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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선생님 운남성 차밭 답사 여행기 살짝 보기5 (페북에서)
41. 2012.01.05
옛날 사람들은 우리의 땅을 아랫터라 여기고 하늘을 윗터라고 여기셨던가 봅니다. 더하여 아랫터는 윗터를 닮았다고 생각하셨던가 봅니다. 아울러 아랫터 안에서도 앞서고 뒤서는 관계가 있으며, 뒤서는 것은 앞서는 것을 닮는다고 보신 듯합니다. 이처럼 앞서고 뒤서는 관계는 흔히 어버이와 아들딸의 관계로 이해되곤 했습니다.
그이들께서는 앞서고 뒤서는 관계가 뚜렷하게 얘기되기 어려운 것들조차 서로 닮는다고 보셨습니다. 여러 동물들과 식물들과 사람의 관계도 그런 것인데, 이런 경우는 주로 형제자매관계로 이해되곤 했습니다.
하나 더 이야기할만한 것은 특정 부분도 전체를 대표할 수 있고, 전체의 특징을 담고 있다고 보셨던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특정 부분은 전체를 대표하는 동시에 독립된 개체처럼 여겨졌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한 바위나 산이나 물은 우리땅(아랫터, 지구, 어머니)의 일정 부분으로서 각각 우리땅을 대표함과 동시에 그 스스로 하나의 독립 존재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만주어에서도 이런 점이 부분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하늘의 별을 '우시하'라고 불렀는데, '우시하'는 '웃터'라는 뜻이며, 보기에 따라서는 '웃터'와 '우시하'는 음운변화를 거쳐 작은 차이가 나타난 동일 어휘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시하'들에도 나름대로 형제자매관계가 있어, 가장 으뜸이 되는 우시하를 비롯한 다양한 우시하가 독자적 특징을 가지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으뜸이 되는 우시하는 한자어로 북극성인데 만주어로는 '하따아 우시하'입니다. 하따아는 첫 땅이란 뜻입니다. 하따아의 '하'는 우리말 '하늘' '하나' 등의 '하'와 비슷하게 '처음' '으뜸' 등의 뜻을 가집니다. 그밖에 한둘을 더 보자면 일곱 별로 이뤄진 칠성은 '나단 우시하'(나난구리), 황제의 별이라는 제성은 '카한 우시하', 수성은 '물커 우시하', 혜성은 '어리쿠(어리광) 우시하' 등 우리말과 연관된 듯한 이름이 많습니다.
아무튼 이런 관계 맺음에 대한 생각에서 하늘의 태양인 '하라'(첫뿌리, 첫나, 하라는 바라와 같은 말이고, 이게 음운변화 되어 우리말의 별이 됩니다)는 아랫터인 우리의 땅에서 많은 '나'와 연결됩니다. 만주어나 우리말의 '나'는 그래서 한자어의 我나 吾와 달리 일인칭명사만은 아닙니다. 굳이 한자로 옮기면 本이나 氏쯤 될 것입니다. 이런 얘기는 이쯤에서 줄이고요.
인류학자분들이 말씀하시는 토템이즘과 애니미즘에 등장하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광물 등도 이런 관계에서 나온 것이지 원시미개적인 신앙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라는 점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마치 부자가 이름을 나눠가지고 형제가 이름을 나눠가지는 것처럼,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공동체전체회의(제비, 곧 모든 선비)의 이름을 식물인 제비꽃에 나눠주고, 또 조류인 제비에게도 나눠주고, 그것을 나라 이름으로도 썼던 것입니다. 나라이름인 부여(당시 음가 부이으)를 흰 사슴에게도 붙여주고, 왕의 아들에게도 붙여주며, 신의 이름을 조류인 까마귀(가마고니)나 포유류인 곰에게도 나눠줬던 게 그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성姓을 금속인 금(아이쇠)에게도 나눠주고 그걸로 나라의 이름으로도 삼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내놓을 수 있는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다른 존재에게 나눠주는 데 인색한 우리가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까요? 적어도 나의 라임오랜지나무 방식의 세계에서는 말입니다. 이제는 아날로그와 디지탈의 협상결과쯤 되는 의인화라는 문학적 기법조차 금기가 되어가는 듯합니다. 그래서 재미 있으라고 사진 하나 올리는데, 혹시 저작권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 얼른 내리겠습니다. 아무튼 이 동물에게 사람 이름 나눠주고 형제 대접을 하는 것이 토템은 아닐 듯합니다. 다만 분별이 있을 뿐, 우주에 생명 아닌 것은 없고, 생명 가운데 관계는 어떠할지라도 형제 아닌 것은 없지 않을까요? 환경부가 '범생명연대부'가 될 날도 오려나요?
오늘도 담벼락으로 글 고문하는 현이를 용서하셔요. 덜 통해도 자꾸 하다 보면 더 통해질 것으로 믿는 마음에 그만......(댓글1)
어투를 좀 바꿔보고 싶습니다. 다음과 같이......^^ "신화는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우리와는 좀 다른 시각으로 조망된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사실들을 발견하는 데, 실증주의적 방법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할 뿐이겠지요. 아마 옛 분들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사실들을 표현하는 데는 신화나 설화, 어릴 적 할머니에게 들었던 '옛날이야기'같은 방식이 더 적절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 말이 그 말인가요? 번거롭기만 한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댓글2)
42. 2012.01.06
Inviting you to the Courtyard of Conversation about Promise
‘Baniha’. How long it has been for me to greet you with this word!
I will be talking about a promise in this space beginning today. All cultures have their own eyes with which they make sense of their surroundings.
We can find a promise in everything: the sounds we make, the bowls we use, and the clothes we wear - they all embody their own promises. We will cease to own any cultures should we not have a promise embedded in all things and tasks, in addition to our basic necessities, that we deal with each day.
A promise, when it gets unclear, darkens our lives and the world around us, whereas a clear promise brightens them. Such a promise symbolizes the depths and widths of our lives; our attitudes toward it measure our earnestness for self-scrutiny.
Now I want to share with you the conversations about such a precious promise. A promise may change in every era, in every society, and at every turn in an individual's life. But regardless of different times or places, the promise remains as the source of our faith, the root of our actions, and the principle of our self-refinement.
It is not outrageous to say that, without a promise, we cannot live. Even that one declares he will live without one is a kind of a promise itself.
Five years have passed since we gathered to talk on-line. During those years, I may have changed in disposition: a little deeper here, a little wider there, and even a little marred at some parts.
Here I slide open the door to the courtyard where we come together to share our stories. I will not hesitate to reflect upon and even repeat the stories from the past over again. Within the frame of the promise, I believe we can share our experiences about what has come today and our quest for what is yet to come tomorrow.
I hope each of us would join in to make this courtyard a wholesome place and thank all of you who have come to take you parts.
Sincerely Yours,
Aragaby
저의 영문 사용자 벗들을 위하여....for my friends speaking English, specially Chris!
집 밖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교류를 하는 공간을 통칭 차관茶馆 또는 차루茶楼라고 부릅니다. 이런 공간도 시대와 사회적 여건 및 문화적 추세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벗님들께 오늘날의 이런 공간에 대해 제가 보고 느껴온 바를 말씀 드릴까 합니다. 페북이 무슨 의견발표 공간은 아니지만, 제 일과 관련되어 이 이야기는 몇 번 나누어서 올려볼까 합니다.
먼저 타이완의 경우입니다. 타이완에도 원래 차관 또는 차루가 많았는데, 지금은 찾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까닭으로는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그 하나는 경제개발의 과정에서 커피와 탄산음료를 비롯한 간편한 음료가 들어와 차를 대신한 점입니다. 특히 시간이 황금이고 돈(이런 것을 감히 시간과 비유하다니 간도 크죠?)이라는 이상한 관념이 사회를 휩쓸면서 차를 기피한 점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차루는 원래 문화예술의 공간이자 상업적 공간인데, 자본주의의 빠른 발전에서 상업적 동기가 차루의 성격을 변질시켰습니다. 젊잖은 문화예술공간으로서는 다른 분야의 공간들만큼 이윤을 얻을 수 없다 보니 차루에 아가씨가 등장하고 이들의 웃음을 파는 공간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꽤 있었던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우리 사회의 남성이발소의 퇴폐화를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타이완의 차루는 문화와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기피를 받았고, 마침내 옥석이 함께 탄다는 말처럼 차루는 차츰 타이완의 교류공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더하여 마침내 이익만을 탐하던 변질 차루는 업종 전환을 하게 되어, 차관문화 또는 차루문화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차루가 이끌어왔던 사회적 순기능도 이를 계기로 차츰 영향력을 잃고 타이완 사회는 진중하면서도 낭만적이고 긍정적이며 전통적인 성격을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또 차를 마시면서도 차문화는 얇아지고 차를 다루는 사람들도 신뢰받는 대중적 친구의 지위를 잃어가면서 조금씩 삭막해졌습니다. 처음에는 그걸 차 마담들이 했겠지만 그건 어차피 어려운 일이었지요.
다음으로 홍콩의 경우입니다. 타이완의 차루 변질 방향이 퇴폐화였다면, 홍콩의 변질 방향은 딤섬点心식당화였습니다. 지금도 홍콩에는 차루라는 이름을 건 맛있는 딤섬식당이 여러 곳입니다. 어느 분께 소개한 적도 있는 린훵로莲香楼같은 차루도 이미 전통적인 차루라기보다는 식당에 가깝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차루에서 딤섬을 팔긴 했지만 오늘날 주와 부와 바뀐 것은 분명합니다. 그만큼 변질도 되었지만 변질 방향이 상대적으로 건전하다보니 아직도 홍콩의 차루는 나름대로 약간의 문화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차루 이야기는 아무래도 두어 번 더 해야 할 듯한데, 다음에는 일본과 중공(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차루가 어떠해야 할지 말씀을 드려보려 합니다.
사진은 제가 다니는 뒤안길의 이발소의 한 귀퉁이입니다. 오늘 이발하러 갔다가 연결 지어 차루 생각이 나는지라, 기다리는 틈에 벗들께 얘기를 늘어놨습니다. 이 이야기는 몇 분 벗들께는 도움이 될 듯하다는 생각도 짐짓 하고 있는데, 제발 그러시기를....(^o^) 참 제가 고색창연한 이발소에 다니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저는 준 민머리여서 좀 덜 민머리인 것처럼 다듬어야 하는데, 헤어숍에는 이런 다듬기 기술이 없는지라, 아직도 이발소만 다닌답니다.(#^.^#) — 장소: 콩지Pot지
들판, 동구, 혹은 풍광이나 지세 좋은 곳에 누정(樓亭)이란 소통 공간이 있었고, 저잣거리의 이발소도 훌륭한 우리의 문화소통 공간이었습니다. 미장원에 떠밀려 하루가 다르게 퇴락해가는 이발소는 현대사회에서 비루먹게 살아가는 우리네 중년 남성들의 현주소를 대변하는 듯 합니다. 이발소가 살아나야 고개 숙인 남자들이 살아납니다. 자, 이발소의 부흥을 위하여~!(댓글)
43. 2012.01.07
무서운 발상의 전환: 사진의 작품은 이싱에서 활동하시는 천젠핑陈建平대사의 '차호감상'인데, 원래는 연치 지긋한 사부로부터 차호에 대해 설명을 듣고 공부를 하는 어린 제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가 차호를 만들어가지고 와서 연치 높은 분에게 팔려고 하는 장면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어른은 왼손으로 값을 조금 깎아라 하고 아이는 그럴 수 없다고 버티는 장면이랍니다. 세상사 이렇게 달리 보일 수도 있으니, 참 재미있고도 무서운 일입니다.
이런 전환을 다른 이에게서 바라지 않고 스스로에게서 찾으려는 생각에서 올려본 것입니다. 세상 살아보니 가장 무서운 늪이 '나는 옳다'라고 믿는 것임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그게 스스로에게서 '자유'를 뺏어가는 도둑이었습니다.
발상의 전환에서 하나 말씀 드려보고 싶은 우리 옛 분들의 시간 개념에 대한 발상.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간과 더불어 시간이라는 좌표축 위에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좌표축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우리 옛 분들은 모든 존재의 생명적 운동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것이 시간과 공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시간과 공간은 미리 존재하는 좌표축처럼 보여도 원래는 생명활동의 파생 물이라는 것입니다. 벗님들께도 황당타 마시고 한번 같이 음미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한자로는 정양왕正阳王, 그들의 이름으로는 '쇠누라'!
이 땅에 오신 밝은 태양이란 이름으로 불리셨던 목동이 그의 어른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그의 벗들의 열렬한 도움을 받아 그의 젊은이들의 희망이 되도록 세운 나라, 난자오南诏!
그들이 나라를 세운 땅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성터, 그 성터를 지키는 북문과 중문에는 난자오의 이념을 보여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그 성이 뒷날 중수되었으니, 당시 난자오의 이념이라 하기엔 어렵다고 한다면, 성급한 결론이라고 지적은 해야겠지만, 일단은 받아들여주기 라고 청하겠습니다.
북문의 이름은 공진루拱辰楼, 뭇별들이 감싸고 도는 북극성이란 뜻입니다. 공자 말씀 가운데, "진실함으로 정치를 한다면 마치 북극성은 그 자리에 가만 있는데 뭇 별이 감싸고 돈다"는 구절과 궤를 같이합니다.
중문의 이름은 성공루星拱楼, 북극성을 감싸는 별, 특히 북두칠성을 가리킵니다. 일곱 가운데 둘은 하늘(해)과 땅이고, 넷은 겨울과 봄과 여름과 가을의 사계절이며, 마지막 하나는 마치 영화 '제6원소'의 이쁘고 똑똑하고 착한 처자처럼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늘은 나라의 이념과 목표를 상징하여 최고지도자에 상응하고, 땅은 나라의 재산과 법령을 상징하여 공동체구성원총화를 상징했습니다. 사계절은 나라의 주요 통치기관을 상징하는데, 현대식으로 옮기자면 씨앗에 상응하는 겨울은 국가전략원을, 파종에 상응하는 봄은 국가입법원을, 성장에 상응하는 여름은 행정원을, 결실을 판단하는 가을은 사법원을 각각 상징했습니다. 입법, 행정, 사법의 정립과 견제로 사회를 유지하는 현대의 정치구조와는 달리, 네 기관의 협의와 화해 및 조정으로 사회를 유지했습니다. 삼권분립만 생각할 게 아니라 사부연대도 한번쯤 음미해 볼만 하지 않을까요?
아무튼 자세히 말씀 드리기는 무엇 해서 얘기를 한걸음 옮겨봅니다. 난자오민국의 또 다른 근거지였던 오늘날의 쿤밍(이족의 종족명칭, 신이 내린 사람들이란 뜻)에도 그 남문이 남아 있는데, 그 문루의 이름이 태양으로 다가가는 문루라는 뜻에서 근일루近日楼입니다. 그 아래에는 진실함을 따르면 삶이 두터워진다는 뜻의 준덕귀순遵德归淳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일단 우리의 말부터 바루어놓자는 생각이 마치 업장처럼 다가옵니다. 오늘은 이 한 생각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고마하'
영화제목이 제6원소가 아니라 제5원소인데, 어쩌다가 이런......미련한 곰땡이 어쩔 수가 없군요......
(^-^)/-자기 뺨 후려치는 모습!
ㅎㅎ 저 모양이 자기 뺨을 후려치는 모습이라는 발상이 더 재미있습니다. 물론 맞으시는 분은 아프시겠지만요(댓글)
44. 2012.01.09
제 입으로 제 이야기를 하자니 좀 부끄럽고 쑥스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어떤 것은 벗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좋겠다 싶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오늘 드리는 사소한 이야기도 그런 경우입니다.
저는 옷이나 신발을 꽤 오래 입고 신는 편입니다. 특히 가죽구두는 적어도 10년 이상은 신습니다. 구두 장사 하시는 분이 들으면 싫어하시겠지만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고, 나름 버릇이 돼서 생각 안 해도 저절로 그럴 것이라 예상됩니다.
남의 가죽으로 내 발을 가리는 게 좋은 일도 아니겠지만, 그 보다는 가죽을 손질하는 과정에서 어머니 대지와 다른 작은 생명들이 너무나 싫어하실 많은 공정을 거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안 신을 생각까지는 못 하겠으니 신기는 신어야 하겠고, 어차피 신을 양이면 좀 아껴서 그만 신어도 되는 날까지 몇 켤레라도 덜 신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발이 발만 편하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다 떨어진 것을 억지로 신을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신는 날까지는 누가 봐도 깔끔하고 멀쩡한 신발을 신으려고 합니다. 실제로 제가 15년 신은 구두를 다른 분들이 보시고는 한두 해 신었거나 장만한지 얼마 안 되는 구두로 여기십니다.
그러기 위해 나름대로 관리를 잘 하는 편입니다. 하루 신은 구두는 반드시 잘 말려 땀으로 말미암는 변질이 없게 하고, 마르는 과정에서 변형이 일어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가죽이 터지거나 갈라지지 않도록 해줍니다. 깨끗하게 해주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물론 차호처럼 구두도 무리가 되지 않게 원칙적으로 번갈아 신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무구두 틀(통칭 슈트리)은 필수적입니다. 그것도 세균이 증식하지 않도록 향나무를 씁니다. 한번 마련한 구두 틀은 평생을 쓰고 다음 대에 물려줄 수도 있으니 그리 아깝게 여기지 않기로 했습니다. 여행 등 신발을 쉽게 번갈아 신을 수 없을 때나 습기가 특별히 많은 때는 건조제를 쓰기도 합니다. 아무튼 신고 입는 데 대한 사소한 제 생각도 정리하자면 책이 두어 권은 될 듯싶습니다.
아무튼 이런 사소한 얘기를 벗님들께 드리는 것은 늘 구체적이고 싶어서입니다. 비록 나이가 어리지는 않다 해도 제가 아직 구름 위를 노닐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좀 더 구체적이고 좀더 치열해서 삶의 대부분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도록 살고 싶습니다. 구체적이고 사소한 작은 틈으로 구름보다 형체가 없는 마음조각이 안개처럼 슬그머니 빠져나가고 스스로의 삶이라는 게 듬성듬성한 제 관념의 허수아비가 될까 조심하는 탓이기도 합니다.
오늘 함께 일을 나누는 식구들에게 잠시 대학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만으로 한 해가 되면 대개 직립인간으로서의 기능을 복원하게 됩니다. 그것은 외면입니다. 직립인간에 담긴 내적인 약속을 실현하는 데는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즉 직립인간이 회복되는 육체적 기간과 내면적 생활기간 사이에는 상당한 시차가 있을 것입니다. 대학도 그런 시차를 살펴 직립인간에 담긴 약속을 이뤄가는 지표에 대해 나름대로 밝히신 옛 어른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우선 분명히 하면 어떻겠습니까?"
약간 얘기가 날아다녔습니다. 다만 마음이 넓으신 제 벗님들의 도량을 믿기에......
사진은 올해로 일곱 살이 된 구두와 신발 틀, 그리고 여행갈 때 사용하는 신발 내부 건조도구입니다.
모든 제품을 아끼는 것은 좋은 습관이죠^^ 그렇지만 요즘은 많은 제품이 만든 사람의 혼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좀 아쉽네요. (댓글)
호강이나 사치를 싫어하지만 어떤 연고가 있어 John L. 이나 va..나 ber......같은 상표의 1er급 신발도 신어 봤는데, Yie선생님 말씀처럼 혼이 제대로 담긴 제품은 보기 어려웠습니다. (박현 선생)
많은 수의 장인이 장인 행세만하고 상업주의의 달콤함에 젖어 본질을 잊어버린 세상이 되었습니다 ㅎㅎ. 차라리 염천교의 구두장이들이 우리 아시아 사람들의 넙적 발에 맞는 신발은 더 잘 만들죠. (댓글)
45. 2012.01.10
약속이 하나 증발한 틈으로 여유롭게 차 한 잔을 즐기면서 눈을 돌리니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작은 도자기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제가 직접 윈난 리쟝에서 들고 온 것이고 그 자리에 있었던 기간도 짧지 않은데, 이제 새로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물고기 모양을 한 도자기가 이제서야 눈에 들어오자, 슬며시 두 가지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먼저 든 생각은 우리가 본다고 하는 행위에 두 가지가 있다는 옛 어른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는 사물이 눈으로 들어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눈이 사물에게 쫓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일러주시고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삼각형을 잡아라" "기둥을 세워라" "꼭지를 눌러라" 등 그때의 추억이 저를 웃음짓게 합니다. 또 이 구별방법과 훈련법이 참 쓸모가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든 생각은 저 도자기를 대체 왜 저렇게 함부로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려진 글자들이 제대로 맞지도 않는데다 그 내용의 글자가 왜 이 도자기에 있는지도 이해되지 않아서입니다. 물론 이해를 못하는 게 제 생각이 짧아서일 수도 있지만, 이 경우는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 합니다. 벼는 바다 밑에서 자라고 쌀은 사슴을 먹이는 물건이라고 하는 격이어서 말입니다.
가운데 있는 절구질하는 글자는 그렇다 치고, 바른손 편 위의 혜성을 가리키는 ‘짜'는 방향이 거꾸로 되어 혜성이 지구에서 우주로 날아가는 모습이고, 그 아래의 눈 쌓인 산에는 눈의 느낌이 담기지 못했으며, 아래의 달빛을 가리키는 '허버'는 빛을 느낄 수 없어서, 아무래도 글자를 모르거나 이 글자에 애정이 없는 이가 대충 그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 왼손 편 윗 글자는 이게 사람의 위장인지 호수인지 알 수도 없게 그려놓았고, 그 아래 글자도 풀 많은 산인지 목초지인지 분간이 어려우며, 옥을 그린 글자는 무슨 꼬치처럼 그려놓았고, 그 옆의 새는 뻐꾸기인지 뭔지 알 수가 없으며, 다리를 가리키는 글자 옆의 가운데 아래 글자는 개구리를 그린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글자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거나 디자인 등으로 활용할 때는 나름의 애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해를 잘 하고 그렇지 않고는 다음 문제라고 봅니다. 아무튼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구나 하는 돌이킴이 몸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지금 즐기는 차도, 타고난 고마운 눈도, 아름다운 소통도구인 우리말도, 우리가 주의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도 다 소중한데, 그 소중함을 제대로 담고 있는지 늘 스스로를 돌이켜 봅니다. 그리고 늘 부끄럽습니다. 다만 늘 부족한 걸 알면서도 돌이켜보기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기 싫어서입니다.
46. 2012..01.11
윈난 샹그리라로 들어가는 길목, 소 샹그리라! 이곳에 '야커지쩌'雅克吉泽라는 산장이 있는데, 가끔 찾는 곳입니다. 이곳이 쟝족 식 식당인데다 그들 방식의 불냄비(샤브샤브)요리를 제대로 하는 곳이어서 그러기도 합니다. 또 샹그리라에서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 경우, 특히 샹그리라의 딸이자 샹그리라 최후의 '바리'(바리교 전승자)이고 저보다 나이 많은 동생(자기가 원하니 어쩌겠습니까) 올해 70세의 아무阿姆가 새하얀 하다(축하의 뜻으로 걸어주는 얇은 목도리, 하다는 첫 땅이라는 뜻)를 들고 마중을 나와서 몇 곡의 환영가를 불러주는 곳도 이 산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집에 찾아간 어느 날, 많은 현지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글쎄 한국에서 오신 스님 같은 어느 분이 자기 좌석은 버려두고 그네들의 좌석으로 가서 기웃거리시더니, 마침내 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시더군요. 그래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답니다. 그분들은 약간 거칠기도 하지만, 매우 개방적이기도 하답니다. 이번에 기회가 있을 때는 어쩔지......아무의 연락처가 소식 없이 바뀌어버려서......따리의 이선생도 휴대전화기를 현지 진료 차 나갔다가 재래식 화장실에 빠뜨린 뒤 그녀와 연락할 방법이 없다 네요......
일종의 귀리증류주인 칭커주青稞酒는 쟝족의 전통주인데, 잘 내린 술은 맛도 일품일 뿐 아니라 고산반응을 예방하는데도 작은 도움이 됩니다. 이 집의 칭커주도 일품이고, 이 산장의 화당火塘(난로)도 쟝족의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토지'土地 '토황'土皇 '관음대왕'观音大王 등의 글자와 엉성한 그림들이 조잡하게 인쇄된 종이뭉치들, 이런 것을 일반적으로 '쟈마'甲马(또는 즈마纸马)라 부릅니다. 쟈마는 본래 북방계 기마종족들이 쓰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사실을 살피자면 동북아시아에 널리 퍼진 보편적 물건입니다. 쟈마를 연구해온 분들에 따르면, 중국 윈난의 따리에서만 무려 200여종이 넘는 쟈마가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루스벨트나 마오쩌뚱 쟈마도 있고, 공자님과 예수님의 쟈마도 있으며, 전염병과 호랑이의 쟈마도 있습니다. 따리의 이름난 재래시장인 깐까이(깐지 또는 깐지에, 赶集, 赶街)에 가면 다양한 쟈마뭉치를 살 수 있습니다.
쟈마는 기도를 하거나 제사를 올릴 때 그 용도에 따라 알맞은 종류를 골라 불에 태우는 물건입니다. 아직도 전통이 지켜지는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는 아직도 사진에서처럼 다양한 쟈마가 그것과 짝을 이루는 다양한 기도의 도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민속학의 연구소재나 민간예술의 연구대상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인간과 다른 존재 사이의 소통과 관련된 주요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아울러 소통에 대한 옛 분들의 일반적 관념을 읽을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소통은 곧 동의를 구하는 절차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냥 효율이 소통이 아니라 적절한 의례가 곧 소통이었습니다. 그냥 통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은 늘 하나의 의례와 절차여야 했고, 그런 절차를 거쳐야만 소통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절차와 의례를 거치지 않은 통함은 야합으로 간주되었고 사사롭고 정당하지 못한 밀통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즉 마음이나 편의에 따라 소통하지 않고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적절한 절차를 거쳐 당당하게 소통해야 그 소통이 동의를 얻은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소통을 해야 할 때 그 격식의 적절함과 부적절함은 논할 수 있지만 순수한 허례와 허식은 드물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옛 분들에게 쟈마를 쓰는 제사나 기도는 실제 우상 숭배가 아니라(변질된 것은 요즘의 일) 그 대상을 생명화 의인화하여 동의를 구하는 소통의 방법이었던 셈입니다. 그것은 허례허식이나 격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우 실용적인 소통의 공동체화였던 셈입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퇴임식과 새 대통령의 취임식이 통일된 것을 놓고 허례를 줄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현대적이라 할 것입니다. 허나 퇴임식을 따로 두고 그 퇴임식을 자신의 피심판 절차로 삼는다면 그것을 허례나 비효율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퇴임하는 대통령이 맨발로 편복을 걸치고 광화문 광장 높은 곳에 올라 서서 자신이 취임식 때 약속하고 맹세했던 것을 제대로 지켜냈는지를 국민들로부터 공개 심판 받는 절차가 곧 퇴임식이 된다면 그것은 꽤 괜찮은 소통의 절차가 될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칭찬을 상징하는 다양한 쟈마나 준엄한 질책과 응징을 상징하는 쟈마가 있어서 그걸로 간접적 축제적 심판을 한다면 그 쟈마의 쓰임새는 허식일까요? 그 절차 하나만으로 대통령은 집권기간 내내 퇴임식에 대한 선 어음 부채의식을 쉽게 떨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날이 죽는 것보다 두렵거나 소풍 가는 아이들보다 설렐 수도 있겠죠.
아무튼 우리가 이른바 서양식 문화인류학으로 쉽게 평결 내린 옛 격식들도 다시 살펴보면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만한 소중한 측면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게 어리석은 현이의 생각입니다. 자세히 말씀 못 올려 죄송스럽고, 번번히 양해를 구해 죄송스럽습니다.
아무튼 엄청난 종류의 쟈마는 공동체적 소통을 위한 다양한 주제와 방법이 존재했다는 방증일 수도 있습니다. 토지와 관련된 내용이 많은 이 사진은 이싱에서 범가호장의 기공식 때 쓰였던 쟈마의 일부입니다. 그 다양한 축제와 기도는 신앙적 형식이기 전에 소통의 절차였다는 점은 우리의 소통을 위해 어떤 절차가 어떻게 필요한지 생각하게 할 듯도 합니다.
저명한 대가를 만나고, 그 만남이 지속되면 대개 두 갈래의 변화가 나타나는 듯 합니다. 하나는 그 대가의 권위를 활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여가는 변화일 것인데, 그 가운데 차악은 여우가 범의 위력을 빌어 쓰는 이른바 호가호위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 모습은 비교적 안정된 조직사회, 예를 들어 대기업이나 공무원조직이나 규모가 있는 단체 등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최악의 모습은 그 만남을 이용하여 그 대가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을 그 대가의 맞수로 키워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불안정한 조직이나 변화가 많은 영역, 예를 들어 정치조직이나 역동성이 많은 사회조직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자신을 키워준 인물을 공격하여 자신을 키우는 모습이 이류정객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것은 그만큼 정치조직이 안정되지 못했다는 뜻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가운데 굳이 차악과 최악을 나누는 것은 아마도 그 사이에 배신이라는 문제가 개입된다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변화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처럼 그 대가를 존경하여 그 대가를 배우고 그 대가를 자신의 삶의 일정 영역에서 체화시키는 학습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 차선은 그 대가의 행동방식이나 활동방식 및 언어사용방식 등을 익히고 나아가 그의 사고체계를 익혀 자신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라 봅니다. 최선은 그 대가의 마음 길을 배우며 그가 대가로 된 까닭과 바탕과 경로 등을 살펴 자신의 삶을 한층 깊이 있게 해나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밖에도 그런 대가를 만났지만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으면서 흘려 보내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세 사람만 같이 가도 배울 스승이 있다는데 말입니다.
사진에 보이시는 세 분도 모두 특정 분야, 즉 자사예술분야의 대가들이십니다. 바른손 편부터 현존 최고령 중국공예미술대사 쉬한탕徐汉棠 선생이시고, 다음은 자사예술 설계방면의 최고 권위자이신 칭화대학의 짱소우즈张守智 석좌교수이시며, 마지막은 자사예술의 사회화의 최대 공로자인 중국도자협회의 스쥔탕史俊棠 부화장이시니, 이 방면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대가들이십니다.
이런 분들과 벗을 하면서 자사예술과 관련하여 저는 어떤 모습을 취했는지 돌이켜 봅니다. 제가 자사예술분야를 제 삶의 주요 영역으로 하지 않는다는 까닭으로 가볍게 지내온 것은 아닌지 돌아 봅니다. 최선의 배움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혹시 제가 그러지 못했는지도 돌아 보게 됩니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만큼 큰 죄도 없는 듯 합니다. 거듭 다짐하건대 벗님들은 제게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47. 2012.01.13
차마고도를 다룬 프로그램을 꽤 여러 편 보았습니다. 한국의 방송 제작자들께서 편집하신 것들뿐 아니라 타이완 분들이 찍은 것, 일본 분들이 만든 것, 동남아 국가들이나 중국 현지 방송종사자들께서 화면화한 것 등 제가 본 프로그램의 수가 적지 않습니다. 어떤 것은 자연을 중심으로 편집했고, 어떤 것은 차를 중심으로 찍었으며, 어떤 것은 문화와 역사와 풍속을 중심으로 만들었고, 어떤 것은 그냥 여행기처럼 화면화되었습니다. 어떤 것은 길었고 어떤 것은 짧았습니다. 또 어떤 것은 전문적이고 어떤 것은 업외적(아마추어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윈난 차마고도에서 반드시 만나야 하는 종족 가운데 한 종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을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도 매우 이상했습니다. 자치와 독립을 주장한다는 티베트 쟝족과 신쟝 위구르족도 나오는데, 이슬람 후이(回)족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중국인이 만든 프로그램에 그들이 등장하지 않다 보니, 다른 나라의 방송제작자들은 아예 그들에게 처음부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듯 했습니다.
차마고도가 생겨난 것은 여러 천 년이 되었고, 그 길은 대부분 각 종족들의 조상들이 이동해온 길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지리적 환경과 현실적 인구로 말미암아 차마고도의 간선이 된 길도 있고, 그 지선이 된 길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차마고도가 가장 활발하게 운용된 것은 서력 13세기에 몽고족이 주도하는 원제국이 자신의 영역을 거대하게 넓히면서부터였고, 이를 계기로 몽고족의 상업적 선봉부대가 된 후이족이 이 도로의 가장 주요한 주인공이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원제국과 더불어 후이족은 윈난의 여러 지역에서 자리잡고 때로 자신들만의 마을을 만들거나 때로 다른 여러 종족들의 마을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종족적 단결력이 뛰어난 그들은 차마고도에서 매우 강력한 상업세력이 되어 그 뒤 차마고도와 윈난 후이족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윈난 차마고도에서 그들의 마을을 지나지 않고서는 여행을 이어갈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윈난 차마고도에서 가장 중요한 몇 개의 마을, 웨이산巍山과 따리와 시저우喜州에서 후이족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조차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차마고도 프로그램들에서 그들은 침묵 속으로 밀려들고 있습니다. 웨이산의 경우 그 행정단위인 웨이산현은 이족과 후이족의 자치현 인데도 가장 근면하고 가장 부유한 그들의 이야기는 무슨 금기나 되듯 없어졌고, 따리나 시저우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대체 왜일까요? 저는 차마고도에서 그들의 이국적 이야기가 활발하게 회자되어 차마고도가 문화대동맥으로서의 본 모습을 드러냈으면 합니다.
사진은 웨이산현 성립 50주년 기념행사에서 후이족 여성들이 자신들의 민속의상을 입고 떼 춤을 추는 장면입니다. 후이족의 이야기는 차마고도에 남아 있는 이족과 하니족 등의 라임오랜지나무 향기와 바이족과 나시족의 서사시적 분위기에다 사마르칸트의 북적임과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사행시)가 주는 몽환적 새벽 풍취를 더해줄 것이고, 이것은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를 더욱 아름답게 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장미혁명의 두려움은 마땅히 사라져야 합니다. 행복과 평화를 위한 인류의 몸부림은 주의와 주장과 이념과 사상을 넘어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생동감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중국화에 반대했던 종족은 대부분 사마르칸트적 문화를 가진 종족과 중앙아시아적 특징의 종교를 신앙하던 위구르와 티베트 쟝족이었고, 다른 종족들은 대체로 적극적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는 편이었습니다. 이때의 갈림이 아직까지 윈난의 종족들에게서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습니다. 참 간단하고 분명한 문제가 아닌 듯 합니다.
오늘은 원고 안 쓰고 페북이나 보면서 노니까 참 마음이 한가합니다.
*\(^o^)/*
그렇게 한가한 시간도 가끔은 꼭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답사 중에 후이족, 이족, 하니족, 바이족, 나시족 등 다양한 민족의 문화와 풍속을 접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연 잎 위에 반찬을 차린다던 다이족의 음식문화도 접할 수 있는지요? (제가 완전 문외한입니다.)(댓글)
다이족의 지역은 이번에 포함되지 않는답니다. 해당 종족은 이족, 바이족, 쟝족, 푸미족, 후이족, 나시족 등입니다. 이족은 높은 산 8부 기슭에서 늘 만나게 되고요. 바이족은 우리 도와주시는 분과 기사님부터 시작해서 부지기수일 겁니다. 바이족 집에서 저녁식사도 하게 될 예정이고 바이족 출신 중국 최고 얼후연주자의 연주도 그 식사 끝나고 그 집 마당에서 함께 즐길 겁니다.. 쟝족과 나시족도 마찬가지이고, 후이족 마을 촌장 집에서 점심을 드시고 중국식 이슬람사원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이슬람여성을 위해 마련한 지구상 가장 깨끗한 수공업장도 보실 겁니다. 참고로 저희들 공장이랍니다.
쟝족의 힐머니 가수와 하루 저녁 파티를 열 거구요. 푸미족 마을에선 반나절 그들과 함께 보낼 겁니다.. 등등 많습니다. (박현 선생)
예, 선생님 기대됩니다. 80년대 후반 국교가 트이기 전 중국에서 한 달 동안 여기저기 주로 관광지 위주로 다녀서 평소에 '차마고도'권역과 '실크로드'권역에 대한 목마름이 심했는데 선생님께서 해갈을 시켜주실 것으로 기대되어 벌써 맘이 설렙니다. (댓글)
비행기표에 어려움이 없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박현 선생)
48. 2012.01.14
그냥 아무 누이의 사진을 하나 더 올립니다. 1960년대 중·후반(자신의 기억으로는 67년), 아무(43년생) 누이의 20대 중반 때의 모습입니다. 문화선전대에 끌려 다니며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랍니다.
제가 주목해서 봤던 표정에도 저 젊음이 녹아있었습니다. 우리 문화원에서도 완주의 옛 사진공모를 했었습니다만 사진은 기록이자 또한 이야기 그 자체입니다. 소중한 사진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그분의 소중한 이야기도 가지고 계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은 굳어진 것이지만 이때의 이야기는 굳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야기입니다. 기록과 이야기의 주고받음,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댓글)
이야기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이야기는 어떻게든 한 매듭을 지어드려야 할 짐으로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내고 싶은 대로 내자니 아무 누이와 그의 제자들이 걱정되고, 그렇다고 곡필을 할 수도 없고 해서, 3년째 그냥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가 별도로 녹음해서 전해온 음악CD도 그냥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틈 봐서 링크를 걸어주신 이선생님과 이 동영상을 만들어주신 김선생님께 하나씩 드리려고 합니다. (박현 선생)
아무 님의 노래를 올려 주셨네요. 아무 누이가 험한 여정에서 샹그리라로 돌아와 옛 바리였던 그녀를 기다리던 분들 앞에 서서 다른 이야기는 못하면서 노래로 그 환영에 답하는 사진이 남아 있네요. 초라하지만 뜻 깊은 "바리여왕의 귀환"이었습니다. 아무 누이는 당신의 지난 모든 사진을 저에게 맡기시고, 버리든 그걸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내주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사진으로 함께하는 아무 님의 이야기.. 그것은 진한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한 이야기일 것 같아요.. 꿈도 담겨 있을까요? 희망을 노래하는 것도 있을까요? 부모도 모르고 버려진 어린 여자아이가 6살에 바리로 선택되고 또 버려지고.. 세상의 이목은 한반도로 집중되어 있을 때 중공의 군대가 침략하여 칸국(캄국 인지......)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고 이후 황량한 땅을 떠돌다가 험한 여정을 마치고 샹그릴라로 돌아오신 그 분의 소리는 어떠한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것일까요? 4년전 차예관을 방문하여주셨을 때 더 열린 마음으로 반겼어야 했는데 당시 제가 많이 모자라 그러질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연락처가 없으시다니 그 분의 근황을 어떻게 접할 수 있을 지...... 모쪼록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빌 뿐입니다.. (댓글)
사실 두벌식 한글 자판에 문제가 좀 있습니다. 초성과 중성과 종성으로 구성되는 한글의 특징상 자음을 입력하는 비중이 훨씬 큰데, 자음이 모두 왼쪽에 몰려 있어서 오래 작업을 하면, 왼쪽이 좀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오늘도 원고작업 제치고 그냥 놀기로 했습니다. 노는 김에 또 옛 글 하나 올립니다. 아무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했던 2007년의 글인데, 다시 여기에 옮겨봅니다. 그녀가 전해준 열일곱 살 때의 사진과 함께 말입니다. 벌목장에 끌려가 목공들과 함께 일하던 그때, 아무를 알고 있던 어른들이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을 가련하게 여겨 "아무들은 노래나 불러라, 너희들이 노래로 우리 힘을 돋구어주면 우리가 너희들 몫까지 다 즐겁게 할 테니까"라고 했던 그 시기의 사진과 함께 말입니다. 참고로 문장은 [ ] 내부를 제외하면 오자까지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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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갑신년 어느 가을날의 이른 밤이었습니다. 그때 6순의 그녀는 적지 않은 관광객이 찾아 드는 해발 3,400미터의 쭝덴(中甸) 샹그리라[샹바라], 그 곳에 있는 어느 외딴 공연장에서 너무나도 열정적으로 민요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가르마를 곱게 타고 비녀를 찌른 머리, 꽤 오랫동안 입어왔을 장족 여인의 복장, 허름한 시설 때문에 현장 반주도 없이 녹음반주에 맞춰 바람처럼 시원하게, 파도처럼 열정적으로, 초원의 먼지처럼 소박하게, 구름처럼 아련하게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바라보며, 저는 ‘아, 이것이 바로 장족의 소리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6순의 몸이라고는 도저히 짐작하기 어려운 물결 같은 몸놀림과 탁 트인 목소리, 소녀와 같은 맑음과 갖은 풍상을 겪은 중년의 고뇌와 모든 것을 갈무리한 노년의 편안함이 하나로 어우러진 눈빛, 허나 그 눈빛은 다른 한편 불빛처럼 광채를 뿜기도 했습니다.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는 관중들은 하나 둘 씩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하다’(축복을 상징하는 길고 하얀 천)를 벗어 들고 무대로 나아가 그녀에게 걸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장족의 ‘하늘여인’(무녀)일 거라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민요를 부르는 예인으로 살아가는 장족의 무녀가 틀림없으리란 확신마저 들었습니다. 허나 함께 다닌 벗들이 또한 여럿이어서 그런 것을 확인해보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을유년 봄 저는 그곳에서 다시 그녀를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비슷했지만, 한 해 사이에 그녀는 좀 지쳐 보였습니다. 좀 슬퍼 보이기도 했습니다. 눈에서는 불빛 같은 광채가 사라졌고, 몸짓과 노래에도 힘이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나이든 그녀는 움직이는 인형처럼 노래를 부르고 바로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그녀와의 인연이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병술년 봄에 저는 다시 그 먼 곳으로 찾아가 그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또 약간의 일거리가 있어서 그녀를 만나야만 했습니다. 당시 교육방송 라디오 팀과 함께 저는 장족의 무녀와 무악을 찾고 있었으며, 제가 아는 이 가운데 가장 먼저 만나보고 싶었던 이가 바로 그녀, 아무(阿姆)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외딴 공연장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저는 먼저 물었습니다. “누이는 천녀(天女, 장족의 무녀)이지요?” 깜짝 놀란 듯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장족의 민속음악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매듭지어질 무렵, 그녀는 다음날 자기 집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긴 채 종종걸음을 치며 공연장의 대기실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사실 쭝덴의 중심지는 이미 현대화가 진행되어 건축의 양식이나 그들의 복장을 빼고 나면 장족의 옛 모습이 [꽤] 사라진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날 저희가 찾아간 아무의 집도 그런 중심지의 어느 모퉁이였습니다. 허나 그녀의 집 마당을 들어서자 이곳이 아직 가난한 장족의 삶터임을 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를 집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녀와 올해 마흔이 된 그녀의 제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이른바 그녀의 신딸이었습니다. 마침 신딸은 찾아온 손님에게 점괘를 풀어주고 있는 중이어서, 우리는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아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허나 신딸의 점괘풀이 시간은 생각보다 길어서 우리는 아무의 방에서 몇 달 만에 찾아왔다는 신딸의 남편이 내온 수유차를 마시면서 아무런 대화도 없이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쇄청차와 야크 젖[사실 야크에게는 젖이 없습니다. 야크는 수컷이기 때문입니다. 야크의 짝은 디리 또는 나커라고 부르는데, 샹그리라나 호주의 캉가루<나는 모른다의 원주민어>라는 말이나 다리이름이 강 이름으로 와전된 양쯔강 처럼 서양사람들이 잘못 옮긴 것입니다]으로 만든 치즈와 들깨가루와 설탕 등을 넣고 만든 장족의 수유차야 이미 습관이 될 정도로 익은 맛이었지만, 아무런 대화도 없이 장족 무녀의 집에서 향불을 피워놓고 마시는 수유차의 느낌은 너무나 독특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잊어버린 그 맛을 어찌 기억하겠습니까만, 마치 어머니의 젖을 마시는 듯 편안한 느낌이 몰려들었습니다. 순간 먼 땅의 낯선 느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언어가 불편해도 답답함이 없었고, 처음 만나는 장족의 무녀도 누이 같았으며, 가난한 무녀의 집과 부끄럼을 많이 타는 신딸도 이미 수십 년을 만나온 사람들인 양 편안하기만 했습니다. 이윽고 신딸의 점괘풀이가 끝났고, 우리는 그 방으로 옮겨가 신딸이 부르는 무녀들의 이런저런 노래도 듣고 아무의 노래도 더 들으면서 우리가 왜 남인지 궁금해지는 분위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녀는 자기보다 제 나이가 더 적은 것을 알면서도 ‘오빠’라고 부르면서, 만난 것이 기뻐서 웃다가 너무 기뻐서 울다가 하기를 거듭했습니다. 정말로 가난해서 내올 것이 없고,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그녀에게 저는 “그래도 누이는 하늘의 딸인데”라고 대답하니, 6순의 그녀는 “하늘의 딸이라는 소리를 50년 만에 처음 듣네요”라고 대답하면서 그 뜨거움이 제게까지 전해지는 그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누군지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요. 초원을 떠돌다가 일곱 살에 신어머니가 나를 거두어 그 손에서 자랐어요. 그 뒤 다시 초원을 떠돌며 모진 세월을 보냈지요. 요즘이야 노래라도 부르면서 살지만 온갖 천대도 다 받아봤지요.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정말......하늘의 딸이라는 말, 이제는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하네요.”
이야기는 길었습니다. 반나절이 지나고 우리가 일어나야 할 무렵, 그녀는 온 집안을 뒤져 두 가지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마 어느 누군가 목숨을 걸고 따왔을 ‘바위 꿀’을 통째로 내와서 다 먹고 가라고 하는가 하면, 그녀가 소중히 간수했을 아주 큰 ‘하다’를 들고 와서 눈물이 마르지 않은 눈에 웃음과 아쉬움을 담아 “자쉬떼라”(직역하면 그대의 땅에 햇님이 가득하기를, 그래서 만사여의의 뜻으로 쓰임)라고 기원을 하며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저는 그 땅에서 제법 많은 “자쉬떼라”를 들어보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인사말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말의 “반갑습니다”(그대는 나에게 신과 같으신 분입니다)가 형식적인 것처럼 말입니다. 허나 그녀의 인사는 정말이지 우리의 일생을 축원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녀의 수유차는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고, 쭝덴 초원을 흐르는 ‘땅의 젖’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무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녀가 내오던 수유차를 생각합니다. 그녀의 “자쉬떼라”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녀가 걸어준 '하다'는 아직도 제 목에서 부드럽고 가시랑 거리는 느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날의 한 잔 차는 처음 만난 사람을 오누이로 이어준 ‘핏물’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보니 선생님께서 아무 님을 바리데기의 바리와 비교하신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요즘 좋은 인사말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바니하' ‘자쉬떼라’...... 이 또한 소통과 사귐의 기쁨입니다.)(댓글)
2008년도에 아무 선생님을 처음 뵙고.. 오래 전에 알고 지내던 그런.. 지금도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때 여행 중에 선생님께서 어디론가 안내하시며.. 한시도 쉼 없이 말씀 전해 주시며 이리저리.. 아무튼 많은 곳을.. 산소마스크도 써가며 누군지도 잘 모르는 낮 선분들과 함께 했던 여행 중에서 처음 만난 분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기억으로는.. 워낙 생각이 없던 저라(지금도 생각 없긴 마찬가지지만요^^)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분 한 분 얼굴 정도는 그려집니다. 그때 그곳에서 만났던 많은 분들과 그 중에 한 분이신 아무 선생님..
샹그릴라에서 처음 아무 선생님을 뵙고.. 한 분 한 분 목에 솜털 같은 하얀색 하다를 목에 걸어 주시며 반갑게 손을 잡아주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뎃글)
여행 중에 많은 기념품도 가방에 꾸역꾸역 챙겨왔지만 그 중에도 아무 선생님이 목에 걸어주신 하다를 여행 가방 한곳에 잘 간직하고 왔습니다. 왠지 그냥 버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댓글)
지금 저의 손목에는 저의 아내가 아무 선생님께 선물로 받은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천안 석으로 만든 염주 같은 팔찌가 저의 손목에. . 먼가 (정표?) 정의 표시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항상 같이 하고 있습니다. 아내도 문득 문득 잘 지내실까? 여보......하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댓글)
피도 살도 섞이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은 낯선 사람에게 왜 이런 감정이 생기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댓글)
아내가 중국어 배워야겠답니다.. 다음에 선생님 만나 뵐 때는 그냥 수다 좀 떨고 싶답니다. ^^(댓글)
49. 2012.01.15
목숨을 나누었던 벗 해중解中 서해진 선생께서 오늘 설을 쇠기 위해 중국 이싱으로부터 돌아오셨습니다. 그 동안 페이스북 마저 쓸 수 없는 이싱에서 살림을 챙기시느라 이 공간에서 얼굴을 보이지도 못하셨습니다. 이제 그곳도 얼추 마무리가 되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으니, 앞으로는 좀 자유로운 행보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곳 일이 수월치 않은 일인데 그 일을 도 맡겨놓아서 마음이 늘 아리고 무거웠습니다. 이제 공항에서 나오시면 함께 들깨 탕 한 그릇으로 점심이나 같이 해야겠습니다. 해중선생과 안면이 있는 벗들께선 함께 위로와 축하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50. 2012.01.17
三宝慈为首 百善孝为先, 仁者乐山 山高不如祖德高, 智者乐水 水长不如亲恩长.
永怀崇德报. 本 毋忘饮水思源. 要为民族尽大孝 要为国家尽大忠. 投射伦理之光 照亮世界, 柘大宗教之光 照亮人间..
"보배로운 가르침엔 자비로움이 머리요, 모든 착함엔 모심이 먼저라. 공도를 가는 이 산을 즐긴다지만 산이 높은들 조상의 은덕만큼 높을 것인가? 지혜로운 이 물을 즐긴다지만 물이 긴들 부모의 은혜만큼 길 것인가? 영원토록 가슴에 품을지니 진실을 높이하고 근본에 보답하라. 잊지 말지니 물을 마심에 그 뿌리를 생각하라. 민족을 위해선 큰 모심을 다하고, 나라를 위해선 큰 받듦을 다하라. 윤리의 빛을 쏟아 부어 세계를 밝히며, 큰 가르침의 빛을 넓히어 사람세상을 밝히라."
타이완 철관음의 주요 산지인 무짜木栅, 거기에는 타이페이를 대표하는 주요한 도교 사원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무짜 지남궁指南宫입니다. 그 사원의 한 귀퉁이에 놓인 빗돌에 새겨진 글귀입니다. 저는 이제 그 글을 이렇게 옮겨 봅니다.
"가르침을 받들어 그 길을 가려거든 먼저 자비로움을 익혀라. 착한 일을 하고 싶거든 먼저 모심과 낮춤의 도리를 익혀라. 길게도 이어지는 산들의 흐름이 조화라 여겨 그 모양을 즐기려는가, 그대는 조상으로부터 이어와 오늘 여기에 있도다. 흐르는 물이 모양에 갇히지 않고 멀리 흘러감을 즐기려는가, 그대는 어버이의 보살핌으로 살아나 여기까지 왔도다. 날마다 새로워짐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임을 분명히 하라. 어떤 일에도 뿌리가 있어 그 뿌리부터 살펴봄이 마땅하도다. 세상 천지에 내가 모시지 않을 만한 사람이 그 어디에 있으며, 여러 사람이 만든 규범 가운데 내 임의로 내쳐버릴 규범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을 밝힐 내 도리는 먼저 내 스스로 나의 사람됨을 다하는 것이요, 사람세상을 밝힐 내 방법은 먼저 내 스스로에게 나의 원칙을 적용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예외를 두지 않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베푸는 사람인가? 나는 모시는 사람인가? 나는 높일 것을 높이는 사람인가? 나는 나의 뿌리를 내가 배운 관념에서 찾지는 않는가? 나를 위해 살지 않아 생겨난 따뜻한 힘이 내게는 있는가? 나에게도 밝은 세상에 살만한 공로가 있는가?"
이제부터 곰땡이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더 착하게 살겠습니다. 더 따뜻하게 살겠습니다.
요즘도 저는 가끔 스스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합니다.
"더 열심히 배워야지. 이렇게 놀다가 나중에 커서 뭐가 되려고......"
5회분은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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