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미안해, 그리하여 다시 미안하다
<아이 캔 스피크>의 인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핵심 정서는 미안함이다. 2017년 한국 사회에서 미안함이란 혐오의 반대편에 서 있는 감정이다. 그러고는 염치와 만나 연대를 낳는다. 이 영화를 ‘위안부 문제를 성공적으로 측면돌파한 대중영화’라고 한다면 작품의 가치 중 한쪽 면만 평한 셈이 될 것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혐오와 몰염치의 시대, 지금 필요한 연대의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20여년간 한 구청에다 8천건의 민원을 넣은 옥분(나문희)이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를 미워하던 동네 사람들은 미안해한다. 구청 공무원 민재(이제훈)는 눈물 흘리며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한다. 옥분은 그간 숨겨온 것에 미안해하고, 주변 상인들은 몰랐던 데에 미안해한다. 친구 정심(손숙)은 몸져 누운 모습을 보여 미안하고 남동생은 누나를 외면해 미안하고 옥분은 그런 동생을 끌어안고 흐느낀다. “미안혀, 미안혀….” 영화의 감정적 클라이맥스인 진주댁(염혜란)과 옥분의 오열 장면. 그간 아픔의 실체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닫자 미안한 감정이 북받친다. 영화 전반에 걸쳐 주인공이 가장 격하게 흐느끼는 이 장면의 대사는 “미안해”다. 미 의회에서 옥분의 연설을 들은 많은 의원들 역시 입을 모은다. “I am sorry.” 상영시간 1시간 10분여가 지나 옥분의 과거를 바라보게 되는 관객도 덩달아 미안하다. 잘못하지 않았어도 타인의 불행을 볼 때 마음속에 자생하는, 동서양을 막론한 공감의 감정이 바로 미안(未安·sorry)이다.
자신의 잘못이 연루되지 않은 비극을 대할 때 많은 이들은 미안함을 느끼지만, 어떤 이는 자신도 모르는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우월감을 챙긴다. 예컨대 광화문과 팽목항에서 이제 지겨우니 그만하라고 삿대질하던 이들의 마음속에 미안함이란 존재하지 않는 감정이다. 옥분의 진실을 알기 전까지 동네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댔다. 이건 초보적 단계의 혐오다. 몰랐기 때문이다. 겉모습만으로 상대의 인격까지 판단했다. 요즘 인터넷에선 말 한마디에 혐오의 대상도 되고 가해자도 된다. 대개 앞뒤 사정을 알게 되면 혐오는 미안함으로 바뀐다. 염치 있는 경우다. 미안함이 타인을 향한 따뜻한 감정에서 나온다면 염치는 자신을 향한 최소한의 냉정에서 비롯된다. 염치라곤 찾아보기 힘든 높은 단계의 혐오도 우리 주변엔 많다. 극중 일본인 로비스트들의 혐오는 최악의 단계다. 얼마 받고 이러느냐며 옥분에게 악다구니질하는 건 그들이 거짓을 말하기로 모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단인 염치가 없는 탓이다. 그들에게 욕설을 날리려던 옥분과 민재가 서로를 다독이며 자제하는 것은, 스스로 혐오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는 분별이다. 최근 적지 않은 상업영화들이 손쉽게 혐오의 감정을 소비하는 경향과 구분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시의성은 뜻이 깊다.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나누는 연대
<아이 캔 스피크>가 혐오를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21세기적·여성적 연대다. 피아 식별이 또렷해야 했던 80년대식 배타적 연대와는 구분된다. 인물들은 같은 편에 서서 똑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각자 위치에서 잘하는 걸 한다. 늙은 세대는 밥과 옷을 짓고 젊은이는 외국어능력을 품앗이한다. 이 연대에서는 나의 희생은 적고 동료가 얻는 효용은 크다. 문명이 고도화할수록 자신의 위치에 맞는 연대란 어떤 방식일지 고민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극 초반 행정소송 꼼수를 제안했던 민재가 후반부 옥분의 피해자 신분을 입증하기 위해 철새 정치인인 구청장의 성향을 활용하는 아이디어도 이같은 세계관의 연장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구현하는 실사구시. 영어를 가르쳐달라는 옥분의 부탁을 피하기만 하던 민재의 마음은 동생의 끼니를 챙겨준 (유사)어머니의 손길에 의해 열린다. 이쯤에서 휩싸이기 쉬운 모성애에 대한 강박 또한 영화는 지혜롭게 피해간다. 옥분과 민재가 만나고 갈등하며 화해하는 국면은 로맨틱 코미디 서사의 그것으로, 이들의 사이는 보호-피보호 관계로 묶이지 않는다. 안부 고맙고 나는 잘 있으니 너도 잘 지내기 바라며(“Fine. Thank you, and you?”) 연대하는 동료로서 양쪽의 성장담을 동등하게 지지하는 형세다.
극중 세대간 연대를 낳는 것이 모성애라면 지역공동체의 연대를 키우는 건 자매애다. 진주댁을 비롯해 족발집 처녀(이상희), 활동가 금주 선생(김소진)으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유대는 남자 하나 없이도 세상 든든하다. 배우자 없이 산전수전 겪어온 시장 여성 상인들은 뭇 영화에서처럼 보호받거나 폭행당하는 객체가 아닌 웬만한 풍파쯤은 스스로 버텨낼 주체로서 연대한다. 옥분의 출국을 앞두고 시장 상인들로부터 선물이 답지한다. 횟집에서 사골을, 건어물집은 한약을, 국숫집에선 내복을 전했다는 설정은 자못 중요하다. 횟집 주인은 민어탕을 끓여오는 대신 굳이 정육점에 들렀고, 건어물집 사장은 견과류로 비상식량을 챙겨 보냈어도 충분했으련만 고집스레 한약방을 찾았다. 상인들은 옥분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의논했을 터다. 어쩌면 이 선물들은 정육점, 한약방, 내복가게 사장이 준 걸지도 모른다. 옥분은 우리가 본 것보다 훨씬 많은 시장통 사람들로부터 응원받고 있다. 지역공동체의 연대를 모색하는 이 영화의 각본은 이렇게 사려가 깊다.
에필로그: 당의(糖衣)로서 ‘구청 3인방’의 코미디는 적재적소에 입혀졌다. 계단 오르기 장려 스티커를 거꾸로 부착하는 헛수고 장면이 옥분의 영어공부가 부질없는 일인 듯 보이는 국제전화 장면 직후에 붙고, 추석 연휴에 소개팅할지를 묻는 여직원의 엉뚱한 질문이 옥분과 민재 형제의 유사가족 형성을 본격화하는 장면 앞에 편집되는 식이다. 각색과 편집에 투여된 이같은 근면함은 개봉 후 지금까지 흥행을 이어가는 탄탄한 지지대가 되고 있다. 더불어 이 영화의 최종 흥행 결과만큼이나 궁금한 것은, 올해 각종 국내 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이 영화의 배우들이 가져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