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 고 임병호 시인을 기리며
한때의 봄은 갔다.
저속으로 흐늘거리며
떠돌던 부초
형을 데리고서야 영영 갔다.
지난 날, 목련이 떨어지던 속도와
형이 생에서 떨어지는 속도가 비슷하다.
꽃도 형도 뚝 떨어졌으나
그리 빨랐다는 느낌은 없다.
중력도 천진에는 자리를 내준다.
떨어진 형을 주워 빈소에 두니
비현실적으로 맑은 눈동자
문턱을 넘고
이승의 술잔 위에 목련 한 송이
피었다가 또 진다.
병산屛山 풍경
한낮 흙길 걸어 병산에 서면
곡식들 할 수 없이 익어가고 있다
아이들은 꼭꼭 산그늘로 숨어 들고
살아 있는 무언가 죽어가고 있다
초경初經
첫 꽃
연분홍 꽃
제 어미가 먼저 본 꽃
이젠 아비와 멀어지는 꽃
열두 살 계집애의 속살을 헤집고
부끄러이 피어나 울음이 되는 꽃
장미꽃 한 다발을 건네 보지만
왠지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 꽃
여자로 사는 게 고욕인 걸 알면서도
모른 체 웃음 지며 축하해야 하는 꽃
산정山頂에 앉아
겨울 볕 돋아나는
서갓 마을 산마루
돌서낭 한 켠에 쭈그리고 앉아
엉겅퀴 초롬한 잎새 더불어 사는
이슬 한 방울 무심코 들여다보니
흘러간 날들 차곡히 맺혀
문득 내 눈 열고 들어서네
눈물도 한 방울.
*서갓 마을은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의 한 마을로 누석단 형식의 돌서낭이 인상적인 곳이다.
익는다는 것은
-자두에게
익는다는 것은
끝없이 물러지는 것이구나
살점은 더욱 물러지면서 씨앗은
빈틈없이 단단해지는 것이구나
익는다는 것은
제 맛을 내는 것이구나
물러져 터지는 한이 있어도
낼 맛은 다 내어 버리는 것이구나
익는다는 것은
때로 무서운 것이구나
무방비의 살점 속에서도 태연한 단단함으로
깨무는 이빨도 아프게 하는 것이구나
익는다는 것은 그렇구나
아무도 예기치 못한 무른 살 깊숙이
무서운 단단함을 키워 가면서
제 맛을 낼 때 미련 없이 떨어져서
또 다시 푸르름을 생각하는 것이구나.
부석사浮石寺 앞, 평화민박에서
양백兩白이 만나는
산자락의 어디메쯤
여창旅窓으로 내다본
비 내리는 산 혹은 산을 적시는 비가
정겹다, 추사秋史가
대정, 유배지의 초옥에서 바라본
눈 내리는 풍경 혹은
풍경 한 귀퉁이의 자신처럼이나
눈물겹다.
나 또한 스스로를
유배시키고 있으므로.
한 시절
봄으로 피어났던
학교 앞 강변의 세 그루
어린 복사꽃이 좋았다
희망 없던 시절, 친구와
말없이 한참을 바라다보고
손 내밀어 만져보던 그 꽃이 좋았다.
세월도 강도
흘러온 것들은 또 그렇게 흘러
바닷가 낙척서생이 된 친구는
봄마다 복사꽃의 안부를 물어왔지만
먹고 살 길을 찾느라
그 꽃을 잊고 지낸 나는
친구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그저께 아침
간밤의 취기까지 따라나선 출근길
무슨 마음이 동해 그곳을 찾았다
꽃은 지고 시든 이파리만 남았다
몇 번을 쓰다듬어도 끝내
날 알아보지 못했다
잊기로 했고 잊은 모양이다.
한 시절
꽃이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 꽃을 버린 대가로 일자릴 얻고
기다림에 지친 꽃은 나를 버리고 만
그런 시절을 살았던가 보다.
고맙습니다
일몰의 골목길 한 귀퉁이에서
하루 품을 함께 판 늙은 일꾼들
구겨진 모자를 힘겹게 벗어들며
고개 숙여 깍듯이 인사를 나눈다
수고하셨소, 또 봅시다.
우연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도
호주머니 찔러 박았던 두 손 뽑으며
그분들 향해 절로 고개 숙인다
고맙습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고맙습니다.
구천리 九川里
-신영복 선생님께
이 여름에
지난 겨울을 생각합니다
이렇듯 편안한 잠자리에 누워
선생님의 칼잠을 생각합니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청량한 한줄기 바람이 다가옵니다
칼잠 자는 감옥 안 이웃들의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이
이 저녁 가득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다가섭니다
그날 정처 없는 눈들이
떼 지어 구천으로 몰려오고
곤한 몸 쉬어갈 처마 밑으로
차곡차곡 들어와 쌓일 때
선생님은 떡잠을 자도 좋을 온돌방에서
칼잠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 곁으로 저와 전우익 선생님 눕고
이십 년 징역살이도 함께
제 자릴 잡고 누웠습니다
산골의 어둠은 깊어만 가고
어느 새 오십 줄에 앉은
한 조선 사내의 좁고 여윈 등골에서 슬며시
맵디매운 절개의 매화 한 송이 벙글어
우리들의 허한 머리맡을
밤새워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 신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떡잠은 바로 누워 자는 잠을, 칼잠은 모로 누워 자는 잠을 말한다. 신 선생님과 옥살이를 한 분들은 좁은 감방에서 다른 이들을 배려하기 위해 칼잠을 주무시곤 했다고 한다.
감은사지 感恩寺址에서
되돌아보는 역사는
은폐되어 저렇게 아름다운가
동쪽 하늘 구름을 헤치고
아주 계급적으로 솟은
쌍탑의 찰주 끝에 보름달이 꽂힌다
달의 심장으로부터 터져 나온
한 무리 빛이
옛 신라의 밤하늘을
사뭇 역사적으로 비춘다.
천수백 년도 전에
죽어 용이 된 아비를 위해
왕국을 상속받은 아들이 바친 탑
사실은 성골의 폭력을 운명으로 알았던
서라벌 석공들의 노동이 세운 탑
지배의 역사는 석공들을 묻고
계급의 강제는 호구의 전설에 가려
저 돌덩이가 내 눈길을 붙든다.
죽어서도 죽지 않고 용이 되다니
계급의 생명은 질기디질겨
달빛 스산한 금당지金堂址 아래로
마악 동해를 다녀오는 용이 보인다.
火葬 1
-화장터 가는 길
시립 화장터로
가는 길은 넓지 않았다
고단했던 망자의 일생처럼
추적이며 가을비는 뿌려
묘 하나 지을 여력이 없는
상주들 찌푸린 이마를 두드리고
홍건히 젖은 작업복 바지 속
일만이천 원짜리 화장허가서는
이승의 마지막 증명서가 되어
점점 뜨거워만 가고 있었다.
火葬 2
-화장터 풍경
앞산은 낮게 앉아 고갤 떨구고
저승은 위태로이 공중을 떠도는데
간간이 막내딸의 흐느낌 들려오고
사람들 서로의 마른 눈길을 피해
굴뚝연기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火葬 3
- 유해를 뿌리며
느리게
그저 느리게
송천은 흘러
예까지 떠내려 온 한 인생을
이제사 오시는가 반겨 맞는데
고인은 무얼 그리 미련 남는지
물살 거스르며 떠나려 않아
질긴 인연이 서러운 상주들
바짓가랑이 무릎 위로 걷어 올리고
휘휘 푸르른 재를 내저으며
저 가벼운 이승을 철거하고 있다
무심한 가을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감은사지 쌍탑을 찾아가며
이천년 십일월 십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늘. 감은사로 간다. 많이 아프다. 낭만적으로 가을을 타는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육신이 아프다.
두산베어즈는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현대유니콘스에게 육대 이로 졌다. 두산과 현대는 모두 냄새나는 자본이다. 나는 그래도 전력이 약한 두산베어즈를 응원했다.
아메리카의 민주당 후보 앨 고어는 플로리다 재검표에 기대를 걸고 공화당의 부시는 초조하다. 고어와 부시는 둘 다 내 인생과 관계없는 아메리카 자본주의의 적자들이다. 그래도 나는 뭔가 떡고물이라도 떨어질 걸 기대하며 고어가 되길 바라고 있다.
기차가 운산역에 섰다. 빨간색 스웨터에 몸빼를 입은 행상 할머니는 차창에 머리를 대고 잠에 빠졌다. 바디라인이 선명한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의 몸매를 의식하며 자리를 찾는다. 두리번두리번. 이건 리허설이 아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다. 경주행 통일호에 탄 모든 이들이 지금 전생을 쌓아온 연기력으로 아주 리얼하게 여기의 풍경을 이어가고 있다.
다시 바퀴가 구르고 차창 너머 들판으로 경운기가 잔뜩 가을을 실어 나른다. 이 가을은 한 줌의 햇살을 위해 기도하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적인 가을이 아니다. 어쩌면 엊그제 부도처리 된 대우자동차의 노동자들이 마지막 겨울을 보내는 데 쓸 보급품일지도 모른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자본가는 지금쯤 유럽의 고풍스런 저택에서 미디엄으로 익힌 비프스테이크를 자르고 있을 것이다.
라디오에서 집권당의 대표가 연설을 한다. 한때는 시민운동가였으나 지금은 인생의 의외성을 즐기고 있는 표정이다. 어제는 야당 총재의 국회 연설이 있었다. 주저리주저리 세상에 그런 애국지사가 없다. 백범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언론은 아주 보수적으로, 아주 애국적으로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잠들었던 할머니가 깨어났다. 혹 내려야 할 역을 지난 것은 아닌가? 황급한 목소리로 탑리역을 지났는지 묻는다. 아직 반도 오지 않았다. 저승이 멀지 않은데도 노인은 바쁘다. 집에는 그녀를 기다리는 가족, 아니 가축들이 있다. 그녀의 인생에서 사료 냄새가 난다.
탑리를 안다. 고등학교 동기의 고향이다. 그 친구는 이두박근 삼두박근이 훌륭해 여름이면 조끼런닝 입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 신선처럼 살길 바란 조부의 뜻과 달리 자본의 신선들에게 도끼자루를 깎아 바치는 일을 하고 있다.
기차는 또 달린다. 내 앞에는 예비역 병장이 앉아 있다. 어린 애인과 어울리기 위해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다. 계절로 보아 무리가 아니다. 철로 변의 감들도 똑 같은 색으로 물을 들였다. 내 곁에는 스무 살의 처녀가 앉아 있다. 그녀의 가방 속엔 바나나 우유 한 병, 카스텔라 두 개가 들어 있다. 그게 아침 그리고 점심이다. 가방의 다른 곳엔 세계사와 처세론이 들어 있다. 태만한 성격을 고치려는 그녀가 세계사의 행간을 빠져나가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지난 여름 중국 길림성 유하현의 조선족 마을에서 걸린 감기는 세 달이 가까워도 떨어지질 않는다. 아무래도 조선족은 한국인이 아닌 모양이다. 한국 감기약이 통 듣질 않는다. 체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마누라는 사랑만 찾고 있다. 존재가 부실해서 의식이 영 움직이질 않는다. 그동안 밥처럼 먹어온 종합감기약이 발작성뇌졸증을 일으키는 성분을 포함, 판매 중지될 모양이다. 뇌졸중의 위험은 콧물의 훌쩍거림보다 멀어 우선 콧물을 닦는다.
잠이 온다 스르르 병든 몸과 사랑과 밤과 드라나와 정치와 스포츠와 부정과 콧물과 재채기와 미열을 안고 쌍탑을 찾아간다. 천년 쌍탑의 어깨도 여간 무겁지 않겠지만 나의 몸 나의 생각, 내 어깨의 무게도 그 못지않다. 내가 거기 서면 감은사지에는 탑 하나가 더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잠이 든다.
조시 弔詩
몇 년 동안 단 세 편의 시만 썼다
모두 죽음에 관한 것이다.
어린 나를 가르친 스승의 때 이른 죽음.
소리의 참맛을 알게 해 준 늙은 가객의 죽음.
평생을 술과 시로만 점철한 선배 시인의 죽음.
죽음이 내 펜을 움직여 시를 만들었다.
꽃도 사랑도, 가족도 이웃도 아닌
죽음만이 내 감각을 움직여 시를 만들게 하였다.
돌아보니 참 무딘 삶이었다.
하루 또 하루가 지나면 똑같은 하루가 혀를 날름거리고
그 혓바닥에 고여 들어 침처럼 살았다.
나는 지금 세상살이의 중독에서 깨어나는 중이다.
내 시와 사랑을 병들게 했던, 병들어야 살았던 세상으로부터
한 발 또 한 발 물러나는 중이다.
그리고 차츰 다가서는 중이다.
묘지에서 편안한 제비꽃 한 송이, 돈절했던 벗들의 안부를 향해
스스로를 팔았던 나 자신을 행해.
금단 증상이 만만치 않다.
심신에 잔뜩 낀 기름기들이
한 몇 해만 더 지내자며 발목을 붙든다.
하지만 이제는 떠나야 할 때
나를 죽이고야 말 헛된 삶을 향해 애도를 표할 때
발길을 돌리며 조시를 바친다.
지난 삶에게
나를 가두었던 혓바닥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