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이 먼저 발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하더라도 그것은 수만의 시위군중에 포위당한 군의 자위권발동의 차원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에 ‘폭동설’의 가장 주요한 논리인 ‘선과격시위설’이 등장하게 된다. 발포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진압할 수 없는 상황, 진압은커녕 주요거점인 도청과 역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만큼 시위가 과격하고 폭력적이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 주장은 ‘폭동설’의 주요한 논리인 만큼 상당히 일리가 있다.
우선 최초의 총격으로 밝혀진 19일 오후 장갑차에서의 발포를 살펴보자.
오후 4시 30분 계림동 파출소와 광주고등학교 중간쯤에서 장갑차 1대를 시위대원들이 포위했다. 시민들이 사람의 벽을 쌓아 장갑차의 전진을 막아버린 것이다. 시내에서 광주고등학교 쪽으로 이동하던 이 장갑차는 보도위에 군중들이 운집해 있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속도를 줄이다가 그만 보도 위로 뛰어 올랐다가 시동이 꺼져버렸었다. 이 장갑차는 가로수 한 그루를 들이받으면서 앞바퀴 구동축이 보도난간에 부딪쳐 버렸다. 군중들은 장갑차의 양쪽에 달린 감시경을 돌로 깨어버렸다. 장갑차의 눈을 빼앗은 것이다. 장갑차는 꼼짝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안에는 장교 등 9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려다가 모여있는 군중들이 ‘저놈들 죽여라’고 외치자 그 중 2명은 도망가고 7명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난 군중들이 근처 페인트상회에서 석유통을 구해다가 장갑차 밑에 불을 질렀으나 발화되지 않았다. 다시 짚더미를 가져다 불을 질렀으나 타지 않았다. 군중들은 불이 붙은 짚더미를 들고 올라가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집어 넣으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뚜껑이 열리면서 총탄이 발사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처음에 하늘을 향해 발포했으나 군중들이 해산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이 발포로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3년생인 김영찬(19세)이 손과 대퇴부에 3발을 맞고 쓰러졌다. 김영찬은 급히 조대부속병원으로 옮겨졌고 장갑차는 군중들이 웅성거리는 틈을 타 쏜살같이 달아나버렸다. 공수부대원이 투입된 후 최초의 발포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총을 맞고 피를 흘린 김군은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전남대의대 부속병원에서 8개월 동안 치료를 받고 그해 12월 퇴원했다.
- 김영택,『5ㆍ18 광주민중항쟁』, 동아일보사, 1990, p76-77.
그렇다. 해치를 열고나와 총을 쏘지 않았다면 그 군인들은 장갑차 안에서 통구이가 되었을지도 모르나. 성난 군중들은 하늘을 향해 발포한 위협사격에서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시위대를 향해 직접 사격을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씨의 비극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어서, 20일 밤에 광주역 부근에서 있었던 계엄군의 총격은 다음과 같은 정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충돌은(3명의 사망자를 만든 - 인용자, 두 번째 글 참고) 20일 오후 4시쯤 무등경기장에서 2백여대의 차량이 광주역 광장을 거쳐 시내로 진입할 때 광주역을 경비하고 있던 공수부대가 발포하자 시위대원들이 ‘가만두지 않겠다’며 광주역에 들어가려고 기도하면서 일어났다. 특히 군은 고속도로가 차단될 경우 병력과 군수품을 수송하기 위해 절대 필요한 철도가 마비되지 않도록 광주역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던 터였다.
(20일 - 인용자) 밤 10시부터 시위대원들은 광주역을 점거하고 있는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트럭에 실린 드럼통에 불을 지른 뒤 전진시켰으나 분수대와 충돌, 공수부대원들에게로 나아가지 못했다. 군중들은 계속해서 10여대의 차량을 동원해 기습작전을 폈었다. 이 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일제 사격을 가한 것이었다. 당시 제 3여단 11대대장 임수원(林守元) 중령은 몰려오는 시위군중을 해산할 길이 없어 E-8 발사총이라는 가스총을 쏘았다고 1989년 1월 27일 광주특위청문회에서 증언했다. 발포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시위대원이나 인근 주민들은 ‘콩볶듯한 총소리로 밤새 잠을 못잤다’고 술회하고 있다. 특전사 상황일지는 ‘시위대가 트럭을 몰고 전진, 아군 1명 압사, 전지역의 폭도 광분, 화염병 및 투석으로 아군에 대해 파상공격을 실시해 밤 10시 10분 이후 완전 포위상태에서 폭도와 대치 중’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니까 군은 도청, 교도서, 역 그리고 자신들이 주둔하고 있던 전남대와 조선대만은 끝까지 지키려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공방전이 치열해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와중에서 3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 김영택, 같은 책, p117-118.
20일 차량이 대규모로 시위에 동원되면서 계엄군과 시위대의 대치상황이 시위대의 일방적인 수세에서 공세적인 상황으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광주역을 반드시 사수해야할 이유가 있는 군의 입장에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대대적인 직접발포가 아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21일 오후 1시경 공식기록에서 54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알려진 군의 대대적인 발포가 있었다. 그 때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21일 - 인용자) 12시 58분. 일부 과격한 군중이 관성관광버스 2대를 몰고 도청 광장으로 쏜살같이 몰고 들어가 분수대를 돌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이 그 버스에 집중사격을 가했다. 순간적인 발포였다. 이 발포로 버스 1대는 다시 군중쪽으로 되돌아갔지만 1대는 분수대 옆에서 정차하고 말았다. 운전기사가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서 당시 61대대장 안부응 중령은 1989년 1월 27일 국회청문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 버스가 갑자기 나타나니까 먼저 실탄을 받은 장교가 이 버스를 저지시키기 위해서 여기에다 사격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주위에 있던 10여명의 장교들이 우루루 발포했습니다. 지금 의원님들이 말씀하시는 집단발포라는 것이 바로 이 상황입니다. 이것은 차량에 대한 사격이었습니다. 나나 또는 내 부하가 죽어서는 안되겠다 하는 그러한 의도에서 본능적으로 사격을 한 것입니다. 만일 이 버스를 저지하지 못했으면 그 좁은 공간에 있는 1천여명의 병사들을 깔아뭉갰을 것이고 수십명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자위권 발동으로 발포했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이 대목의 자위권발동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그때 버스가 너무나 당돌하고 갑작스레 진입해왔기 때문에 본능적인 방어수단으로서의 발포일 수도 있다. 이 같은 발포와 거의 때를 같이해서 또 다른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 총성은 많지 않았다. 이 총소리에 대해 나는 시민군의 대응발포로 알고 있었으나 20일에는 시위대원들이 무기 탈취사건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시위대원의 발포가 아니라 이미 다른쪽에 있던 공수부대가 발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김영택, 같은 책, p133-134.
이상의 정황으로 판단한다면 차를 몰아 군을 깔아뭉개고, 군을 향해 화염병과 불붙은 드럼통을 굴려버리는 시위대는 사실상 ‘폭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폭도’들의 과격한 행위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 군은 발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족을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이러한 결론이 군의 발포가 도덕적으로 정당한지 부당한지에 대한 판단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군의 발포는 이해가능하다는 점만 확인할 뿐이다. 군의 발포가 이해가능하다면 시위대의 과격한 시위는 어떠할까.
‘폭동설’의 입장에서는 시위대의 과격한 시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음’으로 일관한다. 유언비어, 선동, 지역감정 등을 내세우긴 하지만 ‘폭동설’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시위대의 시위를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두고 있으며, 그들이 내세우는 몇몇 동기들은 이를 은폐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여기에 싸구려 지역감정이 삽입되어 ‘전라도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 라든가, 정체불명의 귀족적 낭만주의와 결합되어 다음과 같은 진술을 만들어 낼 뿐이다.
3. 이들은 날조된 유언비어를 퍼트려 군중을 선동하고, 폭도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불량배, 구두닦이, 넝마주의, 공장근로자, 무직자, 전과자, 행상 등 사회소외계층에 술을 먹이고, 민간인들을 마구 쏘아 군중을 흥분시키면서 계엄군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했다.
지만원,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 아닌 이유는 이렇습니다!」한국논단, 2002
이상이 단순히 기술해본 ‘폭동설’ 논리의 편협성과 배타성이다.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것만 이해하고 인정하고 싶은 사실만을 인정하는 ‘~주의자’ 또는 요즘말로 한다면 ‘~빠’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편협성이며, 나머지를 인정하지 않거나 적대시하는 배타성이다. 이들은 역사로서의 진실, 즉 사실관계나 인과관계를 왜곡하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지닌 것 같다.
무엇인가 신화를 받들어 모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류의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첫댓글ㅁㅁ님, 그런데, 왜 시민군 장갑차가 군인들을 깔아죽였던 사실을 빼놓았을까요? 더욱이 도청안의 군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도청 앞 양편 옥상 건물에 두 대의 중기관총이 설치되어 정조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청 사수를 포기하고 광주 외곽으로 퇴각하면서 퇴로를 열기 위해 장교들이 공포탄을 발사하였던 것입니다. 병사들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었어요.
오전 10시 10분, 뒤쪽. 그러니까 도청 광장 쪽에 있던 공수부대에게는 실탄이 지급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때 사병 한 명당 10발씩 지급되었다. 시위군중과의 대화가 불가능해졌을 때, 장 지사는 도청 본관 3층 지사실 옆 복도에 있었다. 필자도 함께 있었다. 실탄이 지급되고 있는 광경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 김영택 10일간의 14:11
실세는 모든걸 책임져야합니다. 무한책임주의를 지금의 대통령에게는 적용시키면서 그당시 실세였던 전두환은 그 사실이밝혀졌건 아니건 그당시 실세라는건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그러면 실세가 그당시 나라의 국정운영을 책임져야하는것입니다. 허울뿐이고 말한마디 소신있게못하는 최규하대통령같은 허수아비에게 책임을 물을것이아니라요.
그렇습니다. 김영택씨를말하는것입니다. 21일에는 낮에는 실탄을 회수하는 광경도 펼쳐집니다.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고 아우성도. 군은 부상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나 수송을 못해 더욱 자극되는 듯. 이란글은 <조선일보 취재일지> 에서발췌했습니다.
실세는 모든걸 책임져야합니다. 무한책임주의를 지금의 대통령에게는 적용시키면서 그당시 실세였던 전두환은 그 사실이밝혀졌건 아니건 그당시 실세라는건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그러면 실세가 그당시 나라의 국정운영을 책임져야하는것입니다. 허울뿐이고 말한마디 소신있게못하는 최규하대통령같은 허수아비에게 책임을 물을것이아니라요. >>>> 이거에나 답변해주시길바랍니다.
ㅁㅁ님, 5월 19일 폭도들이 나주경찰서에서 수천 정의 무기를 탈취한 사실에 대한 증언은 나주의 언론인 증언을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newstown.co.kr/newsbuilder/service/bbs/mess.asp?P_ID=bbs9&P_SearchKey=&P_SearchWord=&P_OrderKey=p.C_Class_N%20DESC,&P_Order=p.C_Order_N%20ASC&P_Page=1&P_Index=162
첫댓글 ㅁㅁ님, 그런데, 왜 시민군 장갑차가 군인들을 깔아죽였던 사실을 빼놓았을까요? 더욱이 도청안의 군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도청 앞 양편 옥상 건물에 두 대의 중기관총이 설치되어 정조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청 사수를 포기하고 광주 외곽으로 퇴각하면서 퇴로를 열기 위해 장교들이 공포탄을 발사하였던 것입니다. 병사들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었어요.
두대의 중기관총은 전혀 사용되지않았습니다. 병사들에게는 실탄이 20일날 지급되었습니다. 장교들에게는 19일 김영찬군의 사건에서봐도 알수있듯이 이미지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글왜 왜 이리플을다실까요.. 폭동설의 논리적배타성과 편협성을 비판하는글에 뜬금없이 장갑차글이달리니 글이무안하군요
ㅁㅁ님아, 최규하 대통령이 군자위권 발동 재가를 내리신 일자는 5월 27일 새벽이었습니다. 5월 20일에는 군자위권이 거론되지도 않았고, 실탄 지급 사실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저에겐 허위사실안통합니다만... --
오전 10시 10분, 뒤쪽. 그러니까 도청 광장 쪽에 있던 공수부대에게는 실탄이 지급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때 사병 한 명당 10발씩 지급되었다. 시위군중과의 대화가 불가능해졌을 때, 장 지사는 도청 본관 3층 지사실 옆 복도에 있었다. 필자도 함께 있었다. 실탄이 지급되고 있는 광경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 김영택 10일간의 14:11
21일상황입니다.
ㅁㅁ님, 5월 20일 폭동진압의 최고 지휘관은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었습니다. 김대중의 사람 정웅 소장이 실탄 지급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하시려는 것인지요.
21일에는 낮에는 실탄을 회수하는 광경도 펼쳐집니다.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고 아우성도. 군은 부상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나 수송을 못해 더욱 자극되는 듯.
518 진압작전 "화려한휴가"의 최고지휘관은 그당시 실세인 전두환이었습니다. <<<- 손바닥으로하늘을가리지마십시오.
실세는 모든걸 책임져야합니다. 무한책임주의를 지금의 대통령에게는 적용시키면서 그당시 실세였던 전두환은 그 사실이밝혀졌건 아니건 그당시 실세라는건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그러면 실세가 그당시 나라의 국정운영을 책임져야하는것입니다. 허울뿐이고 말한마디 소신있게못하는 최규하대통령같은 허수아비에게 책임을 물을것이아니라요.
ㅁㅁ님, 광주향톻사단에서 실탄을 도청으로 공수해 준 사실이 있습니까? 그리고, 정웅 소장이 실탄 지급 명령을 내린 사실이 있는지요? 인용문에서 필자는 김영택씨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김영택씨를말하는것입니다. 21일에는 낮에는 실탄을 회수하는 광경도 펼쳐집니다.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고 아우성도. 군은 부상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나 수송을 못해 더욱 자극되는 듯. 이란글은 <조선일보 취재일지> 에서발췌했습니다.
김영택의 10일간의취재일지와 조선일보취재일지 이 두곳에서 실탄지급사실이 확인됩니다.
518 진압작전 "화려한휴가"라는 것이 있었나요? 그런 것이 있다면 그 작전이 세워진 날자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지엽적인 곳으로 논쟁을몰고가시지마시구요 ,, 실탄지급사실이 확인되었으니 다른곳에선 19일날 나주서가털렸다. 실탄은 지급되지않았다. 정웅소령이 모든 책임자다라는 말은 다른곳에서 하지마시길바랍니다.
실세는 모든걸 책임져야합니다. 무한책임주의를 지금의 대통령에게는 적용시키면서 그당시 실세였던 전두환은 그 사실이밝혀졌건 아니건 그당시 실세라는건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그러면 실세가 그당시 나라의 국정운영을 책임져야하는것입니다. 허울뿐이고 말한마디 소신있게못하는 최규하대통령같은 허수아비에게 책임을 물을것이아니라요. >>>> 이거에나 답변해주시길바랍니다.
12.12 이후의 실세가 누구냐는것은 모든 세상사람들이 다압니다.. 손바닥으로하늘을 가리려 마십시오
폭동진압 지휘권이 광주향토사단 사단장에게서 게엄사로 이양된 날자가 5월 22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님이 말하는 "화려한휴가"는 언제 수립된 작전인지요?
소모적인논쟁으로가기싫습니다. 화려한휴가 였건 화려한 바캉스였건 똑같습니다. 뭘 얻으려고하시는것인지? 실세는 모든걸 책임져야합니다. 무한책임주의를 지금의 대통령에게는 적용시키면서 그당시 실세였던 전두환은 그 사실이밝혀졌건 아니건 그당시 실세라는건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그러면 실세가 그당시 나라의 국정운영을 책임져야하는것입니다. 허울뿐이고 말한마디 소신있게못하는 최규하대통령같은 허수아비에게 책임을 물을것이아니라요. >>>> 이거에나 답변해주시길바랍니다
ㅁㅁ님이, 광주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광주가 폭동 진압을 결정하였으니 책임을 광주에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하하하 ~~ 여기서 님의 밑천이 다드러난것 같군요.. 이만 가겠습니다 .. 이글 지우실것같은데 그런 밑천까지 파헤쳐보는 행동은 하지않으실거라봅니다. 명색이 학도신데.. ㅋ 이만갑니다 수고가많으셨습니다.
실세라면 정웅 소장이 오히려 실세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장교 군번이 전두환 소장보다 5년 상급자였습니다. 정웅 소장이 폭동진압 작전을 결정하고 지휘하였던 때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그 일을 알았거나 눈꼽만큼이라도 영향을 미친 일이 있었는지요.
전두환이 실세니까 설사모르더라도 책임을져야합니다. 부하들을 다루지못한 것도 한나라의 실세에게는 죄목입니다.
광주폭동진압 지휘계통에 전두환이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었던 적이 있었는지요. 보안사령관은 군대 행정상 작전지휘에 전혀 관여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하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마십시오.!!! 실세가 작전지휘에 관여도못하는게 실세입니까 .하하하 그러면 타임지는 그런 허접실세를데리고 특종이니뭐니하면서 전두환을 단독인터뷰하며 한국의 미래상황에대한 인터뷰를했군요..
거기서 전두환은 한국에맞는 정치체계가 필요하다라고헀고요 허접실세가 어디서 건방지게 한국가의 정치체제를 논합니까? 안그래요?
전두환을 좋아하시는것은 좋은데 잘못된것까지 미화하려고하진마십시오. 저는 박정희 존경하고 동시에 노무현씨도 존경합니다. 그러면 저는 빨갱이입니까 우파입니까? 저는 이념에 얽매이고싶지 않구요 실리적으로 합리적으로 바라보려고합니다. 전사모님들과 한기총여러분들께서도 합리주의적으로 역사를 바라보셨음합니다.
전두환이 처음 며칠간은 전혀 몰랐었다는 것은 5.18 수사에서 입증이 되지 않았던가요? 당시 중정 총무국장이 김대중의 심복 이종찬이었는데 전두환 서리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하하하하 그놈의 김대중 김대중은 약방의감초군요?? ㅋㅋㅋㅋㅋ 김대중이 아주 그냥 한국의 프리메이슨입니다 하하하하 김대중 김대중.. ㅋㅋㅋㅋ 웃다가만가는것같네요. 김대중이 매일 꿈에나와서 괴롭히십니까? 하하 김대중의사람이라는 증거는 전라도라서?? ㅋㅋㅋ
증거나좀가져오세요 5공화국 소설쓰지마시구요
김대중이 중정 총무국장이었으며 광주사태 전야에 자신을 연행하였던 이종찬을 김대중 정부 초대 국정원장으로 임명하였다는 사실을 모르실리 없을텐데 무슨 증거를 원하시는지요?
ㅁㅁ님, 5월 19일 폭도들이 나주경찰서에서 수천 정의 무기를 탈취한 사실에 대한 증언은 나주의 언론인 증언을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newstown.co.kr/newsbuilder/service/bbs/mess.asp?P_ID=bbs9&P_SearchKey=&P_SearchWord=&P_OrderKey=p.C_Class_N%20DESC,&P_Order=p.C_Order_N%20ASC&P_Page=1&P_Index=162
미친글이 여기도 있군..
ㅁㅁ은 빨갱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