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의 경기도 연천 횡산리 유적을 통해 석촌동 적석총 고분에 대한 상향 연대로의 조정에 더 큰 탄력이 붙어야 하고 붙을 것으로 보입니다
-횡산리적석총은 남북 58m, 동서(이상 기저부) 28m, 높이 3.5~5.8m인 남한 최대의 무기단식적석총이다. 윗부분도 남북 48m, 동서 12m. 기원 전후 백제 건국 시기로 추정. 혹 그 이상으로..-
석촌동고분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 61-6 위치한 유적으로 주변에는
아차산성, 몽촌산성등의 방어 산성과 평지에 풍납토성및 방이동고분과 더불어 한성백제시기(BC18~AD475)의 초기 시대 고분입니다. 이곳에는 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적석총 양식의 백제 무덤(기단식 돌무지무덤) 뿐 아니라 마한 토착세력의 수장급무덤(즙석봉토분) 및 일반 백성들의 무덤(옹관묘, 토광묘), 화장유구, 기타 석곽묘 등 여러 형태의 무덤들과 부장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한성백제시기에 신진, 토착 세력들이 함께하는 시대상을 알수 있는 중요 유적입니다.
http://blog.naver.com/ssipwon?Redirect=Log&logNo=80092751413 => 석촌동 고분 사진
1916년 일제에 의해 조사되어 처음 소개되면서 조선총독부의 촉탁이었던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조사된 바에 의하면 이곳에 적석총66기가 있었고, 토총22기가 주로 석촌동의 남쪽 및 동쪽에 군집 혹은 산재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무분별한 개발과 더불어 상당한 고분들이 유실 손상을 입는 상태입니다.
석촌동의 기단식 적석총 고분의 축조시기는 1970-80년대에 이들 적석총 발굴에 참여한 임영진 현 전남대 교수가 1995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백제한성시대고분연 구'에서 주창한 이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한국고고학사전」은 "(축조연대의 경우) 상한 연대는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475년 공주 천도 이후 적석묘는 더 이상 축조되지 않고 석실분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고 기술하며 통설처럼 펴졌습니다.
물론 몽촌 토성 발굴전에 풍납토성이 더 상향의 연대 가능성들이 나왔지만 이병도 이후 김원룡 교수마저 사성으로 치부하며 등한시 훼손되는 가운데
몽촌토성이 본격적 발굴을 시작하면서 백제왕 왕성(王城)으로 추정하였고 몽촌토성의 축조 연대를 기준으로 하여 왕성의 축조시기가 3세기 중.후반 이후로 추정하면서 그 왕성에서 살았을 왕들의 무덤은 당연히 그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결론하에 석촌동의 적석총 무덤은 3세기 중 후한 이전으로 상향될수 없다는 주장이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풍납토성의 축조 연대가 백제 초기 건국 연대와 맞물리면서 석촌동 고분에 대한 연대상의 상향 조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몇년전부터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석촌동1호분은 상층부위가 상당히 훼손되어 있지만 남분이 결합된 쌍분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남북분 사이의 격리된 3.7m 공간에는 점토로 메워져 있으며 북분을 먼저 쌓고 남분을 쌓은 것으로 보이며 환인현 고력묘자촌의 이음식 적석총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고력묘자촌15호분과도 유사한 구조입니다.
특히 주목해서 봐야할 것은 귀이개 모양 은제품이 출토뿐 아니라 <남분과 북분을 잇는 점토 판축부 동쪽 끝에서 풍납동 토기와 연결되는 토기 바닥편이 출토되었다.>
- 풍납토성의 풍납동식 토기는 -<풍납동무문토기와 풍납토성 연대>를 참조- 기원전 2세기 전후의 토기로 기원후의 연질 타날문 토기가 본격화 될때 급격히 소멸하는 특징의 토기입니다.-
석촌동 제3호 적석총 무덤이 이번에 횡산리 유적의 적석총과 견줄수 있는 실제 더 큰 크기의 적석총양식입니다.
3호분은 방형(또는 장방형)의 단축적석총(段築積石塚)이고, 3단까지 남아있는 각 단의 높이는 0.7∼0.8m, 폭 4∼4.2m이다. 남북 길이 43.7m, 동서 길이 55.5m, 그리고 높이가 약 4.5m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훼손으로 거의 절반이 망가졌음-
고구려의 전형적 무덤 양식인 이런 적석총은 집안에 1만여기가 분포되어 있고 동방의 피라미드라는 일명 장군총의 높이에는 못미치지만 평면 면적에서는 능가하는 크기입니다.
장군총은 7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1100여개를 쌓아올려 총 높이는 13.1m, 한 변의 거리는 31.58m이며 그 중 가장 큰 돌은 높이 5.7m, 폭 1.12m, 두께 1.10m로 약 32톤되는 크기입니다.
http://myhome.shinbiro.com/~kbyon/pyramid/kzangkun.htm => 고구려 적석총-장군총
고조선 문명지인 요하 일대의 선시대 즉 기원전 4500년까지 올라가는 요령성 서부의 홍산문화(발해문명)에서도 이미 100여미터에 달하는 적석총 양식및 고인돌의 원형을 볼수 있는 석관묘등이 함께 출토되고 있으며 이것은 요동의 길림성 통화현 여명문명에서 발견된 홍산문화(발해문명) 만기(BC3500 - 3000년) 우하량 유적에서 발견된 제단, 신전등과 연장선상에서 이후 고구려의 집안과 남부에까지 이어져 오는 양식입니다.
그리고 고구려 장군총부터 석촌동 적석총 위에는 기와들이 함께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어떤 건축물을 일종의 능묘 위에 세우는 사당 (陵上廟)과 같은 성격의 이른바 향당 (享堂)으로 추정하고 있어 역시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인 시설로서 옛날에 동이민족이 세운 나라에서 유행하던 묘제와 유사한 모습의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석촌동 고분에서도 4세기니 3세기니 하는 이면에는 기원전 18년에 건국하며 기원전후로 해서 왕국으로 성장하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불신과 함께 삼국지의 한전을 기반으로 하는 원삼국 혹은 삼한론 같은 소국 난립 소국 연맹체 수준의 정치력의 인식과 맞물린 측면이 크다 하겠습니다.>
실제 일제시대의 일본학자들의 인식에서 3세기 이전까지의 우리 역사의 미개적 시기로의 인식은 섬나라에서의 야요이 시대 하한선인 3세기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식민지 속국 주제에 너희 역사는 최소한 우리를 넘지 못한다. 우리에게 없기에 너희에게 있을수 없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상하고 해괴한 논리입니다.
여담으로 신라의 초대형크기인 장창(長倉)이라는 건축물이 있습니다.
남북국 시대가 되기 전 즉 신라 전성기 이전의 663년에 지어진 건물인데
107m*23m의 대형 고상식 건물입니다. 삼국 유사에 이런 관련 기록이 있음에도
믿을수 없다 혹은 오사카 창고군 유적같은 여러개의 건물이 붙어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일본학자들은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에게 없으니 우리에게 있을수 없다라는 시각과 논리의 출발이죠.
이게 당시의 역사관이였고 기반이였으며 이런 역사관에 국내에서 별 의문없이 열심히 추종하는 세력들이 존재하는 속에서 최근에 나름의 성과들이 나오는 모습에 새로운 감회들이 느껴지곤 합니다.
남한서 가장 큰 적석총 확인
첫댓글 횡산리적석총은 발굴전부터 연구자들 사이에서 관심을 끌었던 유적입니다. 참여한 지도위원들도 적석총관련 논고를 하나라도 썼다면 다 참여하였다고 하더군요. . 그런데 역사님이나 보도자료처럼 지도위원회의 약보고서 자료를 보면 신통한것이 나오지 않아 어쩌나 싶습니다. 발굴결과는 기대와는 달리 매장주체부조차 확인되지 않아 일부 연구자는 자연제방이라고 까지 하나 봅니다만 적석총일 개연성이 더 큽니다.
역사님이 언급한 중에 홍산문화의 적석총이 고구려 적석총과 연결된다는 말은 무엇에 근거하는지 모르겠군요. 근거는 있나 모르겠습니다. 신석기문화인 홍산문화와 고구려가 어떤 계통적인 연관성이 보이는지?? 단지 돌로 쌓은 무덤이라는 적석총이라는 단어가 같은것때문에 연관지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요.
역사님에게 횡산리적석총과 관련하여 자료소개를 드리오니 검토해보시면 위와같은 적석총이해보다는 진일보 할듯 싶습니다. 기전매장문화재 연구원의 학곡리 적석총과 충주댐수몰지구 종합발굴보고서중 배기동선생의 발굴을 (지명은 기억이 가물거려서)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위 두 발굴보고는 횡산리적석총과 형태상 유사하며 유구의 위치도 유사하고 출토토기들도 학곡리와 횡산리는 비슷한듯 합니다. 차이는 위 두발굴결과의 경우 매장주체부가 도면상 희미하게 나마 확인되나(묘곽이 적석이므로 확인 어려움) 이번 횡산리는 이렇다할만한 매장주체부가 확인되지 않아 일부 연구자는 적석총이 아니라고까지 단언까지 하더군요
홍산문화의 적석총이 고구려 적석총과 연결된다는 말은 무엇에 근거하는지 모르겠군요. 근거는 있나 모르겠습니다. 신석기문화인 홍산문화와 고구려가 어떤 계통적인 연관성이 보이는지??>??? 아니라는 근거로 말하려는가요?? 그런 말의 견해가 무엇인지 먼저 묻고 싶군요. 횡산리자료는 아래 여휘님이 제시한것 이상의 것이 있는가요??
지도위원들이 유구를 보고 언급한 내용은 여휘님의 자료에는 없습니다.그리고 홍산문화와 고구려가 연관된다고 말한 사람은 역사님입니다. 이에 대하여 역사님에게 그 근거가 무엇인지 질의한것입니다. 역사님은 근거없이 주장하는 분은 아닐듯한데, 이런식의 반문을 어찌 해석하여야 할까요. 그저 근거가 없거나 모르거나 둘중에 하나인가요.어떤 주장을 할때 나름대로 자기생각과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역사관련글이 정치선언문도 아니고 그저 내생각에 이렇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습니까!!!
역사님이 언급한 중에 홍산문화의 적석총이 고구려 적석총과 연결된다는 말은 무엇에 근거하는지 모르겠군요. 근거는 있나 모르겠습니다. 신석기문화인 홍산문화와 고구려가 어떤 계통적인 연관성이 보이는지?? 단지 돌로 쌓은 무덤이라는 적석총이라는 단어가 같은것때문에 연관지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요. >??? 님은 서북한 일대의 목곽묘를 보고는 그게 고조선이 발명한 것인가요?? 이런 단순한 질문의 상반되는 사고를 하고는 ... 저런식의 말솜씨를 발휘하니?? 우선 남의 말에 꼬집어 보고 시작하자는 말인가요?? 또 버릇 나오는군요.쯧 홍산일대의 적석총 양식이 고구려와 석촌동 고분으로 흐르는 일련의 양식과 상반된다는 말인가요???
정말 토론을 하고 싶다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견해를 풀고 대화를 할것이며 겉에서 조금씩 간보듯이 본인식의 질문과 본인식의 답변 정리의 자세는 정말 안좋아 보이군요. 앞서도 매번 그러하더니.. 구체적인 견해를 풀기 바랍니다.
역사님 스스로 말한것에 대하여 질의한것 뿐인데 비꼬운것으로 보다니 스스로 자문자답해보시기 바랍니다. 가장이른시기의 신석기문화인 홍산문화와 고구려의 적석총사이를 뜬구름 잡듯이 말하는 습관을 버려야 되겠죠. 정치선언문도 아니고 말입니다.
정치 선언문>?? 풋.. 토론할 내용이 없다면 불필요한 댓글은 삼가. 이만.
요새 두분의 댓글을 보다보면 역사토론인지 서로에 대한 비아냥인지 구분이 안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시는게 여러모로 염려가되는군요. 차후에는 되도록 서로간에 이런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나가다..님께서 정치선언문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불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신석기시대 홍산문화의 적석총과 고구려 적석총과의 연결관계에 대한 의문을 표시한 것은 합당하다고 봅니다.
교란된 흔적조차 없다는 건 적석총이 아니라는 증거군요. 게다가 지표면을 제외하면 그냥 생토인데....무덤은 확실이 아니군요..... 고고학적 상식으로는 횡산리 적석총은 유적이 아니고 자연제방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