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번 해외탐방을 준비해주시고 수고해주신 박종국 학장님과 손원교수님, 송계장님을 비롯한 교직원님들, 조은 여행사 직원님들에게 큰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번 여행의 취지대로 우리는 독일을 통해 국제적인 안목을 한층 기르게 되었고, 좀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뛸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교수님,교직원님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세계속의 경희인으로 우뚝 서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째날 긴 비행, 프랑크프르트 도착
인천에서 오후 12시 30분에 출발하여 12시간의 긴 비행끝에 현지시각 오후 4시 30분쯤 프랑크프르트공항에 도착했다. 착륙하기 전 비행기 창문을 통해 독일 땅을 내려다보려고 했지만, 두꺼운 층을 이룬 구름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착률했을 때, 오후 4:30임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흐린데다,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높아 더욱 어두웠다.
출국 수속을 다 마치고 공항을 나와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벤츠에서 만든 버스로 우리버스와 좀 달랐다. 버스 높이가 매우 높았는데, 왜그런가 했더니 버스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것이었다. 낯선 기후, 한국에서 보지못했던 버스, 공항 주변의 노란 털의 사람들을 보니 비로소 독일이구나! 실감이나기 시작했다.
버스로 20분정도 이동해서 프랑크프르트 시내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프랑크프르트 중앙역근처에 있는 한국식당이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중앙역전 한복판에 기아자동차와 금호타이어 빨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시내 가장 한복판에 그것도 큰 건물에 자리잡고 있다니..’ 반가운한편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꼈다. 식당에서 두부된장찌개로 식사를 하고 식후에 독일이 그렇게 자랑하는 맥주를 맛보았다. 모두들 맥주맛에 푹빠진 듯 앞으로 더 다양한 맥주맛을 볼 것을 기대하는 모습들이었다.
날도 어둡고 좀 늦은 시간이었지만 식사후 숙소로 이동하기 앞서 독일에서 유명한 뢰머광장으로 이동했다. 로마인이 살았다해서 뢰머광장으로 불리는 이곳은 최근에 전통목조가옥으로 재건된 아름다운 건물이 있었다. 시간이 늦어 문을 닫아 들어가보진 못했지만, 신성 로마제국 황제 52명의 자화상이 걸려있다는 시청사도 볼 수 있었다. 들어갈 수 없는 아쉬움에 이곳을 다녀간 흔적을 남기고자 시청건물현관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전체적으로 겉으로나마 로마제국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었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이 모두 독일전통목조가옥들이라서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어느 건물하나 관심가지 않는 건물이 없을정도로 한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광장 한 가운데에는 상인 도시를 상징하는 정의의 유스티티아 분수와 여신동상이 서 있었다. 또 한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매우 높이솟아있는 성당이 있었는데, 가이드분의 말을 들어보니 황제성당 또는 대성당이라고 했다. 독일의 많은 유적,유물들이 2차대전 연합군의 폭격으로 많이 손실되었지만, 보기흔하게 파괴되지 않은 성당이라고 하셨다. 고딕양식으로 지은 검붉은 건물인데 1562년 건립되어 36명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이 여기서 선출되고 대관식을 치루었다고 한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문이 열려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 여학생이 큰 첼로를 연습하고 있었고, 성당 예배당에선 무용인지, 율동인지 여러명이 모여서 무언가를 연습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첫째날이고 오랜 비행끝에 도착한 늦은 시간이라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낼 수 없었다. 그냥 뢰머광장과 시청사,정의의 여신상, 대성당을 보고 사진찍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다시 버스에 올라 숙소로 이동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약 1시간 30분쯤 아우토반을 달려 NH 호텔에 도착했다. 말로만 듣던 아우토반을 달려보았는데, 듣던것만큼 흥미롭진 않았다. 안전을 우선하는 버스라서 속도를 낼 수 없었기 때문. 그래도 간혹 광란의 질주를 하는 BMW,벤츠 이런 차들을 보면서 조금은 아우토반을 느낄 수 있었다. 한가지 또 신기한 것은 우리나라처럼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없다는 점... 고속도로에서 오토바이도 달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잠을 제대로 못이룬 탓인지 피곤이 몰려왔다. 시차적응이 안되면 어쩌나 고민을 했지만, 다행히 잠이 몰려와 밤 9시 30분쯤 잠자리에 들었다.
다른 조원들은 독일의 밤문화를 즐기기 위해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가이드 분의 말로는 독일은 밤문화가 없는 나라라고 한다. 독일 사람들은 가정중심적이라 회사에서 퇴근하면 일찍 귀가해서 가정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참 배울만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사회 범죄, 청소년 탈선행위가 주로 밤에 일어나지 않는가? 밤에 술과 쾌락에 만취해 몸과 영혼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나라도 이런 밤문화가 적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해보게 하는 독일의 선진문화였다.
둘째날 쾰른을 거쳐 아헨으로 이동
다음 날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더 자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일찍 잔탓일까? 긴장을 한 탓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새벽 4시면 한국시간으로 정오 12시였다. 한국에서도 아무리 늦게자도 정오면 눈을 떴던 것을 생각해보면, 평소 반복과 습관에 의해 형성된 우리 몸의 생체시계의 정확함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성경을 좀 읽고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담그었다. 피곤이 풀리는 듯 하였다.
아침 6시30분에 호텔 1층에서 룸메이트 명규형과 함께 가장 먼저 식사를 했다. 빵과 고기,버터,생과일,잼,시리얼,우유,요구르트.. 참 메뉴가 다양했다. 뷔페식으로 원하는 것을 다 먹을 수 있었는데, 의욕이 앞서 많이 퍼와서 남긴음식이 많았다. 전반적으로 음식이 좀 짰는데, 이 나라가 네덜란드와 같은 저지대이기 때문에 저혈압이 많아서 짜게 먹는다고 한다. 독일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 우린 밖으로 나와 산책을 하기로 했다. 독일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아침이었다. 전날 밤에 어두워서 보지 못한 마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시골마을이라고 하기엔 크고, 도시라고 하기엔 현대식 건물이 너무 보이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는 도로변을 따라 산책을 하기로 하고 무작정 걸었다. 그 때 시간이 아침 7시 15분밖에 안되는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등교하는 초등학생들이 눈에 많이 띄었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차들도 보였다. 밤문화가 없으니 하루를 일찍 시간할수밖에... 가이드님의 말을 빌리면, 이 나라 관공서의 출근시간은 아침 8시, 퇴근시간은 오후 5시이다. 심지어 돌아오는 길에 확인한결과 초등학교 수업도 8시부터였다. 요즘 사이쇼히로시의 아침형인간이라는 책이 일본의 아침을 바꾸었다고 화제가 되고 있는데, 일본,독일 두 경제대국의 이른 아침문화를 우리역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신앙이 있어서 새벽기도로 아침을 남보다 일찍 시작하는 나로서는 더욱 이 나라의 이런 문화가 부러운한편, 내가 고수하고 있는 생활패턴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을 갖게 하는 독일 아침풍경이었다.
도로변에 대부분 집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독일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전국토의 대부분이 평지이기 때문에 사람이 어디든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인구밀도를 갖고 있긴하지만, 굳이 한 곳에 많은 사람이 모여살필요가 없다고 한다. 더욱이 독일은 과거 봉건제를 기반으로한 200여개에 이르는 봉건국가들로 나라가 나뉘어져있었으므로 지방분권화가 매우 잘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라에선 우리 나라 서울처럼 그렇게 복잡하고 답답한 도시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그 마을도 결코 작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우리나라처럼 길거리에 온갖 상점들의 간판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주택이었다. 집들도 얼마나 아름답고 아담하던지, 마치 동화에서 본 듯한 평화로운 마을풍경이었다. 또 길거리주변에 쓰레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질서의식 또한 훌륭했다. 이 나라사람들은 자신이 지킬 것은 철저히 지키면서 자신들끼리 약속한 것을 어겼을시엔 엄중히 책임을 문다고 한다. 길에 침을 뱉으면 큰일나는 나라 이 나라가 그런 나라이다.
평범한 산책길이었지만, 배울것이 많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산책이었다. 독일의 아침이 좋았다.
조금 더 걷다보니 고가인도가 나왔고 밑으로 철도가 놓여있었다. 그런데 철도가 중간중간 끊기고 파괴된 흔적들이 보였는데, 아마도 2차대전의 흔적인 것 같았다. 불과 몇십년 전 이 곳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 한구석이 구슬퍼지기도 했다. 그런 전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만한 성장을 이룬 독일 게르만민족의 민족성 또한 대단하게 느껴졌다. ‘ 아! 독일... ’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독일의 아침이었다.
오늘은 긴 시간 버스를 타고 아헨으로 이동을 해야했기 때문에 아침일찍 짐을챙겨서 모여야 했다. 우린 아쉬움을 남기고 발걸음을 돌려 숙소로 돌아왔다.
9시 20분쯤 NH 호텔을 출발해서 아헨으로 출발했다. 아헨으로 가는길이 먼데다 중간에 쾰른을 경유해 쾰른성당도 다녀가야 했기 때문에 아침일찍 출발을 해야했다. 아우토반을 달려 쾰른까지 3시간이 걸리는 장거리여행이었다. 창밖의 풍경이 좀 지루했는데 가이드님의 말씀이 독일땅의 대부분이 평지이고 특히나 우리가 있는 중북부지방의 고속도로밖의 풍경은 지루한 풍경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속도로 주변엔 얼마나 많은 공장과 산업시설이 늘어서 있는가? 고속도로 옆의 땅값은 또 얼마나 비싸며 운송로를 중심으로 얼마나 인구가 밀집되어 도시가 발달하는가? 하지만 독일은 달랐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토목기술을 자랑하는 독일은 2차대전이후 꾸준히 고속도로 사업을 벌여 전 국토를 거미줄같은 고속도로로 연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공장이 도로변에 있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어떤 공장은 땅값이 싼 산속 깊은곳에 자리잡은 곳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운송에 큰 영향이 없다고 한다. 거기다가 라인강을 비롯해 라인강의 지류들이 많아 선박을 이용한 운송량이 많아 입지로 인한 운송비의 차이가 없는 나라라고 한다. 참 대단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고속도로를 3시간을 달려도 별 볼거리는 없었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아담한 마을의 풍경, 또 바람이 많이 부는 나라라서 보이는 풍차들, 빵을 많이 먹는 나라라서 보이는 밀밭의 푸른 풍경, 또한 독일이 자랑하는 고속열차 이체에(ICE)의 모습... 주로 이런 풍경들의 반복이었다.
또 하나 주목할만한 것은 독일의 삼림이었다. 가이드분의 말에 따르면 독일인들의 나무사랑은 세계제일이라고 한다. 독일이 전 산업시설을 중단시켜도 나무만을 가지고 20년을 버틸수 있을정도로 나무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독일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나무를 매우 과학적으로 가꾸고 관리한다고 한다. 지방마다 토질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 지방에 맞는 나무를 집중적으로 심어서 인공적인 삼림을 이룬다고 한다. 그렇게 장기적으로 앞을 내다보고 나무를 심고 관리하기 때문에 이토록 풍부한 삼림자원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후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를 외치며 무조건 빠른 시일내에 푸른산을 만들고자 아카시아같은 나무를 닥치는대로 심었던 우리나라의 근시안적인 정책이 매우 부끄럽게 느껴졌다. 어딜가나 무엇을 보나 배울게 많은 독일이다.
시차적응이 덜 된 까닭일까? 지루한 풍경으로 이내 잠이 잠이들어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주변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고, 눈을 떠보니 창밖으로 장관이 연출되고 있었다. 막 쾰른 시내에 들어선 것이었다. 저 멀리 쾰른 성당이 보였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을만큼, 그 명성에 걸맞는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가이드님의 말에 의하면 그 성당에는 예수님 탄생시 예물을 들고 경배하러왔던 세 동방박사의 유골이 안치되어있다고 했다. 아직 내릴시간이 많았지만 벌써부터 마음은 성당속에 들어가있었다.
쾰른 시내에서 중국식 음식점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성당으로 이동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쾰른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우린 사진찍기에 바빴다. 무엇보다 성당으로 들어가 기도도 하고 동방박사 유골이 담긴 황금상자 앞에서 예수님을 경배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신성로마제국당시 로마에서 옮겨온 성물이라고 한다. 1층에서 그렇게 경건의 시간을 가진 후 1유로를 내고 성당위로 올라갔다. 500개가 넘는 나선형 계단과 철계단을 올르고 올라 성당위로 올라갔을 때, 쾰른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라인강이 시내를 관통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건물도 빽빽이 들어서있고, 고층빌딩도 보이고... 경제대국 독일의 면모를 보는 듯 하였다.
쾰른에서의 시간을 보낸 후 이번 여행의 주목적지인 아헨으로 이동을 했다. 쾰른에서 아헨까지는 약 2시간이 걸렸다. 독일에서 아헨은 대학도시로 유명하다고 한다. 특히 이번에 견학을 하게되는 아헨공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대라고 한다. 아헨대학은 내일과 모레 9개 연구소를 중심으로 견학할 예정이고, 오늘은 아헨에 도착해 아헨성당을 비롯해 아헨시가지를 구경하고 숙소에 짐을 푸는 것이 일정의 끝이었다. 먼저 아헨성당으로 갔다. 아헨성당에도 역시 신성로마제국당시 이 곳으로 옮겨온 성모마리아의 옷가지와 예수님의 기저귀등의 성물이 담겨있는 금상자가 있었다. 로마의 역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이 나라엔 이렇게 기독교 성물이 많았다. 또 그 곳엔 프랑크왕국의 마지막 황제인 칼대제가 대관식을 치룬 칼대제의 의자도 있었다. 독일의 역사와 기독교 종교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유물들이었다.
어느덧 해가벌써 져버렸다. 아헨도 도시이긴하지만 밤문화가 별로 없었다. 일찍 호텔로 들어와 쉬고 내일을 준비했다.
셋째날, 아헨대학 방문
총장과의 만남이 약속되어있는 중요한 날이었다. 아침 8시 30분에 아헨대학 본관으로 가서 총장님을 만나 아헨대학에 대한 소개를 들었다. 이렇게 선진국의 대학을 방문했을 때, 총장님이 직접 나와 방문객들을 맞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번 아헨대학방문을 추진하신 학장님께서 몇 달전부터 아헨대학에 연락을 하시고, 미리미리 준비를 하신 결과라는 사실을 나중에 듣게 되었다. 이번 독일해외탐방이 그냥 해외여행의 차원을 훨씬넘는 아주 중요하고 의미있는 여행임을 알게해준 총장님과의 만남이었다. 총장님은 우리가 한국의 IT에 관계된 대학, 학과 학생들인 것을 아시고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솔직히 아직 우리 한국의 대학이 세계에서 경쟁력을 갖는 분야는 IT분야를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더욱 우리 대학들이 세계에서 경쟁력을 갖추어서 어느 대학을 가든 환영받을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해야한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총장님은 우리중에 관심있는 사람은 꼭 아헨대학 석사또는 박사과정에 지원해주기를 부탁하셨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헨대학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총장님과의 만남 후 본격적인 아헨공대 연구소 견학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간 곳은 컴퓨터공학 연구소 (Chair of Technical Computer Science)
사람이 모든 것을 제어하는 로봇이 아니라, 스스로 상황과 주변환경을 파악하고 판단을 내려 움직이는 로봇을 보았다. 이런 로봇의 기술은 지금까지 그냥 무조건 볼을 움직여 골만넣으면 되었던 로봇축구의 단순성을 이제는 서로 전술을 짜서 네트워킹을 이루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로봇축구로 한층 수준을 높이게 될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뭔진 정확히 모르지만 듣기만해도 확실히 앞선 기술력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사람의 손의 모양을 인식하여 읽어드리고 해석하는 시스템도 보았다. 시각장애자를 위해서나 여러분야에 유용하게 쓰여질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는 인형을 놓았을 때, 그 인형과 가장 유사한 인형을 스스로 찾는 로봇이었다. 인형의 색깔 모양에서 우선순위를 스스로 결정하여 가장 유사한 인형을 순서대로 찾아내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참 독특하고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연구소가 트렌드를 좇고 돈이 되는 것에만 몰두하는 반면, 이 곳 연구소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아주 창조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간 곳은 ComNets 연구소였다. 아헨으로 오던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을 하는데 군데군데 세워져있는 기지국들을 볼 수 있었는데, 휴대폰을 사용하는 독일사람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아 질문을 했더니 독일은 역시 밤문화가 없고, 굳이 휴대폰을 가지고 다닐 필요성을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앞선 기술력을 갖고도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급속도로 시장이 커지는 일은 없다고 한다. 독일사람들의 보수성을 또한 확인해볼 수 있는 재미있는 현상이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문화를 갖고있는 이 나라 사람들은 변화에 대해 우리나라처럼 수용적인 모습보다는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보수성이 더 강하다고 한다. 독일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이 유비쿼터스라든지 홈네트워킹 같은 분야, 그리고 고용량,광대역통신에 관심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세 번째 방문한 곳은 초고주파에 관련된 연구소였다. 하나의 건물에 세부적으로 나뉘어져있었는데, 첫 번째는 전파전파에 관련된 연구실로서 전파의 전파경로를 3차원 시뮬레이션하는 프로그램을 사용해 연구를 하고 있었다. 두 번째 연구실은 요즘 광대역통신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스마트안테나를 연구하는 연구소, 세 번째도 무반사실에서 측정되는 S 파라미터를 방향에 따라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는 마이크로웨이브를 이용해 인체의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는 의료쪽에 관계된 연구소였는데, 직접 실험에 참여하는 시간도 가졌다.
네 번째 통신연구소였다.
각 연구소마다 자신들의 연구분야에 대해 제한된 시간내에 설명해주려는 노력을 많이 하였지만 워낙 전문화된 분야이고 쓰는 용어들이 어려워서 아직 학부과정을 밟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손원 교수님의 보충설명을 들으면서 각 연구소의 연구인력, 연구소 규모, 시스템에 대해 배우는 것이 더 많았다. 독일은 참 연구인력이 많았다. 이공계기피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모습이었다. 박사과정이 20명 30명씩 되고 학부생들도 직접 기업과 연관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산업전선에서 투입되어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그런 시스템, 산학연결이 아주 잘 된 시스템이었다. 교수님께서도 이런 시스템은 우리나라도 배워야 할 시스템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침 일찍 총장님과의 만남부터 4개 연구소를 방문하기까지 빡빡한 일정을 보낸 우리 팀들은 많이 지쳐있는 모습들이었다. 아헨시내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조원들과 함께 아헨시내를 돌아보며 쇼핑을 했다. 선물을 좀 사려고 했으나 상점들이 대부분 일찍 문을 닫고, 술집밖에 문을 연 곳이 없어서 아쉬웠다.
내일 또 5개 연구소를 방문하는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어서 내일을 위해 일찍 들어가서 쉬기로 하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태어나서 벤츠를 처음 타보았다. 우리나라 차와 승차감의 차이는 별로 못 느꼈지만 확실히 출발할 때 힘이 달랐다. 벤츠엔진의 힘이 느낄 수 있는 택시였다.
넷째날 5개 연구소와 벨기에 브뤼쉘
이날도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연구소는 무선 네트워크에 관련된 연구소였다. Department of Wireless Network
연구소를 들어서는데 에릭슨엠블렘이 보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독일의 대학 연구소 대부분이 그렇게 산업체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대학을 졸업하고도 바로 기업에 들어가 일할 수 있는 실질적인 인력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만도 했다. 홈네트워킹이라든지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무선 블루투스 등등 무선 네트워크에 관한 연구가 한창 진행되는 연구소였다.
두 번째 연구소는 음향에 관련된 연구소. Institute of Technical Acoustics 아파트 층과 층 사이 소음을 줄인다든지, 차 안의 소음을 줄이는 연구를 하는 곳이었다. 또 우리가 직접 실험에 참여한 곳이 있었는데, 사람의 위치를 파악하여 자동으로 스피커의 on/off를 조절함으로써 어느 곳에 있든지 3차원 음향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입체스피커를 연구하는 곳이었다. 손원 교수님께서는 이런 연구분야는 참으로 남이 하지 않는 독특한 분야라고 하시면서 우리나라도 이런 남이 하지 않는 독특하고 창조적인 분야를 연구하는 과감한 연구원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다. 전부다 돈이 된다고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우리 나라와 같은 시스템에서는 아직까진 이런 분야에 과감히 뛰어들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있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공계의 활성화와 국가의 지원이 갖추워져야 하고 교수진에서부터 학부모, 학생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의식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면에서 독일의 연구소들은 확실히 우리보단 미래를 내다보고 앞서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세 번째 방문한 곳은 이동통신 연구소. Institute of Communication Systems and Data Processing 이곳에서역시 우리를 위해 자신들이 연구하는 것들을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준비해 발표를 해주셨는데, 역시 용어들이 우리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것들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졸았다. 대충 이해하기론 다양한 통신 환경속에서 어떻게하면 적은 대역폭을 이용해 효율적으로 통신을 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것 같았다.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그들의 연구에 대한 열의만은 배울 수 있었다.
네 번째 방문한 곳은 Chair of electrical engineering and computer science 반도체에 관련된 연구소였다. 고용량의 메모리 칩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제작된 웨이퍼에 결함유무를 찾아내는 전자현미경, 이를 통해 본 집적회로의 내부의 모습은 참으로 미세한 세계였다. 그렇게 작은 것들을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이해할 수 없는 신기 그 자체였다. 조그맣게 만드는 것은 우리 한국의 기술력도 세계적이라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다섯 번째는 전력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소였다. Institute of Power Systems and Power Economics 독일은 원자력 발전을 비롯해 풍력발전이 많이 발전한 나라이다. 우리나라처럼 강의 낙차가 큰 곳이 없어서 수력발전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 나라도 그 큰 규모의 산업시설을 가동하기 위한 에너지 확보가 급선무여서그런지 전력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이 연구소 역시 우리나라 대학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분야를 연구하는 연구소였다.
이렇게해서 이틀간에 총 9개의 연구소를 돌아보았다. 저마다 다 독특한 분야를 주제로 하여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고, 연구진의 층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두텁고, 학부생과 디플롬과정, 박사과정으로 연결되는 시스템도 참으로 잘 갖추어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연구소들을 견학한 후 내린 결론은 첫째, 먼저 우리나라 이공계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전환이 필요하다는 것. 뭔가 남들이 하지 않는 독특한 분야를 과감하게 시도하는 창조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산업체와 더욱 더 연관이 깊은 산학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대학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대학이 저마다 특성화를 시켜 지금보다 더 깊이 산업체와 함께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이공계 연구소에 인력들에 대한 국가의 대우가 좀 더 좋아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 대학의 학부생은 31,000명 그리고 대학원생이 13,000명이라고 한다. 우리학교의 대학원에 석박사과정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과 너무도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결국 나라를 먹여살리는 것은 이공계인데, 대우가 시원치 않다면 누가 이공계를 기피하지 않으며 누가 이 나라를 먹여살린단 말인가? 이공계에 대한 대우가 달라져 이공계기피현상이 반전되어 기술대국,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꿈꿔본다. 본교 대학원에 지원하는 학생수가 우선 늘어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많은 고급인력이 본교 동대학원에 진학하여 본교의 위상을 드높이는 꿈을 꿔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한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있다. 교수님들께서는 우선 본교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을 권면하셨다. 이미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상태라서 더욱 사명감과 함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주목하지 않을지라도 세계를 무대로 정말 열심히 해서 본교의 명예를 빛내고,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큰 뜻을 이루고 싶다.
저녁식사를 하고 일정이 좀 변경하여 뜻하지 않게 벨기에를 가게 되었다. 가이드님의 호의였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었지만 우리에게 좀 더 감동을 주시고자 벨기에행을 학장님과함께 추진하신 것이었다. 참 감사했다. 하루종일 연구소를 돌아다니느라 몸은 지쳐있었지만, 그래도 여행국이 하나 더 추가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국경을 넘자 국제 경찰이 버스안으로 들어와 여권을 확인하는 광경도 보고... 하지만 벨기에 브뤼쉘로 가는 버스안에서 계속 잠을 잤다.
브뤼쉘에 도착해 내려야 했지만 몸이 너무 피곤해 내리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피곤함을 무릎쓰고 온 보람이 있었다. 건물들이 큼직큼직하고 웅장함이 독일과는 또다른 모습이었다. 입이 저절로 벌려졌다. 예전에 왕이 살았다던 건물,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건물 보는 건물건물마다 그 아름다움은 형언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워 탄성을 자아내었다. 오줌싸개 소년의 동상도 보고 사진도 찍었다. 하루동안 쌓인 피곤은 온데간데 없고 어느새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 미소를 띄고 브뤼쉘 이곳저곳을 보며 사진을 찍고 돌아왔다.
다시 독일로 돌아와 아헨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몸이 파김치였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로 걸어가는 몇십미터 되지 않는 그 길이 어찌나 멀리 느껴지던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대충 씻고 쓰러졌다.
다섯째날 홀가분한 마음으로 관광
코블렌츠로 이동했다. 코블렌츠는 모젤강과 라인강이 만나는 지점의 도시 이름이다. 두 강이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9세기 무렵 이 두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성을 쌓으면서 발달한 도시라고 한다. 독일은 1871년 통일 국가를 이루기 전에는 많을때는 300여개에 달하는 봉건국가로 나뉘어져있었다. 지방 봉건국가라고 하더라도 자체적인 군사력을 다 가지고 있어 제후끼리 치고받고를 반복했고, 이 과정에서 황제는 거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고 한다. 또 잦은 전쟁으로 전통문화유산들이 많이 파괴가 되고 보존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1871년 통일 국가를 이룬 후 빌헬름 황제를 중심으로 옛것을 찾자는 노력이 시작되었고, 지금 남아있는 고성이나 유적지가 빌헬름황제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 빌헬름 황제의 동상이 서 있는 곳이 이 곳 코블렌츠였다. 라인강과 모젤강이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 말을 타고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빌헬름황제의 동상은 두 강이 만나는 곳을 향해 금방이라도 전진해나아갈듯한 모습이었다.
코블렌츠에서 많이 들어보았던 로렐라이 언덕으로 갔다. 가는 길 옆으로 라인강이 흘렀는데, 우리나라에선 부산항이나 인천항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큰 배가 다니는 것이 낯설었다. 가이드분의 말에 따르면 라인강은 알프스 산의 빙하가 녹으면서 그것이 땅을 깍아 형성된 강으로서 독일인들에게 이 강은 신이 내린 선물로 통한다고 한다. 빙하가 만들어낸 강이라 수심도 깊도 이 나라는 월강수량이 매월 거의 일정해서 수량의 변화도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운송의 큰 부분을 배가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31개의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시키기에도 충분할만큼 수량이 풍부하다고 한다. 독일이 2차대전 이후 경제성장을 이룬 것을 일컬어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 말이 어울릴만 했다.
로렐라이 언덕은 라인강물이 험한 지형을 만나 강물이 땅을 깍아 굽이굽이 형성된 곳으로서 옛날 나룻배를 몰던 뱃사공들이 지나갈 때 요염한 자태를 하고 있는 여인이 뱃사공들을 유혹해 많은 뱃사공들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슬픈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었다. 로렐라이 언덕을 올라갔을 때 꽤 높은 곳이었는데, 고지대와 고지대 사이를 라인강이 깊숙한 곳에서 흐르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과연 빙하의 힘이 얼마나 센지를 한눈에 보게 하는 광경이었다. 로렐라이 여인의 동상도 볼 수 있었는데, 멀리서나마 그 요염한 자태를 볼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전설과 같은 그 현장에 직접 와보니 정말 느낌이 색달랐다.
로렐라이 부근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로렐라이언덕의 포도주도 맛보고 3시쯤 하이델베르크를 향해 출발했다.
하이델베르크... 참 많이 들어본 도시 이름이었다. 어디서들어봤는지는 몰라도 참 아름다운 도시로서의 명성이 알려진 곳이었다. 독일 사람들에게 하이델베르크는 대학의 도시로 통한다고 한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서 괴퇴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사상가들이 이 대학에서 강단에 서기도 했다고 한다. 이 대학 도서관에는 매우 오래된 기록들이 남아있을 정도로 독일사람들은 기록에 능한 민족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얼마나 기록에 약한 민족인가? 기록이 없는 민족으로 유명한 우리 한민족이 독일의 이 기록성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한다. 흐릿한 잉크는 명확한 기억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나 역시 여행을 하면서 가는 곳의 지명, 도착시간, 가이드님의 설명 등을 적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다시한번 느끼게 하는 하이델베르크였다.
하이델베르크는 특히 성으로 유명한 도시인데, 2차대전때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고성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래도 성이 많이 파괴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한 짓이라고 한다. 자신의 친인척관계를 이용해 하이델베르크를 차지하려했던 그의 욕심이 결국 그 아름다운 성을 흉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아무튼 이 독일이란 나라는 전쟁이 끊이질 않던 땅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2차 대전때 이 도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행운이 아니라고 한다. 다름아닌 이 곳 출신 유명인사들이 미국에 많이 진출해있었는데, 2차대전당시 이 도시만큼은 폭격을 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말을 절감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배워야 한다. 열심히 배우고 힘을 키워야 우리 한국도 세계에서 강자로 불리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여섯째날 하이델베르크 성과 로템부르크 중세마을
아침 9:15분 NH 호텔을 출발해 전날 밤에 갔었던 하이델베르크에 다시 갔다. 독일 날씨는 참으로 변덕스러웠다. 아침에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햇빛이 눈이 부실정도로 맑았는데, 하이델베르크에 30분 정도 걸려 도착하고나니 어느새 먹구름이 몰려와 새찬바람과 함께 비바람을 뿌려대고 있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독일의 기후였다. 이런 변화무쌍하고 살아남기 힘든 기후조건에서 게르만족이 강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또한 이 나라 사람들은 아이들을 키울 때 춥다고 감싸려 들기보다 추위에 적응시키기 위해 어려서부터 훈련을 시킨다는 것이다. 과연 게르만족다운 이야기였다.
어쨋은 비바람을 맞으며 하이델베르크 성에 올랐다. 다행히 금방 비는 그쳤고 하늘도 또 어느새 개기 시작했다. 하늘이 돕는 여행이었다. 하이델베르크는 연간 350만의 관광객이 다녀갈만큼 관광수입이 많은 도시라고 한다. 그 중 대부분이 미국인일만큼 이 지방에서 미국으로 진출한 지성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지금의 성의 모습은 300년전 루이 14세가 파괴하고 난 후의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성을 둘러보며 사진도 찍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마음 한 구석으론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쳐온 성의 애환을 느낄 수 있었다.
날씨가 많이 추웠다. 그러나 아름다운 성과 함께 하는 시간만큼은 추위를 잊은 듯 돌아다녔다. 점심을 하이델베르크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먹고 잠깐의 쇼핑시간을 가진다음 다음 목적지인 로템부르크로 향해 떠났다. 그 때 시간이 오후 2시 20분이었다. 2시간을 좀 넘게 달려 4:40분에 로템부르크에 도착했다.
이 곳은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찾는 관광도시는 아니지만, 우리가 동화에서나 보았음직한 전형적인 유럽의 중세도시의 원형의 모습이 남아있는 도시라고 한다. 과연 도착해서 보니 먼저 성벽이 보였다. 성벽안에 마을이 다 들어있는 곳이었다. 성벽을 통과하자 유럽식의 전통목조가옥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정말 동화속의 한 풍경같이 아담하고 분위기있는 모습이었다. 1시간동안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벽을 따라 마을의 반바퀴를 돌면서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보는 곳마다 신기해서 계속 설레이기만 하였다.
저녁 6시 15분 어느덧 해는 지고 어두워졌다. 로템부르크 성 마을안에 있는 식당에서 스테이크로 저녁식사를 하고 우리의 마지막 밤을 위해 마지막 숙소를 향해 출발. 밤 9시 15분 호텔 도착...
어느덧 꿈과 같은 독일에서의 시간이 다 흘러가고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난 인천을 출발하면서부터 지난 6일의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정말 어떻게지나갔는지 모를정도로 빨리 흘러간 시간이었다. 어느덧 집이 그리워지고 있었고, 한국의 사람들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한편으론 더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한 편으론 빨리 돌아가고 싶은 향수에 젖어 마지막 밤을 맞았다. ‘ 아! 독일이여.. ’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맥주 파티를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재미있는 게임도 하며 마지막 밤은 그렇게 또 흘러갔다.
일곱째 날. 귀국
이번 독일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뷔르츠부르크. 밤새 비가 와서 땅이 촉촉이 젖어있었다.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우리의 벤츠버스는 아침 9시 20분쯤 호텔을 나와 독일의 낭만가도를 달렸다. 알프스 휘센에서 시작해서 뷔르츠부르크에 이르는 이 낭만가도는 독일의 가도중에서도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가도라고 한다. 푸른초원이 펼쳐져 보이고 도로를 따라 강이 흐르는 그 장관.. 낭만가도의 이름이 과연 어울린만 했다.
10시 15분에 뷔르츠부르크에 도착했다. 그 곳엔 봉건영주가 살던 성이 원형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2차대전에 양쪽 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원형그대로 복된해놓은 곳이라고 하였다. 봉건영주의 세력이 얼마나 컸던지 우리나라 어떤 궁전도 그 보다 크진 않을 것이다. 참으로 컸다. 그 성의 내부와 정원들을 둘러보고 뷔츠부르크 시내를 관통해 옛다리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서 사진을 찍고 옛다리 부근의 중국식 식당으로 가서 독일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배불리 하였다.
식사를 마친후 이젠 정말 모든 일정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아직 보지못한 독일의 모습을 더 보고 싶은 욕심도 들고, 독일의 사람들을 더 만나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마음도 들고... 하지만 제한된 시간은 우리를 재빨리 공항으로 몰고가버렸다.
비행기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이륙할 때 마음으로 외쳤다. 아듀 독일! 안녕... 또 만나자... 언젠가 또 올 수 있으리라 믿는다. 참으로 배울 것도 많고 생각해볼 것도 많은 나라 독일. 독일을 통해 세계를 보는 눈이 많이 넓어진 것 같다. 독일을 통해 선진국민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독일을 통해 전쟁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느꼈다. 독일에서 신사의 모습, 기사도를 배웠다.
여러모로 참으로 유익한 여행이었다. 끝으로 이 여행을 위해 많은 준비로 아낌없는 수고를 해주신 우리 아버지와 같은 학장님과 IT 최고 전문가 손원교수님, 또 여행사 아저씨, 현지 가이드 고박사님 그 밖에 여행을 함께 해준 전자정보학우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첫댓글 우와 밤새 썼것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