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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종(柳慶種)
1714년(숙종 40)∼1784년(정조 8).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土]). 자는 덕조(德祖), 호는 해암(海巖).
조부는 1673년(현종 14) 계축춘당대문과(癸丑春塘臺文科)에 갑과 1등으로 급제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유명현(柳命賢)이다. 부친은 성균진사(成均進仕)였던 유뢰(柳耒)이며, 모친은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던 목임일(睦林一)의 딸이다.
그의 가문은 조선후기 내내 남인계열에 속하였는데, 조부대의 유명천(柳命天), 유명현(柳命賢), 유명견(柳命堅), 유명전(柳命全) 등이 1680년(숙종 6)에 일어난 경신환국과 1694년(숙종 20)에 일어난 갑술환국을 거치면 정치적으로 실권함으로써, 이후 정치권력에서 소외되는 비운을 맞았다. 후에 비록 영조, 정조의 탕평책에 따라 남인들도 환로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지만, 그의 가문은 남인 내부에서도 허적(許積)의 당으로 지목되어 여전히 출사의 길이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재야학인으로서의 유경종의 일생은 단조로운 편이었다. 벼슬을 단념한 채, 독서하고, 효도하였으며, 겨를이 생길 때마다 시문을 지었던 것이 그의 인생의 개요이다. 1728년(영조 4)에 숙부 유래(柳徠)가 이인좌(李麟佐)가 일으킨 무신란에 무고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숙부는 장살되었으며, 부친 역시 이에 연루되어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 이 때 유경종은 부친의 적소에 따라갔다가 이듬해에 그곳에서 부친상을 당했다. 이 사건은 그나마 입지가 좁았던 관로진출에서 그의 가문이 더더욱 곤란을 겪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무신란의 무고사건 이후 4년 뒤에 그의 집안은 한양을 떠나 안산의 향저(鄕邸)로 낙향하였는데, 19세부터 21세까지는 경향간(京鄕間)을 왕래하면서 환로진출의 단념을 확인하는 기간이었다. 27세 무렵에 송도를 유람하고 돌아온 것이 그나마 먼 거리 여행이었을 뿐, 그는 안산권(安山圈)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56세에 모친상을 당해 4년간, 63세에 영조의 국상을 당해 1년간 저술을 폐했던 일 이외에는 내내 안산에 거주하며 독서와 시문 창작에 전념하였던 재야문인이었다.
유경종의 학문적인 배경은 그가 재야 학인으로 성장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 조부대에 형성된 청문당(淸聞堂)과 경성당(竟成堂) 등의 많은 서적을 통해 독서범위가 매우 넓었다. 그는 이익(李瀷)의 서당에서 학문과 예절을 배우며 안산 일대의 남인, 소북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유경종은 매우 신중하고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로 주변인사와의 교류가 제한적이었으며 따르는 이도 많지 않았다. 그와 교류한 인물에는 이용휴(李用休), 안정복(安鼎福), 강세황(姜世晃), 임희성(任希聖), 허필(許泌), 유중림(柳重臨), 조중보(趙重普), 엄경응(嚴慶膺), 이수봉(李壽鳳), 최인우(崔仁祐), 이맹휴(李孟休), 이광환(李匡煥), 채제공(蔡濟恭), 박도맹(朴道孟), 신택권(申宅勸), 유경용(柳慶容) 등이 있다.
유경종은 『해암고(海巖稿)』의 저서를 통하여 4,000여 수의 시를 남겼다. 그는 문장재도론(文章載道論)의 관점을 문학의 출발점으로 상정하고, 여기에 육경중심의 상고적인 문학관과 남인계열을 추숭한 계통의식을 그의 문학관의 특색으로 삼고 있다. 그의 시는 그가 살았던 안산지방의 삶과 풍속을 시화함으로써 기속시인이 보여주었던 사실성과 비판성을 획득하였고, 이전에는 쉽게 보이지 않았던 파격과 해학으로 우리나라의 한시가 나아갈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세계에서 보이는 연작(連作)의 활용과 파격적인 양상은 한시의 규범적 한계에 도달하여 자유로운 시 정신을 탐색하고자 했던 작가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시는 자연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시각의 전환을 의도하였고, 시국과 사회상의 비판, 일상쇄사와 주변 인물에 대한 관찰 및 재야사인으로서 경험했던 대부분의 견문을 통해 제재의 확대를 최대화하였다. 또한 시적 표현면에서는 마음 가는 대로의 시 쓰기를 구사하여 형식에 매이지 않는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청문당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에 있는 조선 후기 가옥이다.
이 집은 진주유씨 16세손 유시회(柳時會, 1562-1635)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에는 정치에서 소외된 남인들이 이곳에서 교유하였다. 20세손인 해암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은 매부인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2-1791), 지기인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과 함께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문하로 활동하였다. 강세황은 이곳에서 제자 김홍도를 가르쳤으며, 「송하맹호도」를 함께 그렸다고 한다. 유경종의 말년에는 이곳에서 오천시사(午川詩社)를 결성하였는데 많은 문인과 묵객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특히 안산 청문당의 만권루(萬卷樓)는 조선 4대 서고의 하나로 기호남인들의 학문적인 기반이 되었다. [1]
청문당과 현정승집도(강희맹의 玄亭勝集圖)
복날에는 모여 개를 잡아먹는 게 풍속이다. 정묘년(1747) 6월 1일은 초복이었다. 이날 마침 일이 있어 다음날로 미루어 현곡의 청문당에서 복달임을 하였다. 술이 거나해지자 광지(光之, 강세황(姜世晃))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여 뒷날의 볼거리로 삼고자 하였다.
모인 사람은 모두 11명이었다. 방안에 앉은 사람이 덕조(德祖, 유경종(柳慶種)), 문밖에 책을 들고 마주 앉은 사람이 유수(有受, 유경용(柳慶容)), 가운데 앉은 사람이 광지, 옆에 앉아서 부채를 부치는 사람이 공명(公明, 유경농(柳慶農)), 마루 북쪽에서 바둑을 두는 사람이 순호(醇乎, 박도맹(朴道孟)), 갓을 벗은 채 머리를 드러내고 대국하는 사람이 박성망(朴聖望), 그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강우(姜佑), 맨발인 사람이 중목(仲牧)이다.
관례를 하지 않은 젊은이는 두 사람인데 책을 읽고 있는 자가 경집(慶集, 강흔(姜俒)), 부채를 부치고 있는 자가 산악(山岳, 유성(柳煋))이다. 대청마루 아래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자는 심부름꾼 귀남(貴男)이다. 이때 장맛비가 막 걷히자 초여름 매미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문고와 노랫소리가 번갈아 일어나는 가운데, 술 마시고 시 읊조리며 피곤함을 잊고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그림이 완성되자 유경종이 기문을 짓고, 다들 각각 시를 지어 그 아래에 붙였다.
원문伏日, 設家獐會飮俗也. 丁卯六月一日, 爲初伏. 是日有故, 其翌日追設, 玆會于玄谷之淸聞堂. 酒闌, 屬光之爲圖, 以爲後觀. 會者凡十一人, 坐室中者爲德祖, 戶外執書而對坐者爲有受, 中坐者爲光之, 傍坐搖扇者爲公明, 奕于軒北者爲醇乎, 露頂而對局者爲朴君聖望, 側坐者爲姜佑, 跣足者爲仲牧. 童子二人, 讀書者爲慶集, 搖扇者爲山岳. 軒下侍立者爲家僮貴男. 于時積雨初收, 新蟬流喝. 琴歌迭作, 觴詠忘疲, 致足樂也. 畵成, 德祖爲記, 諸人各爲詩, 系其下.
-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의 강세황 그림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에 부친 기문
영조 23년(1747) 6월 2일(음력) 안산의 문인들이 청문당(淸聞堂)에 모였다. 이날은 마침 초복 다음날이어서 복달임을 하였다. 모임에는 청문당의 주인 해암 유경종과 그의 친척인 유경용(柳慶容, 1718~1753), 유성(柳煋) 그리고 해암의 매부인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 강세황의 두 아들인 강우(1729~1791), 강완(1739~1775) 등이 함께했다.
문인들은 개장국을 끓여 먹으며 술을 곁들였다. 거나하게 술기운이 돌면서 문인들의 풍류가 살아났다. 거문고를 퉁기며 한시나 시조를 읊조렸을 것이다. 흥이 가라앉으면서 참석자들은 독서나 바둑 등 각자의 취미나 흥밋거리를 찾아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 표암 강세황의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부분), 1747년. 개인 소장
그때 누군가가 이날의 즐거움을 그림으로 그려 기념하자고 제안하였다. 붓은 그림에 소양이 있는 표암 강세황이 잡았다. 표암은 270년 전 안산 청문당에서 있었던 여름날의 풍경을 마치 스냅사진을 찍듯이 되살려 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가 그것이다. 그림 속에는 책 읽는 이, 바둑 두는 이, 부채질하는 이, 멀리 바깥을 내다보는 이, 마루 아래에서 대령하는 심부름꾼 등 모습도 다양하다. 거문고와 술병이 뒷전으로 놓인 것으로 보아 술자리가 끝난 직후였던 것 같다.
강세황이 그림을 완성하자 모임을 주선한 유경종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 기문을 썼다. 모임의 취지, 진행 과정 그리고 참석자들의 이름뿐 아니라 그들의 자세, 위치도 자세히 밝혔다. 그림 속 인물의 자세를 보며 이름을 적시하고 있어 참석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현정승집도는 조선 후기 문인들의 여름날의 풍경을 담은 그림과 함께 시, 산문이 어우러진 풍속화라고 할 수 있다.
현정승집도에는 ‘玄亭勝集’이라는 큰 글씨의 제목 아래 그림·기문·시 8편이 차례로 이어져 있다. (원래는 두루마리 상태였는데, 지금은 제목 및 그림 부분과 기문·시 부분으로 분리되어 전한다.) 그림과 글씨는 모두 강세황의 친필이다. 현정승집도에 실린 강세황의 시는 ‘정묘년 6월 현정의 승경을 읊다[丁卯六月玄亭勝景]’라는 제목으로 『표암유고』에도 실려 전한다.
탁 트인 산 위 누각엔 술잔들이 널려 있고/ 敞豁山樓列斝盤
졸졸 흐르는 시내가 난간까지 닿았네/ 淙潺石磵遶闌干
거문고 가락 바람 부는 소나무 사이로 아득히 퍼지고/ 風松琴曲悠揚遠
바둑돌 맑은 날에 우박 치듯 그 소리 차갑구나/ 晴雹棋聲剝啄寒
내키는 대로 시를 읊조리며 다투어 화답을 재촉하고/ 狂詠篇章爭屬和
자세히 그림으로 옮겨 자랑스럽게 돌려보네/ 細移啚畫侈傳看
촛불을 쥐고 흠뻑 취하는 것 사양하지 말게나/ 莫辭秉燭千塲醉
모름지기 흐르는 세월 짧음을 아쉬워해야 하나니/ 須惜流光一指彈
강세황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32세에 안산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처가인 진주 유씨의 유경종, 유경용 등과 어울려 지냈다. 성호 이익을 찾아가 학문을 익혔으며, 단원 김홍도를 제자로 받아들여 그림을 가르쳤다. 강세황이 뒷날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지며 ‘예원의 총수’로 불린 데에는 안산 문인들과의 교유가 뒷받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정승집도의 배경이 된 안산 청문당은 진주 유씨가 대대로 살아온 집으로, 안산 지역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특히 이곳은 조선 후기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남인 학자들이 모이면서 조선 후기 문예와 실학의 산실이 되었다고 한다. 청문당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에 있으며 경기문화재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건물이 신갈~안산 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 사이에 끼어 있어 강세황 당시의 그윽한 문향은 찾아볼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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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부곡동과 청문당
경기도 안산 지역에서 한때 묵향(墨鄕)으로 불린 곳이 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이다. 조선시대 안산군 군내면 부곡리(釜谷里)와 신리(新里)에 속해 있던 부곡동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부곡리로 통합되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부곡동이 되었다.
부곡동은 2009년 6월 30일 현재 총 8,403가구에 22,152명[남자 11,331, 여자 10,821]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행정구역은 36개통 141개 반에 이른다. 안산시 동부 외곽 지역에 위치하여 수인산업도로와 영동고속국도·서해안고속국도가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넓고 길게 조성된 성호공원과 단원조각공원이 동네 앞에 조성되어 있고, 수리산 자락이 넓게 동네를 감싸고 있는 전원적인 주거 지역이다.
[기호남인의 대표 문중 진주유씨 가의 터전으로 우뚝 선 부곡동]
부곡동은 원래 진주유씨 누대의 세거지로 개멸·벌터·새마을·시랑골·신촌·옹기마을·정재골 등의 자연부락이 있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의 시랑골·신촌 등은 폐동되어 새로운 주택과 양궁경기장·제일스포츠센터 등이 들어섰고, 개멸·벌터 등 북부 지역은 예전의 자연 취락을 유지하고 있지만 안산~신갈 간 고속국도가 마을 중앙을 관통하고 있다. 안산시가 발전함에 따라 1991년 11월 18일 안산시 조례 제416호에 의거, 와동에서 월피동으로 분동이 되었으며, 1995년 3월 2일 안산시 조례 제605호에 의거하여 월피동과 부곡동으로 분동이 되었다.
부곡동에서 누대에 걸쳐 살아온 진주유문(晋州柳門)은 조선 후기 기호(畿湖) 남인 3대 가문인 목래선(睦來善)의 사천목씨(四川睦氏)와 민희(閔熙)·민암(閔黤)의 여흥민씨(驪興閔氏)와 더불어 안산 지역에서는 대표적인 가문이다.
진주유씨 대종가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4호로 지정된 청문당(淸聞堂)은 삼척부사를 지낸 수촌(水村) 유시회(柳時會)[1562~1635]가 손수 조영한 것이라 한다. 본디 충청북도 괴산에서 살아오던 유씨 집안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유시회의 조카인 유적(柳頔)[1595~1619]이 선조(宣祖)의 아홉째 딸인 정정옹주(貞正翁主)의 부마로 뽑힌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정혼을 하고 혼인에 이르기 전 유적의 아버지 유시행(柳時行)이 사망하자, 어린 사위가 3백 리가 넘는 길을 오갈 것을 걱정한 선조가 한양에서 1백 리 안쪽에 묘를 잡으라는 명을 내려서 묘지를 부곡동 새터에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진주유문은 선조로부터 받은 넓은 사패지(賜牌地)와 안산 바닷가 어염권을 기반으로 이곳에 세거해 왔으며,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유적이 선조의 부마가 된 데 이어 조카 유명견(柳命堅)[1628~1707]·유명천(柳命天)[1633~1705]·유명현(柳命賢)[1643~1703] 등 3형제가 판서에 오르는 등 한때 진주류문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유명천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1694년(숙종 20)의 갑술옥사(甲戌獄事), 1701년(숙종 27) 신사원찬(辛巳遠竄) 등 세 차례에 걸쳐 15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다. 또한 신사년 원찬 때는 경기감사 유명견이 위도(蝟島)에, 이조판서 유명현이 남해도(南海島)에 각각 절도안치(絶島安置) 되는 등 정치적 박해를 받다가, 이 중 유명현이 유배지에서 목숨을 잃는 참극을 겪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유명천은 청문당(淸聞堂) 인근의 경치를 읊은 시 「하당팔영(荷堂八詠)」 여덟 수를 남겼으며, 이산해(李山海)의 고손녀로 유명천의 아내가 된 정경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는 계속되는 남편의 유배 생활과 출산의 실패 등 고초들을 한글 필사본으로 쓴 『고행록(苦行錄)』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경기도 전통명가로 꼽히는 경성당(竟成堂)은 진주유씨 가의 21세손이자 차종손인 유신(柳賮)[1748~1790]의 아들 유중서(柳重序)[1779~1846]가 둘째 아들 유방(柳霶)[1823~1887]이 살림을 날 때 지어 준 집이라고 한다. 안산문화원장을 지낸 고 유문형(柳文馨)에 따르면, 안채는 2백여 년 전에, 그리고 사랑채는 그보다 30여 년 뒤에 지어졌다고 한다. 집터에 대해서 따로 전해지는 말은 없으나, 풍수사인 오 아무개가 “수십 대를 이어가면서 보전해야 할 자리다. 재벌 정 아무개의 재산과 바꾸어도 아까울 만큼 좋은 자리다.”라는 극찬을 남겼다고 한다.
경성당의 누마루에 걸린 3개의 주련에는 “높은 산 화모봉 아래 빗살처럼 모여 사는 한 가문, 이들이 사는 깊은 골 부곡 마을에는 집들이 솥발처럼 들어섰구나[山高華帽峰下居 簪纓之族村深覆 釜谷中有鐘鼎之]”와 “선조께서 내려주신 땅, 한 줌이라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宣廟賜牌之局 寸土勿與於他人]”, “성조[14조인 성산공(星山公)]께서 터를 잡으신 곳이니 후세까지 보전해 나가라[星祖定礎之基十世相傳于後裔]”라는 글이 있는데, 이런 글에서도 알 수 있듯 아직도 진주유씨 종손이 자부심을 지니며 거주하고 있다.
현재 상록구 부곡동 산50~40번지에는 진주유씨 가의 선영(先塋)이 있으며, 유적과 정정옹주의 묘소[안산시 향토유적 제14호]를 비롯한 여러 분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 진주유씨 가의 분묘 위치를 상세하게 그려 놓은 것이 「부계전도(釜溪全圖)」로, 안산시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계전도」는 유명천의 6세손으로 구한말 개천군수를 지낸 모산(帽山) 유원성(柳遠聲)[1851~1945]이 그렸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 4대 만권당의 하나-청문당]
진주유씨 대종가인 청문당에는 1만 권의 서책이 저장된 만권루(萬卷樓)가 있어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고택과 이인엽(李寅燁)·이하곤(李夏坤) 부자의 회와재(晦窩齋), 유명현(柳命賢)의 경성당(竟成堂)과 더불어 조선 후기 4대 만권당으로 꼽히기도 했다.
청문당은 16,529㎡의 대지 위에 현정(玄亭)·하당(荷堂)·희한당(凞閑堂)·만권루 등의 부속 건물과 괴석원(怪石園) 등 정원이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만조가 되면 정원 밖으로 배를 띄울 수 있게 조영된 청문당의 실경을 그린 표암 강세황(姜世滉)[1713~1791]의 「지상편도(池上篇圖)」가 처가인 유씨 가문과 진주강씨 본댁에 각각 1점씩 전하고 있다.
조선 후기 청문당의 만 권에 이르는 서책에 대해서는 “원컨대 유감사 댁 서고의 좀벌레가 되어 만 권 서를 배불리 먹고 싶네[公嘗貯萬卷詩書 伊時童謠 願爲柳監司宅魚 飽食萬卷書 野史載之]”라는 표현이 시중에 떠돌 정도였다고 한다. 유씨 집에서 책을 빌려갔던 이들 중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히는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1712~1791]도 있었다.
만 권의 책 말고도 청문당 하면 사람들의 입에 자연스레 오른 것이 별미로 담그는 특미 가양주인 노가주(露柯酒)였다. 피나무와 찹쌀을 원료로 하여 이슬을 맺히게 하여 담그는 이 술은 궁중에서만 전래되는 것으로, 유석의 사촌형인 진안위 유적 댁에 전수된 명주(名酒)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선조의 아홉째 딸인 정정옹주(貞正翁主)가 하가(下稼)해 올 때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강세황의 처남인 해암(海巖) 유경종(柳慶種)[1714~1784]은 조선 후기 안산의 문화를 꽃피운 주역이었다. 현 정재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오교촌장(午橋村莊)의 주인이었던 유경종은, 안산 일대의 넓은 사패지(賜牌地)와 일찍이 선조로부터 하사받은 바닷가의 어염권에 의하여 축적된 자산을 이익(李瀷)[1681~1763]의 문하에 대한 지원과 ‘안산15학사’의 창작 공간으로 쾌척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의학에 조예가 깊어 유의(儒醫)로 칭송 받던 유경종은 매부인 강세황, 지기인 안정복과 함께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 청문당에서 10리 떨어진 성촌의 성호장(星湖庄)에 출입하였다. 특히 안정복이 70여 세 때 한 짐의 서책과 손녀의 혼수에 쓸 가마와 말을 빌려 달라고 할 정도로 유경종과 안정복은 가까운 사이였다.
유경종은 말년에 청문당을 중심으로 ‘오천시사(午川詩社)’를 결성하였는데 경향 각지의 많은 문인과 묵객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한여름의 복날에는 청문당에서 개장국 잔치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장면은 표암 강세황의 『현정승집(玄亭勝集)』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 밖에 부곡동의 모임에 대해서는 안정복의 시와 채제공(蔡濟恭)의 시, 그리고 강세황의 시 등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 기(記)·서(序)·발(跋) 등에 전한다. 이때 모임의 중심인물은 유경종을 비롯한 이용휴(李用休), 강세황, 임희성(任希聖), 허필(許佖), 유중림(柳重臨), 조중보(趙重輔), 엄경응(嚴慶膺), 이수봉(李壽鳳), 최인우(崔仁祐), 이맹휴(李孟休), 이광환(李匡煥), 채제공, 박도맹(朴道孟), 신택권(申宅權) 등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들은 생활과 교유의 공간을 함께 하는 동지의 특성을 넘어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받으며 상대의 가치를 존중하는 심교(心交)의 지경에 이르렀다. 대부분 정치적으로 일탈된 인사들이었기에 세속적 욕구를 초탈하였고, 따라서 서로에게 바라는 바가 없었다. 다만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학문과 예술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를 마음으로 인정하는 심교가 가능했다.
1754년 청문당에서 강세황·이용휴·안정복·신광수·유경종·유경용 등이 모여 같은 운(韻)을 써서 연구를 이룬 시 한 편이 유경종의 『해암고(海巖稿)』에 전하고 있으며, 강세황의 『표암유고(豹庵遺稿)』에도 같은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이처럼 부곡동의 청문당은 성호 이익의 문인들이 중심이 된 ‘안산15학사’의 문예 창작의 중심지였고, 표암 강세황과 해암 유경종은 예술가들을 부곡동으로 불러 모으는 데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표암 강세황이 빛낸 묵향과 예향]
청문당이 유명해지게 된 데에는 시·서·화 삼절(三絶)로 조선 후기 화원의 대표였던 표암 강세황의 영향이 컸다. 서울 남산에서 태어난 그는 21세 때 진천(鎭川)에 머물던 아버지가 별세하자 3년상을 치렀고, 뒤이어 25세 때 다시 어머니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마쳤다. 그리고 집안이 옹색해지자 32세에 처가가 있는 안산에 들어와 61세로 벼슬에 나갈 때까지 30여 년을 머물렀다.
부곡의 처가와 5리 떨어진 곳[현재의 상록구 수암동으로 추정]에 살았던 강세황은 부인을 잃은 뒤 시와 그림에 능하였던 처남 유경종의 청문당에서 그림도 그리고 시도 짓고 읊으며 지냈다. 그런데 청문당에서 강세황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을 배운 이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1~1806?]였다. 그때 김홍도의 나이 8~9세로, 강세황은 김홍도를 귀여워하였고, 김홍도 또한 강세황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청문당은 조선 후기 화단의 대표적 화가인 김홍도와도 인연이 깊은 셈이다.
강세황은 또 수암동 원당골에 우거한 심사정(沈師正)[1707~1769]과 교유하며 수암동 뒤편의 수리산 기슭에 자리한 원당사(元堂寺)에서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그리고 30여 세 위인 이익의 글방을 드나들면서 같은 연배인 이용휴[이익의 조카]와 학문을 논하고 세정(世情)을 이야기하였다.
강세황은 이렇듯 유경종의 도움을 받아 청문당이 위치한 부곡동을 묵향과 예향(藝香)이 가득 찬 공간으로 창출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자부심으로 유원성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부곡동 일원의 8가지 뛰어난 경승을 손수 여덟 폭의 병풍으로 꾸민 것이 『부계팔경도(釜溪八景圖)』이다. 안산시 향토유적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는 『부계팔경도』에는 「모산초적(帽山草笛)」과 「부곡 시냇가의 달빛 속 낚시[釜溪釣月]」, 「숲속 봄날의 꽃비[萬樹花雨]」, 「진벽루의 흰 구름[鎭碧白雲]」, 「지평 뜰에서 들려오는 농군들 노랫소리[芝坪農歌]」, 「먼 바다에서 돌아오는 돛단배[望海歸帆]」, 「우산에 지는 석양[牛山落照]」, 「판천교 다리의 게잡이 불빛[板川蟹火]」등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산의 전통주로서 손색이 없을 노가주의 맥도 끊기고, 그 옛날 기호 남인의 학문적 기반으로 명공거관(名公巨官)들이 제 집인 양 드나들며 매화나무 늙은 등걸 밑에서 만 권의 책과 함께 시·서·화를 벗삼아 매화음(梅花吟)을 즐겼던 조선의 4대 만권당(萬卷堂)으로 불리던 청문당도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다만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부곡동 역시 근대화와 산업화의 개발에 밀려 더 이상 옛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 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표암유고(豹菴遺稿)』
『해암고(海巖稿)』
변영섭, 『표암 강세황 회화연구』(일지사, 1988)
『안산시사』 (안산시사편찬위원회, 1999)
홍영의, 『안산의 옛 경관』(책과함께, 2008)
강경훈, 「18세기 안산의 풍광과 제영: 시로 읽는 안산의 옛 노래」(『한국한문학연구』25, 한국한문학연구회, 2000)
정은진, 「강세황의 안산활동과 문예활동: 유경종과의 교유를 중심으로」(『한국한문학연구』25, 한국한문학연구회, 2000)
박용만, 「18세기 안산과 여주이씨 가의 문학활동: 섬사 편을 중심으로」(『한국한문학연구』25, 한국한문학연구회, 2000)
김동준, 「해암 유경종의 시문학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http://an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ansan&dataType=01&contents_id=GC02501641
해암 유경종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글씨 세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