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나를 사랑하시어]제2장 님은 나를 사랑하시어-김재웅 법사님과의 만남:모든 것을 바쳐라
그리하여 나는 다른 공부 다 치우고 석 달 간 금강경 독송과 바치는 공부에 들어간다. 뒷날 우연한 기회에 백 박사님의 <모든 것을 바쳐라>라는 법문을 보게 되었는데, 너무 훌륭하신 말씀이라 여기 그 일부를 잠깐 소개한다.
우리가 불교를 신앙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부처님이 되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큰 뜻도, 고해에서 윤회하는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님을 만드는 데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되면 중생이 가지는 일체의 번뇌와 고통과 부자유에서 벗어나 원융과 원만과 자유자재롭게 됩니다. 그래서 성불은 곧 해탈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불은 어떻게 해야 하며 해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대하여 모든 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버리고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음을 버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만과 집착과 아집을 버리고 아상을 떨어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그 매에게 던져주던 부처님처럼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성불은 가능하고 해탈의 길은 열린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아니하고는 윤회의 굴레를 헤어날 수도 없고 또한 피안의 길은 요원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성불과 해탈을 위하여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부처님 앞에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마음도 나의 몸도, 탐욕과 진심과 어리석음도 부처님께 바쳐 버리고 기쁨도 슬픔도 근심도 고통도 모두 바쳐야 합니다.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칠 때 평안(平安)이 오고 일체를 바치고 날 때 법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욕(五慾)도 바치고 팔고(八苦)도 바쳐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 주십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바침으로써 불타의 가르침은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중생의 원인이 되는 무명(無明)을 바쳐 버리면 불타의 지혜가 비춰 옵니다. 불타의 광명이 나에게 비추일 때 거기엔 윤회의 바다를 벗어납니다. 생사를 바쳐 버리면 거기엔 불생불멸의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바치지 아니하고 자기의 소유로 하려는 마음에서 일체의 고통이 따르고 번뇌가 발생합니다. 명예를 자기의 것으로 하고 재물을 자기 것으로 하고 여자를 자기의 것으로 하고 자식을 자기만의 자식으로 하려는 데 중생적인 고뇌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영원한 자기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명예가 어찌 완전한 자기와 같이 할 수 있으며 남녀의 사랑이, 재물이, 자식이 어찌 완전한 자기의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중생적인 것은 부처님께 바치고 무상치 않은 즉 영원히 자기의 것일 수 있는 불타의 지혜와 진리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 모든 것을 바친다 함은 우리가 부처님과 항상 같이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잠시라도 떨어져 있게 되면 번뇌와 망상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리는 이제라도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我]라는 아만심, 내 것이라는 집착심을 털털 떨어 내어 부처님 앞에 바쳐 봅시다.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바로 이런 소식입니다.
또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 하였습니다. 그 범소유상, 그리고 유상(有相)이 아닌 모든 것까지도 부처님께 바칠 때 여래(如來)는 현현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부처님께 바친 자리, 그 텅 빈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입니다. 나[我]라고 하는 놈은 무엇이든지 하나를 붙잡아야지 그냥은 못 배기는 놈입니다. 그래 그 놈 때문에 우리가 윤회의 중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를 부처님 앞에 바쳐 버리면, 거기엔 아만도 아집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기도 질투도, 명예를 위한 다툼도, 사리나 이권을 위한 싸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칩시다.
석 달 동안 바치는 공부를 하긴 하였으나, 그리고 참 좋은 공부 방법이란 생각도 들긴 들었으나, 어쩐지 허전한 것이 있었다. 바친다는 것만으론 무언가 내 가슴 한 쪽 허전함을 지우기 어려웠다.
바친다는 행위엔 바치는 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바치기만 하는 한 부처님과 나는 하나가 아니었다. 물론 내 바치는 공부가 일천한 탓이긴 했겠지만 바치는 나와 바침을 받는 부처님은 분명히 따로 존재했다.
그리고 법사님과의 대화 중 이런 일이 있었다. 법사님은 나에게 화가 날 땐 어떻게 하는가 하고 물으셨다.
나는 그 당시 일체개공(一切皆空)의 도리를 약간은 체험한 터라 그런 경우는 곧 공(空)을 관(觀)하곤 했다.
모든 것이 무자성(無自性)이니 화의 자성이 어디 있으랴 하여 화의 공한 자성을 관하는 것이 내 방법이었다. 그 말씀에 법사님께선 화도 바쳐 보라고 하셨는데, 도무지 화가 바쳐지지가 않았다.
나는 그때까지 멀쩡히 화의 공한 자성을 관함으로 얼마든지 잘해 나가고 있었는데 그런 것은 모르시고 무조건 바치라고 하니, 바치려 할 때마다 없던 화의 자성이 오히려 그로 인해 점점 살아나는 데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법사님께서 말씀하신 석 달이 지나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 생각하고 꾸준히 해 보았지만 결국 머리만 아프고 없던 자성만 만들어져 이번에 공성을 관하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옷도 사람 따라 입어야 하는 것처럼 모든 공부는 근기, 인연 따라 가르치고 수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이 바치는 가르침은 훗날 내가 행원의 광수공양원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법사님께선 기도하는 법과 원을 발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이 또한 뒷날 행원에서 원을 발하는 공부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법사님과의 만남에서 내가 들은 법문 중 인상 깊었던 것 하나는, 우리가 부부가 되는 인연이었다.
결혼 적령기를 앞둔 나에게 법사님은 마치 나의 앞날을 이미 아시고 그러신 듯 사람들이 어떻게 부부가 되는지를 말씀해 주셨다.
부부가 되기 위해선 오백생을 같이 해야 한다느니 하는 불가의 말이 있듯이, 그래서 부부란 가장 인연 깊은, 그것도 좋은 인연 깊은 중생들끼리 만나는 줄 알았는데 법사님의 말씀은 뜻밖에도 그것이 아니었다.
법사님께서는 정말 좋은 인연은 대부분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로 만나며 그 다음이 친구나 형제이고, 부부는 전생에 서로 좋지 않은 인연, 그것도 빚이 많은 인연끼리 만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랑해도 부부의 연이 없으면 부부가 되지 못하며 아무리 사랑해도 그냥 헤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빚으로 만난 것이 부부이므로 웬만한 부부가 아니고서는 다툼이 끝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빚이 많은데 어떻게 부부가 되는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일어야 결혼하고 싶어지고 그래야 부부가 될텐데, 빚이 있으면 어찌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의아해하는 나에게 법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설명해 주셨다.
빚이 많아 부부가 되기로 된 인연이 서로 만나면 순간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불길이 되어 타오른다. 그런데 이 사랑의 불길은 지고 지순하다거나 영원하다거나 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부부의 인연을 맺어줄 때까지, 그리고 맺어지고 나서 한 동안만 잠시 타오르는 그런 요상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부부가 되고 나면 그 다음부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로에게 불만이 생기고 서로의 험담을 들추고 종국엔 싸움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이는 마치 복수하기 위해 올가미를 쳐 놓고 기다리는 사람들 같이, 올가미에 걸려들 때까지는 온갖 대접을 다 하지만 올가미에 걸려드는 순간 태도가 돌변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것이 한동안 지속된 다음에야 빚이 청산되는데, 처음부터 빚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거나 그 동안 상처가 깊은 이들은 결국 서로 같이 살지 못하고 헤어지기 쉽다는 것이니, 이런 데 속으면 안된다고 하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사코 하려는 경우, 또는 서로가 지나 보면 성격이나 살아온 환경이 서로에게 맞지 않는 것을 알고도 어쩔 수 없이 빠져 들어가는 경우가 다라고까지는 못하더라도 대개 이에 해당한다고 하셨다.
이런 인연 중 첫눈에 단숨에 반한다든지 상대방에 대한 육체적 갈망이 초기에 짙을수록 빚이 더 깊고 인연이 더 나쁜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부인을 고를 때 이런 점을 주의하고 오히려 첫눈에는 이끌리지 않더라도 무언가 만날수록 정이 이끌리는 사람을 택하라고 하셨다.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정한 사랑은 첫눈에 불타 오른다고 알고 있었는데 법사님이 말씀하시는 인연의 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일부나마 내가 이해하게 된 것은 뒷날 내가 결혼하고도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다.
-보현선생님의 ‘님은 나를 사랑하시어’에서, 불광출판사 刊
첫댓글 다시 읽어도 늘 새롭습니다 ㅎㅎ 기억력이 없어선가... _()()()_
^^ 두번 반복 읽기 모드로 돌입해야 할 듯 합니다...넘 재미있어서.............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뭐든 듣고 보고 행하고,,듣고 보고 행하고를 늘 반복해야 익숙해 지는 듯 합니다..언제나 새로운 듯 하니...ㅎㅎ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