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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the Show
By Elliott Kalb
They say you always remember your first time -- especially your first time in the NBA Playoffs
‘첫 경험’은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것 – NBA 플레이옾 첫 경험도 마찬가지.
(역주) 2007년 플레이옾스는 르브론 제임스의 도약으로 화제가 만발한 기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출신의 4년차 선수가 팀을 폭풍과 같이 이끌며, 젊은 클리블랜드 팀을 NBA 파이널까지 진출시켰으니까요.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옾 경험은 어떠했을까요 – 특히 그들의 첫 플레이옾에서의 성적은? 현 NBA 스타선수들과 은퇴한 몇몇 레전드급 선수들의 첫 플레이옾 시리즈를 탐문해 보겠습니다.
5인의 현역 선수
Dwyane Wade in 2004: In 2004, the Miami Heat returned to the postseason after a two-year absence, led by the rookie guard. Wade, in his first postseason game, hit a running jumper with 1.3 seconds remaining to break a tie with the Hornets and give the Heat their first postseason victory in nearly four years. Wade had 21 points in his postseason debut, including 15 in the second half. Although the Heat would win that series in seven games, Wade shot only 5-for-8 from the floor in the seventh game, and averaged only 15.4 points on 42 percent shooting. In the next round, Wade would average 21 points per game on 49 percent shooting against the Indiana Pacers, but his Heat would lose that series in six games.
드웨인 웨이드 (2004) – 2004년, 3년만에 마이애미 히트는 플레이옾에 출전을 하게 됐다. 그들의 리더는 루키 가드, 드웨인 웨이드. 생애 첫 번째 플레이옾 경기인 호넷츠와의 일전에서 웨이드는 게임종료 1.3초를 남긴 동점 상황에서 결승골을 터뜨리고, 팀에게 4년만의 첫 플레이옾 승리를 선사했다. 생애 첫 플레이옾 경기에서 이 루키는 21점 (후반에만 15점)을 득점한 것이다. 히트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시리즈를 잡아냈고, 웨이드는 시리즈 평균이 15.4점에 42% 야투율에 그쳤지만, 다음 라운드인 인디애나와의 경기에서는 평균 21점에 49%의 슛률을 기록하며 분전했다. 히트는 6차전에서 페이서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Tony Parker in 2002: Parker’s rookie campaign was 2002, and during the regular season he averaged 9.2 points in 15 minutes of action. But those numbers would increase in the postseason. In the first round, the Spurs handled the Sonics 3-2, winning the fifth and deciding game by 23 points. Parker averaged 17.2 points per game in his first playoff series. The numbers don’t do justice to Parker’s performance. Parker was matched against Gary Payton. Payton was selected on the All-Defensive Team for the ninth consecutive year. Parker turned the ball over only five times in five games against the relentless pressure of “The Glove.” The Spurs were eliminated in the second round by the Lakers (en route to their third consecutive NBA championship). Although Tim Duncan scored 26, 27, 28, 30 and 34 points in the five games, the Lakers took the series 4-1. In that series, Parker got his first taste of the big time. Kobe Bryant averaged 26.2 points per game in the series. In Game 3, Parker had 24 points and five assists, but
토니 파커 (2002) – 토니 파커의 루키 시즌. 정규시즌 평균이 15분 출장시간에 9.2점에 불과했던 파커는 포스트 시즌에서 큰 향상을 보였다. 첫 라운드에서 3대2로 슈퍼소닉스를 잡은 스퍼스는 마지막 5차전을 23점차로 승리했고, 파커의 첫 플레이옾 시리즈 평균득점은 17.2점이었다. 이 스탯이 파커의 가치를 모두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파커의 상대는 게리 페이튼이었기 때문. 그가 누구인가? 9년 연속으로 올디펜시브팀에 뽑힌 그 페이튼이 아닌가. “The Glove”를 상대로 파커는 다섯 게임 동안 5개의 실책만 범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음 시리즈에서 스퍼스는 레이커스에게 시리즈를 내준다. 팀 던컨이 26, 27, 28, 30, 34점이라는 맹활약을 펼쳤으나, 레이커스는 4대1로 시리즈를 잡아낸다. 파커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플레이옾 경험을 했다. 코비가 시리즈 평균득점 26.2를 기록하고, 결정적인 3차전에선 5초를 남긴 상황에서 팁인샷을 성공시키며 레이커스에게 승리를 안겨 준 시리즈. 파커는 3차전에서 24점과 5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다섯 게임 평균 13.8점, 5.4 어시스트, 41% 슛률을 찍었다.
Tracy McGrady in 2000: Like James, McGrady went right from high school to the NBA. Like James, it took until year number three in the league to advance to the postseason. But unlike James, McGrady still came off the bench for most of the 2000 season with the Toronto Raptors, starting just 34 games. McGrady’s Raptors drew the defending East champion Knicks, a team that had won 50 games during the regular season. They had Allan Houston, Latrell Sprewell, Patrick Ewing, Larry Johnson and Marcus Camby.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2000) – 르브론과 마찬가지로 티맥도 고등학교에서 NBA로 바로 뛰어든 선수. 티맥은 3년차가 되어서야 플레이옾에 진출할 수 있었다. 34게임에서 스타팅 멤버로 나오기는 했지만, 르브론과는 달리 티맥은 아직은 벤치멤버였다. 맥그레이디의 렙터스는, 정규시즌 50승을 거둔 스프리웰, 유잉, 래리 존슨, 마큐스 캠비의 뉴욕 닉스와 맞닥뜨려졌다. 토론토에 스타 선수라곤 빈스 카터 하나뿐. 닉스는 3게임으로 시리즈 스윕을 거둔다. 모두 경기 후반에나 승부가 결정된 박빙의 시리즈였다. 카터는 그의 첫 플레이옾 시리즈에서 30%의 슛률, 그리고, 시즌 평균에 6점이나 못 미치는 기록을 냈지만, 오히려 맥그레이디는 그의 첫 플레이옾 경기에서 25득점을 기록했다. 1차전에서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랩터스는 첫 쿼터에서 첫 12득점을 득점하며 선빵을 날렸고, 그 이후 벤치에서 나온 티맥은 시리즈 내내 슈퍼스타처럼 게임을 지배했다. 맥그레이디의 시리즈 평균은 16.7점. 이때부터 사람들은, 랩터스의 공격이 카터가 아닌 티맥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아마도 닉스가 패배했을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한 시리즈였다.
Allen Iverson in 1999: Iverson didn’t make the postseason until his third year in the NBA. He was 23 years old in the spring of 1999, when his Sixers faced the Orlando Magic in the first round. The Sixers eliminated the Magic 3-1. With the teams even at 1-1, the series moved to
앨런 아이버슨 (1999) – 아이버슨도 3년차가 될 때까지는 플레이옾을 경험하지 못했다. 1999년 당시 23세. 식서스는 올랜도 매직과 첫 라운드에서 맞붙었다. 시리즈는 3대1로 식서스의 승리. 1대1 타이를 이룬 상태에서 식서스 홈구장에서 벌어진 3차전. 이 중요한 경기에서 아이버슨은 10개의 스틸을 기록한다. 이는 아직까지도 플레이옾 기록이다. 4게임 중 3게임에서 아이버슨은 30점 이상을 득점했고, 이는 1982년 동부컨퍼런스에서 식서스의 앤드류 토니가 셀틱스를 상대로 득점한 이후 식서스 선수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음 라운드에서 식서스는 스윕당했지만, 아이버슨의 첫 번째 플레이옾 시즌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총 8게임 평균득점 28.5점. 미래의 슈퍼스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Kobe Bryant in 1997: Bryant was still 18 years old in the spring of 1997, when he made his first appearance in the NBA postseason. Bryant was the fourth guard on the Lakers, playing behind Eddie Jones, Nick Van Exel and Byron Scott.
코비 브라이언트 (1997) - 1997년의 코비는 약관 18세. 그의 첫 플레이옾 시리즈는 레이커스의 가드 에디 존스, 닉 밴 액셀, 바이론 스콧을 백업하는 위치에서 시작됐다. 레이커스의 첫 상대는 포틀랜드. 레이커스는 3대1로 시리즈를 잡는다. 그 후에 유타 재즈에게 4대1로 시리즈를 내주는 레이커스. 코비가 첫 빅샷의 경험을 하게 된 것은 이 시리즈였다. 재즈가 3대1로 앞서 있는 상황에서의 5차전 유타 홈 경기. 샤킬 오닐은 1분 47초를 남기고 파울아웃 당한 상태. 게임종료 39초를 남기고, 존 스탁턴이 레이업을 성공시켜서 89대89 동점이 된 상황. 코비는 브라이언 러셀 위로 버저비터를 날렸고, 공은 림을 외면했다. 레이커스에게 시리즈 반전을 가져오게 할 수 있었던 빅샷이었다. 결국, 레이커스는 연장에서 맹활약 한 칼 말론 (32점 20리바운드)의 유타에게 무릎을 꿇는다.
Some all-time great non-centers and their first NBA playoff action:
5인의 레전드
스코티 피픈 (1988) – 1988년 스코티의 루키 시즌. 피픈의 출전시간은 또 한명의 루키 호레이스 그랜트보다 적었다. 피픈의 첫 플레이옾 무대 경험은 1라운드의 클리블랜드. 그때까지도 4년차 선수 마이클 조던은 플레이옾 시리즈를 이겨 본 경험이 전무했다 (3연속 1라운드의 고배를 마신 상태였다). 클리블랜드와의 5차전을 앞둔 상황, 불스의 감독 더그 콜린스는 승부수를 띄운다. 베테랑 브랫 셀러스 대신, 루키 스코티 피픈을 스타팅에다 놓은 것. 피픈은 이 중요한 경기에서 성숙한 기량을 과시하며 커리어 하이인 24점 (3쿼터에만 10점)을 득점했고, 6리바운드, 5어시스트, 3스틸까지 기록하며 팀의 시리즈 승리를 진두지휘 한다. 마지막 5차전에서 피픈은 39분을 뛰었고, 팀은 107대 101의 승리를 거두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조던이 자신의 첫 세 시즌 동안 많은 플레이옾 기록을 갈아 치우긴 했지만, 그의 첫 플레이옾 시리즈 승리는 피픈이 함께 했을 때에야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피픈은 첫 루키 시즌부터 이러한 큰 공헌을 팀에 제공했다.
Michael Jordan in 1985: The Chicago Bulls drafted
마이클 조던 (1985) – 시카고 불스가 드래프트 3번픽으로 조던을 영입한 이후, 조던은 1985년 그의 루키 시즌동안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는 맹활약을 펼쳤다. 조던이 오기 전 불스는, 3시즌 연속 플레이옾 진출에 실패한 상태. 조던이 오기 전 그들의 정규시즌 성적은 28승과 27승. 1985년에 불스는 38승을 거두며 플레이옾에 진출, 밀워키 벅스와 자웅을 겨루게 된다. 벅스는 홈에서의 첫 두 경기를 모두 잡고 3차전 시카고 원정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조던은 35점을 폭발시키며, 시카고에 4년만에 첫 플레이옾 승리를 안긴다. 제리 레인스도르프가 불스 새 운영진의 총수가 된 이후, 팀의 첫 포스트시즌 승리였다. 이는 그 이후의 불스의 포스트시즌 성공을 이끄는 효시였다. 조던은 정규시즌에서 28.2점을 득점했고, 그의 첫 플레이옾 시리즈에서 평균 29.3점을 기록한다. 조던의 첫 플레이옾 시리즈에서 불스의 감독 케빈 러거리는 그에게 많은 출장시간을 허락했고, 조던은 43분이라는 시간을 출전하며 5.8리바운드에 8.5어시스트라는 올라운드 활약을 펼쳤다.
Larry Bird in 1980: “Larry Legend” joined the Boston Celtics as the highest salaried rookie ever in any sport (five years for a total of $3.25 million dollars) and lifted them from a team that won 29 games to a team that won 61. Bird’s first playoff series was against the Houston Rockets, a team that went 0-6 against the Celtics during the season.
래리 버드 (1980) – “래리 레전드”는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당시 루키로서는 가장 높은 연봉 (5년계약 $3.25 mil)으로 셀틱스와 계약하며 NBA에 입성했다. 그리고, 정규시즌 29승밖에 못 거둔 팀을 61승 팀으로 만든다. 그의 첫 플레이옾 상대는 휴스턴 로켓츠 (역주: 당시엔 휴스턴이 동부소속이었습니다). 로버트 리드의 수비 때문에 공격에서는 잘 안 풀린 버드였지만 그의 보스턴은 4게임으로 로켓츠를 스윕해 버린다. 두번째 라운드에서 만난 줄리어스 어빙의 필라델피아 식서스팀. 1차전을 홈에서 내준 셀틱스는 2차전에서 버드의 36점 14리바운드에 힘입어 1대1을 기록한다. 식서스가 결국 4대1로 시리즈를 잡았고, 셀틱스는 이 시리즈에서 많은 경험을 쌓게 된다. 시즌 전, 존 하블리첵이 은퇴하고, 1980년 시즌 이후에는 데이브 코웬스와 피트 마라비치까지 은퇴한 셀틱스지만, 이때부터 팀은 버드의 팀이 되어 갔고, 드디어 1980년대 셀틱스의 거센 활약의 서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Magic Johnson in 1980: “The Magic Man” had one of the greatest careers, and one of the greatest opening acts, in history. His rookie season started in bizarre fashion, as his coach Jack McKinney suffered a life-threatening injury just 13 games into the season when he fell off his bicycle. Magic went on to post terrific numbers in his rookie season (18.0 points, 7.7 rebounds and 7.3 assists). In the playoffs, he was even better. The Lakers defeated the Suns 4-1. They defeated the Sonics 4-1. They advanced to face the 76ers in the NBA Finals. The Lakers captured the NBA title in Game 6 at
매직 존슨 (1980) – 역사에 길이 남을 루키시즌을 보낸 매직 존슨. 그의 루키 시즌은 조금 이상하게 시작됐는데, 감독인 잭 매키니가 자전거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인해 중상을 입으며, 시즌 시작 13게임 만에 중도 하차한 것. 하지만 매직은 18점, 7.7리바운드, 7.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루키시즌을 마쳤다. 플레이옾에서는 한술 더 뜬 매직. 선즈를 4대1로 잡은 레이커스는 소닉스마저 4대1로 잡고 NBA 파이널에 오른다. 필라델피아 식서스와의 대결. 6차전에서, 매직은 42점, 15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압둘자바가 부상으로 빠진 레이커스에게 우승컵을 안긴다. 이 날, 모든 포지션에서 뛴 매직은 파이널 MVP까지 챙긴다. 루키로서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직의 첫 번째 플레이옾 평균스탯은 18.3점, 10.5리바운드, 9.4어시스트.
Oscar Robertson in 1962: It took until his second season, 1962, for Robertson to crash the NBA postseason. In that sophomore season, the Big O averaged 30.8 points, 12.5 rebounds and 11.4 assists. He had 45 triple-doubles in that season alone. In the playoffs, his Cincinnati Royals drew the 37-45 Detroit Pistons.
오스카 로벗슨 (1962) – 1962년, The Big O의 2번째 시즌이 되어서야, 그는 포스트시즌을 경험한다. 그 해에 로벗슨의 스탯은 30.8점, 12.5리바운드, 11.4어시스트. 그 시즌에서만 45번의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그이다. 플레이옾에서 그의 신시내티 로얄스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만난다. 디트로이트가 1차전을 잡았고, 2차전은 홈관중의 응원에 힘입은 신시내티의 승리였다. 하지만 피스톤스는 다음 두 게임을 홈에서 모두 잡으며 다음 라운드로 올라간다. 로벗슨은 그의 첫 플레이옾 시리즈에서 평균 28.8점, 11리바운드, 1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점슛이 없던 시절임에도 로벗슨은 이 4차전 시리즈에서 81번의 슛시도만에 115점을 득점했다.
출처: NBA.com
번역:Doctor J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토니 파커의 활약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디펜더 페이튼을 농락하던 모습을 잊을수가없군요. 역시 올해 파커를 보니 될성 싶은 떡잎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티맥이 플레이오프 첫 경험을 한 저 때에 빈스 카터가 패한 것에 대한 분풀이로 자신의 퓨마 농구화를 던졌 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시즌에 나이키로 스폰서를 바꾼 걸로 알고 있는데...맞나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저 때를 기점으로, 둘 사이에 금 아닌 금이 가기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사촌간의 친분이나 우정이 사라질만한 심각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티맥에게 올랜도로부터 접촉이 왔을 때, 그리 어렵지 않게 둘이서 갈라설 수 있을만한 정도의 것이었다고나 할까요? 서로가 팀의 the man 이 될만한 선수들이어서 어쩔 수 없었던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Dr.J님이 말씀하신 티맥이 올랜도로부터 오퍼를 받았던 그 당시에 개인적으로 구단 수뇌부 이상으로 입김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카터가 아무런 설득을 하지 않은 건 무척 아쉽게 생각합니다. 카터가 강력하게 티맥의 잔류를 주장했더라면 올랜도 건도 충분히 무산되었을 거라 봅니다. 결국엔 리그 역사상 최고의 듀오가 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서로가 날려 버린 셈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말입니다. 근데 티맥을 픽한 아이제아 토마스는 언제 랩터스를 떠나게 되었나요? 가정이지만 만약 토마스였더라면 그냥 그렇게 티맥을 떠나 보냈었을까요?
토론토에선 두번째 시즌이 끝난 후부터 티맥의 가능성을 믿고 맥스 계약을 제시했지만 티맥은 서명을 거부했고 결국 시즌이 끝난 후엔 FA가 돼서 올랜도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당시 티맥은 자기가 1인자가 될 수 있는 팀에서 뛰고 싶다고 공공연히 얘기했었습니다. 올랜도에 가자 팔 근육이 달라지고 슛 포물선이 달라지더군요....만일 제한적 FA 제도가 1년만 먼저 생겼다면 카터와 티맥 콤보를 오랫동안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토마스가 있었더라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을 듯 합니다.
아...사정을 자세히 알고나니 그 내막이 이해가 가네요. 재차 말하지만 카터-티맥의 콤비를 보지 못한 건 정말 리그로서도 무척 아쉬웠다고 봅니다. 결국엔 그랜트 힐과의 제대로 된 호흡을 볼 수 없었으니까요. Dr.J님의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