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 교수의 역작
불교 초보탈출 100문 100답
“서산 대사도 살생으로 인한 과보를 받았을까?” “부처님은 윤회를 가르치지 않았다는데 사실일까?”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해 참전했던 서산 대사는 살생으로 인한 과보를 받았을까?〉〈불자가 아닌 사람이 불교의 계율을 어겨도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모두 “그렇다”이다. 〈초기 선승들은 좌선을 하지 않았다는데 사실일까?〉〈부처님은 윤회를 가르치지 않았다는데 사실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모두 “아니다”이다. 이런 질문에 우리는 그리고 불자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상식’에 의존해 답변하거나 ‘그럴 수도 있다’고 무책임한 답을 만들어 낸다면 그 사람은 아마 영영 불교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반짝 떠오른 의문이나 풀리지 않는 의심을 파헤치기 위해 팔만사천의 경전을 헤집거나 선지식을 찾는 일도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현대를 살아가면서 수없이 부딪히는 경제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 혹은 일상의 소소한 문제에 대해 불교의 명쾌한 답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런 것들이 불교 공부에 막 눈을 뜨고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고 싶은 사람들의 어려움이다. 이 책은 100개의 질문 그리고 100개의 답변을 통해 이런 고민을 단박에 풀어준다. 경전과 선지식을 대신할 만한 명쾌하고 논리적인 답변!
불교 초심자부터 불교 전공 학생, 물리학 교수, 스님 등 만 3년 반 동안 저자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질문들은 그야말로 다양하고 기발하다. 그런데 질문보다도 저자의 답이 더욱 빛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명쾌한 답변 때문이다. 저자는 무엇을 물어도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철저히 경전에 근거해 논리 정연하고 명쾌한 답변을 내놓는다.
<서산 대사도 살생으로 인한 과보를 받을까?>에 대한 답변에서는 “인과의 법칙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고,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고 불교의 인과론을 설명하며 “따라서 살생에 참여한 서산 대사는 그에 따른 과보를 받았다.”고 ‘경전’을 근거로 답변한다.(마치 용수보살도 작은 과보로 신체적 고통에 시달렸던 것처럼) 다만 “삼독심에 의한 살생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살생’을 구분”해야 하고 서산 대사의 살생을 “미래나 내생에 고통의 과보를 받을 각오하고서, 보다 큰 선을 위해서 살인을 하고 살생을 하는 것이 보살도”로 규정한다. 서산 대사의 ‘위대함’에 대해 의심하지 않지만 누군가 한 번쯤 의심해 볼 수 있는 질문이다. 필자는 이런 질문을 통해 불교의 인과론에 대해 적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 중에는 불교를 곡해할 수 있는 것들이 무척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초기 선승들은 좌선을 하지 않았다는데?>라거나 <부처님은 윤회를 가르치지 않았다는데?> 류의 물음. 저자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일침을 놓는다. 이런 주장은 경전이나 선어록 그리고 불교사를 꼼꼼히 살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정말’일까 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주장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모든 것의 기저에는 현대 불교학 탄생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특히 “초창기 서구의 불교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불교를 비판하기 위해 불교를 연구했기에 기독교적 세계관에 맞지 않는 불교의 신비한 교리들은 모두 잘라버린 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교리만을 추출하여 불교라고 규정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윤회를 부정하면 초기 불전의 2/3 이상이 폐기되어야 하고, 초기 선승들이 좌선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마치 미래인들이 난지도를 파보고 썩지 않은 라면 봉지를 근거로 “현대인들은 라면만 먹고 살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불교에 대한 갖가지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것은 책과 사람, 즉 ‘경전’과 ‘선지식’이다. 하지만 궁금할 때마다 선지식을 찾아 나서기도 어렵고, 답 하나 알기 위해 수많은 경전과 논서를 뒤지는 것도 쉽지 않다. 요즘엔 ‘네이버 지식 검색’과 ‘다음의 카페’에 질문을 올려보지만 익히 알려진 대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불교에 대한 질문과 답변은 상당 부분 오도된 지식 투성이며 선사 흉내를 내는 개인 답변에 불과하다. 반면 이 책의 저자는 철저히 경전에 의거하고 있으며 초기불전과 대승경전을 넘나들며 질문자들의 물음에 명쾌하게 답변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돋보인다. “궁금하면 물어라!” 이것만 알면 초보는 탈출 이 책은 크게 ‘수행’, ‘교리’, ‘생로병사와 윤리’ 그리고 ‘불교와 이웃종교’에 대한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수행>에 대한 질문은 ‘불교 신행의 목표는 무엇인지’, ‘수행자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윤회의 고리를 끊었다면 그 이후의 상태는 어떤 것인지’부터 초기불교, 대승불교 그리고 탄트라 불교에 대한 질문과 답들로 구성되어 있다. <교리>에 대한 질문과 답에는 불교의 우주관이나 시간관을 비롯해 오온이나 12처 등 불교의 핵심교리에 대한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윤리>에 대한 장에는 ‘선과 악, 윤리의 기준이 무엇인지’, ‘음행에는 플라토닉 러브와 같은 것도 포함되는지’, ‘뇌사에 대해 불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 실생활에서 일어날 만한 궁금한 것들이 망라되어 있으며 <이웃종교>에 대한 장에는 불교를 중심으로 힌두교나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등의 이론과 불교를 비교하는 글들이 할애 되어 있다. 모든 질문이 관련 책 하나를 다 읽어도 하나의 답을 얻기 힘든 것들이지만 저자는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을 통해 질문을 올린 사람들의 궁금증을 단박에 해결해 주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은 불교 입문에 막 입문한 사람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교과서이자 사전’과 같은 책이 될 것이다. “만 3년 반에 걸친 문답”, 체계불학 이 책에 나온 질문과 답변은 김성철 교수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라온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성철 교수는 만 3년 반에 걸쳐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200여 개가 넘는 질문을 받았다. 그 중 이 책에는 중복된 질문과 현학적인 질문을 제외하고 100개를 추렸다. 그는 불교계에서 누구보다 명쾌한 논리 전개와 풍부한 필력으로 이름이 높다. 이런 이유로 그에게 궁금한 내용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필자는 “매번 질문이 올라올 때마다 자판을 두드리기가 망설여”졌지만 “기발한 질문, 쟁점이 될 만한 질문, 진지한 질문이 올라오면 만사 제쳐 두고 컴퓨터 앞에 앉게”됐다고 말한다. 그의 답변은 교리나 수행을 ‘학문’으로만 보지 않고 철저히 ‘신앙’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높다. 요즘 그의 관심사는 ‘체계불학’이다. 서문을 통해 밝혔듯 그는 어떤 글을 쓸 때나 이것을 염두에 둔다. 근대 이후 서구를 중심으로 불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 인문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경영을 위한 학문적 보조 수단인 지역학, 언어학, 종교학 분야에서 불교가 연구되었는데, 서구 인문주의 전통의 객관성과 과학성, 합리성을 방법론으로 삼았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인문학적 불교 연구는 불교에 대한 인습적 오해를 시정한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갖지만, 마치 실험동물을 다루듯이 불교를 해부하다 보니 불교의 종교성이 망실되기 쉽다. 갖가지 이설(異說)들이 난무한다. … 이를 접한 불자들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학문과 신앙이 하나된 새로운 시스템을 연구 중에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답변들은 저자의 이런 노력의 흔적이 흥건히 배어 있다. 아직도 저자의 홈페이지에는 이런 궁금증을 묻는 ‘불교 초심자’들의 질문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다. ▦ 저자 소개 김성철(홈페이지 주소 : http://www.kimsch.net/) 1982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1997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철학박사) 1993년~1999년 동국대(서울, 경주) 및 중앙승가대 등 강사 역임 2000년 3월~현재 동국대(경주) 불교학과 교수 현재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사)한국불교학회 이사,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인도철학회 편집위원, 보조사상연구원 편집위원으로 있다. 저서로는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연구』(지식산업사, 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불교시대사, 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중관사상』(민족사), 『회쟁론 범문?장문 문법해설집』(경서원)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론』, 『회쟁론』, 『백론?십이문론』, 『불교의 중심철학』(이상 경서원) 등이 있다. 1996년 제6회 가산학술상(가산불교문화연구원) , 2004년 제19회 불이상(불이회), 2007년 제1회 올해의 논문상(만해사상실천선양회) 등을 수상했다. ▦ 목차 01 수행 001 불교의 신행 목표는 무엇이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002 수행자는 무엇을 얻고자 멸진정(滅盡定)에 드는 것입니까? 003 열반하여 윤회의 고리를 끊었다면 그 이후의 상태는 무엇인지요? 004 도대체 무엇이 도를 닦는 것입니까? 005 불교 수행을 하지 않아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006 계, 정, 혜 삼학은 무엇입니까? 007 계, 정, 혜를 어떻게 닦아야 하나요? 008 삼독심이란 무엇이고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009 성불은 인간계에서만 가능합니까? 010 색계 선(禪)의 경지에서 아라한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011 지관수행과 구차제정의 관계, 그리고 제4선과 깨달음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012 세속적 복락을 초래하는 유루업도 성불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까? 013 멸진정에 든 수좌에게 전신마취를 건다면? 014 무여의열반에 드신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 가능한가? 015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 조사선의 수행법은 어떻게 전개되고 발전되었습니까? 016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비유로 중관, 간화선, 위빠사나를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017 초창기의 선승들은 좌선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018 남종선과 간화선은 어떻게 다르고, 남종선의 스님들은 무엇을 하며 살았나요? 019 인간의 언어는 깨달음에 장애가 됩니까? 020 훌륭한 선사란 어떤 분이며, 선문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021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022 밀교의 복덕 쌓기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023 탄트라(Tantra)불교란 무엇입니까? 024 밀교에서 말하는 색신, 법신, 보신, 화신은 무엇입니까? 025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하는 근본적인 기준은 무엇입니까? 026 대승에서도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합니까? 027 불교수행과 생업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02 교리 028 불교에서는 우주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나요? 029 시간에 시작이 있습니까? 우주공간에 끝이 있습니까? 030 객관세계는 무엇인가요? 도대체 존재하기나 하는 건가요? 031 물질과 마음, 그리고 인간과 지구와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나요? 032 불교에서는 하늘나라[天上]와 신(神)을 어떻게 보나요? 033 연기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034 연기론은 결정론 아닙니까? 035 윤회와 업보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036 부처님은 윤회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037 윤회와 시공간 개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038 악업의 종자는 수행이나 참회를 통해 사라지나요? 039 윤회는 삼강오륜 등 유교적이고 상식적인 가족관계를 파괴하는 이론이기에 잘못된 것 아닌가요? 040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가르침은 다른 교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041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와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는 무슨 차이가 있나요? 042 의도적으로 짓는 업은 죄가 되지 않습니까? 043 개미나 모기를 죽여도 악업이 됩니까? 044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받게 될 과보는 무엇입니까? 045 자연 정복으로 현대문명을 건설한 ‘인간’은 과보를 받게 되는 겁니까? 046 깨달은 부처님도 업을 짓습니까? 047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048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 049 12처가 공하다는 깨달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1 050 12처가 공하다는 깨달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2 051 12처가 공한 것을 자각해도, 고통은 그대로 있는 것 아닙니까? 052 공이란 무엇입니까? 053 중관학에서 4구 판단 모두를 비판한다고 하지만, 그런 비판 역시 제4구 아닙니까? 054 중관논리의 ‘판단 비판’ 중에서 제1구가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055 불공(不空)은 무슨 뜻입니까? 056 아공법유(我空法有)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057 유위법(有爲法), 무위법(無爲法)은 무엇입니까? 058 우리의 마음, 즉 식(識)이 있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059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1 060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2 061 유식무경이라고 해도 나의 식(識)과 남의 식이 구분되기에 실재론과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062 부처님의 법신, 보신, 화신은 무엇입니까? 063 열반에 든 부처님이 색신으로 나타나실 수 있습니까? 064 여래장사상은 유아론(有我論)과 비슷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03 생로병사와 윤리 065 선과 악, 윤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066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067 채식도 살생 아닙니까? 068 석가족의 멸망 일화에서 보듯이 물고기를 잡거나 파리, 모기를 잡아도 그에 대한 과보가 그렇게 엄청날 수 있습니까? 069 살생이 나쁜 것은 알지만 농사를 짓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070 100만원을 사기 당했을 때 그것을 받아내는 것이 좋을까요, 잊는 게 좋을까요? 071 어떻게 하면 음욕을 제어할 수 있습니까? 072 음행에는 ‘플라토닉 러브’와 같은 것도 포함됩니까? 073 지범개차의 정확한 의미가 궁금합니다. 또 임진왜란 때 살생을 했던 승병들은 과보가 없을까요? 074 불자가 아닌 사람이 불교의 계율을 어길 경우 그에 대한 과보를 받습니까? 075 반야바라밀다를 체득할 경우 도덕적, 윤리적으로 어긋나는 일을 절대 하지 않을까요? 076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불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칩니까? 077 뇌사자의 장기기증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078 중음신이 새로 태어날 때 입태는 언제 이루어집니까? 079 중음신에게서도 수, 상, 행이 작용합니까? 080 중음신에게도 물질적인 몸이 있습니까? 081 미물인 벌레가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082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는 삼계 밖에 있습니까 안에 있습니까? 04 불교와 이웃종교 083 종교는 왜 ‘위대한 거짓말’이라는 말을 들을까요? 084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 아닙니까? 085 불교의 열반과 기독교의 영혼불멸 사상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요? 086 불교에서 말하는 범천은 타종교의 신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렇게 생각해도 맞는 겁니까? 087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은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088 불교 이전의 윤회설과 불교의 윤회설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089 불교의 윤회설과 외도의 윤회설은 어떻게 다른가요? 090 힌두교에도 육도윤회설이 있었나요? 091 샹까라 신학의 무명과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은 어떻게 다른가요? 092 우빠니샤드의 ‘범아일여(梵我一如)’와 원효 스님의 ‘일심(一心)’은 어떻게 다른가요? 093 진여는 힌두교의 브라만과 마찬가지 아닌가요? 094 힌두교의 아뜨만은 공(空)과 같은 것 아닙니까? 095 크리슈나무르티의 오도 체험과 불교의 깨달음은 같은 것입니까? 096 ‘여래장’이나 ‘불성’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마찬가지 개념이 아닌가요? 097 가톨릭 신부인 라모뜨 교수의 불교 연구는 신뢰할 수 있나요? 098『주역』의 음양설을 유식학이나 연기설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099 융의 집단무의식과 아뢰야식을 비교할 수 있을까요? 100 타종교의 권력 앞에서 자신의 종교심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책 속으로 문 : 부처님은 윤회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답 : 부처님 역시 윤회를 가르치십니다. 윤회가 부정되면 불교 전체가 부정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을 때 세 가지 신통력이 열렸다고 하는데 첫째는 숙명통(宿命通)이고, 둘째는 천안통(天眼通)이고 셋째는 누진통(漏盡通)입니다. 이를 삼명(三明)이라고 부릅니다. 삼명 가운데 숙명통과 천안통은 윤회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숙명통은 자신의 전생을 모두 기억하는 신통력이고, 천안통은 다른 생명체의 전생과 현생의 관계를 모두 알고, 내생을 예측하는 능력입니다. 숙명통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인과응보의 연기법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자각하게 되고, 천안통을 통해서 인과응보와 연기의 법칙이 다른 생명체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보편법칙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보편법칙을 알게 됨으로써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누진통을 얻습니다. 현대불교학은 서구에서 발생한 인문학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초창기 서구의 불교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불교를 비판하기 위해 불교를 연구했기에 기독교적 세계관에 맞지 않는 불교의 신비한 교리들은 모두 잘라버린 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교리만을 추출하여 불교라고 규정해 왔습니다. 만일 윤회를 부정한다면, 초기불전의 2/3 이상이 모두 폐기되어야 합니다. 윤회를 부정하면 모든 불교 수행은 무의미해집니다. 왜냐하면 불교수행이 지향하는 열반, 해탈이란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서구불교학자들은 신앙이 아니라 인문학적 호기심으로 불교를 연구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신앙과 수행의 불교학’이 새롭게 탄생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불교학을 체계불학(Systematic Buddhology)이라고 부릅니다. 본문 중 36번째 질문과 답(본문 171쪽~172쪽) 문: 채식도 살생 아닙니까? 답: 불교의 계율은 절대 절명의 지상명령이 아닙니다. 계율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경우, 미래에 언젠가 괴로운 과보를 받는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율을 어길 경우에도, 그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어긴 다음의 참회 여부에 따라, 계를 어길 때의 마음가짐(삼독심의 유무) 등등에 따라 그에 대한 과보가 달라집니다. 삼귀의 후에 오계를 받는 것이 일반적인 불자 입문의식이지만, 오계를 받지 않고 삼귀의만 다짐해도 불자로 인정됩니다. 오계의 경우도 모두 받지 않고 일부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바새오계경』이나 『대지도론』에서는 수계 정도에 따라 재가불자의 수준을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일분행자(一分行者): 오계 가운데 한 가지 계만 받고 지키고자 하는 재가불자 소분행자(少分行者): 오계 가운데 두세 가지 계만 받아 지키고자 하는 재가불자 다분행자(多分行者): 오계 가운데 네 가지 계만 받아서 지키고자 하는 재가불자 만행자(滿行者): 오계 모두를 받아서 지키고자 하는 재가불자 단음행자(斷淫行者): 오계 모두 지키면서 부부생활의 음행도 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재가불자 예를 들어 생선회집을 운영하는 분의 경우 ‘불살생계’를 받지 않으면 됩니다. 회사업무로 술을 마셔야 하는 분은 ‘불음주계’를 받지 않으면 됩니다. 장사를 하기에 거짓말을 많이 하는 분은 ‘불망어계’를 받지 않으면 됩니다. 수계식 때에 자신이 지킬 수 없는 계목에 대해서 복창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키겠다고 서원한 계목은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그럴 경우, 미래나 내생 언젠가 오계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직업이나 상황 속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상과 같은 가르침에 의거할 때, 가능하면 채식을 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맞게 원만하게 식사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채식을 하는 것이 옳고, 미래나 내생에 언젠가 채식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어야 합니다. 제 홈페이지에 링크되어 있는 ‘보리심의 새싹’ 홈페이지로 들어가 보시면 채식에 대한 좋은 가르침을 많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식물도 생명이기에 이를 먹는 것과 고기 먹는 것이 다를 게 없다는 얘기를 쓰셨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의거하면 식물은 중생에 속하지 않습니다. 생명과 중생이 동의어라고 할 때, 불교적 관점에서 식물은 생명이 아닙니다. 윤회의 세계인 삼계, 육도 그 어디에도 식물의 세계는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식물은 DNA로 이루어진 세포 덩어리일 뿐입니다. DNA와 세포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로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지, 수, 화, 풍 사대에 식(識)이 부착되어 있어야 중생입니다. 다시 말해 ‘고기 덩어리’인 육체에 중음신(中陰身), 또는 귀신이 오버랩 되어야 중생입니다.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셨던 경봉(鏡峰: 1892~1982) 스님께서는 식물을 우리의 손톱이나 머리칼과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식물이 중생에 속하지는 않지만 중생의 거주처(居住處) 역할을 하기에 율장에서는 풀을 함부로 베거나 나무를 함부로 잘라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식물 속에 살고 있는 중생(벌레 등의 미물)을 해칠 수가 있고, 다른 중생의 거주처를 빼앗는 꼴(투도)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율장을 보면 괴생종계(壞生種戒)라고 해서, 스님이 과일을 드시려고 할 때, 정인(淨人)이라는 사찰 내의 재가불자가 과일에 칼로 흠집을 낸 후 스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과일을 미리 ‘죽이는’ 시늉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과일이 생명이기 때문이 아니라 승가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식물도 생명이라고 주장하는 자이나교도(Jaina敎徒)의 비방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식물의 경우 음악을 틀어주면서 키울 경우 잘 자라고, 해치려고 할 경우 반응을 한다는 실험에 근거하여 식물도 생명 아닌가 묻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광물인 ‘물(水)’의 경우도 컵에 떠 놓은 후 좋은 마음을 보내주면 질이 좋은 육각수로 변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 식물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광물도 반응합니다. 다시 말해 온 세상이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 반응합니다. ‘모든 것이 생명’이라든지[華嚴], “그 어떤 것도 생명이랄 게 없다.”[般若]는 무차별적인 조망은 ‘생명’과 ‘무생명’을 가르는 지침이 될 수 없습니다. 생명과 무생명을 가르고, 그에 의거하여 살생하지 말라는 윤리적 지침을 제시하는 것은 철저한 속제의 일이고 분별적 활동입니다. 불교윤리적으로 ‘분별’할 때 식물은 불교적 의미의 생명, 즉 중생이 아니기에 식물을 먹거나 해치는 것은 살생이 아닙니다. 본문 중 67번째 질문과 답(279쪽~283쪽) 문: 불자가 아닌 사람이 불교의 계율을 어길 경우 그에 대한 과보를 받습니까? 답 : 불교윤리는 계(戒)와 율(律)로 구분되는데, 계는 자율적이고 율은 타율적이라고 합니다.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를 초래하는 인과응보의 세계에서 선악을 판가름 하는 기준이 계이고, 승가에서 생활하시는 스님들의 행동 규범이 율입니다. 그대로 일치하지는 않지만 현대용어로 풀어 말하면 계는 ‘윤리[Ethics]나 도덕[Moral]’에 해당하고, 율은 ‘법[Law]’에 해당합니다. 계에서는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이 모두 문제가 되지만, 율에서는 신업(身業)과 구업(口業)만 문제로 삼습니다. 계는 부처님의 명령이 아니라 연기(緣起)의 세계, 인과응보의 세계에서 발견된 이법(理法)으로서의 윤리이며, 선악의 기준이기에 불교신자든 아니든 계에 어긋난 행동을 할 경우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됩니다. ‘남을 해치는 행동’ 또는 남과는 무관하더라도 ‘고결하지 못한 행동’이 계에 어긋난 행동입니다. 그러나 율의 경우는 다릅니다. 비구 스님의 250계와 비구니 스님의 348계가 율의 조목들입니다. 율의 경우는 스님들에게만 해당됩니다. 타종교인은 물론이고 재가불자에게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승단의 규범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는 타종교인, 재가불자는 물론이고 무종교인과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지켜야 할 행동규범입니다. 그 어떤 종교를 믿든 계를 어길 경우 괴로운 미래가 초래되고 잘 지킬 경우 행복한 미래를 맞이합니다. 본문 중 74번째 질문과 답(303쪽~304쪽) |
출처: 책을 좋아하는 사람 원문보기 글쓴이: 연화
첫댓글 좋은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