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음문자이지만 우리말은 사용에 따라 미묘한 의미를 표시한다. “옳커니! 잘 알았습니다.”라면 아주 만족하여 흔쾌하게 즉시 결정하는 경우다. “그래요? 딱 그렇다고 할 수만도 없을 것 같은데... 일단 알았습니다.”라고 한다면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전제 하에 참고는 하겠다는 유보적인 결정이다. 한참을 뜸을 들이다 힘없는 목소리로 “충분히 알았습니다.”라고 한다면 전혀 마뜩치는 않지만 물리치기 어려워 마지못해 수용하는 불만이 가득한 결정이다. 예를 들면 사극에서, 초승달마저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그믐밤에 검은 연기 하늘로 솟아오르는 횃불 밑에 대소 신료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전의 상감을 향해 “가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청원하는 장면을 더러 본다. 상감의 표정은 밝지 않다. 땅바닥에 엎드려 간청을 하는 신하들의 행동은 겉과 속이 다르다. 형식은 간청이지만 내용은 강요다. 상감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긴 밤을 물러가지 않고 어거지를 부리겠다는 뜻이다. 신하도 알고 상감도 안다. 결코 물러서지 않을 농성이라는 것을. 결국 상감께서는 떫은 감을 씹은 얼굴로 "윤허하겠노라." 하고 고개를 외로 꼬았을 것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겪어온 경험이 풍부하여 노회(老獪)해지는 면도 있지만 신체적 노화, 정신적 위축, 사회적 역할 상실 등으로 심한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더 많다. 개인차가 크겠지만 대개의 경우 존재상실감으로 젊은 시절의 그 넘치는 자신감은 찾아볼 수 없이 의기소침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자신감 상실은 자기주장을 신중하게 하거나 주장 자체를 가슴 속에 묻어버리는 경우까지로 이어진다. 대신 주위의 뜻은 고려나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아진다. 자신의 의사에 맞지 않더라도 받아들이고 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서글프다. 그러나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고 생각이 드는 일이지만 우리는 대세를 거스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것이 업무적인 것이 아니라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섭리라면 더 더욱 거스를 수 없다.
요즘은 나이를 의식하게 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다른 경우보다 신체적인 노쇠를 자각하는 경우는 정말 당혹스럽다. 발달이 정점에 이르면 노화기로 접어든다는 것은 상식인데 그 상식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터무니없는 미련(未練)이고 욕심이다.
이제 머리염색을 그만두라는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염색약의 부작용으로 피부과를 찾을 때마다 의사는 권했지만 여태까지 그 말을 듣지 않았었다. 젊은 나이에는 염색을 해도 두드러진 부작용을 느끼지 못했다. 시력에 영향이 있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더니 세월이 갈수록 피부에 직접적으로 반응이 나타났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했는데 염색 전에 옻 예방약을 먹는 것으로 2년 정도를 견뎠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그 약도 효과가 없다. 지금 염색한지 열흘이 넘었는데도 머리 피부가 벌겋고 가렵다. 좁쌀만큼 작은 두드러기도 사라지지 않는다. 체력이 부작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주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생로병사의 순리에 따르는 수밖에 없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머리가 하얗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10년 정도는 더 늙게 보일 것이다. 흰머리를 염색한다고 근본적으로 젊어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남이 보기에는 실제 나이에서 얼마를 빼 줬는데 이제 그 덤을 포기해야 한다. 여태까지 덤을 누려왔는데 그 덤을 포기하고 원래의 나로 돌아간다는 것이 이토록 억울하고 속상할 줄은 몰랐다.
연세가 칠순이 넘으신 모 여가수를 티브이에서 보니 하얀 백발을 염색하지 않고 그냥 출연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보기에 괜찮은 이유가 안면 피부를 의사의 도움을 받은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비록 머리는 하얗더라도 얼굴이 탱글탱글하면 한결 나아 보인다. 그렇다고 남자인 내가 얼굴에 칼을 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 분명하다. 내 욕심이야 무슨 짓인들 못하랴 만은 해서는 곤란한 일을 무모하게 감행할 만큼 용감한 나는 아니다.
자판질을 하다 멈추고 거울 앞으로 가서 손가락 한 마디쯤 올라온 흰머리를 바라본다. 아직은 하얀 테를 두른 듯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머지않아 지하철에서 젊은이들이 일어나 공손하게 자리를 양보할 것이다. 꼭 내 젊음을 누구에겐가 억지로 뺏겨버린 것 같아 가슴이 허전하고 아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