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帶方)은 어디에 있었는가
당대(唐代)의 학자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북사(北史) 제94권 백제열전(百濟列傳)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백제라는 나라는 아마도 마한(馬韓)의 복속국이었을 것이며,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 그 왕이 순행을 나섰더니 시중드는 아이가 그 후에 임신을 하였는데 왕이 돌아와서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 시중드는 아이가 이르기를 전에 하늘 위를 보니 큰 계란 같은 기운이 내려와 감응하였더니 임신하게 되었다고 하기에 왕이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후에 사내아이를 낳자 왕이 그를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그에게 입깁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으며, 뒤에 마구간으로 옮기니 역시 그렇게 하였다. 왕이 신령스럽게 여기고 명을 내려 그를 양육하게 하여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신의와 믿음이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帶方)의 고지(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니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
북사의 이 기록은 백제를 마한에서 나왔다고 했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전혀 딴판이다. 북사의 편찬자는 백제가 마한의 색리국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색리국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는 동부여(東扶餘)에서 일어난 주몽(朱蒙)의 탄생설화를 끌어들이고 있다. 즉, 이 기록의 첫 부분은 백제가 마한의 색리국에서 기반을 형성했다는 내용과 주몽의 탄생설화가 뒤엉켜 있는 것이다. 때문에 편찬자는 백제가 마한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몰랐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630년경에 위징(魏徵) 등에 의해 편찬된 수서(隨書) 제81권 백제열전(百濟列傳)에도 나타난다. 하지만 수서에는 백제의 선조는 고려국(高麗國)에서만 나왔다고만 쓰고 있고, 마한과 연관을 맺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에도 백제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에서 시작된 것으로 쓰고 있다. 남사(南史)에는 백제의 건국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백제는 그 선조인 동이(東夷)에 삼한국(三韓國)이 있었는데 그 첫재를 마한(馬韓)이라 하고 둘째를 진한(辰韓)이라 하며 셋째를 변한(弁韓)이라 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열두 나라이며, 마한에는 쉰 네 나라가 있었다. 큰 나라는 1만여 가구이며, 작은 나라는 수천 가구로서 총 10만여 호이니 백제가 그 중 하나이다. 후에 점차 강대해져 모든 작은 나라를 아울렀다. 그리고 그 나라는 본디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 1천여리에 있었다가 진대(晉代)에 이미 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가졌을 때 백제는 요서와 진평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
이처럼 남사에는 백제와 대방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데, 백제를 마한에서 나왔다고 규정짓고 있다. 남사와 북사가 동일인물인 이연수에 의해 편찬됐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같은 기록의 차이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항이다. 이연수가 백제에 대하여 남사와 북사에서 각각 다른 내용을 기재한 것은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남조와 북조가 백제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조는 백제가 한반도의 삼한 소국 중 하나였다가 점차 삼한의 일부를 잠식하여 결국은 대륙까지 진출하였다고 보았고, 북조는 백제가 원래는 대방의 옛 땅에서 시작하여 동이의 강국으로 성장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연수는 남조와 북조의 이 같은 다른 기록 때문에 북사에서 이중적인 서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조와 북조의 기록을 모두 존중한다면 백제는 대방의 옛 땅에서도 건국되었고, 마한의 색리국에서도 건국되었다는 설정이 가능하다. 백제의 건국은 대방의 옛 땅과 마한의 색리국에서 동시에 진행되었거나 또는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조의 기록에서는 전혀 대방 옛 땅과 백제를 관련시키지 못한 것을 볼 때 대방 옛 땅에서의 건국이 마한에서의 건국보다 먼저 이뤄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대방 땅은 북조에 속한 땅이었기에 대방에서 일어난 일을 남조에서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제의 건국은 애초에 요동의 대방 옛 땅에서 이뤄졌다가 다시 근초고왕시기에 마한의 색리국에서 또 한번 이뤄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최초 건국지인 대방 옛 땅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우선 '대방 옛 땅'이라는 표현이 가지는 의미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 대방 옛 땅은 전한(前漢) 세종(世宗)이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무너뜨리고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세종이 설치했다는 한사군은 진번(眞番),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군(玄菟郡)이다. 그런데 서기전 82년에 진번군은 낙랑군에 병합되고, 임둔군도 현도군에 폐합되었다. 그 후 낙랑군은 진번군 땅에 남부도위(南部都尉)를 설치했는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예맥(濊貊)의 토착세력이 강성해지자 낙랑의 남부도위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세기 말에 공손씨(公孫氏)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낙랑의 남부도위 7현을 대방군(帶方郡)으로 삼는다. 따라서 '대방 옛 땅'은 바로 낙랑의 남부도위에 속한 진번 땅을 일컫는다.
그런데 학계 일각에서는 이 진번군 지역을 한반도의 황해도 일원에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황하 동북부 일대를 장악했던 공손씨 세력이 황해도까지 세력을 뻗쳤다는 의미인데, 이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당시 한반도 북부는 고구려와 말갈(靺鞨)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진번군(眞番郡)을 한반도에서 찾으려는 학자들은 당시 대방군이 황해도 지역에서 요동반도 쪽으로 밀려났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됐다는 주장을 합리화시키려는 억측일 뿐이다.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桓鮮卑東夷傳)에는 당시 대방군(帶方郡)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倭人은 대방(帶方)의 동남쪽 큰 바다 한가운데에 있으며, 산으로 이루어진 섬에 의지하여 나라와 읍락을 이루고 있다. 옛날에는 1백여국이 있었으며 한나라 때 예방하여 배알하는 자가 많았고, 지금은 사신과 통역인이 왕래하는 곳이 서른 나라이다. 군(郡)으로부터 왜(倭)에 이르려면 해안으로 물길을 따라 한국(韓國)을 지나고,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가다 보면 그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仇耶韓國)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7천리를 가다가 비로소 한차례 바다를 건너 1천여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이르게 된다.’
이 기록은 대방군에서 왜국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군(郡)이란 대방군을 일컫고, 거기서 출발하여 왜(倭)로 향했다는 것은 대방군이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살았던 진(晉)의 영토에 속했다는 뜻이며, 진이 한반도를 장악한 적이 없기에 대방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방군을 떠나 한국에 이르고, 다시 한국의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동쪽에 이르면 구야한국에 이르고, 다시 천리를 항해하면 대마도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얼핏 보면 대방군이 요동반도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해안을 따라 항해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의 항로는 대방군을 떠나 고구려를 거치지 않고 곧장 한국(韓國)의 해안에 닿았으며, 한(韓)의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항해하여 구야한국(仇耶韓國)에 이르렀다. 당시 한국이라 함은 여러 한국으로 이뤄졌던 한반도 남쪽 지역을 통칭하는 것으로 백제 땅을 일컬으며, 구야한국은 김해를 중심으로 형성된 금관가야(金官加耶)를 일컫는다.
따라서 이 항로는 항해의 시작점이 요동반도가 아니라 산동반도였음을 말해준다. 즉, 그들은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한반도 남부에 이르러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항해하여 구야한국에 이르렀고, 이 항해 거리를 총 7천리라고 했던 것이다. 항해 거리가 7천리라고 표현한 것도 대방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당시 거리 개념으로 한반도의 황해도 지역에서 일본열도에 이르는 길을 아무리 길게 잡아도 3천리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倭)에 이르기 위한 항로를 대방군에서 시작한 것은 이처럼 대방군이 산동반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대방군이 산동반도에 있지 않고 요동반도에 있었다면 그들은 대방군에서 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 이르는 가장 짧은 항로는 산동반도를 출발해 황해를 건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진수가 살았을 당시 요동반도는 고구려의 땅이었다. 또 요동반도를 출발하여 왜에 이르고자 한다면 항해 시간이 긴 것은 물론이고 고구려의 간섭마저 받아야 한다. 하지만 산동반도에서는 고구려의 간섭 없이 곧바로 한국의 해안을 거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가야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당시 위나라 사람들은 당연히 산동반도를 항해의 출발점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는 위나라 사람들이 왜국으로 가기 위해 택했던 항로의 시작점인 대방군이 산동반도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말하자면 대방군은 하수(河水; 黃河)의 남쪽인 하남 지역의 동쪽 지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방이 이렇게 설정될 때 백제의 첫 도읍지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성립될 수 있다.
첫댓글 언어적인 역사는 사실의 기록일 수 있지만 정치적인 역사는 위증의 역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