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김씨의 발자취]
역사 탐방(歷史探訪)ㅡ
金德謙墓誌銘(김덕겸묘지명)
김덕겸
(高麗.1082~1150年.68壽)
<韓國 金石文追補>
<한국 금석문 추보>
李蘭映 編(이난영 편)
李丙燾 監修(이병도 감수)
金德謙墓誌銘(김덕겸묘지명)
所在: 國立博物館
(소재: 국립박물관)
年代: 高麗毅宗四年
(년대: 고려 의종 4년.
서기 1150년)
高麗國瑜伽業玄化寺住持解空見性寂炤玄覽通炤圓證僧統墓誌
(고려국유가업 현화사주지해공 견성적소현람통소원증승통묘
지)
寶文閣校勘文林郞尙食奉御同正 黃文通撰
(보문각교감문림랑상식봉어동정 황문통찬)
師諱德謙字則未聞俗姓金氏淸州上黨郡人也其六世祖守司徒三重大匡諱勤謙國初 //
(사휘덕겸자즉미문속성김씨청주상당군인야기육세조수사도
삼중대광휘근겸국초)
□□生子曰忠良官至門下侍中忠良生侍郞諱懷玉懷玉生大府少卿諱元
전(晉+戈={戈10劃}福也복 전)
元전生殿中內 //
(□□생자왈충량관지문화시중
충량생시랑휘회옥회옥생대부
소경휘원전원전생전중내)
給事同正諱德沖德沖生[尙][食]奉御同正諱珍幹珍幹生三子長曰周美檢校少府監今無(差)仲白世□□ //
(급사동정휘덕충덕충
생[상][식]봉어동정휘진간진간
생삼자장왈주미검교소부감금
무(치)중백세□□)
先師沒季則師也師七歲丁母憂郞檢校軍器監徐軍孚先女也師之先君欲託於玄化寺三重 //
(선사몰계즉사야사칠세정모우랑검교군기감서군부선녀야사
지선군욕탁어현화사삼중)
大師順眞夜眞公夢故僧統英念來告曰吾其來矣明日師乃至眞公卽師之叔父而英公亦眞 //
(대사순진야진공몽고승통영념래고왈오기래의명일사내지진
공즉사지숙부이영공역진)
公之叔父也英公平昔嘗謂人曰吾死後復爲異僧投此寺大弘祖道耳眞公以此器之師亦自負爲 //
(공지숙부야영공평석상위인왈오사후부위이승투차사대홍조
도이진공이차기지사역자부위)
英公之後身也
(영공지후신야)
ㅡ煩雜事由原文以下中略 ㅡ
. (번잡사유원문이하중략)
■ 해석(解釋)-註explain詳細
고려국 유가업 현화사 주지해공 견성적소 현람통소원증 승통묘지
보문각 교감 문림랑(文林郞) 상식봉어동정 황문통(黃文通)이 글을 짓다.
스승(師)의 이름은 덕겸(德謙)이고,
자(字)는 미문[未聞] 아직 듣지 못했으며,
속세(俗世)의 성(姓)은 김씨로 청주 상당군(上黨郡) 사람이다.
그 6세조(六世祖)는 수사도 삼중대광(守司徒 三重大匡) 근겸(勤謙)으로 고려(918~1392年. 474歷) 건국 초기(初期)에
// □□아들 충량(忠良)을 낳으니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충량이 시랑 회옥(懷玉)을 낳고,
회옥은 대부소경 원전을 낳고,
원전은 전충내급사동정 덕충(德沖)을 낳았고,
덕충(德沖)은 상식봉어동정 진간을 낳았다.
진간이 세 아들을 낳으니,
장남 주미(周美)는 검교소부감(檢校少府監)으로 지금은
금무치[今無差]
* 치(差)-다를 차. 층(層)질 치.
<差: 층질 치. 등급,구분,벼슬>
벼슬이 없고,
둘째 □□는 //
스님보다 먼저 죽었으며,
막내가 곧 스님이다.
스님의 나이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인 서부선군(徐孚先君)의 딸이다.
선친(先親)이 스님을 현화사(玄化寺)의 삼중대사 순진(順眞)에게 의탁(依託) 시키고자 하였다.
밤중에 순진공(順眞公)의 꿈에 작고(作故)하신 승통(僧統) 영념(英念)이 나타나,
"내가 왔노라" 고 하였다.
다음날 스님이 찾아왔으니 순진은 스님의 숙부(叔父)이며 영념(英念)은 순진의 숙부이다.
영념은 평소(平素)에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후에 다시 승려(僧侶)가 되어 이 절에 와서
조사(祖師-한 宗派를 세우고 宗旨를 펼치는 僧侶)
의
도(道)를 널리 펼 것이오." 라고 했다.
스님 또한, 스스로 영념(英念)의 후신(後身)이 되겠다고 자부(自負) 하였다.
나이 13세가 되던
을해년(乙亥年. 서기 1095년)에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으며,
이듬해(丙子年.서기1096년)에 불일사(佛日寺)에 나아가 구족계(具足戒=大戒)를 받았다.
우리 나라 건통(乾統) 3년 계미년(癸未年.서기1103년)에 왕륜사(開城 王輪寺) 선불장(選佛場)에 나가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니 북송(北宋) 숭녕(崇寧) 2년이기도 하다.
타고난 성품이 뛰어난 스님은 시시때때로 경(經). 율(律). 논(論)을 읽어서 훤하게 깨달았으며 유서(儒書)에 이르기까지 꿰뚫은 바가 많았다.
특히 의학에 조예(造詣)가 깊어서 가끔 승려(僧侶.和尙)들과 더불어 여러
조사(祖師-한 종파宗派를 세워서 종지宗旨를 펼치는 승려)
의,
신비(神秘)한 행적(行蹟)을 읽다가 부처의 가르침과 합치(合致)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이것은 반드시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다른 날 그것을 대조(對照)해 보면 과연(果然) 스님의 말이 옳았으므로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참으로 복종(服從) 하였다.
이로부터 사□에서 □ 배우기를 요청(要請)하는 무리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스님은 온화(溫和)한 표정(表情)과 말로 그들을 대하면서 조리(條理)있게 잘 이끌어 주었다.
그러므로 항상(恒常) 절의 교학(敎學)이 되어 여러 해를 보내었다.
예종(睿宗. 고려 16代왕. 1079~1122년. 43壽)
때,
□사 덕연이 일찍이 궁궐(宮闕) 안의
명경전(明慶殿. 고려시대 개성(開城)의 연경궁(延慶宮)에 있던 건물)
에
머물렀는데
임금(예종 睿宗)이,
"국사(國師-나라의 스승)를 계승(繼承)할 이는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국사(國師)가 스님이라고 대답(對答)하였다.
처음 장엄사(莊嚴寺)의
주지(住持=上方.方丈.住僧.~스님)
가
되어 국사(國師-나라의 스승)
에게 취임(就任)을 감사(感謝)하는 예(禮)를 바치자,
국사(國師)가 명경전(明慶殿) 문 밖에서 조석(朝夕)을 베풀어주며 총애(寵愛)하였다.
인종(仁宗) 초(初)에
국척(國戚: 임금의 인척姻戚)
이씨(이자겸 李資謙)가 권력을 오로지 전단(專斷)하게 되자,
그 아들로 중[불도 佛徒]이 된 자(者)가 현화사(玄化寺)에 있으면서 그 세력(勢力)을 믿고 위세(威勢)를 부렸다.
여러 원로(元老) 승려(僧侶)와 덕(德)이 뛰어난 승려들을 위협(威脅)하고 문제(問題)를 일으키니,
이에 권세(權勢)에 아부(阿附)하는 자들이 날마다 그 문(門)에 가득하였다.
스님은 홀로 노(怒)하여 꾸짖으며,
"스승이 있는 곳에 도가 있는 법인데, 어찌 달인(達人)들이 권세 있는 자에게 협박(脅迫)을 받아 도리어
어린아이(이자겸의 아들)
의
문객(門客-권세 있는 집의 식객)
이
됩니까?"
라고 하였다.
이씨(이자겸 李資謙)의 아들이 크게 미워하여 해치려고 한 것이 여러 번이나 되었다.
병오년(丙午年.1126년 2월 25일.仁宗4년)
에
궁궐(宮闕) 안에서 난(亂.이자겸의 난 李資謙之亂)
이
일어나자 이씨(李資謙)의 아들도 승도(僧徒)를 거느리고 바야흐로 서울로 올라와서 강제(强制)로 스님을 □□하여 왕위찬탈(王位簒奪)에 동반(同伴)하려 하였다.
스님은 병을 구실(口實-핑계)로 사양(辭讓)하고 문하(門下) 두 사람과 남쪽의 삼각산(三角山=北漢山) 향림사(香林寺)로 가서 잠시(暫時) 머물렀다.
그 해 1126년 여름 5월 26일에 이씨(경원이씨 慶源李氏)의 무리들이 패(敗)하자
인종(仁宗)이 가상(嘉尙)하게 여겨 삼중대사(三重大師)를 더해주고 대흥사(大興寺)로 옮겨 주지(住持)하게 하였다.
또 수좌(首座)를 더하여 주고 매번 조서(詔書-임금의 명령을 적은 문서)
를
내려 궁궐(宮闕)에 오게 하여 불교의 오묘(奧妙)한 이치(理致)를 물어보았다.
스님은 풍채(風采)가 당당(堂堂)하여 키가 8척(尺)이나 되었다.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사나운 군졸(軍卒)에 이르기까지 (스님을) 바라보면 얼굴빛을 가다듬고
단정(端正)히 하며 뒤로 물러나면서,
"참으로 천하의 대복전(大福田-큰 스님)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정(朝廷)에서
법천사(法泉寺) 승려(僧侶)들이 횡포(橫暴)를 부린다는 소식(消息)을 듣고
스님에게 명(命)하여 그 절(temple)로 옮겨가 주지(住持)하게 하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절(temple)의
중(bonze)들이 모두 다 잘 다스러져 조용해졌으므로 이에 승통(僧統)을 더하여 주었다.
또 왕명으로,
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
[金光明經疏-
경주 분황사(慶州 芬皇寺)에서 원효(元曉)가 저술(著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