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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항구도시 나폴리의 베수비오산이 그늘을 드리운 곳에 자리한 가정에서, 1882년 10월 6일 돌린도 루오톨로 신부는 열한 명의 형제자매들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실비아는 가난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매우 순수하고 고상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엔지니어이며 수학자인 아버지 라파엘레도 신앙심이 깊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장 라파엘레는 가족에게 매우 엄격했으며 인색할 정도로 절약했다. 그래서 이 가정에서는 웃을 일이 거의 없었고, 게다가 형편없는 수입으로 정말로 비참한 가난에 시달렸다. 특히 어린 돌린도가 겪는 고통은 더 컸기에, 훗날 그는 이렇게 썼다. “내게 돌린도Dolindo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뜻은 고통입니다.” 이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아돌로라타Addolorata”(고통의 성모)에서 딴 것이었다.
돌린도 루오톨로는 이미 세 살 때 신부님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집에서 차가운 대리석 계단 위에서 배웠고, 그것도 항상 호된 매질을 당하면서 끝이 났다. 그러니 아버지가 집에 오면, 책상 아래에 숨어 있었다. 매일매일 계속되어 아이가 견디기엔 너무 큰 그 고난은 그 아이를 “동굴에 사는 바보”로 만들었다. 열한 살이 되어 첫영성체를 하는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어린 돌린도의 내면은 천상적 신비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혼자서 새벽 미사를 다니고 아버지의 가혹한 처벌을 하느님께 희생으로 바치기 시작할 정도로….하지만 중학교에 가서는 1학년을 두 번 다녀야 했다. “나의 정신은 닫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고 내 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가장 굴욕적이고 창피한 것은 자신이 학급에서 가장 작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친구와 사귀는 것을 금지했으며, 학급 친구와의 모든 접촉을 금지했다. 나중에 아버지 라파엘레 루오톨로는 아들 돌린도에게 자주 고백했다. “네가 어렸을 때 내가 왜 그토록 끊임없이 네게 고통을 주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주님께서 그렇게 시키신 것 같구나. 너는 그 누구보다 훌륭하게 되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 이유를 난 정말 모르겠다. 얘야, 그래도 내가 너를 사랑한 건 분명해.!”
성모님의 “키스”
1896년 돌린도 루오톨로의 부모는 이혼했다. 어머니 실비아는 아들 돌린도를 나폴리의 어느 선교 수도회가 운용하는 기숙학교에 보냈는데, 그에게 학습 장애가 있다는 것이 이내 드러났으며, 그 곤란한 상황에서 그는 완전한 신뢰의 마음으로 예수님과 성모님께로 향하였다. 며칠 지나서, 1896년 6월에,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날 나는 동급생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성모님의 상본을 책에 기대어 내 앞에 두었습니다. 나는 성모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사랑하는 어머니, 제가 사제가 되기를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저에게 거기에 맞는 지능을 주십시오. 어머니도 아시듯이, 저는 바보니까요.’ 그러면서 그 상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데 갑자기 졸음이 덮쳤고, 상본이 움직이더니 – 바람이 불어서인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 내 이마를 스치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의 부족한 정신은 완전히 밝게 개어있었고 빛으로 가득 찼습니다.”
곧이어 돌린도는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자신을 완전히 바치겠다고 기도했는데, 그것은 리구오리의 알폰소 마리아 성인의 기도를 본뜬 것이었다. “그날의 그 봉헌은 내 생애 전체의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돌린도는 학급에서 가장 훌륭한 학생이 되었고, 결코 읽어본 적 없는 것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학습 부진으로 늘 조롱받았던 그가 그때부터는 동급생들의 무자비한 질투를 받게 되었다! 동급생들은 돌린도에게 모든 시험에서 가장 나쁜 점수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쳤다. “루오톨로에게 영점을!” 그리고 직장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교사는 그 잔인한 놀이에 굴복했다.
돌린도는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으며, 굴욕감을 안겨주는 교사와 교우들의 횡포에 맞서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침묵하며 참을 수 있었던 깊은 이유가 있었다. “나는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 가득한 시간은 3년이나 계속 되었다. 돌린도가 다행스럽게도 선교 사제회의 수련자로 받아들여져 신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열망했던 서원을 18세에 할 때까지 그 고통은 계속되었다. 첫서원 후 어느 날 돌린도는, 중국 선교사가 되어 순교하고 싶다는 원의를 드러냈다. 하지만 장상은 그에게 이런 예언적인 대답을 했다. “하느님께서는 수사님에게 고난과 사도직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이런 갈망을 주셨습니다. 수사님은 순교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피는 흘리지 않고, 마음으로만 순교할 것입니다.”
사제 그리고 십자가의 길
1906년 돌린도 루오톨로는 사제서품을 받았다. 곧이어 나폴리에서 교사 일을 시작했으며, 신학교에서 그레고리고 성가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자기가 다녔던 중등 신학원에서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 이내 그는 훌륭한 선교사로 이름이 났고, 아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교의 후계자로 꼽히는 등의 그의 노력과 능력은 대단했다. 그는 빈틈이 없었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않았으며, 그러면서 그의 영혼은 점점 차가워졌고 성과도 없게 되었다.
그때 한 동료의 질투는 그의 승승장구에 빠른 종말을 가져왔다. 단지 음악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그는 장상에게 불려갔으며, 거친 질타와 위협을 받았다. 나중에 그는 그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찌 된 일인지 마술처럼 갑자기, 나는 새롭게 하느님 안에서 뜨거운 기도 속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것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우리가 피조물을 믿고 기대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뻐져리게 느꼈습니다. …그건 나의 내면을 쇄신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정화의 폭풍은 그에게 실제로 영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유년 시절부터 자주 직면했던,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특별한 고난이 가득했던 그 길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큰 계획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그는 점점 더 분명하게 알아들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정화하신 것은 당신 손안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인식은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도록 그가 자신을 완전히 맡겨드리는 데 매우 중요했고 또한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결국 그해 그는 남쪽의 항구도시인 타라노에 있는 신학교의 영성 지도자로 발령이났다. 그곳의 상황들은 혼란스러웠고, 신학생들은 그를 경멸하면서 맞이하였고, 장상은 그를 마치 가장낮은 직급의 수련자처럼 취급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자제하고 극기해야 했는지, 고요히 머무르고 침묵하기 위해서 내가 하느님과 일치하려 얼마나 애썼는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앞으로 당겨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항상 나를 상황을 통해서 이끌어주셨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우는 아이를 손잡아 데려가듯이, 내가 늘 당신을 따르도록 이끄셨습니다.”
이 정화의 열매로 그는 점점 더 자주,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하느님 안에 깊이 들어가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분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엄마의 품속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습니다.”
없애라, 하지만 쫓아내지는 마라
1907년 가을, 돌린도 루오톨로 신부에게 격랑이 아주 갑작스럽게 휘몰아쳤다. 이단을 방어했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나폴리로 불려갔으며, 장상은 그에게 미사 집전 금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그렇게 실제로 내게 수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 아침에 나는 집에서 성체를 모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마치 파문이라도 당한 사람인 양 피했습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돌린도 신부를 “이단자, 민중 선동자, 교회에 위험한 인물…”이라며 교황청 신앙교리성에 신고했으며, 그에 따라 로마로 소환되었다. 신앙교리성에서의 치열한 심문 끝에 1908년 1월 말, 돌린도 신부는 모든 사제 직무에서 면직되었다! 특히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몇 주간에 걸친 심문 동안에는 성체를 영할 수 없었고 고해성사도 불가능한 점이었다. 심지어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며 정신 병원에 보내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검진한 정신과 전문의는 “돌린도 신부는 날카로운 이성과 분명하고 논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라는 진단서로서, 그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임을 증명해 주었다. 비로소 그해 4월 중순에 돌린도 신부는 다시 나폴리로 돌아갔으며, 자신을 선교단체에서 배제한다는 교황청의 결정을 알게 되었다!
이때 그는 온몸으로 깨닫고 인식했다. 자신이 죽어 가는 것을, 완전히 없어지고 파괴되었음을! “나는 온전히 주님께 나 지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 당신 뜻대로 하소서.’”
“주님께서는 저를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믿었습니다. 제가 그 일로 멸망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신랑이신 당신의 겸손으로 옷 입혀주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상처 입힌 채 바닥에 그대로 두셨고, 저의 사제직은 찢어졌으며, 고난 속에서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끔찍한 멸시를 통해서 꽃이 피어났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교회인 당신을 더욱 더 내적으로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적대자들이 당신을 제국의 여왕으로 묘사하는 신성 모독의 저주 가운에 저는 당신을 엄마라 불렀습니다, 당신은 저를 결코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저의 길을 평탄하게 하셨고, 더 큰 걸음으로 서둘러 하느님의 뜻을 이루도록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영혼에게 말씀하신다”
아주 심한 반대를 못 이기고 돌린도 루오톨로신부는 1908년 5월에 수도공동체를 떠나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도 그를 “이단자이며 미친 자”로 취급하며 피했다. 더욱이 그가 자신에게 내려진 판결을 애써 참으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것을, 악마에 사로잡힌 결과라며 의심하는게 아닌가! 급기야 친척들은 구마사를 불렀다. 그러나 그 구마사는 이 젊은 사제가 하느님과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매우 빨리 간파했다. 또한 돌린도 신부의 겸손에 감동하여 그 구마사는 이런 말로 그를 위로하였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하느님께서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많은 고난을 참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겁니다.”
이렇듯 몇 개월 동안에 엄청난 고난이 가득 밀려들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은총의 선물도 돌린도 신부 안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그에게 힘을 주고 격려하는 말씀이 그의 안에서 들려왔으며, 그의 앞으로의 사제생활을 위해서 중요한 의미가 되기 시작했다. 돌린도 신부는 그 당시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고, 단지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하는 말씀을 분명한 이성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들었을 뿐이다. 그는 그 말씀들을 받아쓰기 하듯이 순종하면서 받아 적었다. 1910년 8월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사제 돌린도 루오톨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다. 그리고 너는 살아 있다. 네가 아니라, 내가 네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통해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해부터 예수님의 말씀들은 지속적으로 그리고 강렬하게 점점 더 많아졌다. 돌린도 신부는 자신의 생각이나 상상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그 말씀들을 일기장에 적어두었다. 나중에 그 말씀들에 “예수님께서 영혼에게” 혹은 “마리아께서 영혼에게”라는 설명도 적었다. 현재 돌린도 루오톨로 신부의 시복을 위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1910년 8월 초, 스물일곱 살의 돌린도 신부에게 로마로부터 서신이 도착했다. 미사를 드려도 된다는 허가서였다! “2년 6개월 11동안 저의 직무는 중지되었습니다.”
그는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주교의 비서로서 그리고 젊이들을 돌보면서 다시 사목에 나섰지만, 또다시 비난의 화살이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1911년 가을에 그는 다시 로마로 소화되었으며, 해를 넘겨 한 달가량 더 로마를 떠나지 못했는데, 신앙교리성의 감옥에 갇혔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겪은 가혹한 취급은 그에게 매우 고통스럽게 각인되었다. 다행히도 석방과 미사 집전 허락이라는 최종적인 판결을 받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활동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역경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그를 어떻게 이끄셨는지 그는 분명히 알아들었다. 특히 그가 초대받아 갔었던 여러 다른 교회에서 쏟아낸 열광적인 강론을 통해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회개하게 된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Triumph des Herzens nr.161>에서 이정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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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수님, 저를 온전히 드리오니 주님께서 돌보아 주소서!
아름다운 글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이야기 생애들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