추가시켰다.
기독교는 "하나님", "하느님", '신' 등의 어휘 뿐만 아니라 신과의 교감과 교제조차 빼앗아 독점하고 있다. 게다가 "하나님과 멀어진 죄"까지 뒤집어 씌우고 있고 전통문화 속에서 갖가지 죄목을 날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독교가 심어준 잘못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독교를 안티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인에게 반대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안티는 기독교가 뿌린 잘못된 의식을 간파하고 분쇄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 기독교의 끝없는 궤변들 / 이철민
기독교인들의 모든논리는 순환논리속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기독교 교리의 모순은 또다른 모순을 무수히 낳게 되는데 그들의 궤변의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엉터리 불가지론
기독교에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기의 판단 능력으로는 진리를 알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불가지론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되면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신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전혀 근거가 없는 말도 않되는 가르침이라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우리 인간을 진리조차 판단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교리가 말하고 있는 주장의 전제에 의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불가지론이라는 교설에 의존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에는 신처럼 군림하는 '독재자'가 있다. 기독교의 독재자가 누구냐고? 바로 목회자 같은 사람들이다. 실로 기독교의 진리는 목회자들에게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불가지론, 실용주의, 상대주의 등과 같은 것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그들이 모두 진리에는 접근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안티바이블의 서론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런류의 주장의 예를 들어보자면, "이 우주는 우연히 존재할 확률이 아주낮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대우주와 만물의 심오한 법칙을 알수 없다."라는 주장등이 있겠다.
그러나 어리숙한 기독인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사실상 진리에 대한 불가해성에 대해서는 우리와 같은 안티기독교인들이 먼저 말해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인들은 "인간은 진리를 판단할 수 없다"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자신도 인간이면서 어떤 것이 진리인지 판단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증명할 수 없는 신을 믿는 것과 불가지론이라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 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히 알수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기독교의 신이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이해할수 없다.
단순히 도달 못할 극한의 개념은 아닐까? 일단 백번 양보해서 극한이라고 생각해보아도 그것은 말이 않된다. 왜일까? 기독교인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나누어 놓으면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신이라는 존재도 단순히 하나의 의견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진리를 포기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도 인간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도그마 역시 역시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지론을 앞세워서 "신의 이름은 야훼","신은 삼위일체이다","기독교를 안믿으면 지옥에 간다"라고 주장하는것에 얼마나 큰 오류가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진리를 천상에 올려 놓았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 진리란 인간의 손이 닫지 않는 곳에 놓이게 되었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하게 된 진리....이것이 기독교의 주장이다. 그래서 인간은 단지 진리를 받아 먹는 존재일 뿐 어떤 것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알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그런 행태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진리를 알수 없다면 신이 내려주는 진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들만의 착각일 뿐이다. 그들 자신도 인간이라는 것만은 분명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이라는 것도 공허한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이 어떤 하나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진리라고 믿으며 숭배하는 것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도 역시 인간이라면 인간의 힘으로 진리를 알수 없다는 말이 허구가 된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힘으로는 진리를 알수 없다"라는 주장을 했다는 것 부터가 어떤 확실한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힘으로는 진리를 알수 없다"라는 주장도 하나의 진리가 될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어떤 판단을 내릴수 있다는 것 부터가 이미 그 자신이 진리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 할수 있는 최소한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진리를 알수 없다라는 주장을 한다지만 이러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진리의 본질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힘으로 진리에 도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면 그러한 판단을 내릴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인을 알고 있다면 당연히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에 대해 의심하려고 들지 말라고 한다.
검증되어 있지 않은 진리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너무도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말은 그것이 아주 주관적인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 기독교인들이 진리라 믿고 있는 것은 객관성을 아주 배제해 버린 아주 주관적인 것일 뿐이다.
고작 그 정도 가치 밖에 없는 것을 두고 기독교인들은 진리라고 믿고 있는 셈이다.
(2)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기독교인들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임을 강조하여 신의 계시에 근거한 기독교를 따르라는 엉터리 철학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독교가 주장하고 있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라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불완전한 존재라고 여겨지는 가운데 절대적인 신의 계시라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이상한 현상'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불완전한 존재가 받아 들였던 '신의 계시'를 무엇이라고 평가해야 할까?
지금도 사기꾼들이 신의 계시임을 내세워 사기를 치는일이 종종있는데 기독교의 계시는 악마에 의한 계시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악마에 의한 계시와 구별한다.
그런데 이때 그들의 믿음에 신에 의한 계시와 악마에 의한 계시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그들에게 필요하게된다.
그런 구별을 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결국 여기에서 필연코 인간적인 판단력이 작용하게 된다.
결국 기독교에서는 스스로의 궤변속에 빠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또, '하나님의 뜻=정당성=절대성'이란 것이 한 집단이나 개인의 편리를 따라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즉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절대성에 기초한 그 정당성은 자기자신의 특수성에 입장에서 '내식대로'이해한 '절대자의 뜻'이란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기독교의 그 절대성과 정당성은 타종교와 상치될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또한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그 정당성에 기초하여 다른 이의 생각이 그르다거나 옳다고 말 할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과의 변증법적 대화를 통해 얻어진 나대로의 결론에 입각한 '나 스스로의' 결단, 정당성 임을 알야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의 그 정당성 및 여호와의 뜻은 인간의 제약이 들어간 불완전한 것임을 인식하고 그런 정당성을 절대적인것으로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절대자의 뜻을 함부로 말하기 전에 자기의 뜻을 마치 신의 뜻과 동일시 여기는 것이라는 생각은 자기 스스로를 우상화 하는 우라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잃어버린 진리에의 길을 되찾는 방법이 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겠지만, 목사의 말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주체로서 진리에 대한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 선후관계가 뒤바뀐 기독교인들 / 예수사냥
성경과 기독교교리의 온갖 모순과 비진실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이웃을 사랑하면 좋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해야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이다."
위와 같은 논리 전개를 비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일단 첫째로, 선후관계가 뒤바뀌어 있다는 것을 지적해 두고 싶다. 위와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 아닌 그들의 윤리관때문에 '이웃사랑'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기독교리에 바탕을 두고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관에 바탕을 두고 기독교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고 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미 가지고 있던 윤리관과 부합한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신성을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식의 선후관계 착오를 저지르던 일들을 심심찮게 보아 왔다. 페미니즘이나 환경운동을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간판으로 내세우는 일이 대표적인 일이다. 그들은 바이블과 기독교리 때문에 페미니즘과 환경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우기지만 거의 설득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바이블의 남녀차별구절과 장애인 비하등은 안티바이블에서 누누이 지적했으므로 이번에는 환경 운동만 들여다 보기로 하자. 환경오염과 공해가 현대만큼 심각하기도 훨씬 전에 불가나 도가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내용이 너무도 많다. 선후관계로 따져보아도 오늘날의 환경운동가들은 도가와 불가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떤가. 그들은 단지 시대의 조류에 편승했을 뿐이다.
또한 구약에서 나타나는 사악한 성경구절들(안티바이블에서 누누히 지적했으므로 생략하겟다)에 대해서, 그것이 성경의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외면한다.
즉, 그들은 이미 갖고있는 기본적인 윤리관에 의해 성경을 구분하고 편식하고 있는셈이다.
둘째로, 기독교는 과연 비기독교보다 더 훌륭한 덕성을 표상하여 왔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버트런드 러셀이 한 말을 인용하도록 한다.
"기독교는 정말 그 경쟁자나 반대자보다 더 훌륭한 덕성을 표상하여 왔는가? 나는 정직한 역사학도라면 어떻게 그렇게 주장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도 박해를 더 쉽사리 가하는 것이 특색으로 되어 왔다. 불교는 결코 박해를 가한 적이 없는 종교이다. 칼리프의 제국은 기독교 국가들이 유태교 민족이나 이슬람교 민족에게 대했던 것보다 훨씬 친절하게 그들을 대하였다. 이 제국은 유대인과 기독교 민족들이 공물만 바치면 괴롭히지 않았다. 반셈족주의는 로마제국이 기독교화하던 순간부터 기독교에 의하여 촉진되었다. 십자군의 신앙적 열정은 유대인 학살로 나타났다. 드레퓌스를 부당하게 고발한 것은 기독교도들이었으며, 그를 복권시킨 것은 자유사상가들이었다. ........... 기독교가 도덕성을 향상시켰다는 주장은 오직 역사적 증거를 덮어놓고 무시하거나 날조함으로써만 유지할 수 있다."
● 악성 전염병 기독병.......예방만이 있을뿐! / 분석가
기독교인란 전염 병은 일단 전염력이 무섭다. 우리나라 전역을 교회로 뒤덮고 있는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동네에 하나라도 과분한데 자그마치 수십개의 교회가 상주해 있다.
더 무서운 것은 한번 이 전염 병에 걸리면 치유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안티들 중에는 이 병에서 극적으로 치유된 사람들이 꽤 있겠지만 그 병으로 인해 받았던 스트레스, 정력 낭비는 돈으로도 보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전염 병이 인체에 끼치는 해악의 과정과 특징에 대해서 오랜 세월 동안 연구해 보았다. 이 연구로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기독병(이하 기독병이다)은 사후 치료보다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선 인체가 기독병에 걸리는 과정과 특성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① 공포 조성으로 이성의 마비 또는 괴멸
믿지 않으면 지옥 또는 심판 이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막가는 벌이 내려진다고 위협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들은 너무 무서운 나머지 호기심이나 의구심이 마비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마음이 약한 성인에게서도 많이 나타난다. 그들은 천벌이 두려운 나머지 성경의 오류를 계속 외면하고 이성을 마비시키도록 자신을 세뇌시킨다. 그런 다음 '악마의 유혹을 뿌리쳤어!'하고 안심을 한다. 기독병의 공포감 조성은 기독병만의 강력한 무기이다. 이 무기만 제거하면 사실 기독병은 이빨빠진 호랑이다. 안 믿어도 지옥안가는 데 왜 기독병에 걸리겠는가?
만일 기독병 전염사들이 단지 '이웃 사랑'과 '평화'를 외친다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독병에 걸려있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병 전염사들은 항상 불신지옥 예수천국을 신나게 외쳐대지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을 외치지는 않는다.
기독병의 무서운 점은 공포분위기 조성이라는 '채찍' 뿐만 아니라 '믿으면 구원받는다'라는 회유책을 쓴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후 세계가 너무 두려운 사람들은 이 얘기를 듣고 제발로 기독병에 걸리는 경우도 많다.
② 자아도취
기독병에 걸린 사람들은 적어도 기독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주입된다. 마치 정신병 환자가 정상인에게 미쳤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기독병 환자들은 대부분 정상인들을 한심하거나 불쌍하게 생각한다. 왜 자기처럼 병에 걸리지 않는 지 매우 답답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병환자들은 정상인을 가리켜 이교도 또는 불신자라 부른다.
휴거파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은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 재림과 휴거를 안믿는 사람이 너무 불쌍하고 답답해요. 성경을 읽으세요"
정상인들이 성경의 오류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면 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성경을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군요. 한번이라도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영적으로 만나보세요.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될거예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환자들은 자신들이 진리로 인해 자유로운 인간인 줄 안다)
결국 신을 믿건 안믿건 한낱 자의적 선택의 문제인데도 환자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었고 정상인은 잘못 읽었다는, 자신들은 영적으로 사물을 보는 눈이 있다는, 자신은 진리로 인해 자유롭다는 등의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들은 이 우월감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았고 자신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집단 자아 도취에 빠지게 된다. 또한 오류 투성이 성경 을 제멋대로 해석해 놓고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행세한다. 그리고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둥 영감을 받았다는 둥 하며 신을 마구 사칭해댄다. 소위 선지자라고 불리는 환자들은 이 자아도취가 극에 달한 환자라 하겠다.
③ x고집
기독병 x고집은 황소 고집 저리 가라다. 기독병 환자를 설득시키는 일은 팥으로 메주를 쑤는 일보다 더 황당한 일이다. 환자들은 '성경이 진리가 아닌것 같다.', '야훼가 전지전능은 아닌것 같다' 라는 말만 들어도 신성모독이니 성경모독이니 악마니 사탄이니 하며 공격성을 띠어 오히려 말한 사람이 죄송스러울 정도가 된다. 이 완강한 x고집에 오히려 압도되어 전염되는 사람들도 많다. 환자들은 야훼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성경이 티끌만큼의 오류가 있다거나 하는 가정조차 하지 않는다.
기독병 x고집은 오늘날 기독병이 수많은 변종들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는 데에서도 입증된다. 왜냐면 환자들간의 의견대립은 곧 변종의 생성(종파의 나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대화로 의견을 나눌 생각이 없다.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독병균을 어떻게하면 상대방에게 주입시킬까를 고민할 뿐이다. 완강한 x꼬집끼리 티격태격하다가 끝내 갈라서게 된다. 그래서 기독병의 변종만 2000종이 넘는다고 한다.
④ 폭력성
내가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 겠지만 대충 말해보겠다. 기독병 환자의 잔인한 만행들은.. 청교도의 인디언 학살은 말할 것도 없고 칼뱅이라는 환자는 교회 한번 참석 안했다고 처형을 일삼은 환자이다. 루터? 농민 봉기를 개 돼지 때려 잡듯 해야 한다고 주장한 환자이다. 한국 기독병환자? 불상 단군상 눈도려내기 목자르기, 사찰 방화 등의 막가는 폭력성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참고로 한국에서 개신교가 아닌 다른종교인 중에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거의 없다. 조계종 폭력 사태에서 스님들끼리 옆차기하는 장면이 있었긴 하지만 기독교의 만행에 비하면 귀여울 정도다.
기독병의 가장 좋은 예방책은 겸손과 솔직함이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다양한 서적을 읽어 보고 탐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모른다면 모른다고 하고 이해가 안가면 이해가 안간다고 해야지 자기만이 깨달았다거나 영적인 체험을 했다거나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헛 소리를 해서는 안된다. 한번 솔직함을 잃어버리면 계속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말을 하게 됨에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 아퀴나스의 비의도적인 삽질 / 몰러
'철학자적 신학자', '천사 같은 학자'로 불리워지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끄회 수도사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문하에서 공부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영향을 존중할 만한 것으로 만들었고, 궁극적으로는 성공한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방인이면서도 성인과 동등하게 추앙 받고 있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들 때문에 연옥이라는 개념이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하여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퀴나스는 모든 분야의 지식을 하나의 완벽한 체제로 구성하려고 하였다.
아퀴나스의 중요한 두 개의 저술은 “이교도를 논박하는 대전”과 “신학대전”인데, 여기에서 그는 충분한 체계에 손을 대었고 그것은 나중에 교회의 공인된 철학이 되었다. 그의 체계의 핵심에는 “자연신학”과 “계시신학”간의 구분이 있었다. 자연신학은 이성의 활동과 감각 경험으로부터 나오며, 후자는 신앙과 신적인 우아함과 성경으로부터 온다. 스타일이 다른 두 신학은 “신에 대한 이해”라는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퀴나스가 분리된 영역이라고 본 것이 지닌 중복성 때문에 나중에는 그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큰 문제가 발생했고 이것은 그의 후배들(스콜라주의자)을 끊임없이 괴롭힌 문제가 되고 말았다. 아퀴나스는 무의식중에 그의 체계주의로써 신과 세계, 지식과 실재, 신앙과 이성의 확립된 동일성이라는 바위에 균열을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나중에 윌리엄 오브 오캄은 이 균열에 쐐기를 박았고,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은 물을 부었으며, 결국 이후의 철학자들이 서로 논박을 하는 도중에 몇 사람이 해머로 내려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퀴나스의 철학사적 의의와 영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믿음과 이성의 관계는 동일성에서 시작하였으나, 아퀴나스가 이성으로도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한 다음, 스콜라파들이 장황하게 이를 논증하기 시작했고, 결국 결론이 나지 않는 가운데 오캄에 의해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아퀴나스가 시도한 신의 존재증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그 전에 아퀴나스가 허접한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을 깨버린 것도 기억하자. 이 존재론적 증명은 아직도 개독먹사들에 의해서 제기되는 아주 웃기는 논리이다.
안셀무스의 증명
“신은 가장 위대한 사유의 대상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것과 아주 똑같은 그 밖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보다 위대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보다 위대한 어떤 것, 즉 ‘존재하는’ 하나의 신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보다 위대한 신에 대한 생각을 품을 수 있는 까닭에, 신 자체는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경을 경우에는 더욱 위대한 것을 우리가 상상하게 될 터이므로, 그러니까 신은 존재한다.”
아퀴나스의 반박
“일단 더 이상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존재로서의 신에 대한 생각을 일반화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의 본질에 대한 지식은 인간 이성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며, 그 대신에 감각경험에 의존하는 것이다. 신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함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증명은 개념에서 존재로, 관념에서 사실로 비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반박을 조금 더 쉽게 표현하면 우리가 유니콘이나 청룡과 여의주를 상상하지만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란 말과 같다.
작금의 기독교인들은 아퀴나스의 반박의 배경도 모르고 목적도 모른 체 악용한다. 신의 본질은 이성보다 감각 경험에 의존한다는 말을 완전히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꿈을 꾸었거나 환각, 환청을 감각경험이라고 우기면서 하나님을 영접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사기꾼들의 수금잔치인 각종 부흥회장에서 쇼를 하는 약장수와 무면허 의사들의 대갈통에 벼락이 내리기를 신께 기도한다.
아퀴나스는 논리와 이성으로써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그의 삽질과 되삽질을 함께 적는다.
① 변화로부터의 증명 : 변화는 어디에서나 이루어진다. 누군가가 그런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Unmoved Mover와 같은 신이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먼저 부동의 동자(절대적 기준/원점을 가진 존재로서 법칙부여자인 셈인데, 실은 여기부터 문제가 생긴다.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이 괜히 나왔나? 세상은 가만히 있고 신이 뺑이치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어찌되었든 일단은 인정하고 넘어가자)가 무엇인지부터 정의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라는 것은 질료(예를 들어 대리석)와 형상(설계도, 회화 따위)이 합쳐진 것(대리석으로 된 다비드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변화는 실체의 현실태와 잠세태의 차이라고 하며, 실체는 그 안에 현실적인 것이 될 성질들을 잠재적으로 가진 것이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휘발유는 가연성을 지녔다고 할 때, 휘발유가 탈 수 있는 잠재성이 휘발유에 내재하고 있지만 그 잠재성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성냥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정리하면, 변화(휘발유가 불에 탐)를 일으키는 요인(성냥에 불을 붙여 휘발유에 던진 사람)이 바로 인과관계 부여자이다.
이 인과성 이론을 확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의 원인을 들고 있다. 예를 들어 절벽 위에 있다가 떨어지는 돌로써 설명하면, 돌 자체(→질료인), 돌이 있는 땅과 절벽의 형세(→형상인), 돌을 미는 것(→운동인), 돌이 낮은 곳으로 가려는 성질(중력과는 다른 개념이다) 또는 돌을 밀려는 욕망(→목적인)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목적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갈릴레이가 등장할 때까지 물리학의 발전을 가로막은 사상이었다.
현대의 인과관계 해석은 운동인만 고려되고 있다. 목적인은 목적이라는 개념 속에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이나 목적론과 관련된 해석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모든 사물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목적인은 부동의 동자이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부동의 동자를 신 또는 하나님이라고 증명하려는 것이다.
아직도 몰러가 뭔소리를 하려는지 파악이 안 되는 이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아퀴나스는 먼저, 부동의 동자 이외의 인과관계 부여자(또는 변화 유발자)를 무시하고 있으며, 변화는 인과관계 부여자의 행동에 따라 생긴 것이지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님을 잊은 것이다. 결국 아퀴나스가 말한 부동의 동자와 같은 신은 다음에 다룰 제1원인과 비슷한 것이 되어버린다. 아퀴나스의 부동의 동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부동의 동자와는 그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
한편, 다른 방법으로 반박해 보자. 원자 내에서 일어나는 개별 양자들의 변화는 누가(또는 무엇이) 어떻게 일으키는가? 확정되지 않는 양자들의 변화(움직임)에 의해 어떻게 원자/분자가 형성되고 생물이 형성되고 우주선이 형성되는가? 즉 누가 어떻게 질서 있도록 변화시켰느냐는 말이다. 여기에서 기독교인들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그랬다고 답변할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와 양자론을 이해하지 못하니 저런 대답만 나올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 “변화요인이 없어도 변화하는 것이 있다. 이런 변화에 있어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는 구경꾼일 뿐이며 아무 것도 행사하지 못한다. 즉 Unmover가 되어버린다.”
② 인과관계로부터의 증명 : 누가 원인을 일으키는가? 스스로는 인과에 얽매이지 않는 “제1원인”이 있는가? 나는 있다고 본다.
위 말은 이 세상 만물과 모든 현상에는 모두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을 계속 캐어 들어가면 최초의 원인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최초의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신이라는 주장이다.
우선 쉽게 반박하자면 버트런드 러셀이 말한 대로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고, 어떤 것(하나님)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다른 것도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최초원인 또는 시초가 존재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필연성이 없다.
반대로 절대 있을 수는 없지만 최초원인이 있다고 치자. 그 최초원인은 이 세상 안에 있는가? 아니면 바깥에 있는가?(차원, 우주, 시공간 등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최초원인이 존재하는 곳은 표현할 수가 없으므로 편의상 “세상”이라고 하였다.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와 같은 세상을 공유하거나 같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뜻이고 바깥은 우리와 다른 세상에 있으면서 우리 세상의 원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또 최초원인은 형상인가? 움직임인가? 의지인가? 존재인가? 존재라고 한다면 actor 또는 controller인가? 아니면 bystander인가?
이 모든 물음들에 대하여 아무 것도 답할 수 없다. 어떻게 답을 하더라도 “최초원인”은 그 이전 다른 원인의 내포를 부정하지 못하므로 모순이 되고 만다.
반박 같지 않은 반박 같지만 더 간단하고 가장 유용한 것은 이것이다.
“그 최초원인이 여호와라는 증거 있어?”
③ 우연성으로부터의 증명 : 우리는 자연에 있어서 우연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우리는 이렇게 짐작한다. 우연성을 뛰어 넘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라고...
먼저 언급해야될 것이 있다. 이 세상은 예정된 수순에 따라 흘러가는가? 아니면 우연의 종합인가? 아퀴나스는 우연성으로부터 필연을 이끌어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체 속에 지니고 있지 못하지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체에 지닌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있는 자”와 비슷한 개념이다.
자연 또는 세상의 우연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우연을 조정하는 절대적 존재가 있다고 해 버리면, “조정한다”는 말을 하는 순간 우연이 아니게 되며, 곧 필연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아퀴나스의 논증은 우연성이란 것 자체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로 수정이 되어야 한다.
“자연은 우연성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실은 절대적 존재가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뉴턴, 라이프니쯔, 데카르트가 등장하면서 자연법칙론으로 발전한다. 태양계만 하더라도 일정한 중력의 법칙 등에 따라 행성들이 운행하고 있음을 볼 때, 이 세상은 모두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확장하면 절대적 존재의 계획과 의도에 따라 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고 설명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으며 과학이 발전하면 세세한 모든 운동에 대하여 설명이 가능해지고 종국에는 절대적 존재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뉴턴이 호언장담했던 예정설을 기독교는 이렇게 잘도 우려먹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렇게 우겨대다가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오면 갑자기 입장을 바꾸어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이 인간의 대체적인 속성이다. 기독교는 그러한 인간속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절대적 진리라고? 천동설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한 것은 인간이 저지른 한 때의 실수였다고?
200년 넘게 세상을 지배한 칼테지안-뉴터니안(데카르트적이고 뉴턴적인) 패러다임은 원자의 구조와 운동을 설명하는 단계에 이르러 붕괴하게 된다. 불확정성의 원리, 양자론 등은 최초발견자가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발견된 것이다(양자론의 기초 개념을 발견한 플랑크는 자신의 발견을 거부했다). 세상은 절대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연이 종합되어 그 결과가 통계적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이 혁신적 개념은 활활 타오르던 예정설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파악할 수 없다는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이는 명제에서 파생된 불확정성의 원리는 뉴턴을 박물관으로 보낼뻔 했다. 하지만 뉴턴의 바탕 없이 상대성이론이나 양자론도 설 수 없기에, 그리고 실생활에서는 훨씬 유용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뉴턴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뉴턴의 법칙들은 v가 C에 비해 턱없이 작고, 또 우리가 임의로 기준을 잡을 수 있을 때만 유용하다는 점을 명심하자.
잠시 옆으로 샜다. 하여간 이 세상은 총체적으로는 여전히 우연하게 움직이고 있다. 총체적 우연을 뛰어 넘는 절대적 존재, 즉 The Controller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자연법칙이란 것은 존재한다. 하지만 법칙이 존재한다고 해서 법칙부여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칙은 자연이 움직이는 방법을 표현한 것이지 자연이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결국 법칙부여자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오류되겠다.
아래 제 5항과 중복되는 반박이지만 우연성을 넘는 존재란 법칙부여자라고 우기는 종자들 때문에 여기서도 언급할 수밖에 없다.
④ 우월성의 정도로부터의 증명 : 우리는 자연에 우월성의 정도가 있음을 안다. 이런 생각은 완전성의 개념을 함축하는데, 이 개념은 차례로 우리가 완전한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아퀴나스가 스스로 뭉개버렸던 존재론적 증명과 제1원인론의 방법을 짬뽕하여 답습한 것이다. 자연 자체는 우월하다거나 열등함을 따질 대상이 아니므로 자연에 우월성이 있다는 개념 자체가 문제가 되지만 일단 그렇다고 쳐도 여기에서 완전성의 개념을 도출하는 것은 억지되겠다. 그냥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라고 우기는 것이 차라리 귀엽기나 하다.
또 완전한 존재가 있다고 쳐주자. 그렇다고 해도 그 완전한 존재가 기독교의 여호와라는 것역시 증거할 수가 없다.
⑤ 조화로부터의 증명 : 우리는 어디에서나 적응과 일치가 있음을 보게 된다. 물고기는 헤엄을 쳐야 하기 때문에 지느러미와 꼬리가 있으며, 개는 뼈다귀를 갉아먹어야 하기 때문에 억센 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순전한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계획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후자를 지지한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창조주의를 주장할 때의 바탕이 되기도 하는 증명법이다. 목적론과 의장론이 믹싱된 이 주장은 당시의 과학적 지식에 비추어 볼 때 한번쯤 생각해 봄직한 것이지만, 오늘날까지도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놀랍다. “콧구멍이 아래쪽을 향한 이유는 비가 들이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라고 하는 진술이 이 사람들에게는 개그가 아닌 모양이다. 코의 모양은 안경을 걸치기 좋게, 귀의 모양은 헤드폰 끼기에 좋게 만들어졌다고 주장할 인간들이다.
적응과 일치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쩌다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적응이라는 것은 우연이나 계획을 따질 성질이 아니다.
하지만 또 양보해서 적응이 목적(계획)의 증거라 치자.
그럼 계획자가 여호와라는 증거는 없다는 반박부터 시작하자. 이 세상은 완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안하다. 적응과 일치보다는 결함이 더 많은 세상이다.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기도하고 있지 않는가? 죄 많은 세상에서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기독교인들이여, 하나님이 계획자가 아니라고 인정하겠는가? 아니면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인정하겠는가? 둘 다 인정할 수 없다면 기독교인들은 나찌를 인정하는 것이며, 공산주의를 인정하는 것이며, 골수 KKK단 단원이 될 소질이 있는 것이다.
한번 다르게 생각해보자. 적응이 계획의 결과라면, 그럼 부적응은 계획의 실패인가? 아니면 부적응 자체가 계획이었는가?
말장난으로 들리는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이 조화로부터의 증명은 바로 다른 증명들을 부정하는 것이란 말이다. 위에서처럼 몰러가 뺑이치는 일이 없이 이 항목에 대한 반박과 부정만으로도 아퀴나스의 다른 증명들을 부정할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Unmoved Mover는 없었고, 제1원인은 이후에 삑싸리만 거듭했으며, 절대적 존재는 우연성을 뛰어넘지 못했으며, 절대 우월한 완전한 존재도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아퀴나스는 이교도(그리고 무신론자)들을 잠시 논박할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잠재우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체계주의는 믿음과 이성의 동일성을 스스로 부정하게 만듦으로써 그가 이룩하고자 했던 신학과 철학의 결합(실재로는 철학이 신학에 종속)을 오히려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을 직시한다면 교황청은 아퀴나스에게 부여한 성인의 지위를 박탈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불가지론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퀴나스의 증명을 부정했다고 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에게는 여전히 신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여호와가 창조주가 아니며, 절대적 기준으로서의 존재도 아니고, 전지전능하지도 않으며, 절대선이나 절대악도 아니다. 그냥 유대인들이 원했던 배타적인 고대잡신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