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4일 타계한 이란 영화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1940-2016)는 독특한 인물이다. 한국 관객들에게 자신의 존재증명을 한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에서 그는 아마드의 정직성과 인간애를 따사롭게 포착한다. 가슴 깊이 연정을 담아 테헤레를 바라보는 청년 호세인. 그들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전하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 (1994).
자살을 생각하는 중년사내 바디의 하루 여정을 카메라에 담은 <체리향기> (1997). 100세 먹은 노파의 죽음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영화 <바람이 우리를 데려가 주리라> (1999). 아이들의 세계와 20대 청춘의 사랑, 중년사내의 축음에 대한 갈망, 아주 늙어버린 노파의 죽음. 인간의 삶에 내재한 시간대를 퍼즐 맞추듯 그려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허다한 길과 언덕배기와 바람과 먼지와 나무와 하늘은 은유 이상을 내포한다. 길과 길은 굽이치면서 이어지고 어느새 단절되지만,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교차하고, 황량함과 따뜻함이 혼재하는 공간 길. 그런 길을 걷거나 달리는 인간군상의 내밀한 심리를 지루할 정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추적하는 키아로스타미.
바디, 자살을 결심하다
우리는 바디를 모른다. 중년의 인텔리이자 레인지 오버를 소유한 인물이라는 게 정보의 총량이다. 영화는 그가 승용차를 몰면서 거리를 헤매다니는 것으로 시작한다. 분명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찾는 눈길이다. 카메라 렌즈는 그의 얼굴을 오른쪽과 정면에서 잡아낸다. 분주히 움직이는 손놀림도 빼놓지 않는다. 분명 찾는 대상은 있는데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거리를 떠도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고 있다. 1980년에 시작되어 지루하게 진행된 이란과 이라크 전쟁, 그 여파로 인한 경제난을 영화는 부수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감독은 이란 국민들의 피폐한 삶을 포착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직 바디의 눈길과 손동작을 통해서 그가 간절히 찾아 헤매는 대상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할 따름이다.
마침내 우리는 그가 찾는 대상이 자살자를 방조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과 만난다.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예정된 장소에서 영면하고자 하는 바디. 그는 자신의 죽은 육신을 덮어줄 사람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까마귀들이 떼 지어 날아다니는 고지대에 파놓은 구덩이에 누워 최후의 시각을 맞이하려는 바디. 왜 그는 자살하려는가?!
군인, 자살로부터 탈주하다
얼핏 봐도 어리숙하고 숙맥 같은 청년이 바디의 차에 오른다. 장거리를 걸어온 그는 피로하고 남루하다. 군에 입대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곤궁한 청년. 그는 돈 때문에 학력도 변변치 못한 형편이다. 바디가 그에게 거액을 제시하며 일거리를 제안한다. 의혹과 불신으로 가득 찬 청년의 눈길. 모든 이해와 수용을 거부하는 군인.
구덩이로 군인을 데려왔지만 바디는 난감하다. 요지부동의 자세와 돌처럼 굳어버린 얼굴로 한사코 고개를 젓는 청년. 군인은 승용차 안에서 꼼짝도 않고 앉아 있다. 이윽고 바디는 포기하고 운전석에 오른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군인이 차 밖으로 튀어 나간다.
가파른 언덕길을 직선으로 내달리는 청년. 구불구불한 길의 단면을 내리 꽂히듯 질주하는 군인. 그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는 바디. 저 아래 어디선가 군인들의 구호소리가 들린다. 비탈진 언덕길을 힘차게 달려오르는 젊은 육신들과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친다. 바디는 다시 운전대에 손을 올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신학생, 자살을 꿈꾸는 자를 설교하다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바위 파쇄기. 거대하지만 녹슬고 방치된 철골을 지키는 관리인에게 바디가 드라이브를 제안한다. 끝내 거부하는 그가 가리키는 곳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신학생이 앉아 있다. 선뜻 동승하는 신학생.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1979) 때문에 이란에서 신학을 공부하러 온 젊은이. 바디는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다.
기독교도와 마찬가지로 무슬림도 자살을 경원시한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가난한 처지지만 그는 바디의 제안을 거부한다. 외려 바디에게 자살의 본질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자신의 육신을 죽이는 것은 모두 살인입니다.”
의미 없는 생을 끝장내는 편이 삶을 질질 끄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바디. 그런 정도의 자율권이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믿는 중년사내. 하지만 신학생은 자신의 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바디.
바게리, 체리열매를 설파하다
머리가 세고 벗겨진 주름진 얼굴의 노인 바게리. 자연사 박물관에서 조류 박제사로 일하는 건강한 노인 바게리. 그가 선선히 바디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바게리는 젊었지만 너무도 가난했던 시절 자살을 시도했던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꺼낸다. 나무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매려 했다는 바게리. 그런 시도가 헛되이 끝나고 그가 우연이 맛 본 체리열매.
등교하던 아이들도 맛보고 집에서 잠자던 아내까지 맛을 본 체리열매. 그로 하여금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인도한 체리. 바게리는 지금까지 바디가 지나왔던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그를 인도한다. 이리저리 비틀리고 돌이 많은 거친 도로로 운행하라고 주문하는 바게리. 그의 이야기는 끊일 듯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빈혈을 앓고 있는 아들을 위해 돈이 필요한 바게리. 그럼에도 그는 바디에게 자살하려는 동기를 묻고 살아야 할 이유를 힘주어 말한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 밤하늘을 비추는 보름달과 별들, 바람에 흔들리는 체리나무와 꽃과 풀을 말하는 영혼의 인간 바게리. 바디는 하염없이 듣고만 있다. 이윽히 작별하는 두 사람.
바디, 자살을 결행할 것인가
한밤중 창 밖에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울린다. 커튼 너머로 바디의 바지런한 몸놀림이 보인다. 채비를 마친 그가 택시에 오른다. 단정한 자세로 나무 아래 파인 구덩이에 눕는 바디. 시커먼 먹장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달린다. 어디선가 천둥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바디의 묵연한 얼굴과 앙천(仰天)의 육신.
아아, 그때 소낙비처럼 거센 빗방울이 듣는다. 아까 보았던 한낮의 정경들이 바디의 뇌리를 스친다. 체육시간에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소년들의 건강한 육신들. 거칠고 강렬한 자동차 경적소리. 구름과 연무에 싸여 테헤란 외곽으로 서서히 넘어가는 저녁 해. 가파른 등성이를 날아다니는 까마귀들과 허다한 인간들의 야트막한 둥지.
바디는 그 모든 것을 마치 처음 대면하는 사람처럼 보고 듣는다. 그가 바게리에게 말한다.
“내일 아침에 저에게 돌을 던지세요. 혹시 살아있을지도 모르니까 돌 두 개를 던지세요! 그리고 몸을 흔들어주세요!”
색으로 말하는 키아로스타미
사람들이 구덩이 주위로 모여든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쉬게 하는 영화감독 바디. 촬영은 끝났다고 외치는 바디의 표정이 넉넉하고 여유롭다. 선글라스를 낀 바디 주변에 스텝들이 함께 한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초록의 향연이 펼쳐진다. 풀과 나무와 꽃들로 가득한 초록의 벌판과 언덕에 생명의 숨결이 가득하다. 모든 것이 살아서 약동하는 축복의 공간.
어제까지만 해도 갈색의 칙칙하고 먼지 풀풀 날리던 죽음과도 같았던 공간의 일신(一新)이 전개된다. 로드무비처럼 바디의 하루를 쫓아다니며 렌즈가 포착했던 단조롭고 시끄러우며 숨 막힐 것 같던 공간.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나무 한 그루와 까마귀들 이외에는 없는 척박한 사막 같은 공간. 그곳에 초록의 물결이 한가득 넘실대고 있는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색의 현저한 대조를 가지고 삶의 본질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바닥 모를 심연처럼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던 어제와 환희가 넘쳐나는 오늘의 대비로 그는 삶의 모순과 대립을 설파하는 것은 아닐까?! 길이 길에 연하여 끝없는 것처럼 굴곡과 질곡과 패배와 절망 너머에 존재하는 기쁨과 축복과 희망의 날들을 노래한 것은 아닐까?!
흔들리고 뒤얽히고 난만하게 풀어진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초록의 파도는 영화의 시공간을 일순에 바꿔놓는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처럼 단번에 대단원으로 질주하는 것이다. 거기서 키아로스타미는 관객에게 넌지시 말하는 듯하다.
“그래도 인생은 살만한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