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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 권송지 - 선덕여고 2-4
숲
내가 작고 철이 없었던 옛날, 황성공원의 푸른 소나무 밑에서 할머니와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밝은 햇살이 나뭇잎을 만나 잘게 흐드러지던 날이었다. 굵은 나무뿌리 의자에 앉아 나는 발장난을 치고 할머니는 그림을 그리셨다. 잠시 후 작은 숲이 나에게 건네졌다. 어린 나는 한 손에 꼭 들어오는 숲이 신기해서 그 그림을 한참이나 바라봤었다. 지갑에서 꺼낸 명함 뒷면에 아이브로우로 그림을 그리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십년도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때 처음으로 할머니의 꿈을 보았다.
하지만 가난했던 삶, 가슴속에 묻어둬야만 했던 꿈, 고달픈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나의 꿈을 쫓느라 할머니의 그림을 잊고 살았다.
작년에 아픈 다리를 이글고 무장산을 다녀왔다는 할머니가 걱정되어 엄마와 함께 할머니 집을 갔엇다. 어떻게 갔다왔냐는 말에 할머니는 스케치북을 들고 오며 말씀하셨다.
“다리가 아파서 살살 친구들만 산에 가고 나는 살살 걸어서 단풍보도 왔다. 조금만 걸어가니까 억수로 좋은 단풍 숲이 있더라. 한번 봐라.”
억새를 보러간 치누들 보다도 더 좋은 구경을 하고 왔다며 웃는 할머니의 얼굴에 나는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그제서야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할머니응 위하는 착한 손녀였던 내 모습은 다 거짓이었다. 어재서 나 마저도 할머니의 꿈을 잊고 지내 왔던 것일까. 너무도 죄스럽고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날, 할머니의 아픈 다리를 한참이나 만져주었다.
젊어서는 자식들을, 늙어서는 손주들을, 쉬어야 할 때에는 할아버지가 남겨주고 떠난 밭을 모두 떠맡아야 했던 할머니의 70년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부턴가 작은 나보다도 더 작아진 할머니를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기엔 너무도 긴 세월이었고, 당신을 위해 보내기엔 터무니없이 짧았던 순간, 할머니를 지탱해 준 그림이 있었음에 감사한다. 어릴 적 그 숲에서 만난 할머니의 오랜 꿈을 이제는 내가 지켜주고 싶다.
얼마 전 외삼촌 네와 독립하여 모든 것에서 해방된 할머니는 본격적으로 그림에 전염하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혼자 지내시는 작지만 따뜻한 아파트에는 이젤이 놓여져 있다. 내 눈에 보이는 할머니의 그림은 참 멋있고 슬프고, 가슴을 울린다. 매일매일 늘어가는 그림 속에 할머니의 웃음도 늘어 갔으면 좋겠다.
어릴 적 할머니에게 받았던 명함 뒤의 숲은, 지금도 내 방에서 맑은 산소가 되어 나를 숨쉬게 해 준다. 유난히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할머니의 행복은 아마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가. 진흙 위의 고고한 연꽃처럼 힘든 세월 속에서도 때 묻지 않은 할머니의 인생, 매일같이 하느에 뜨는 해와 달마저도 할머니의 행복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수 : 박다정 -근화여고 2-3
숲
아버지는 순식간에 물고기가 되셨다. 뻐끔뻐끔. 바다 표면에 입을 내밀고 숨을 몰아쉬는 붕어처럼, 아버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셨다.
“ 제 동생 놈이, 경찰서라고요?”
아버지를 마법사로 변신시킨 마법사는 삼촌이었다. 마법사는 회사 일에도 마법을 부린 모양이었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의 월급을 자신의 통장으로 넣는 순간이동 마법부터 허튼 소리하면 경찰서에 불법 체류가라 신고하겠다는 협박 마법까지. 명절이 아닌 날에 삼촌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삼촌은 비쩍 말라 석은 나무같았다. 썩은 나무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슴이 없으셨다. 아버지처럼 물고기가 되시지도 않으셨다. 그저 조용히 썩은 나무를 쳐다보셨다. 썩은 나무의 얼굴은 땅에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톡 건드리면 시멘트 바닥으로 향한 그대로 툭 떨어질 것 같이. 그러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할아버지는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경찰서 밖으로 향하셨다. 아버지는 내내 할아버지 눈치를 보시다가 이 눈치 없는 녀석아. 얼른 할아버지 쫓아가! 나의 등을 꾹꾹 밀어 내셨다. 나는 밀리지 않으려 애를 쓰다, 아! 할아버지랑 어색 하단 말이에요! 결국 아버지에게 한 대 얻어 맞고 갈을 나섰다 그럼 더더욱 쫓아가야지 이 녀석아! 아버지의 외침이 강한 힘으로 나의 발을 끌어 당겼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계셨다. 시민들을 위한 자연 휴양림. 단정하게 쓰인 팻말을 뚫어지게 보고 계셨다.
“와! 어떻게 이런 도시 한복판에도 숲이 있을 수가 있죠?”
할아버지와의 끈끈한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명절이 아닌 날에 처음 보는 사람은 할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셨다. 할아버지는 팻말을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고 말씀하셨다.
“ 많은 벌레들, 많은 조류들 그리고 많은 나무들이 끊임없이 조화를 이루어야지 누구 하나 욕심을 내지 않고 배려하는.......”
할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하셨다. 할아버지는 팻말에 적힌 ‘림林’자를 손으로 살살 어루만지셨다.
“ 내가 키운 나무 놈 마저 말이야.”
할아버지가 나무를 키우셨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에 그물망을 쳐 보아도 건져지는 것이 없었다. 할아버지 손이 닿여 있는 팻말 뒤에 빽빽이 들어 선 나무들이 눈에 들어 왔다. 내 필통 속 갈색 몽당연필을 세워놓은 것 같았다.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초록색이 문득 예뻐보여 할아버지께 여쭈었다.
“저도 언젠가 숲을 만들 수 았을까요?”
나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줄곧 팻말에 박혀있던 고개를 돌려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를 쳐다 보았다. 나도 다라 시선을 옮겨 보았지만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쌉니다 싸요! 호객 소리와 눈을 찌르는 밝은 조명 뿐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숲엔 못된 나무들이 많아서 힘들 것 같구나.”
대체 무슨 말씀이시지? 왠 못된 나무? 그 때였다.
“소매치기야!”
거리에서 높은 목소리의 외침이 들렸다. 수난 할아버지의 말씀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됐다. 야 돈 좀 있냐? 죽여버릴 거야. 섬뜩한 말들이 이명처럼 들려왔다. 동시에, 썩은 나무에서 풍기던 고약한 냄새가 어디선가 밀려왔다.
우수 : 이지원 -경주여자정보고 1-1
숲
매마른 나뭇잎의 색을 가져간 듯한 햇살이 눈부시게 숲속을 비췄다. 거센 바람 탓에 마구 흔들리던 나뭇잎은 속절없이 떨어져갔고, 사브작 사브작 밟힌 나뭇잎 소리는 무너지는 공허함을 담은 듯 했다. 나뭇가지에 걸린 녹색 빛들은 여전히 빛을 잃고 떨어져 흙과 함께 잠들었고, 하늘은 변함없이 맑았다. 마치 그림처럼 모든 것이 내 눈에 담겨왔다. 털썩 땅에 드러누워 바라 본 숲의 풍경은 꼭 잡을 수 없는 환상 같았고 흘러나오는 싸한 바람 소리는 현실을 잊게 만들어 주었다. 언제 쯤 숲속을 나갈까? 골똘한 물음은 바람따라 사라졌다. 아무렴 어때, 여기가 천국인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나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따뜻한 햇살에 노곤하던 정신은 어느 샌가 꿈속으로 스며들었고, 얼굴은 꿀같은 평온함을 품었다. 시간과 함께 고요함이 숲을 눌렀고 해가 기울어 갈쯤에 나는 평온함이 깨져 날카로워진 얼굴로 눈을 떴다. 지워나, 어디 있니 지원아. 끊임없이 귓가를 맴도는 애탄 소리가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나가고 싶지 않아, 아랫 입술을 깨물며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도록 귀를 감산채 떠나지 않는 소리를 헤집던 내 눈에서는 어느 수난부터 눈물이 흘렀다. 살랑이는 바람은 눈물을 말려주려 애를 썼지만 쉴 세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하나, 둘 떠나갔다. 폭우처럼 떨어진 나뭇잎들은 웅크려진 내 몸을 에워쌌고, 애탄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를 흔들었다. 천둥 같던 시간이 지나자 목소리는 포근함이 되어 햇살처럼, 아니 해살보다 더 따뜻한 손기로 나를 안아주었다. 괜찮나, 괜찮아. 작게 속삭이는 소리는 끊임없이 흘러내리던 눈물을 멎게 해주었고 눈 앞에 내밀어진 깃털 같은 손 길은 울상인 얼굴에 웃음을 불어 넣어 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나뭇잎을 거둬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사리로 그려진 곧은 길에 발을 올렸다. 밟혀오는 나뭇잎 소리는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혀 주었고 하얀 구름은 포근하게 나를 감쌌다.
그래, 이제는 숲을 떠날 시간이다.
우수 : 김한비 -선덕여고 2-6
숲
이번에 신라문화제가 열렸다. 나는 그 한글 백일장에 참여했다. 황성공원을 장소로 해서 나는 황성동에서 성건동으로 이사를 간 후 오랜만에 보는 그 숲의 청량한 모습이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친구와 바닥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흘러 내리는 듯한 햇빛을 받으며 백일장의 개막식을 듣던 나는 주변을 찬찬히 관찰했다. 아름다웠다. 멀리서 보았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혹은 아름답게도 느껴져다. 나뭇잎이 서로 부대끼며 내는 산얀한 파도 소리나 온 몸을 깊게 훑고 가는 차운 바람은 숲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겠지. 이런 풍경들은 변함 있는 경우가 드물어서 내 어린 기억을 떠 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중학생 때 이 황성공원으로 환경미화 봉사를 하러 온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오늘 이 날의 하늘과 날씨를 하고 있었고 숲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주어진 일엔 열심을 다하는 편이라, 죽이 잘 맞는 친구와 근처의 쓰레기를 마구 줍기 시작했다. 있는 쓰레기 없는 쓰레기 다 주워가며 우리는 보이지 않는 쓰레기까지 찾아 줍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아직 낙엽이 많이 떨어지지 않은 한 흙무더기를 발견했다. 그 흙 무더니 밑에는 천이 삐져 나와 있었고, 호기심에 쓰레기를 주울 겸 그 천을 잡아 당겼다. 흙무더기는 쉽게 흩어졌고, 치운 천 밑에는 납작하고 묵직해 보이는 돌이 있었다. 우리는 궁금해 하며 돌을 들춘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돌 밑에는 구더기가 잔뜩 끼인 멸치 찌꺼기와 맥주 캔과 각종 쓰레기들이 있었다. 그 몰상식하고 엽기적인 누군가의 행동에, 또 마냥 아름다워만 보였던 이 숲의 비참한 속내에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이 후로 우리는 몇 번이나 숨겨진 곳곳의 쓰레기들을 발견하였다. 훤칠하니 건강해 보이던 나무도 병들어 죽어 가고 있는 나무란 것도 발견하였다.
멀리서, 겉으론 우직하고 아름답게만 보였던 그 숲도 그 안의 나무와 흙은 병들어 있었다.
겉으론 번지르르 신경 쓴 척 해도 그 속이 병이 들면 소용없어지는 것이다. 쉽게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이런, 내가 봤던 황성공원의 모습은 얼마 전에 본 기사의 내용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외국에서 보는 우리나라의 모습은 경제적이나 기술력, 군사력, 정신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나 정작 그 자랑스럽도록 멋진 우리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우리나라에 대한 자긍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 이것은 또한 우리나라의 높디 높은 자살율과 관련이 없지 않으리라. 겉으론 상당한 강대국, 속으론 병 들어가고 있는 국민들.
나는 이런 우리나라의 모습을 비롯해 개개인에 이르기 까지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허물이 될 겉에 치중하기 보다는 속을 알차고 건강하게 가꿔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숲을, 겉을 전체를 보는 관경 또한 중요하지만 이것은 나무를, 속을, 개개인을 보는 관경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가작 : 권문주 근화여고 2-4
숲
“아침밥은 먹고 가야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나는 단단히 동여맨 신발 끈을 다시 한번 당겨보고는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그럼에도 엄마는 한 동안 굳게 닫힌 문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손에 든 아침밥에 한숨을 가득 쏟아 부으며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다. 나는 고등학생이니까, 엄마는 고등학생 딸을 두었으니까.
“엄마, 오늘 서울 좀 다녀올 게. 할머니 차도 있으신지 보고 며칠 있다가 올지도 모르니 밥 잘 챙겨먹고, 아침은 영양제라도 먹고 가야 해.”
평소 잘 해 드리지도 못 하면서 엄마가 집을 비운다는 소리를 가장 싫어한 나는 엄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엄마가 집에 없으면 난 어떻게 하라는 거야. 왜 항상 엄마한테만 맞추려고 하는 거야!”
못난 딸은 곤한 심통에 마음에도 없던 말을 마구 쏟아내고는 방문을 걸어 잠궜다. 엄마는 오늘도 홀로 그 못난 가시가 돋은 말들을 맨손으로 집어 가슴속에 묻는 다. 그렇게 나는 또 가시를 품은 어리석은 모습이 미워져 끝없이 자책하고 원망했다.
알지 못했지만 엄마는 나에게 있어 꽤나 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침을 열어 주던 달콤하고도 상냥한 목소리와 매일 밤 어둠 속에서 홀로 달빛의 옷자락을 잡아 나를 지켜주던 그 모습이 이토록 가슴을 뜨겁게 적셔 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엄마가 돌아오시는 그 날, 꼭 따스한 어느 봄날의 햇살처럼 푸근히 안아 드릴 것을 다짐했다.
“왔어? 엄마 몸살이 나버렸네. 미안해 딸. 간식은 챙겨뒀으니까 가서 먹어 내일은 꼭 일어나서 맛있는 것 해 줄게.”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 돌아 오자말자 쓰러져버린 엄마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는 지 맥없이 앓기만 했다. 항상 밝고 든든한 모습만 보이던 때와 달리 기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속이 상한 나는 도 한번 툴툴대어 버렸다.
“엄마는 몸 관리도 못해? 왜 바보처럼 아프고 그래.”
반드시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려던 마음과 달리 다시 상처만 내밀어 준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 연신 머리만 쥐어박을 뿐이었다. 그러다 화장기 번진 엄마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고, 가방을 풀어 헤치기도 전에 소매를 걷어 붙였다. 그러고는 하아얀 양 볼을 따뜻한 물로 적시었다. 조심스레 엄마의 얼굴을 닦아보니 괜시리 마음 속 한 구석이 저려왔다. 한 때는 비단결 같이 고운 피부와 투명한 은빛을 띄는 눈, 언제나 핑크빛 웃음만이 그려졌던 아리따운 여인의 얼굴이 너무나도 변해있었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가 된 후, 세월의 길 속 방황했을 때의 모습이 남기고 간 눈가의 깊은 주름 모질기만 했던 딸에 몰래 뒤돌아 홀로 속을 끓인 듯 일그러진 미간, 힘없이 축 쳐진 입골에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엄마의 봉곳한 이마에 한동안 입을 맞춘 채.
다음 날, 머리맡에는 숲길이 그려진 엽서가 놓여 있었다.
“딸, 엄마 얼굴 깨끗이 씻어 놓았네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아가가 내 딸이라는 게 엄마는 언제나처럼 너를 꽉 껴안아 줄거야. 네가 가시 돋힌 나무가 되면 그 가시를 모두 닦아 무디게 만들어 줄 것이고 네가 조그마한 나무가 되면 고운 빛을 지닌 물을 대어 주며 울창하게 자라나길 기다릴 것이야. 아가 성급해 하지 마. 내 아가, 그저 울창하게만 자라주어. 엄마가 너를 감싸고 있는 숲이 될 테니. 너는 세상을 감싸 안는 푸른 숲으로만 자라주어. 그저 그렇게만....”
그 동안의 죄책감이 모두 얽히어 두 눈에서 떨어졌다. 지금껏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뜨겁고도 드넓은 숲의 품에 안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짐했다. 지금 이 바람과 손을 맞잡는 순간, 나는 크게 일어나 숲이 되겠노라고. 엄마께서 해 오신 것처럼 나 또한 누군가에게 어깨를 빌려 줄 수 있는 울창한 숲이 되겠노라고.
가작 : 김지원 선덕여고 2-3
숲
숲은 언제까지나 베푸는 걸까? 나무를 달라면 나무를 주고, 자신을 해치면 해치는 대로 그 자리에서 가만히 는, 그런 의미가 숲일까?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의미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숲은 그렇지 않다. 자신에게 놀러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살아 있음을 느끼고 우리 또한 그런 숲이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우리가 숲을 해치면 숲은 다음번엔 안 러겠지 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아주고 숲이 눈감아 준 것을 우리는 알아차려 숲에게 미안해하며 되돌려 주려고 노력한다. 숲이 아플적엔 우리는 함께 안타까워하며 진작에 지켜주지 못하고 받기만한 마음이 싫고 원망스러워 지기까지 한다. 때로는 하늘과 맞닿아 친구처럼 항상 함께 지내는 숲이 부러워지기도 하고 날씨가 어둡고 하늘까지 우중충한 날엔 숲까지 기분이 좋지 못한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겨 걱정이 되고, 우리도 기분이 좋지 않다. 이젠, 주위를 둘러보면 항상 있는 숲이 친구처럼 가조처럼 태초부터 정해져있는 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작 : 임소원 선덕여고 1-4
숲
유치원생들에게 미술시간에 “숲을 그려 보아요”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아이들은 깨끗하고 청정한 그런 숲을 그려 보여 줄 것이다. 아마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나오는 멋진 숲을 그려 선생님께 보여 줄 것이다. 아니면 백설공주가 살았던 일곱 난쟁이의 집이 있는 그런 숲이라도...
하지만 어른들에게 혹은 유명한 화가이시어도 상관없다. 그런 분들께 “숲을 그려 보세요”라고 한다면 아마 진짜 숲을 그리지 않으실까?
현실의 숲. 흙탕물이 여기저기 고여 있고 넝쿨은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걸려있는 더럽고도 알고 보면 진짜 숲인 숲을 그려 내 놓으실 것 같다. 그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작품성을 따지자면 당연히 어른들, 유명한 화가 분들이 우위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작품성을 보지 않고 내가 두 그림을 해석하자면 유치원생들이 그린 숲은 유치원생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 풍부한 상상력들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어른들, 유명한 화가들의 숲에는 진흙탕, 지저분한 넝쿨 등 자신들이 이 때 동안 살아오면서 본 진짜 숲들의 모습을 그려 순수함은 찾아 볼 수도 없고 풍부한 상상력 또한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숲을 그려 봄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순수한지 아니면 얼마나 때 묻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순수하지 않다고 슬퍼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현실에 물들여 졌을 뿐. 그리고 현실은 순수를 그다지 보지 않을 테니까.
가작 : 이은주 경주여고 1-1
숲
매일, 같은 시간 뻔하디 뻔한 알람소리에 눈을 부스스 뜬다. 잘 잤는지보단 잤다는 것 자체에 안도한채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켠다.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닦고 거울로 내 얼굴을 본다. 밤과 새벽의 경계가 사라진 나날에, 메마르기만 한 사람들 속에 살아가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법한 잿빛얼굴. 눈밑에는 다크서클이 일고 피부에서는 생기를 찾기가 여간 쉬운일이 아니다. 욕실을 나선다. 방 창문 틈으로는 가을의 햇살이 쏟아진다. 검정색 교복에 남색 책가방을 메고 신발을 구겨신는다. 회색문을 바라본다. 눈을 질끔 감는다. 그리고는 문 손잡이를 꽉 쥐고 손잡이를 돌린다. “이 문을 딱 열었는데 내가 알던 풍경이 아닌 전혀 다른 낯선 따스한 풍경이 펼쳐져있다면 얼마나 졸을까?”라는 짧은 망상과 기대를 한 채, 그리고 문이 열린다.
낯선 공간이 열렸다. 내려다보면 있어야 할 빽빽한 차들이 보이지 않는다. 여긴 어디인가. 숲. 그래 이건 숲이다. 온통 내가 잊고 살던 빛깔로 가득한 숲이다. 바람이 크게 일렁이고 나무는 출렁인다. 발 밑으로 통통 도토리가 굴러다니고 바닥에는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닿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해는 저물어가고 구름은 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득, 나도 모르게 “아, 학교 가야 하는데.”
늘 그렇듯 익숙한 공간이 열렸다. 바람도 나무도 도토리도 햇살도 없다. 그래 지금 나는 늘 입는 학교 교복에 남색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던 중이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은 상상이었던가. 왜 나는 그리도 빨리 돌아 온 것일까. 답은 확고했다. 나는 내가 그곳에서 나온 것이 었다. 나의 망상과 갈망이 빚어 낸 숲에 나는 분명 다녀왔다. 그곳에서 이곳을 떠올려 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내가 나온 것이다. 스스로, 밀려오는 시간의 압박에 계단을 내려가며 바람의 촉감을 되새기려 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아니, 지금도 생각한다. “모두의 마음속에 숲이 있지는 않을까?”라고.
가작 : 하바름 선덕여고 1-6
숲
사람은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다. 이 말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다들 느끼지만 지금의 사람들은 자연을 떠나서도 잘 산다. 매일 일상 속에 자연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회사와 학교를 가고 그 시간 속에서 자기의 일을 열심히 하고 여가시단에는 스마트폰, TV같은 전자기기로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그 다음날이 되어도 변화는 없다. 살아가면서 자연을 꼭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 중에 농촌동아리가 생겼다고 해서 망설이다가 한번 체험해 보기로 했다. 이 동아리는 자연 속으로 돌아가 농부들의 마음을 느껴보자는 취지였는데 첫 시간부터 힘들게 밭을 갈고 돌을 골라내고 하다 보니 너무 힘이 들어서 짜증도 나고 했었다. 그런데 내가 심은 채소, 과일들이 열매를 맺고 탐스럽게 익어가는 것을 보니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또한 수확 할 때는 마치 부자가 된 듯한 느낌도 들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흙을 만진 것도 처음이고 내가 농사지어 일구어 낸 음식들을 보며 뿌듯한 것도 처음이었다. 쉬는 날 집에서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만질 때보다 더 많은 걸 얻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흙을 밟고 만지고 열매를 수확해서 음식으로 만들어 먹고 하면서 자연이 주는 치유를 받은 것 같다. 흙냄새에 땀 흘린 내 모습이 자랑스러웠고 수확물을 엄마에게 내밀때 뿌듯했다. 이처럼 나는 자연에 아주 작은 일부분에 접해보았지만 마음에 느껴지는 행복은 몇배나 되는 것 같다. 사람들은 평소에 일상을 살 때에는 나무나 꽃들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계절이 변할 때 어떤 꽃들이 필 때 잠시 보면 즐거워 할 뿐이다. 세상이 문명을 떠나서 산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병이 들었을 때 사람이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자연이다. 암같은 큰병이 걸리면 사람들은 식생활을 자연식으로 바꾸려하고 자연속으로 들어가서 살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마음과 몸에 들었던 병들을 낫게 하기도하고 이처럼 사람은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이 이런 뜻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숲은 자연이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만가지의 풀들이 있고 그 속에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다. 숲은 자연이고 자연은 어머니와 같아서 모든 것들을 휴식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도심 속에 요즘은 공원들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잠시나마 휴식 할 수 있게 해주고 매연등 나쁜 공기들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내 삶에 있어서 자연처럼 또 나를 치유시켜주는 것이 있다. 책 읽기이다. 숲에 가면 벌레가 있어서 좀 싫지만 풀냄새 새소리,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나무 냄새를 맡으며 왠지 모르게 맑아지는 느낌이 들듯이 때로 힘이 들 때 책을 읽으면 자연에서 느끼는 듯한 그런 포근함 또는 맑아지는 느낌, 위로 받는 듯한 느낌에 나는 좀 편해진다. 숲은 멀리서 보면 어둡고 두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다가가서 보면 너무나 아기자기하고 편안함을 준다. 나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숲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많은 것을 받아주고 편안함을 주는 나무처럼 질리지 않는 향기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장려 : 설인정 선덕여고 2-6
숲
나는 남쪽의 열매만 맺는 열대우림 보다. 북쪽의 앙상 마른 가지만 있는 추운 그것 보다 항상 그 자리에서 365일 매년 변하는 내 나라의 그것이 좋다. 봄이면 온 세상을 연분홍빛으로 만들어 내 마음에 따뜻한 바람을 불어주는 그것은 여름이면 맑은 청록색으로 우리의 마음에 활기찬 생명력 넘치는 바람을 분다. 가을이면 타오를 듯한 빨강으로 온 도시를 구경거리로 전략시켜 낮의 네온사인이 된 그것이 이제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을 얼어버릴 기세로 차가운 기운을 내뿜어 문명의 그것들을 얼려버린 그것, 그것이 화나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지 알면서도 악순환은 반복된다. 지금 내거 글을 쓰는 그 와중에도 선선한 바람을 불어 주는 숲은 우리의 삶을 보호하고 의미를 느끼게 해 준다. 따사로운 햇빛아래 오래딘 역사의 냄새를 내 뿜는 너는 오늘도 여전히 빛난다.
장려 : 임소현 경주여고 1-2
숲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늘에 있던 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그 시간속에서 한 길을 따라 걸어 갑니다. 어둠 속에서 묵묵히 홀로 걸어 가지만 그 날은 유난히 친구와 싸우던 날이라 더욱더 나의 마음 한 구석, 쓸쓸한 미소와 함께 미안한 마음이 나의 가슴 속에서 쓰러집니다.
길을 걸어 가면서 홀로 나홀로 아무도 앉지 않은 긴 의자를 쳐다보며 그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하며 소곤소곤 거리던 그날이 떠오르지만 지금은 지금의 나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는 시간을 갖게 될 길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그 친구와 함께 이 숲을 향한 길을 건널 수 있는 날이 언젠가 올 수 있지 않을까요?
장려 : 정수현 경주여자정보고 2-2
숲
숲은 우리에게 휴식과 쉼터의 공간을 제공 해 준다. 사람들은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휴식을 취한다. 숲은 모두가 사용하는 공간이며 사람들 스스로가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왜 몇몇 사람들은 이 맑고 푸른 곳에서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일까? 숲은 우리 모두가 사용하는 맑고 청정한 곳이다. 한번씩 공원이나 숲 등에 와 보면 플렌카드 등에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데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숲은 우리에게 싱그럽고 맑은 공기와 쉼터를 제공해 주는데 우리도 그에 맞게 잘 써주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조금 불편해도 우리의 숲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조금씩 참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더 깨끗하고 싱그러운 숲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서로 조그만 관심들과 노력들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