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척양척왜와 세계화 ((斥洋, 斥倭: 反美·自主)) |
[연재]조광환 선생님의 청소년을 위한 동학농민혁명이야기 |
|
|
요즘 '세계화'란 말이 유행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화'란 자본, 노동, 상품, 서비스, 기술, 정보 등이 주권과 국경의 경계를 넘어서 조직, 교환, 조정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세계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세계화가 평등한 국가 대우, 동등한 기회 부여, 자유로운 경제활동, 경제활동의 공동 참여, 민주화 세계의 전개 등을 초래시키며 이는 대륙의 기류나 해양의 조류와 같은 것이어서 저지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일종의 자연적 현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세계화'의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은 이러한 시장 자유화를 동반한 세계화는 전적으로 선진국에게 유리한 것이며, 후진국의 경제발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며, 선진국 경제에 후진국이 종속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세계화는 이익을 보는 계층과 손해를 보는 계층을 극명하게 나눠 놓으므로써 분쟁과 갈등을 증대시키는 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의 농산물시장의 개방에 따른 우리나라 농민들의 피해, 자본의 대량유입과 대량유출에 따른 외환 위기의 위험성 등 개발도상국을 비롯한 중진국이나 후진국이 감수해야할지도 모르는 부담이 상당합니다. 아직도 이들간의 논쟁은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면 이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겠지요. 역사적으로 볼 때 조선은 이미 1870년대- 80년 대 '세계화'의 체제에 그것도 불평등하게 편입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 안으로는 조선사회 내부의 모순이 표출되고 밖으로는 자본주의를 앞세운 서양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세계적 제국주의 체제'라는 강풍을 만난 가랑잎배와 같은 신세였답니다. 당시 조선정부는 외세의 개항요구에 세계정세에 대한 지식도 대응 방안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답니다. 결국 조선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에 불리한 조건 속에서 세계체제로 편입되었지요. 강화도 조약으로 대표되는 불평등조약 체제는 결국 식민지화의 시초였습니다. 결국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의 청일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인해 조선에서의 주도권은 청이 장악하게 되었답니다. 이에 일본은 군비를 확충하여 한편으로는 청과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에서의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고자 경제적 침략에 주력하게 되어 조선은 일본의 상품시장인 동시에 원료공급지 및 식량 공급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영국산 면제품이나 냄비 등 값싼 자본주의 생필품을 미끼로 한 일본의 쌀 수입이 늘어나게 되자 국내 쌀값은 폭등하게 되어 조선 민중은 물가고와 식량부족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부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거둬 민중을 수탈하였으며 관직을 직접 매매하는 매관매직도 여전히 성행하였습니다. 이렇듯 우리 민중들은 봉건정부의 말단 하수인인 지방 수령들과 아전들 그리고 청일과 러시아 및 서양 제국주의라는 외세의 침략 앞에 2중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답니다. 따라서 당시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외세에겐 무능력하고 비굴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국민들에게는 호랑이보다도 무섭게 굴던 조정 대신들과 탐관오리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땅을 침탈하려는 외세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컷을 것이란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요. "비바람이 일어나는 듯, 홍수가 치달리는 듯, 천둥 번개가 우는 듯, 파도가 치는 듯, 불길이 타는 듯, 20세기 제국주의여 ! 신성한 먼로주의가 백기를 든 이후로 동서 6대주에 소위 6대 강국이니 8대 강국이니 하는 열강이 모두 치열하게 제국주의를 숭배하여...세계무대에 제국주의가 날뛰게 되었다. 그런 즉 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즉 민족주의를 분발하는 것이다. 이 민족주의는 실로 민족 보존전의 유일한 방법이다. 이 민족주의가 강하면 나폴레옹 같은 영웅도 어찌할 수 없으니, 오호라 민족을 보존코자 하는 자가 이 민족주의를 버리고 무엇을 취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민족주의가 팽창하고 웅장한 모습을 갖추면 어떠한 극렬하고 고약한 제국주의라 하더라도 감히 침입치 못할 것이니, 요컨데 제국주의는 민족주의가 약한 나라에만 침입한다. 비단같고 꽃같은 한반도가 오늘에 이르러 암흑 속에 빠지게 됨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한민족의 민족주의가 강하지 못한 까닭이니, 바라 건데 한국 동포는 민족주의를 크게 떨쳐 '우리 나라는 우리가 주장한다'는 자세로 호신부를 만들어 민족을 보전할지어다." <1909. 5. 28. 대한매일신보> 위의 글은 일제시대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신 신채호 선생의 글입니다. 선생은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민족주의가 발휘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민족주의는 바로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사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민족주의가 발전하면 어떠한 극렬, 고약한 제국주의라도 감히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과, 한국동포는 민족주의를 대분발하여 "우리 민족의 나라는 우리 민족이 주장한다"는 한마디를 호신부로 삼아 민족을 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개항을 전후해서 서세동점(서양세력이 동양을 점령해 나감)에 위기를 느낀 조선인들의 여러 형태의 '민족주의적' 반응이 나타나는데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 '민중운동' 및 '개화운동'이 그것이지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민중운동이지요. 민중사상 혹은 민중운동은 19세기초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농민운동을 통해 집적된 힘이 1860년대에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과 연계됨으로 사회사상 및 사회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840~60년대에 중국이 서양 제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게 되자 불안을 느낀 민중들은 세계사적 혁명을 예고하는 천지개벽사상과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는데, 인내천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님이라고 가르치는, 일종의 평등사상을 담고 있었답니다. 이 민중사상이 사회적 실천운동으로 나타난 것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동학농민운동이 민족주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지요. 동학농민혁명의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외세적인 성격은 '척왜(斥倭), 척양(斥洋)'라는 구호에서 드러났고, 특히 일제의 경복궁 습격이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2차봉기는 분명 제국주의 침략 세력 앞에서 국가적 독립을 지키려 했던 반외세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올해가 갑신년이지요.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이 땅의 자주적 근대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소수의 젊은이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그들이 제 가문의 멸문지화까지 감수하면서 갑신정변을 계획했던 배경을 생각하면 120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이 그 때 상황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며칠 전 한 신문 만평에서도 묘사를 해놓은 것을 보면 이런 생각이 나만의 생각만은 아닌 듯 합니다. |
|
입력 : 2004년 01월 07일 00:00:00 / 수정 : 2004년 09월 20일 16:03:44 |
동학의 조직 중 남접과 북접에 관하여 |
[연재]조광환 선생님의 '청소년을 위한 동학농민혁명이야기' |
|
|
동학의 조직 중 남접과 북접에 관하여 동학의 단위조직에는 접(接)과 포(包)가 있습니다. 초기 동학의 단위조직은 접이었으나 1893년 3월 이후부터는 동학의 단위조직이 포로 바뀌게 됩니다. 포는 상급조직이고 접은 하급조직이며 포는 여러 개의 접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접의 책임자를 접주라고 불렀습니다. 초기의 포 이름은 큰접주의 성이나 이름을 따서 김 아무개 포, 이 아무개 포라 불렀다가 1893년 3월(癸巳)에 보은집회 때 공식적인 포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리고 큰접주라 하던 것을 대접주로 바꿔 불렀답니다. 그리고 북접과 남접이란 말이 있는데 오지영은 〈동학사〉에서'남,북접설은 수운 선생 당시에 우연히 생겨나온 말이며, 해월 선생이 사는 곳이 북쪽이 되어 북접이라 불렀다'고 했습니다. 또 「東京朝日新聞」1895년 5월 11일자 기사에 의하면 서장옥을 최시형의 제자라 하였으며, 또 서장옥의 제자로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 등이 있는데 이들은 최시형 보다 서장옥의 능력이 위에 있다고 믿고 따름으로서 마침내 南接이라 부르게 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최시형의 제자들이 최시형에게 권하여 北接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계기로 동학의 남접, 북접의 이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전봉준도 공초(심문기록)에서 '호남을 남접이라 칭하고 호중을 북접이라 칭했다'고 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남,북접은 동학조직 내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둘러 싼 노선차이로 생겨난 세력집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접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북접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세력집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또 남접은 농민봉기를 통해서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던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서장옥 등 강경세력이 중심이었던 것에 반하여 북접은 무장봉기에 반대하고 순수한 종교적 입장을 지키려는 최시형, 손병희, 김연국 등 온건세력이 중심이 되었답니다. 동학농민혁명과 남,북접 갈등설에 대하여 19세기 후반 봉건정부의 부패와 외세의 침략아래 신음하던 우리 농촌의 현실 속에서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은 동학교인들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염원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사회변혁을 위한 세력들이 성장하고 결합하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당시 지역적 한계를 넘어 일시에 수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정부에 맞서는 시위를 전개한 조직은 동학뿐이었으며 동학의 상층부는 이러한 힘을 토대로 동학의 공인을 이루려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이를 통해 잘못된 사회 자체를 바꿔보려는 또 다른 입장을 지닌 서장옥과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에 의해 투쟁의 형태와 성격이 이원적으로 진행되어 갔으며, 이들은 교조신원운동 과정을 통해 서로 결합되면서 사회변혁의 주체세력을 형성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변혁의 주체세력 중 갑오농민쟁의 주역인 전봉준 등은 이미 삼례집회 때부터 공식적으로 이름을 드러내고 일단의 세력을 형성하여갔으며, 또 이를 통해 교조신원과 동학의 종교적 자유, 동학교도에 대한 지방관의 탐학 금지 외에 보다 정치적 구호인 외세배격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1893년 동학교단 북접에서 준비한 복합상소가 이뤄질 때 비록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으나 이들 남접 세력들은 상경한 동학교도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무장을 시켜 궁궐을 습격하여 중앙고관들을 제거하고 조정을 개혁하고자하는 가히 혁명적인 항쟁방법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서장옥과 전봉준 등 남접 세력들은 사회변혁을 위해 동학교단 상층부를 움직이는 것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남접 또는 전라도 고부(古阜)라는 한 고을의 농민무장봉기로 그 방향을 바꾸어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전봉준은 고부에서 사발통문거사계획을 수립하는 등 무력항쟁을 계획하고 전개시키는 동시에 이의 확대발전을 위해 사전 함께 계획하고 준비한 사회변혁주체세력들과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거병준비를 하였습니다. 이들의 이런 노력이 갑오년 정월 고부농민봉기로 그리고 갑오년 3월 본격적인 농민전쟁으로 연결된 것이지요. 따라서 고부농민봉기를 조병갑의 탐학에 대한 단순하고 우발적인 지역농민들의 봉기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며, 또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동학의 남접 세력에 의해 사전 계획되었으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고부라는 일개지역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발통문에서 기록된 것과 같이 전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장 올라가 당시 조선이 안고 있던 전반적인 사회모순을 개혁하고자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1894년(고종 31) 남접의 전봉준 등이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무력행동을 반대하여 만류하였으나, 남접이 이를 듣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전개하자 동학의 지도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됩니다. 최시형의 머리에는 과거 1871년 3월 이필제가 교조신원을 명분으로 경상도 북부 지역 동학교도들을 결집하여 일으켰던 영해 무장봉기를 떠올랐을 것입니다. 최시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이필제의 난! 그리고 이 때 입었던 엄청난 인명 피해와 회생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던 동학 조직을 각고의 노력 끝에 다시 재건한 최시형으로서는 남접의 무장봉기를 두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특히 그는 동학의 교주로써 동학을 널리 전파하여 세세손손 이어가도록 해야 하는 책임을 지닌 입장이었습니다. 제폭구민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남접 농민군들의 구호가 가슴에 와 닿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시기와 방법에 있어 차이가 있을 뿐이었지요. 그래서 아직은 시기가 아니니 자중하라고 만류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동학에서 파문시키겠다느니 명령 지휘계통을 어기는 남접을 치겠다느니 엄포도 놓았지요. 허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답니다. 오히려 남접에 의한 2차 봉기가 전라도 삼례에서 있게되자 일본의 침략에 대한 구국의 차원에서 남접을 포용하고 더 나아가 남․북접이 하나가 되어 이 나라와 민중을 지키고자 북접군을 일으겨 남접에 합세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 최시형의 참 면모라 할 수가 있지요. 최시형은 1898년 4월 5일 강원도 원주 호저면 고산리 송골에서 체포되어 그해 7월 18일 사형언도를 받고 72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했는데 그 최후의 순간까지도 담담했습니다. 그 후 다행스럽게도 1907년 고종의 특명으로 최시형은 신원이 승인되어 역적의 굴레를 벗고 복권되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대사상가요 개혁가이며 실천가인 최시형에게 사형을 언도한 고등재판소 판사가 다름 아닌 전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이었다는 사실 아시나요? |
|
입력 : 2004년 02월 08일 00:00:00 / 수정 : 2004년 09월 20일 16:02:32 |
김개남과 임병찬 | ||||||||
[연재]조광환 선생님의 '청소년을 위한 동학농민혁명이야기' | ||||||||
| ||||||||
| ||||||||
김개남과 임병찬은 우리 역사책 속에 모두 애국지사로 자리 매김 되어 있습니다. 두 분 모두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똑같이 나라를 사랑하는 삶의 길을 걸었으나 그 방법은 달랐으며,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비장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 (金開男)의 본래 이름은 영주(永疇)로 1853년 9월 15일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대현의 제3자로 출생하였습니다. '개남'이란 이름은 그가 훗날 동학에 입교하여 문자 그대로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고 남녘 세상을 새롭게 열겠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한편 임병찬은 1851년 2월 5일 전북 옥구군(沃溝郡) 서면(西面) 상평리(上坪里)에서 임용래(林榕來)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호는 돈헌(遯軒)으로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과 함께 정읍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일제의 국권강탈 이후 고종의 밀서를 받고 전국적 규모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의병전쟁을 일으키다 일제에 피체(被逮)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문도에 유배되어 순국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오년(1894)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두 분은 집안 대대로 씻을 수 없는 악연을 맺었습니다. 1890년 낙안 군수로 있던 임병찬이 은퇴하여 태인 산외면 종송리(種松里 : 현,宗聖里)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중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태인은 이웃 금구의 원평과 아울러 호남에서 동학이 가장 그 세를 떨친 곳입니다. 또 이곳은 김개남의 집안인 도강 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어 그들이 동학의 중추적 인물로 등장합니다. 혁명적 풍운아 김개남 김개남은 동학농민군을 남녘 땅을 휩쓸 때 남원에서 우도의 금산, 무주, 진안, 용담, 장수를 비롯하여 좌도를 호령하였고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설치하고 영남의 서남부지방까지 세를 떨쳤습니다. 삼례에서 2차 봉기가 일어나 공주로 진격하는 전봉준과 달리 그는 10월에 청주로 진격하였습니다. 전봉준, 손화중과 아울러 동학의 3거두 중 최고 강경파였던 김개남은 북상 도중 전주에서 남원부사 이용헌과 고부군수 양필환을 체포했는데 굴복하지 않고 반항하자 일거에 이들을 단호하게 참수해버립니다. 이런 그의 명성은 양반 관료들에겐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원한의 대상이었지요. 그는 11월 10일 청주를 공격했으나 일본군에 패하여 진감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너듸에 있던 매부 서영기 집에 숨어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웃 종송리에 살고 있던 임병찬이 김종섭을 시켜 종송리에 있던 송두용 집으로 유인하도록 시켰습니다. 종송리는 회문산 자락에 위치하여 앞서 숨었던 너듸마을 보다 험하고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으니 더욱 안전한 곳으로 와 있으라는 김종섭의 설득이 그럴싸하여 김개남은 은거지를 종송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한편 임병찬은 김개남을 유인해 놓고 김송현, 임병옥, 송도용을 시켜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에 고발하니 이도재는 황헌주로 하여금 강하병 80명을 거느리고 종송리에 와서 12월 1일 새벽 김개남을 잡아갔습니다. 그가 잡혀 전주감영에 끌려갈 때,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우리에 묶여 가다니 그게 웬 말이냐.”라는 노래를 불렀고 전합니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김개남을 전주로 압송한 뒤, 중도에 탈주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김개남을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시켰습니다. 그 때의 광경을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이 머리를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당시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1894년 12월 27일 조선정부에 서한을 보내 "비도 (동학농민군)의 처형은 신중을 기해야 하며 체포된 비도들은 정토대(일본군)에 넘겨 처리토록 하라"고 요구했는데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 도중 탈취사건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전주에서 임의대로 이토록 잔인하게 처형시킨 것입니다. 충의의 의병장 임병찬 임병찬은 김개남을 밀고한 대가로 1895년 정월 정부로부터 임실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했습니다. 포상에 눈이 멀어 밀고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대신 황헌주를 임실군수로 임명하였습니다. 그 후 임병찬은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1906년 6월 4일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현재 전북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 후 최익현과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1906년 7월 9일에는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최익현이 단식항쟁(斷食抗爭)으로 순절(殉節)하였고 임병찬은 이듬해 1907년 1월에 유배가 해제되어 귀국하였습니다. 또 그는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이 강탈당하자 재차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던 중 1912년 고종으로부터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북도 순무대장(全羅南北道巡撫大將)으로 임명한다는 밀명을 받고 전국적인 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다가 일제에 붙잡혀 거문도(巨文島)에 유배되어 1916년 음력 5월 23일 유배지에서 향년 66세의 생을 마쳤습니다. 그런 그가 불과 몇 달 전 일제와 싸웠던 김개남을 밀고하여 잔인하게 죽게 만든 것입니다. 차라리 몇 달 전 김개남 등 동학농민군과 함께 힘을 합해 일제에 저항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임병찬은 포상이 탐이 나서 김개남을 밀고한 것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선비로서 최고의 가치 덕목인 충과 효를 위해 살다 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충성은 나라의 주인인 임금에 대한 충성이지 오늘날처럼 백성을 위한 충성은 아니었답니다. 당시 유림들은 왕이 아무리 잘못하여도 또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여 의롭게 일어난 백성들의 항거를 모두 '난(亂)'으로 인식했던 것이지요. 따라서 몇 달 전 민씨 정권 타도를 외치면 일어 선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을 밀고한 것은 나라의 주인(국왕과 국모)에 대항하여 일어 선 역적을 타도하겠다는 그 나름대로의 충을 위한 신념에서였을 것입니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림들은 충을 위해 의병을 일으킨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림들이 지닌 의식의 한계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임병찬의 임씨 집안과 김개남의 김씨 집안은 대를 이어 원수지간이 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저승에서 만난 두 분은 과연 어떤 대화를 했을까요? | ||||||||
|
||||||||
입력 : 2004년 08월 23일 00:00:00 / 수정 : 2004년 09월 20일 15:55:25 |
꺼지지 않는 민족의 횃불,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따라(7)-손화중과 김개남 | ||||||||||||||||||||||||||||||||||||
[연재]김재영의 '샘솟는 땅 정읍의 문화' | ||||||||||||||||||||||||||||||||||||
| ||||||||||||||||||||||||||||||||||||
| ||||||||||||||||||||||||||||||||||||
ㅇ최연소의 거포 접주 손화중(4194-4228) 장군 손화중은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으로 피난시킨 손홍록의 후예로 승지(勝地)를 찾아 경상도 청학동으로 갔다가 동학에 입교했다고 한다. 입교 2년 뒤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본가인 음성 마을로 돌아왔는데 이곳에 현재 후손인 손홍철, 손홍렬씨가 살고 있다. 손홍철(79세) 옹에 따르면, 선친 대대로 부안읍 내오리(內오里) 옹정(甕井) 마을에서 살다가 과교동으로 이사하여 신원균 씨 집에서 손화중 장군이 출생했다고 한다. 현재 당고개 너머 입암으로 가는 고가교 좌측을 말한다.
음성마을은 일제시대에는 고부 이씨 집성촌으로 이뤄진 쌩계와 밀양 손씨 집성촌으로 이뤄진 삼산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하나로 통합되었다. 손화중은 이 곳에 살면서 포교지를 무장에 두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지도자 중 최연소(34세)였으나 가장 많은 교도를 가졌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백산대회 당시 4천명의 농민군 가운데 상당수가 손화중포였으며 황토현 전투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4225년(1892)에는 선운사 도솔암에 있는 마애불 속에서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이 돌면서 더욱 신비스러운 인물로 여겨졌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예언과 비결이 유행하게 되는 법이다. 특히 조선 후기는 세도정치로 인하여 정치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관직이 매매되고, 탐관오리의 수탈이 전에 없이 강화되자 천대받는 하층민들에게는 이러한 예언사상이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고 하나의 믿음이 되었을 것이다. 손화중은 전봉준과 함께 이렇게 3월 봉기의 주역으로 활동했고 전주해산 후에는 나주(羅州), 장성(長城) 등지에 머무른 것으로 간주된다. 9월 봉기에서는 일본군이 나주에 상륙한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최경선과 함께 나주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태인전투 뒤에는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 이모씨 제실에 숨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고 있다. 그는 전봉준과 김개남이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세가 기울었음을 판단하고 재실지기인 이봉우를 불러 “어차피 나는 잡혀갈 몸이다. 네가 나를 고발하여 후한 상을 받아라. 그 동안 네게 진 은혜를 갚겠다.” 라고 하여 이봉우의 고발로 체포되어 4228년(1895) 3월 30일 전봉준과 함께 처형되었다.(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인물지 참고) ㅇ강경파 김개남(4186-4227) 장군 김개남(金開南)은 4186년(1853)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대현(金大鉉)의 3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영주(永疇), 자는 기범(箕範)이다. 족보에 개남이라는 이름이 없어 동학에 입교한 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정말 가슴졸이고 갑작스럽게 놀랄 때 간이 콩알만해졌다고 이야기한다. 반면에 담력이 큰 사람들은 간이 크다고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간이 보통 사람들 것보다 컸다는 기록이 다음 일화를 통해서 상당히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일설에 김개남 장군은 체포 직전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한다. 때마침 관군이 들이닥쳐 어서 나와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는 호통에 그는 껄껄 웃으면서 내가 어찌 너희들의 오라를 받겠느냐. 내 스스로 걸어 가겠노라 하며 일을 다 보고 난 뒤에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고 전한다. 부러지면 부러졌지 굽힐 수는 없다는 그의 의지와 담대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로 전봉준과 함께 농민군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 ||||||||||||||||||||||||||||||||||||
|
||||||||||||||||||||||||||||||||||||
입력 : 2004년 10월 17일 08:15:15 / 수정 : 2004년 10월 17일 08:18:45 |
꺼지지 않는 민족의 횃불,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따라(8)-최경선과 김덕명 | |||||||||||||||
[연재]김재영의 '샘솟는 땅 정읍의 문화' | |||||||||||||||
| |||||||||||||||
| |||||||||||||||
ㅇ동학농민군 영솔장 최경선(4192-4228)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과 함께 영솔장(領率將)으로 농민군을 이끈 최경선 장군의 묘비가 4329년(1996) 9월 8일 칠보면 축현리(丑峴里) 조왕곡(兆王谷)에 건립되었다. 농민군들이 죽창을 들고 있는 모습을 부조한 3m 높이의 화강암 병풍석 12개를 묘 둘레에 건립하여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을 따르던 농민들의 모습을 형상화시켰다. D17.최경선 장군 묘(칠보면 축현리 조왕곡) 4192년(1859) 정읍시 북면 월천동에서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최성룡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최장군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전봉준과 함께 사발통문 거사계획에서부터 농민군 해산까지 뜻을 같이 한 동학농민혁명의 거두였다. 전봉준 공초에 서로 친한 것이 5-6년이 된다 했으니 최경선의 나이 31,2세에 이미 전봉준과 만나 서로 교감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에도 전봉준의 모주(謨主), 전봉준의 고굉(股肱/팔과 다리)이 되어 거사에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경선은 황토현 전투는 물론 전주성을 점령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2차 봉기 때는 전봉준과 함께 공주 방면으로 북상했다가 일본군의 해안침략에 대비하여 나주지역에 주둔하였다. 공주 및 태인 전투에서 패한 후에는 농민군을 거느리고 화순군 동복(同福)에서 관군과 접전을 벌이다 체포되어 4228년(1895) 3월 30일 서울에서 일본군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져 생을 마감했다. ㅇ넉넉한 인품의 김덕명 장군(4178-4228)
전봉준 장군(41세)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 농민군 지도자 중 김개남이 42세에, 손화중이 35세에, 최경선이 37세에, 김덕명 장군이 51세에 처형되었다. 지도자급 인물중 가장 나이가 많고 그 인품으로 보아서 전장군의 자문역할을 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특히 그의 넉넉한 인품을 짐작할만한 일로 체포 당시 마을 주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 |||||||||||||||
|
|||||||||||||||
입력 : 2004년 10월 17일 08:21:53 / 수정 : 2004년 10월 17일 08:36:40 정읍통문의 다른기사 보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