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100813빌4장1절b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어렵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모든 쉽게 하려고 애씁니다. 쉽게 하는데 쉽게 하는 방법이 뭐냐 끊어져 있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제일 쉽게 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요. 끊어 졌습니다. 세상 따로 있고 천국 따로 있고 그런데 둘이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기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떨어져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끊어져 있는데 어떻게 들어갔어?’ 라고 물으신다면 주님께서 주님의 솜씨를 발휘했더니만 도저히 못 들어 갈 자들이 이미 주안에 들어 가 있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인간은 도저히 때려 죽여도 교회 갈사람 아니고 예수 믿을 사람 아니야’ 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예수님 복음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정말 이상합니다. 미스터리한 거예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지…….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안 믿고 있는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눈이 여기 있잖아요. 눈이 위에 올라가면 안 돼요 눈이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 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눈이 밑에 내려와서 내려갔다가 올라간 것, 이 시선을 가졌을 때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런 그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에요. 어떻게 저렇게 망가진 분을 하나님이 사흘 만에 부활시키는가! 어떻게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시키는가! 그것이 바로 구원 가는 믿음이에요. 아마 제가 이렇게 하면 제 멱살 잡고 ‘목사님 시비 걸고 싶습니다. 성경책이 이 만큼 두꺼운데 당신은 십자가 부활만 이야기해 놓고 하는 말이 십자가 부활만 믿으면 구원 받는다 당신이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것 맞잖아요?’ ‘예, 맞습니다.’ ‘그러면 다른 것 다 놔두고 성경책이 이렇게 두꺼운 데 십자가 부활만 이야기한 다고해서 구원이 됩니까?’ 라고 따지고 싶을 거예요 로마서 10장 9절에 나오잖아요.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제가 성경 두꺼운데 일부로 이것만 찾는 게 아니고 십자가 부활, 이것이 중심이 되는 거예요 나머지는 곁가지가 되는 거예요 화산 이야기 또 해야 되겠는데 화산이 여기 있는데 화산 뒤에 맨틀 현상에 의해 마그마에서 올라와요 지각이 있으면 밀도가 강한 것이 밑으로 내려가면 위에 있는 땅이 떠요 뜨면 숨어있던 맨틀에서 대류현상, 돌고 도는 현상이 있습니다. 뜨거운 것이 돌다가 틈을 바라보면서 틈사이로 끌어 올 때 땅덩어리가 올라오면서 터져버리는 거예요 마그마가 터지면서 용암도 나오고 화석도 나오는데 이렇게 터져 나오면서 홈이 파인 것처럼 나옵니다. 밑에서 마그마가 압력 받아서 올라와요.
여러분 지구는 딱딱한 것이 아니에요. 안에 들어가면 난로에요. 학생들 배웠어요? 안 배웠어요? 지구는 안에 뜨거운 난로로 되어 있어요. 들어가 보세요. 뜨거워서 못 들어가요. 난로가 나오면 여기가 십자가 부활이라면 나머지 이야기, 용암이 흘러나오는 것 같은 것은 곁가지입니다. 용암이 식으면 화산재가 되고 화강암이 되고 암석이 됩니다. 식습니다. 중심이 있어야 돼요.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의 뿌리이다. 그러면 돈을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받습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중심을 헛다리짚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 중심이 무엇인가 하면 시선을 올라가지 말고 밑으로 내려서 ‘어, 그분 죽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났데!’ 이렇게 밑에서 위로 따라오는 마음이 여러분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은 여러분들은 여기서 믿을 수 있도록 이미 하나님께서 장치를 하셨어요.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이미 성령이라는 장치를 집어넣으니까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다 믿어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때 우리도 시선이 따라서 같이 예수님과 죽고 주님 부활할 때 같이 부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겁니다. 로마서 6장, 예수님이 죽을 때 우리도 죽었고 예수님이 살 때 우리도 살아났느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공간 개념이 아니에요. 이것은 새로운 설비 업체가 하늘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려고 합니다. ‘주님이여, 몇 년 뒤에 살아 날겁니까?’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이미 살아났느니라.’ ‘주님, 저는 아직 안살아 났는데요?’ ‘그것은 네가 아직도 설비를 몰라서 그래’ 하늘나라 구조에서는 이미 시간을 넘어가서 이미 살아났느니라. 하면 살아 난 줄 믿으라, 그것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제가 괜히 강조하는 것 같아 미안한 느낌이 드네요. 제가 강조할 문제가 아니에요. 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에 그렇게 되어있어요. 이미 너는 하늘에 앉히시니 이렇게 되어 있다 말이죠.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광스럽게 했느니라. 로마서8장 29, 30절에 나오죠. 이미 그렇게 하셨느니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러분들이 성경을 내가 행함으로 지키려고 하니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성경은 우리가 행하고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이미 다 행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 태가 이미 죽었어요. 죽어 있는데 아브라함이 남편이 아내의 배에 손에 대고 간질 간질였습니까? 아기 하나 생겨라 간질간질 간질이니까 점점 배가 불러지는 겁니까? 두껍아 두껍아 애 하나 다오 했습니까? 아니에요. 오늘 만져도 죽었고, 내일 만져도 죽었고, 낌새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자식이 있을 것이니라.’ ‘자식이 있을 것이다’가 여자 배속에 들어가니까 ‘자식이 있을 것이다.’가 ‘자식이 있었다.’로 바뀌잖아요. 말씀이 나에게 임하매 우리는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들어오니까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자생하는 거예요. 스스로 성장하고 스스로 커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밭에 떨어지면 밭이 어떻게 못해요. 씨가 알아서 열매를 스스로 맺고 알아서 한다 이 말입니다. 알아서 다 해주는 거예요. 이것을 믿으라고 강조하는 나도 참……. 이것은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하늘나라에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가 우리 속에 들어와 버려요. 그것이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3절에 나옵니다.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봤나?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지 봤나? 장부 내 놔봐 이것을 우리보고 자꾸 닦달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생명책에 있느니라는 하는 그 말씀 자체가 하늘나라에서 설치를 해 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이삭이 있느니라 하면 이삭이 생기는 것처럼, 생명책에 있느니라 하면 이미 생명책에 이미 있어버립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74살 먹어서 ‘생명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도 있는 줄 알고 믿어봤지. 없더라’ 라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어요. 우리는 진작부터 그것을 하란 말 이예요. 74살 먹도록 기다려서 하지 말고 지금부터 하란 말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말이 아니라 ‘생명책에 있지! 왜 있느냐 하나님이 있다하면 있는 거야,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잖아. 사람이 있으라 하면 사람이 있듯이 생명책에 있다 하면 있는 거야. 성경말씀은 무조건 맞는 거야’ 라고 이것이 믿어지는 것이 인력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믿어질 수가 없어요. 이것은 나도 내 마음대로 못해요. 이것은 내 평생에 내가 뺄 수도 교체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어요. 성경 자체가 내 안에 들어와 버렸는데 내 안에 성경책이라는 것이 꿈틀거리고 살고 있는데 내가 부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생명책에 있느니라’ ‘아, 내 명단도 있겠구나! 그러면 나는 살았네.’ 왜? 명단에 있으니까 그럼 걱정할 것 없네. 없지요.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했습니다. 교회에 처음 올 때는 병 낫기를 원했고 돈 벌기 위해서 오고 사업 잘되기 위해 오는 무슨 노림수가 있어서 이거 안 해주면 삐져서 교회 안 나오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어쨌든 간에 교회 와서 말씀을 편 순간 생명책에 있느니라. 하니까 ‘아이고 감사해라. 이게 웬 횡재냐! 예상도 못한 건데 나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 되었데……. 아, 이런 횡재를! 주여 감사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냐 이 말이죠. 바보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할 때 제자들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믿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을 빼 버리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니까 ‘야, 제자들이 똑똑하니까 믿었을 거야’ 사람은 예수님을 못 믿게 되어 있어요.
‘아이 목사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을 왜 못 믿어요.’ 그것은 당신에게 예수님의 영이 왔기 때문에 믿는 것이 부담 없이 쉽게 믿어지는데 당신보다 똑똑한 사람보고 믿어 보라 해 보세요. 안 믿어지지……. ‘인생에 무슨 길이 있고, 죽고 나면 그만이지 무슨 생명이 있어.’ ‘목숨이 생명이지 무슨 생명이 또 있어.’ 이렇게 나온다 이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편지를 쓸 때 성령에 의해서 썼습니다. 그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베드로가 그렇게 썼어요. 사도바울의 글들은 성령에 의해서 쓰게 됐다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해석하고 번역할 때도 설교할 때도 항상 성령 받은 입장에서 해석을 해야 돼요. 성령 받은 입장에서 해석을 해 버리면 절대로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킨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 말씀 하나 하나가 믿어지는 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도와줄 때 우리와 함께 할 때 우리가 믿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무엇인가 하면 기쁨이며 이 기쁨은 단절의 기쁨,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올라갈 때 이미 예수님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단절되었어요. 끊어짐에서 오는 기쁨이에요.
회사에서 회식하는데 사장님부터 전 직원이 하는 말이 ‘너는 교회가고 예수 믿으니까 술 안 먹지?’ ‘술 먹어도 천국 가는데’ ‘아니, 너는 술 먹으면 안 되잖아?’ ‘아니요, 술 먹어도 천국 가요’ ‘이상하다 다른 교회에서는 술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술 먹는데 천국 가냐?’ ‘천국은 내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술 먹던 안 먹던 무슨 짓을 하던지 간에 이미 창세전에 성령이 오면 그 사람은 구원 받았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술을 먹더라고 생명책에 이름이 변동되지 않습니다. 바뀌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감사함과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그럼 술 먹을 수 있다는 말이지?’ ‘술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 앞에서 먹어봐라’ ‘당신이 시키니까 난 안 먹는 거예요. 당신들이 시켜서 당신들의 강압에 의해서 나는 주님의 힘보다 당신의 힘이 더 센 것이 되기 때문에 그 꼬락서니 보기 싫어서 안 먹습니다. 나 혼자 있을 때 먹고 싶을 때 먹지만 당신들이 먹으라고 해서 먹을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다니엘서의 세 친구 이었었어요. 되지도 않는 고집이 있었어요. 하라하면 안하고 하지 말라 하면 하고……. 왜? 우리는 그런데 구애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내 안에 설비를 뜯어내 버리고 주님께서 설비를 교체해 놨기 때문에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이 기쁨이 되는 거예요. 가만히 놔둬도 되고 손을 데도 상관없고 손을 안데도 상관없고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상관없고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손 덴 거예요. 그것이 세상관의 단절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와의 단절, 내 몸은 나와의 단절,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몸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홀가분함, 기쁨이죠. 얼마나 기쁜지 4장 12절에 보면 ‘내가 자족할 줄 아노니 내가 비천에 거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모든 일에 배부르며’ 이 대목 모든 일에 뭐한다고요? ‘모든 일에 배부르며’ 쉽게 말해서 안 먹어도 배부르며, 인생 실패해도 배부르며……. 왜? 모든 일이니까…….애가 아파도 배부르며, 교인수가 줄더라도 배부르며, 성경공부 교인들이 참석 안 해도 배부르며, 수박이 좀 쉰 것 같아 해도 배부르며, 단술이 맛있어도 배부르고 맛이 없어도 배부르고 모든 일에 배부르며……. 한마디로 미쳤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화산에서 기어 나온 새로운 인간들이 나오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믿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못 믿을뿐더러 이렇게 새사람 된 사람을 다른 이웃, 친구들이 믿는다? 못 믿는다? 이 사람을 못 믿어요. ‘네가 미쳤다. 미쳤어 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상이었는데 왜 이렇게 됐느냐? 누가 너를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놨어?’ 믿지를 못해요. 왜냐? 단절되었기 때문에…….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가에 물을 길러 왔던 여자가 물을 길러 왔으면 물 길러 가야지 가만히 있는 양동이는 왜 버립니까? 이런 겁니다. 여기 식혜가 있는데 식혜주시는 집사님에게 ‘식혜 좀 주세요!’ 식혜주려고 왔는데 옆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물이다’ 하니까 식혜 던져버리고 ‘나는 배부르다.’ 하는 것 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미친 거 아니에요. 식혜를 받으러 왔으면 식혜를 받아 가야지 ‘나는 식혜가 없어도 괜찮아, 나는 살았네!’ 하는 이 소리하고 똑같다는 말이죠. ‘나는 메시야를 보았다.’ 이 소리예요. 표정들이 왜 그래요? 안 믿는 것처럼…….(ㅎㅎ)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워낙 적기 때문에 내가 혹시 저렇게 물들면 나도 광신도 되지 않겠나! 걱정이 먼저 드는데 예수 믿기 전에는 광신도가 염려되지요. 그런데 주님의 성령이 와서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알면 그 다음에는 광신도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고맙게 여기고 자랑스럽고 그야말로 식혜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여러분 외양간에 소가 없으면 목축업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그러면 포도 농사 왜 짓습니까? 미쳤습니까? 왜 짓습니까?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이 사람이 살려는 거야, 죽으려는 거야? 그래도 나는 무엇으로 기뻐한다? 나를 구원한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한다. 이게 하박국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일반 교회 어떻습니까? 기도 하시면 소떼가 많아지고, 기도하시면 열매가 커지고 포도 알이 굵어지고 무화과나무 열매가 3개 열렸던 것이 10개 열립니다. 그러면 그 기쁨이라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마귀가 준 가짜 믿음이죠. 성령이 없으니까 그런데 혹하고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 나도 교회 나왔으니까 기죽지 않고 살아야지. 이게 무슨 꼬락서니냐 10년이 되도 이 모양 이 꼬락서니이고 20년이 되도 이 모양 이 꼬락서니…….’
그러니까 74살 되어서 ‘아이고 소용없더라, 헛짓했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지요. 잘 하셨습니다. 진작 본색 드러냈어야지 어떻게 숨긴다고 해서 하늘나라 심판을 통과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시선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그거예요. 구원은 이미 나와 있어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미 끝났어요. 어떤 목사가 변경을 시켜도 변경이 안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선을 안 따라 간다는 거예요. 무화과나무에 소출은 많고 외양간에 소가 많은 것 자꾸 그것을 따라 가는 거예요. 몸 병 낫고, 교인 수가 많고 헌금 많아지는 것, 그런 것을 따라 가는 거예요. 그런 걸 따라 가니까 무엇과 멀어집니까? 점점 더 로마서10장 9절과 멀어집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점점 더 멀어져 간다 하니까 노래가 생각나는데……. 김광석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인데 자기가 나이가 서른 되고 보니까 점점 멀어진다는 거예요. 세상 축복을 쫓다보니까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거예요. 고마운 사실은 예수 믿는 사람은 점점 더 생각이 나게 하세요. 아, 그동안 예수 믿고 노림수를 가졌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귀의 장난인 것을 알고 진짜 물동이를 버릴 정도로 물동이고 뭐고 다 버려도 괜찮다 할 정도로 주께서 뺏어감으로서 잊었던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시 한 번 회복시키는 그런 성령의 역사가 매일같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어요.
뭔가 얻고자 하는 것은 빼앗기고 그래서 탄식할 때 다시금 떠오르는 십자가의 복음,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는데 뭘 또 원하고 있어? 너는 나의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 우리는 식혜만 먹을 줄 알지 주님의 쓴잔을 마실 생각은 안하잖아요. 주께서 먹게 하십니다. 먹게 하시면서 이렇게 달고 맛있는데 그동안 왜 미숫가루만 좋아 했던가! ‘내게 모든 것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의 일체의 비결을 배웠는데’ 일체의 비결이 뭐냐?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미 내 안에 계신분에 의해서 내가 못하는 것이 없다. 못하는 게 없다는 것은 ‘슈퍼맨! 도와주세요!’ 이런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해도 ‘주님의 능력으로 이만큼 살아왔습니다.’를 깨닫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예수 믿는 거예요.
지금까지 제가 예수 믿는 것이 이런 거라는 것을 설명한거예요. 단절이에요. 친구하고 대화가 안 되는 즐거움, 가족끼리, 동서지간에 전혀 대화 안 되는 그 기쁨, 심지어 자식 간, 심지어 부부사이에도 대화가 딱 끊어진 그 행복......, 그래놓고 모든 것에 나는 배부르다. 이것은 히딩크가 한번 들어봐야 돼요. 히딩크가 4강 가고 나서 뭐라 했습니까?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하잖아요. 제가 안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죠. 사람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차지하고 나면 욕망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인간은 견딜 수가 없다고 따라서 욕망을 차지할 때쯤 되면 욕망의 다른 대상을 찾아가요. 찾아가서 또 다른 욕망에 배고파하면서 자기 사는 보람을 느껴요 어떤 욕망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그 자체가 인생사는 보람이 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모든 욕망은 욕망에서 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배부른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때 그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만들어 낸 아주 단절된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고 또 설명조차 안 되는 뭔가 낯선 힘이 와서 나를 강타하고 모든 것을 덮쳐버렸어요 성령이 와서 덮쳐버리니까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내가 왜 예수를 믿는 지 설명할 길이 없어요. 설명하지 마세요. 그냥 나는 믿습니다. 그것으로 주님만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구태여 남에게 설명하려고 설득할 필요 없어요.
다음에 약간 어려운 것을 해 봅시다. 어려운 것을 하지만 제가 쉽게 하려고 애씁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예수님만 죽으신 게 아니고 주위에 있는 모든 이 세상구조, 세상구조가 어려우면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모든 것이 다 저주받았어요. 예수님이 저주 받을 때, 예수님이 저주 받았다 하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저주 받았다는 말이 어디 나오냐? 성경에 그런 게 있느냐? 하는 데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서 저주받는 다고 했으니까 그런 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저주받을 때 예수님만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이 저주 받았어요 세상 것은 이제 전부 다 저주 덩어리에요 세상에 모든 것, 우리 몸까지 모두 저주받아요. 저주받는 것이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저주받는다는 것이 기쁨입니다. 왜냐 하면 저주라고 하는 것은 교체되는 겁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없어지고 새로운 몸을 받거든요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흔히 드라마 보면서 사람들이 드라마에 빠지는 이유가 그 순간 잠시 동안 바꿔치기 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내가 저 사람 돼서 내가 현재 이 지긋지긋한 이 사회에서 벗어나서 잠시 저런 공주가 되고 저런 재벌2세가 되고 저런 재벌 집에 며느리가 되고 나는 별 재주가 없는데 빵굽는 재주가 있는 탁구가 돼서 빵도 잘 굽고 …….뭔가 바꿔치기 돼서 뭔가 하고 싶고 자기 집이 없을 때는 강남에 이십만 평 사서 이범수처럼 땅이 있어서 집을 짓고 미운 사람 있으면 안기부에 형님이 있어서 대신 복수해 주고 ……. 자이언트 이야기입니다. 그 순간은 일상에서 오는 슬픔과 피곤함을 잊어버리거든요 제 아내가 늘 집에 오면 피곤해 할 때 뉴스보자 하면 나 피곤하니까 나 보고 싶은 거봐요 리모컨을 딱 제킵니다. 예예예 이 세상이 나는 저주 안 받았다 하면 그때부터 사는 게 힘들어져요
저주 안 받으려고 하는 몸짓, 착한 일하기, 천사되기, 훌륭한 사람 되기 ‘주여, 저주 받았지만 약간 감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그렇게 살지 마셔요 인생 그렇게 사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마저 저주 받았다면 예수님이 왜 저주 받았어요 ? 누구 죄 때문에 저주받았어요? 우리의 죄 때문에 저주받았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저주받지요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십자가를 믿고 본다하는 것은 예수님 믿고 시선을 따라가 보면 ‘저분이 왜 저주 받았지? 내 죄 때문에 저주 받았구나! 그럼 나는 뭐하고 있지?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구나! 아 즐거워라 이렇게 된 다 이 말입니다. 저주 받고 그 다음에 시선을 따라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면 어디로 올라가느냐 하면 부활이 되는 겁니다. 부활이 되면 저주받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부활했기 때문에 그 부활의 영이 성령이죠. 부활의 영인 성령이 오면 우리의 저주가 무엇으로 바뀝니까?
우리의 모든 저주가 축복으로 교체하기 위한 작업이 우리의 남은 인생, 남은 세월입니다 저주받은 병든 이 몸을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몸으로 갈아치우는 작업, 이것이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옵니다. 어서 옛 옷을 홀딱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을 그날이 어서 왔으면 ……. 사도바울이 그 이야기할 때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이 몸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무엇으로 봅니까? 추리닝, 경상도 말을 난닝구, 러닝셔츠 사도바울은 자기 몸을 동대문 시장에서 파는 옷 한 벌로, 셔츠 하나로 본거예요 사도바울은 자기 몸을 남들은 보약 먹고 침놓고……. 어깨가 안 좋아 침 맞아야 되는 데 오십견이 와서 불안불안 한 데 입에서 '옷을 벗어보자! 주여, 옷 갈아입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자기 인생을 그렇게 볼 정도로 그만큼 자신만만하고 복음에 확신이 서있는 거예요 모든 것은 말씀대로 그대로 되어 간다! 나는 확신합니다. 이런 쪽으로 본겁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뭔가 하면 이것은 얼토당토않은 자신감 이예요 본인은 아니지만 남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자신감…….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탁구 내지는 황정음, 이범수 누이동생 그렇게 고아라고 수모를 당하고 무시를 당해도 모독을 당해도 자기는 즐겁게 자기인생을 사는 것 거기에 무슨 우울증이 옵니까? 전부다 남 탓이고 세상이 더럽고 어떻고 이런 것이 아니고 세상은 더러워도 나는 단절되었다 더러운 세상으로부터 나는 단절되어 있어 세상은 더러워 나는 옷 갈아입고 갈란다. 할 정도 로 주어진 것에 은혜에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이라는 거예요 환란 중에 너희가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구나하는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서 예수님이 독수리라면 여기 날갯죽지에 자기가 구원하실 생명책에 기록된 분을 여기에 담는 거예요 그것이 오늘 빌립보서 4장2절에 보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보세요! 이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도저히 인간은 믿을 수 없는데 진짜 믿는 자들이 있더라 이 말이죠.
‘목사님 못 믿습니다.’ ‘아니 있다니까 글레멘드 라는 사람이 있다니까’ ‘인간이 못 믿습니다.’ ‘생긴다니까’ 누가 생깁니까? 주님께서 믿음 준 사람이 여기저기서 생긴다니까 그렇게 사는 사람, 동역자들이 있어요. 신기해요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것을 전하고 내가 너희가 믿으면 손에 장을 짓는 다고 했는데 이제 장 짓을 판이에요. 도저히 믿지 못하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사람은 무엇을 믿고 싶냐하면 예수 믿고 잘되고 복 받고 하는 것을 싶어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배부르다는 소리를 해 버리니까 누가 믿습니까? 배고픈데 뭐가 배불러…….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놓고 이것은 못 믿을 거야 아, 믿지 마 이것은 시작부터 나는 못 믿을 거야 못 믿는다고 해 그런데 믿음이 생길 때 이것은 주님께서 활발하게 일하고 있는 증거다 이 말입니다.
지금도 주께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형제라 할 때 그것이 피를 나눈 형제 정도가 아니잖아요. 혈육의 형제가 아닙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바로 주님께서 같이 천국에서 잘 살라고 곁에 붙여준 형제, 저와 여러분입니다.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예? 여러분은……. 윤복희 노래죠. 신기할 정도죠 그래서 목사가 설교할 때 이 신기함을 유지하도록 복음만 외쳐야 되요 복음은 안 외치고 '여러분 기도 하면 복 받습니다.' 이렇게 하면 형제가 아닌 아, 형제 맞구나 지옥 갈 형제들 (ㅎㅎ)
그래서 74살 먹어서 나는 예수 믿은 것이 헛것이다. 내 힘으로 살았는데 뭐 하나님 힘으로 살았다고 뭐 웃기지마 그런 고백할 사람 모으지 말고 정말 이것은 여러분 때려죽여도 못 믿습니다. 약을 살살 올려서 아, 그거 거짓말 못 믿어 아예 못 믿는 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목사 네가 어떻게 나를 알아? 나는 모든 것을 버려도 모든 것이 배불러’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등장한 다면 그것은 주께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입니다. 아마 그 사람 밑에 이름이 있을 거예요 글레멘드, 글레멘유, 글레멘정, 글레멘최, 글레멘박……. 이렇게 합격통지서에 한꺼번에 나와 있을 거예요
한번 빌립보서를 정리해 봅시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에 편지를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여러분 고생이 많지요?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편지를 사도바울을 안 보냅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고 주안에 서세요. 여러분 주안에 섰다면 이런 환란은 잽도 안 됩니다. 환란도 아닙니다. 이것보다 더 센 환란이 와도 저처럼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여러분 저는 옥에 갇혀있습니다. 인생 망가졌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옷 갈아입고 싶어서 환장하겠어요. 빨리 감옥소의 옷을 홀딱 벗어버리려고 나처럼 기뻐하는 사람 없을 거예요 아마 있다면 주의 형제입니다. 라는 식의 편지를 보내는 거예요 그 편지내용은 도저히 일반인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납득이 되는 편지가 아니에요.
빕립보서 1장 29절 봅시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분명히 그렇게 있죠. 제가 이제 설교를 하겠습니다. 우리 의존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믿는 것은 뭐 복 받는 것으로 알지요? 이제는 그렇지 않고 주님의 쓴잔을 마시세요 설교 끝! 그 다음 주가 또 되었어요. 여러분, 주님의 쓴잔을 마시기 위해서 나오셨군요. 쓴잔을 듬뿍 드리겠습니다. 설교 끝! 연달아 4주만 해 보세요 그 다음부터 슬슬 안 보이기 시작해요 슬슬 자리가 비기 시작해요 성경에 있냐, 없냐를 따지지 않고 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내게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시선을 예수님 가신 곳으로 가 버리면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고는 모든 것이 빼앗긴다 할 때 비로소 신자 맞고 안 맞고가 그때 등장됩니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 내가 원했던 것 다 날라 갔을 때 진짜 신앙이냐 아니냐는 그때 들통 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을 발가벗길 때 감사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이야기가 빕립보서 4장입니다. ‘환난 중에 기뻐 하라’ 그리고 나온 2장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당신들보다 더 고생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서는 희한 하게도 이 땅에서는 하나님 영광을 포기 하고 가장 낮은 인간으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이 맞아요. 틀린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영광스런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천한 하나님, 인간보다 더 낮은 하나님, 더 비참한 하나님으로서 나를 믿느냐 라고 제시 했던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제가 아까 로마서 이야기할 때는 쉬운 것 같은데 막상 제가 빌립보서 가지고 설명하니까 인력으로 믿기 곤란하겠죠. 우리와 함께 왔으되 우리보다 더 비참해진분이 진짜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즐겨 ‘고맙습니다.’ 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영, 성령이 임하면 ‘아, 주님께서 멋지게 일 하셨습니다. 아이고, 자칫하면 놓칠 뻔했습니다. 주님 여기 숨어 계셨군요. 내가 십자가를 덥석 붙잡습니다.’ 라고 나오신다면 여러분은 성령 받은 분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을 봅시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어떻게 한다고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죠. 그러면 자기를 어디에 집어 넣으려합니까? 죽은 자 가운데에 자기를 집어넣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제대로 알려준 코스인거예요 죽은 자의 특징은 모든 것을 빼앗겨요 목숨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긴 거죠. 이것이 얼마나 홀가분합니까?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해요 제가 이번 수련회 때 했고 주일 설교도 했는데 일가친척이 내가 사랑 줬으니까 사랑 줄 꺼라 생각하시는데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밖에 몰라요 사랑 준 다고 사랑 되갚아 주는 게 아니에요. 관속에 누웠을 때 제가 장난치듯이 이야기했습니다. 죽으실 때 그냥 관속에 눕지 말고 죽은척해서 관속에서 빼꼽히 살짝 열어보라 했어요. 누워서 못을 한두 개 빼서 관 뚜껑을 열어서 조카는 어떻게 나오나 보고 큰 아들 어떻게 나오나 보고 시집간 둘째 딸은 어떻게 나오나 죽은 다음에 보라 말이죠. 죽은 다음에 보게 되면 ‘아이고 아이고 하죠.’ 죽으면서 ‘네가 형식이구나! 남을 의식하고 하는구나!’ 그런데 엎어져서 울면서 ‘형님 가시면 안 됩니다.’ ‘아이고 진작 그렇게 하지 죽기 전에 나한 테 사과하지 죽고 난 뒤에 사과하면 무슨 소용 있나’ 한번 드려다 봐요 참 재미있습니다.
아마 그거 다 보고 나면 명이 살아있어도 자기가 자살하고 싶을 거예요 ‘이 더러운 세상 진작 떠날걸! 뭘 믿을게 있다고 뭘 기대 할 게 있다고 아이고 저게 자식이라고 내가 죽을게.’ 하면서 자기가 죽어요.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죽게 하시고 날마다 살게 하십니다. 날마다 세상에 대해서 실망케 하시고 날마다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흐뭇하게 하시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 주님의 설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설비하고는 완전히 단절되어 사람이 이상하게 되어 뭔가 정상적이 아닌 사람처럼 그렇게 되요 사도바울의 모습이 그래요
다음 빌립보서 3장 18절
빌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리스도 십자가 원수로 행한다.’ 십자가가 밥 먹여줍니까? 십자가가 뭔데 그렇게 십자가가 가지고 안달을 내느냐 이 말이죠. 사도바울은 생각에 저런 십자가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거예요 지금 내 행세 같으면 천번 만번 지옥가고 왔다가 또 가고 또 들어가고 영원히 못 나올 인간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피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겁니다. 이야기, 끝난 이야기예요 ‘목사님 고함지르지 마세요. 내가 20년 살다가 예수님 믿을게요.’ 이러지 마세요. 왜냐 하면 20년 살다 믿던 30년 살다 믿던 관계없이 십자가 피로 죽을 우리가 살아났기 때문에 누구든지 십자가 피에 대해서 ‘무용지물이다 네가 헛짓하고 있다 꿈은 환상이구나! 그것은 소용없는 거야 그렇게 믿다가 안 믿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야’ 라고 모독하게 되면 자기는 여기서 울고 싶다 그게 아닌데 그것은 가짜인데 진짜로 하늘에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영원한 기쁨으로 간직할 텐데 아 가짜가 너무 많구나 하고 그들은 십자가 안다고 하면서도 십자가 안 믿는 인간을 영원한 십자가의 원수라고 해요
제가 또 들은 이야기 할게요. 미국에 어떤 사람이 너무 부자 인데 돈이 너무 많아서 자살하려고 했어요. 진짜에요 실화에요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자기 친구 중에 감리교회 목사가 있어서 불렀어요. 감리교회 목사는 죽을 때 돈이나 주는가 싶어서 갔는데 ‘친구야 내가 너를 만나고 오늘 밤 죽으려 한다. 진짜 자살하려한다. 죽기 전에 기독교가 뭔지 한 번들어보자’ 하니까 친구가 귀찮다는 듯이 ‘치 기독교가 궁금하냐? 요새 아무도 안 믿는다니까’ ‘그래도 이야기해 봐라’ ‘안 믿는다니까 해 봐야 너도 안 믿을 거고 나도 물론 안 믿고 옛날에 그런 것이 있었다는 그뿐이야 같은 목사들도 안 믿어’ ‘무슨 이야기인데?’ ‘옛날 교리에 보면 예수라는 사람이 왔는데 그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 피로 구원받는 다나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그런 이야기 초대 기독교에 보면 그런 게 있어 예수님이 대신 죄용서 하고 피 흘리면 피와 더불어서 자기 죄는 없어지고 그 피가 우리를 의인 만들어서 의인들이 가는 천국을 가는 그런 이야기인데 니 못들은 것으로 해라 나도 안 믿어 옛날이야기야’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사람은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친구 앞에서 한 시간 반 동안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왜 우나?’ 하니까 ‘예수가 살렸데 예수가 내 죄를 씻었데.’ 그것만 되풀이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씻었데.’ 그것만 이야기하면서 한 시간 반 동안 계속 우는 거예요 목사 그 친구는 ‘미쳤네. 아무도 안 믿는 건데 나 갈란다’ 가고 난 다음에도 계속 우는 거예요 이 좋은 소식을 이제 와서 왜 전하냐 이 말이죠. 그 목사는 ‘그런 설이 있데 그런 이론이 있어 책에 그런 내용이 있는데 성경 자체가 옛날 책이라 믿지 마. 요새 우리교회 아무도 안 믿어’ 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생명이었습니다.
행했습니까? 자살을 행해서 그런 겁니까? 행함 없어요. 예수님은 자기가 생명책에 기록될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서 아닌 자가 누구인지 알아서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되는 방식으로만 그 사람에게 믿음을 줘요 믿음을 줘놓고 ‘내가 믿어서 구원받았어’ 라고 안 나오는 사람에게만 진짜 성령 보내서 성령으로 믿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죽어 마땅한 데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살았다는 말이 나오는 사람에게만 성령을 줬다는 증거가 돼요 그 외에는 안 돼요 열심히 교회 20년 다녀서 구원받는 것. 이런 것 없어요. 다 거짓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부활하는 것을 믿으면 네가 죽어도 천국간다. 유치원 아이들도 아는 이 간단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사도바울은 울면서 하는 거예요 ‘누구야! 누가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을 모독해! 나는 울고 싶다!’ 이거예요 그 뒤에 나온 이야기가 빌립보서 3장19절 20절 봅시다.
빌 3: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저의 시민권은 대구시 동구 지묘동이에요. 끝나고 나면 집에 가고 싶어요. 왜? 우리의 시민권이 거기 있으니까 제가 만약에 신월동에 이사 온다면 저는 대구 갈 필요 없습니다. 얼른 집에 가고 싶어요. 내시민권 있는 곳에 내 영원한 안식처고 고향입니다. 영원히 살 곳이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예수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고향이 어디 라고요?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데요 이거 터무니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거 믿는 사람 없잖아요 없는데 이게 믿어진다면 그것은 단절입니다. 세상과의 모든 것이 단절된 상태에서 주께서 은혜 주셔서 믿게 하신 거예요 그 외에는 달리 설명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14절에 보면
빌 4: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 4: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아멘
사도바울의 이런 고백의 삶 자체가 그 당시에 하나의 계시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이 안보이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아, 사도바울이 성령 받은 사람 맞다’ 라고 동감할 때 그때 동역자가 되고 예수님, 주안에 같이 서는 주님 때문에 인간이 이렇게 달라졌다는 같이 동감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주안에서 거하는 영광을 받는 성도라는 이런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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