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

<장희빈>
장희빈은 이미 너무 많은 사극과 영화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왔다. 장희빈이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어 계속해서 방송되는 것은 아마도 장희빈의 인생이 너무 드라마틱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희빈의 본명은 장옥정이다. 그녀는 몰락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될뻔 하다가 대비의 미움을 받아 쫓겨나게 된다. 그후 대비의 죽음으로 다시 궁궐에 들어와 후궁이 되어 제20대 왕이 되는 경종을 낳고 중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다시 희빈으로, 또 인현왕후의 죽음과 관련하여 사약을 받고 죽게 되기까지 정말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첨부>
이듬해 경오에 장씨의 생자로써 왕세자를 책봉하시니, 장씨 양양 자득하여 방약무인하니, 이러므로 발악을 일삼아 비빈을 절제하며 궁녀를 엄형하여 포악한 말과 교만한 행지 불가형언이라. 희재는 밖으로 탁란하고 음험하여 팔동에 장난하되 감히 말할 이 없더라.
-인형왕후전

<인현왕후의 사진>
쉬운말로 풀어쓰자면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에 책봉했더니 장희빈이 기뻐하며 제 세장인 듯 버릇없이 했다는 것이다. 제멋대로 다른 후궁들을 다스리고 궁녀들에게 엄한 형벌을 내리기도 하고 포악한 말과 교만한 행동을 일삼아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정도 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희빈이 실제로 극악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녀는 ‘악녀’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 대해서 다른 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주장은 장희빈은 악녀라기보다는 숙종의 왕권강화책에 희생된 여성이라는 평가이다. 장희빈이 살았던 때는 남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으로 당시 임금인 숙종은 탕평책을 처음으로 시행한 임금으로 그가 시행한 탕평책은 ‘교체탕평’ 이라 불린다. 즉 하나의 붕당을 기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붕당을 신임하다가 그 세력이 너무 커졌다고 생각되면 죄다 쫓아내고 다른 붕당의 사람들을 등용하는 형식이다. 실제로 숙종 초기에 남인이 대거 숙청당한 경신환국이 있었고 다시 서인이 축출당하고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 또 얼마뒤엔 남인이 제거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한 갑술환국이 있었다. 이렇게 자주 주도권이 바뀌다 보니 신하들은 숙종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숙종이 자신에게 사약을 내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숙종의 행동을 보았을 때 장희빈이 후궁에서 중전으로 다시 후궁으로 또 사약을 받고 죽기까지의 과정들은 장희빈 개인의 과실과 잘못이었기 보다 숙종의 왕권강화책과 관련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장희빈이 남인세력과 관련되어 있었고 인현왕후가 서인세력과 관련이 있다보니 숙종이 남인을 중용할 때는 장희빈이 힘을 얻었던 것이고 서인을 중용할 때는 인현왕후가 힘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인현왕후가 병들어 죽자 이번엔 숙종의 의지가 아님에도 장희빈이 다시 힘을 얻게 되는 상황이 되었고 그러자 숙종은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게했다’는 명목으로 사약을 내린것이다. 실제로 조선 전기에도 다른 후궁을 저주하였던 후궁이 있었지만 그녀가 사약을 받거나 하진 않았는데 그러다보니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장희빈이 꼭 착한 여성이었는데 어쩌다 희생양이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기록에 보이는 것과 같은 면이 있기는 했으므로 그러한 기록들이 남아있는 것이라 생각되고 자신의 야망을 위해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그것이 들통나 죽은 악녀인지, 아니면 당시 정치적 상황속에 희생된 여성인지 … 진실은 과거속의 사람들만이 알뿐 우리는 추측해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