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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과 민간 신앙 세자는 "뇌성부와 천조"라는 귀신이 보인다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는 도교 경전인 '옥추경'에 나오는 천둥과 번개를 관장하는 신으로, 세자는 악귀를
쫓아낸다는 민간 신앙에 의지해 이 경전을 읽으며 공포를 이겨내려 했습니다.
의대증(衣帶症)과 살인 옷을 입는 과정에 극도로 집착하는 '의대증'이 생겼습니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십 벌을 태워버렸고, 이 과정에서 시중들던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일까지 저질렀습니다. 이 폭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희생자의 수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질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충격적인 고백 아들의 살인 사실을 알게 된 영조가 "왜 사람을 죽인 것이냐"라고
묻자, 세자는 울부짖듯 고백했습니다.
아들의 고백을 들은 영조는 "내 이제 그렇지 않으리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영조의 약속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병든 세자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고, 영조는
왕실의 체면과 안정을 위해 이 끔찍한 문제를 그저 덮어둘 수밖에
없었습니다.지금으로 보면 강박감에 정신 이상자로 나타 나지요
돌이킬 수 없는 말, 그리고 8일간의 비극 결국, 사도세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맙니다.
마지막 경고 어느 날 밤, 세자는 "칼을 차고 가서 누군갈 죽이고 싶다"라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아버지인 왕, 영조를 겨냥한 역모 발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 이 말을 전해 들은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 씨는 왕실을 지키기
위해 비통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녀는 영조를 찾아가 "아들을 죽여달라"라고 눈물로
애원했습니다. 뒤주 속 8일 영조는 아들에게 뒤주로 들어갈 것을 명했습니다. 한번
뒤주에 갇혔던 세자가 뚜껑을 발로 차고 뛰쳐나오자, 영조는 신하들을 시켜 아들을
다시 강제로 집어넣게 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밧줄을 가져와 뒤주를 꽁꽁 묶어버렸습니다.
심지어 빛과 공기마저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그 위를 무거운 풀 더미로 덮어버렸습니다.
8일째 되는 날, 영조는 뒤주에 작은 구멍을 뚫어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습니다. 안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그는 다시 더 큰 구멍을 뚫어 손을
넣어 만져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차갑게 식어버린 아들의 시신이 확인된 후에야 뒤주의 뚜껑은
열렸습니다. 모두가 경악한 이 잔인한 방식 뒤에는, 아들을 향한
분노만큼이나 차가운 영조의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었습니다.
비극 속에 숨겨진 의도: 아버지는 왜 '뒤주'를 택했는가? 영조는 왜 아들을 반역죄로 처형하지 않고, 굳이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이는 참혹한 방법을 선택했을까요? 여기에는 손자인 정조를 지키기 위한 영조의 마지막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핵심 개념: 연좌 법(緣坐法) 당시 조선에는 연좌 법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죄인이면, 그 아들도 왕이 될 수 없다"라는 무서운 법이었습니다.
영조의 선택 만약 사도세자를 공식적인 역적으로 규정해 사형시킨다면, 그는 왕실의 죄인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아들, 즉 영조의 손자(훗날의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 되어 왕위를 이을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었습니다. 영조는 이를 막아야만 했습니다.
비정한 결론 결국 영조는 사도세자를 '공식적인 죄인'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제거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뒤주 속 죽음은 법적인 처형이 아닌, 아버지에 의한 '사적인 처분'으로 남게 됩니다. 이로써 사도세자의 아들은 연좌 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무사히
왕위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을 넘어, 아들을 버려서라도 손자를 통해 왕실의 안정을 지키려 했던 한 군주의
냉혹한 정치적 판단이 얽힌 복잡한 사건이었습니다.
영조가 살아 온과정 참 가혹했지요 자식을 위해 희생 반역법으로 사형은 자손이
절대 왕이 될수 었었기에 서슬이 퍼런 당쟁에 어절수 엇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