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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tpton
Spire "Ship of Fools"

1980년대 중반, 내가 처음 등반을 시작했을 때, 모험에 대한 내 열정을 불타오르게 한 것은 그 무엇 보다도 파키스탄의
발토로 빙하에 늘어서 있는 뾰족한 암봉들이었다. 엘 캡 보다 더 거대한 그 송곳니 모양의 화강암에서의 고소 거벽 등반 - 그 보다 더
멋진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등반을 실제로 어떻게 하는지에 관해서는 몰랐으나, 혼자 마음속으로, 내가 과연 그런 등반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대학 생활이 끝났을 때, 일찌감치 은거 생활로 들어가 요세미티의 어느 동굴 속으로 이사하리라는 내 계획에 대해 한사코 부모님이
반대했다. 거기서 어떤 형태의 일이든 하는 척 하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으나, 이유야 어떻든 간에 나는 모든 면에서 냉혹하리만큼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장래의 직업을 신기하게 알아 맞히는 심리 테스트를 해준다는 대학의 진로 상담 센터로 내가
가보아야 한다고 아버지가 강력히 주장했다. 그 카운셀러에겐 좀 안 됐다고 느꼈지만, 그가 내가 택할 직업들을 골라 주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원 레인저, 아웃도어 지도자, 조경 건축사 등등이 그것이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마음에 드는 분야라고는 나무
수술이었다 (로프 맨 채 체인 톱을 들고 여기저기 매달려 있는 것은 괜찮을 듯 했다).
4년 후, 캠프 4 위의 동굴 안에서 기어다니며 지내기도 시들해지기 시작하자,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해봐야 할 때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요세미티 밸리에서 이미 적잖은 수업료를 냈고, 배핀 아일랜드에 두 번 다녀 온 후여서, 카라코룸을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연히 트랑고 타워를 선택해야 했으나, 전에 본 적이 있는 높이 19,700 피트의 쉽톤 스파이어의 꿈같은 몇 장의 사진들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이미 트랑고는 수십 번 등반된 적이 있는 반면, 쉽톤은 1996년에야 초등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이 산은, 별로 사람들이 찾는 적이 없는 트랑고 빙하 옆의 계곡 안에 감추어져 있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이 산이 클라이머에
의해 최초로 발견된 것은 1989년으로서, 미국의 크렉 콜럼이 에릭 쉽톤의 The Six Mountain Travels라는 고전적인
책에서 이 봉우리의 사진을 본 후 그 탐사를 하기 시작했다. 콜럼이, 육감에 의지하여, 쉽톤이 1938년 카라코룸을 통해 중국으로
갔던 바로 그 길을 따라 갔다. 사람이 붐비는 트랑고 베이스 캠프로부터 두 시간 미만 걸었을 때, 콜럼은 그의 최종 목표인 쉽톤
스파이어를 발견했다. 이 스파이어는 네임리스 타워의 r 반 정도의
크기이고 완전한 처녀봉이었으며, 당시로서는 해볼만한 등반 목표지였다. 삼년 후, 앤디 스텔러스, 척 보이드, 그리고 고인이 된 마크
베비에 등으로 구성된 강팀과 더불어 콜럼이 파키스탄으로 돌아 왔다. 이들은 쉽톤에서 성공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나쁜 날씨와 식량 부족
사태를 맞이하여 정상에서 약 240 미터 못 미치는 지점에서 돌아섰다. 이 등반에 관한 기사는, 셀터스가 쓴 1994년의 클라이밍 지
기사에 게재된 바 있다: 이 글을 읽은 후, 이제 나의 카라코룸 꿈은 그 이름과 얼굴을 갖게 되었음을 곧 깨달았다.
다른 클라이머들도 이 산이 아직도 처녀봉 상태로 남아 있음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고, 그 그룹 중에는 류치 다니쿠치라는 대담한 일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1995년 류치는 1992년 미국대가 올랐던 라인과 비슷한 등반선을 따라 솔로 등정을 감행했다. 이 봉우리에서 자주 발생하는
낙석에 의해 무자비하게 그 벽에서 떨어지기 직전까지 지상 600 미터까지 오른 바 있다. 그의 시신은 발티 족 포터들에 의해
회수되었으나, 그의 홀백은 아직도 그 13 피치에 매달려 있고 쉽톤의 그 적지않은 객관적 위험을 냉혹하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 다음 해, 재차 쉽톤을 시도키 위해, 종전의 대원이었던 척 보이드와 새로 참여한 그렉 차일드 그리고 그렉 포레이커와 함께 콜럼이
되돌아 왔다. 지난번 원정을 통해 얻은 지식이 있으므로, 1992년 너무 문제가 많음이 알려진, 우회 경로인 웨스트 릿지를 피하기로
그들이 정했다. 대신, 이들은 쉽톤에서 가장 긴 루트라고 할 만한 곳을 택했다 .즉, 남벽 중앙의 튀어나온 필라(pillar) 였다.
콜럼은 상존하는 위험 그리고 대원 간의 성격 차이로 인한 갈등에 질려, 그 등반 중도에 후퇴했다. 남은 세 명은 참고 버텼으나,
마지막 코니스의 눈이 굳은 상태가 아니고 위험하기 때문에 정상 9 미터를 남겨두고 좌절을 맛보았다. 최고 수준의 등반을 36 피치 한
후, 이 팀은 그들의 노력이 거의 완등에 가깝다고 여겼고 간절히 원하던 초등을 했다고 주장했다. 등반 전문 잡지의 유식한 사람들,
소위 미디어 전문가들이, 정상에 오르지 않은 초등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거의 즉시 공격을 퍼부었고, 점점 많이 알려지고 있는 이 봉우리에
관해 상당한 논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재릿 오덴과 나는 이 소동에 관해 전부 알고 있었으나, 우리의 쉽톤 등반 결정은 초등을
주장의 가능성 여부에 의해 동요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라인을 개척할 만한 미답 지형을 찾고 있었으며, 쉽톤에는
아직 그런 곳이 많았다.
이번이 나에게는 첫 번째 카라코람 산맥 원정이지만, 파트너인 재릿은 이미 1995년에 트랑고 타워에 그의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윌리
베너가스, 에릭 브랜드 그리고 케빈 스타와 함께, 재릿이 네임리스 타워 북벽을 초등했다. 이 루트는 여러 개의 강 팀이 시도했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었던 프로젝트였다. 당시 재릿의 나이는 만 23세였고, 거벽 등반을 다섯 번 밖에 안했고, 그 중 어느 것도 초등은
아니었다. the Book of Shadows라는 루트는 3,800 피트의 Grade VII로서, 북벽 중앙의 인상적인 다이히드럴
(dihedral) 시스템 위로 올라가며, 이곳의 등반은 온갖 위험들, 예컨대, 장기간 지속되는 폭풍에서부터 어려운 인공 등반 그리고
불안한 믹스드 클라이밍을 요한다. 이 루트는 내가 진정으로 감탄하는, 소수의 거벽 초등정 중의 하나에 속한다.
6개월 전에, 나는 재릿을 알지 못했고 그렇게 큰 것을 하기 위해 그와 내가 이렇게 빨리 팀을 이루게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었다.
우리가 만난 것은 the Mount Washington Valley Ice Festival에서였는데, 거기서 함께 재미있게 믹스드
클라이밍을 좀 했고, 트랑고 타워와 쉽톤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극적인 거벽 등반지죠”라고 재릿이 그
지역을 설명했다. 한 달 후 그에게 나하고 강티 쉽톤을 등반하겠느냐고 전화 걸었을 때,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카라코룸 하이웨이에 관해 내가 들어왔던 모든 이야기는 죽음과 파멸과 심한 부상과 연관되어 있어, 라왈핀디에서 30인승의
순례자들이 타는 버스를
(“prayer bus"?) 탈 때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이슬라마바드 교외의 농지들을 지나 북으로 향하면서 버스 타고 가는
기분은 꽤 상쾌하다. 길을 나선지 거의 12 시간이 지나면 처음으로 상당한 고도감을 맛본다. 그러다가 결국, 길이 좁아지며
맹렬히 흘러내리는 ‘브랄두’ 강 위 수백 피트 높이에 자리 잡고 있는, 수직 암벽을 깎아내어 만든 1 차선으로 좁아진다.
앞이 전혀 안 보이는 모퉁이에서 우리의 몸이 둥근 나무통처럼 이리저리 구를 때마다 기사인 알리는 브레이크를 밟지도 않았다. 그 대신,
친절한 면도 있어서, 여러 개의 뿔피리로 하는 짧은 곡을 크게 틀어주기도 했다. 그 가사는 대략 이런 내용이다: 자, 알리의 차가
모퉁이를 돌아요. 절대로 망설이거나 브레이크를 밟는 법이 없어요.“
만일 반대쪽에서 알리와 비슷한 다른 사이코가 온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 상상이 간다. 알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분명했으나,
그래도 그는 계속해서 “인샬라, 인샬라” (알라의 뜻이라면) 라고 주문을 반복했다 가이드인 카림에게 알리가 속도를 늦추도록 해달라고
우리가 부탁했으나, 그것은 일종의 만용이 될 수도 있었다. 왜냐 하면 그 운전사가 일부러 더 낭떠러지 가까이로 차를 밀어 붙이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아마 원정대가 그렇게 된 경우는 없으리라 생각되나, 작년만 해도 48 명의 파키스탄 승객을 태운 버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생존자는 단 한 명이었는데, 그는 버스 전면 윈도우 옆에 앉아 있었는데, 버스가 급커브 모퉁이에 다가가고 있을 때
그 운전사가 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길 위로 뛰어내림으로써 그 버스가 수백 피트의 허공을 날아 무시무시한 힘으로 물 속에
처박히는 것을 본 유일한 목격자가 되었다.
마지막 마을인 아스콜레에서 쉽톤 스파이어 베이스 캠프까지의 걷는 거리는 약 50 마일인데, 브랄두 강의 모래로 덮인 강 뚝 위로 난
평탄한 길을 주로 가게 된다. 삼일 째에는, 거대한 발토로 빙하의 입구(吹口) 위로 올라섰는데, 여기서부터는 편한 길이 자갈 덮인
얼음으로 바뀌었다. 발토로 빙하 위로 몇 시간 걸은 후, 트랑고 빙하의 왼쪽지맥으로 들어섰고 처음으로 네임리스와 그레이트 트랑고의
모습을 보았다. 네임리스는 여성 체형처럼 날씬했고, 그 옆의 위풍당당한 그레이트 트랑고는 (스타워즈 영화에 나오는 악당 괴물인)
Jabba the Hutt처럼 보였다. 이제까지 내가 들은 바로는, 단일 암괴로 이루어진 화강암 암봉으로는 엘 캡이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들 했는데, 이제는 과연 그 말이 사실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발티 토착민들은, 이미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전에 온 원정대와 같이 그곳에 가보았기 때문에, 쉽톤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네임리스
타워 밑을 지난 지 두 시간 후, 위험할 정도로 바위가 불안정한 협곡을 올라간 후, 푸르게 우거진 초원의 외곽에 이르렀다. 암벽에서
무너져 내린 바위덩이들이 산재한 지대를 지나 야생화와 작은 산중 호수들이 여기 저기 있는 맑고 깨끗한 보호구역이 나타났고, 호수에는
에워싼 산봉들의 웅장한 이미지가 비추었다. the Trango Tower, Uli Biaho, Cat's Eaar Spire 그리고
쉽톤이 세계 최고의 알파인 암벽 지대라고 말해지기도 하는 이 곳을 에워싸고 있었다. 맑은 빙하의 시냇물이 쿡(cook)의 텐트
맞은편에서 굽이굽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텐트에서는 포터들이 봉급을 많이 받으리라는 기대 속에 모여 있었다. 진눈개비가 내리고
있었고, 컴컴한 폭풍 구름이 부분적으로 가리고 있는 가운데, 처음으로 우리가 쉽톤 스파이어를 보았다.
난 쉽톤의 윤곽을 외우다 시피 하고 있었다 - 이미 지난 1994년에 이 산의 이미지가 내 마음 속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실제로 이
산을 보자 마자, 나는 그 정상에 주의를 집중했다 - 멀고 먼 그 정상은 너무나 신비스럽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다가갈 수 없어
보여, 그 위에 서보고자 내가 온 것이 거의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바로 그
때 그 순간에는, 아마 그것을 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그 현실의 중압감을 마음 속 깊이 느꼈다.
첫 번째 날은, 처음으로 루트 밑까지 짐을 지고 가기에 앞서, 캠프 정리와 주변 지역 정찰을 하는데 보냈다. 올라가는데 만도 거의
다섯 시간이 걸렸다. ABC 바로 밑의 아이스폴에서 대부분의 시간이 소비되었다. 로프 매지 않은 채로 크레바스를 뛰어넘고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채 우뚝 솟아있는 세락들 밑을 걸어갔다. 땅 속에서 큰 물결을 일으키며 흐르는 강물의 에너지로 빙하 표면 전체가
흔들렸다. 우리가 금단 지역을 건너고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벽 위에 있는 류치의 홀백을 보았을 때 특히 그러했다.
베이스에서 그 벽을 관찰하면서, 초등자들이 택한 라인이 그 지형 상 최선임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쉽톤의 가슴판에 해당하는
단일 암괴(巖塊)로 이루어진 필라로서 (pillar) 단번에 정상까지 직접 도달할 수 있는 지형이었다. 그 필라의 양쪽 모두에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이는 괜찮은 라인들이 있었으나, 우리는 변형 루트를 하는 걸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상당히
오래 동안 지속된 고기압이 이 봉우리를 파삭파삭하게 만들어 놓아, 처음 3500 피트 구간에 스노우 렛지(snow ledge)가
남아있을는지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었다. 클라이어 두 명과 60 미터 로프 다섯 동 만 갖고서는, 충분한 양의 물을 끌어올리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 필라의 오른편에는 좋아 보이는 크랙 시스템이 몇 개 있긴 했으나, 그 벽의 이 부분 전체가 군대와 같은
타이밍과 능률로 바위와 얼음 파편을 쏟아 버리는 배수 구역이 가로막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쉽톤 남벽의 오른편에 있는 튀어나온 부분을 (bulging prow) 하기로 정했다. 그 벽의 이 구간은 완전
수직이고 또 너무 많이 각양각색의 모양새로 갈라져 있어 과연 어느 크랙으로 올라가야 할지를 정하기가 어려웠다. 이 배의 이물처럼
튀어나온 지형의 (prow) 양쪽에는, 검은 물자국을 따라 상당한 크기의 얼음덩이와 바위덩이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곳이 안전 면에서는 가장 나은 곳에 속하는 듯 보였다.
집 안의 소파에 있을 때는 난 항상 등반에 관해 로맨틱한 생각을 하곤 하나, 그런 상상은 짐 나르기라는 가혹한 막노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수백 파운드의 음식과 연료와 장비를 벽 밑까지 운반되어야 하며, 우리 말고는 고소 포터가 없다.
트랑고 빙하와 하이나블락 빙하를 열흘 간 힘들게 오간 후, 전진 캠프에 쌓인 장비가 거의 우리 키 만큼 높아졌다. 이만한 장비와
식량이면 그 등반을 끝낼 동안 견딜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꼈으나, 우선 한 가지 작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눈을 녹이기 위해
XGK을 설치하려고 할 때, 재릿이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밝힌다: 그 펌프를 집에다 두고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 동안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질러 댔지만, 그리고 난 다음에는 내가 트랑고 베이스 캠프까지 내려가 대체할 물건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스토브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또 내가 도착할 날 저녁때 원정대 쿡 중 한 명이 작업장 내에서 특식을 마련했다.
그들은 마치 내가 VIP가 되어서 그 고기를 먹게 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맛이 찝찝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캠프 장 밖의 볼더링 바위로 뛰어가다가, 근처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홀백을 보게 되었다.
내가 그 안을 들여다 볼 정도로 어리석진 않으나, 그 미스테리의 고기는 파리가 득실거리는 염소의 시체임이 드러났다.
ABC까지 가는 동안, 그 썩은 염소 고기를 토하느라고 15분마다 멈추곤 했고, 도착하는데 거의 하루가 다 걸렸다. ABC에서는
재릿이 그 등반 루트의 첫 피치를 솔로로 했다. 벽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바닥에서 폭발하는 커다란 얼음덩이들에 관해 그가
이야기해주었다. 우리는 거의 2 주 동안 쉽톤을 관찰해왔고, 항상 언제 어디에 위험이 숨어있는지 분명치 않음을 배웠다. 우리가 처음에
골랐던 모든 루트에서 얼음덩이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나서, 적어도 다섯 번은 루트를 바꾸었다.
그렉 차일드로부터 그리고 앤디 스텔터의 기사를 통해서, 암질이 형편없는 바위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은 바 있다. 적어도, 제일
처음에는, 이 설명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첫 두 피치는 젖어 있는 침니로서 박리된 바위의 삐쭉삐죽한 파편들이 (fins) 가득한
화물용 슈트(loading chute, 짐을 밀어내려 운반하는 장치) 같았다. 어떤 곳에서는 마치 길로틴 밑에서 등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첫 500 피트를 지난 후, 벽의 각도가 좀 완만해졌고 전형적인 카라코룸 화강암의 오렌지색을 띠었다. 바닥 위 세 피치 째인,
“까마귀 둥지”라는 곳에 있는 작은 렛지에 우리의 첫 비비를 (bivi) 만들었다. 홀백이 세 개 그리고 큰 물통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이 우리가 처음으로 만날 눈 쌓인 지점에 이를 때까지 지탱해줄 수 있기를 바랬다. 초등자들이 이 봉우리를 등반하는데 20일이
소요되었음을 알고 있어서, 우리도 그 정도 걸릴 것으로 가정했다.
이제까지는 날씨가 지나치다 할 정도로 좋았다 - 구름도 없고, 바람도 없고, 햇볕이 너무 따가워 자외선 차단 크림을 잔뜩 발라야
했다. 그러나 그 벽 위에서의 첫날밤에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삼일 동안 우리는 그 ‘중국식 물고문’을 견뎌내다가 나중에는
줄을 바닥까지 내리고 베이스 캠프로 후퇴했다. 조금도 전진 못하고 있는데 귀중한 식량 만 축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3일 후, 내가 돌아 와 일곱 번째 피치에서 피톤을 박고 있었는데, 그 끝에는 내가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널찍하고, 풀과 꽃이
덮여 있는 비비 렛지(bivi ledge)가 있었다 - 그야말로 “환상의 섬”이었다. (the Fantasy Island). 재릿과
나는 즉시 우리가 Ricardo Montalban and Herve Vilechez (일명Tattoo)의 역으로 가장했다. 몇 시간
동안 그 TV 쇼와 Ricardo 크라이슬러의 Cordova 차 커머셜에 나오는 멋진 장면들을 하며 보냈다.
마치 우리의 포탈리지가 코드도바 차의 매장인 것 처럼, 포탈리지의 바닥 위로 팔을 쭉 펴고, 리카르도의 액센트를 최대한 흉내 내어,
“진짜 코린트 가죽으로 만들어진 호화스런 인티리어를 갖춘 이 새로운 코르도바를 보는 즐거움을 누리십시오,” 라고 내가 말하곤 했다.
재릿이 “그 비행기”에 대해 계속 말하고 나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얼마 동안은 재미있었으나, 그 스페인 난장이가 인간으로 변신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재릿이 진짜로 믿기 시작하자, 내가 그에게 이젠 그만두자고 말했다.
그 판타지 아일랜드 바로 위에는, 요세미티 스타일의 손가락 넓이 및 손 넓이의 크랙이 그 수정질 화강암을 갈라놓고 있었다. 바위는
깨끗했다. 들떠 있는 바위나 감자 칩 같은 바위가 없었다. 그러나 작은 엣지와 발 쓰기 좋은 둥근 모양의 튀어나온 큰 홀드가 많았다.
몇 번 텐션을 받긴 했으나, 재릿이 그 피치를 곧 끝냈다. 5.11 급은 충분히 된다고 했다. 여기가 이 루트에서 처음으로 하드 프리
클라이밍을 한 곳이다. 약 17,500 피트 고도에서 말이다. 그 피치를 후등하면서, 심장이 너무 강하게 뛰어 그 날 나머지 시간
내내 가슴이 아팠고 마른기침이 나왔다.
이 '팬타지 아일랜드' 피치는 매우 중요했고, 또한, 재릿으로서는 상당한 실적이 되기도 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이 라인을 처음 택한
이래 쭉 관찰해온 그 겁나는 반 침니 바로 밑에서 그 피치가 끝나기 때문이다. 내가 재릿을 대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나, 미리
그곳의 선등은 재릿이 하도록 내가 몰래 계획을 짜놓았던 것이다. 처음 20 피트는 쉬운 스퀴징(squeezing) 동작으로 내가
오르기 시작했고, 조금 튀어나온 홀드 위로 올라서서 그 다 150 피트 길이로 뻗어 있는 6 내지 9 인치 폭의 완벽한 크랙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 루트는 내 수중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곳을 ‘프리’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믿지만, 나는 안전한 립
프록(leap-frog) 방식을 택했다. 그 크랙에 맞는 캠이 두 개 밖에 없었다. 믿음직한 나의 5호 짜리 캐머럿. 나는 그곳을
A1으로 매겼으나, A5 급 추락을 겪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었다.
재릿과 나는 20 갤런짜리 원정용 배럴에 (barrel) - 홀링 하기 좋게 서스펜션(suspension) 장치를 했음 - 담은 물을
전부 끌어 올렸다. 그 통은 라왈핀디 바자에서 샀는데, 겉에 둥둥 뜬 털이 보이는 두툼한 더껑이를 들여다보자, 전에 이 통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어느날 밤 그 찌꺼기를 걸러내는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으나, 걸러내는 물건이라곤
재릿의 털양말 뿐이었다 (그는 그게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물이 꽤 부족한 편이서 불순물이 섞여 있는 그 구역질나는 물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재릿의 땀에 쪄든 발 냄새를 없애주는 게토레이 믹스가 우리에게 조금은 남아 있었다.

베이스 캠프 떠난 지 일주일 후, 우리가 “the Notch"에 도착했는데, 이 지점에서 헤드월 하단이 정상 능선과 만나며 등반의
성격이 완전히 새롭게 달라진다. 마치 선사 시대 상어의 등지느러미처럼, 정상으로 이르는 그 마지막 구간의 릿지가 너무나도 예리한
어레이트 (arete) 형태로 시작되기 때문에 그 위를 마치 난간의 손잡이처럼 쓸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릿지의 먼 곳에는 극히
실제로 볼 수 있는 경우가 드문 쉽톤 스파이어 서벽이 있었다. 그곳은 4000 피트의 얼음과 믹스드 클라이밍 루트로서 종전에 한번도
등반된 적이 없으며, 본 사람 조차 없었던 곳이다. 규모가 큰 남벽에 의해 가려져 있어서 눈에 뜨이지 않으며, 이 봉우리 위로 높이
올라온 사람만이 그 매혹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보다 더 먼 곳에는, 그렉 차일드가 the Mystery Phallus라고
명명한 인상적인 미등정 암봉의 뛰어난 모습에 우리는 감탄했다. 상단 벽 시작 부분에서는 잘 안 보였던 쉽톤 정상이 이제 시야에
들어오자, 우리의 사기가 상당히 높아졌다.
the Notch까지 홀링한 바로 그날, 고기압이 완전히 남쪽으로 가버렸다. 지난번 폭풍우 이래 우리는 좋은 날씨에서 (splitter
skies?) 등반했으나, 이제는 통상적으로 카라코룸에서 기대하던 날씨로급격히 악화되었다. 맹렬하게 휘몰아치는 눈과 거의 화이트 아웃
상태로 바뀐 날씨로 인해, 홑겹 텐트를 릿지에 묶어 맬 곳을 찾아 헤매었다. 우리는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갔고 뼈 속까지 젖게
되었으나, 바닥은 온통 튀어나온 돌 투성이의 전쟁터였고, 내가 있는 쪽의 끝부분은 아득한 낭떠러지 위로 약 30 cm 정도 나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탄가스 버너에 산소 공급이 되도록 텐트 문을 활짝 열지 않으면 켜지지 않아서, 결국 우리가 배고프거나 목마를
때면 폭풍이 완전히 제멋대로 텐트 안으로 사납게 휘몰아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서리나 틈새마다 물이 고였고, 이제 재릿이 머물고
있는 강물과 내 오리털 침낭 사이의 유일한 보호벽인 나의 비비색(bivi sack)이 무사하기만을 내가 계속 기도하게 되었다.
“자, 연못에 누워있으니 정말 기분이 얹짢을 거야.” 라고 내가 재릿을 놀렸다. 그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재미있자고
한 말이었다. 그는 내 말을 잘 알아채지 못했고, 가끔 낮게 중얼거리곤 했다: “형, 결국은 당하기 마련이야 (“Payback's a
bitch, bro.").
7일 후, 폭풍우는 겨우 잠시 동안 잠잠해졌으나, 나이프 릿지에 두 동의 선등 줄과 세 동의 스테이틱 라인을 제대로 설치할 수
있었다. 주로 눈이 쏟아지는 속에서 등반했으며 시계가 너무 나빠 서로 볼 수조차 없었다. 눈 덮인 바위를 오르기도 하고 위태롭게
자리잡고 있는 버섯 모양의 눈이 쌓여 있는 곳을 이리저리 돌아 내려오는 완벽한 얼음 고랑까지 (ice runnel) 포함하는 여러
가지 지형 위로 등반했다. 그 척추 (spine) 부분 자체는 주로 아무 홀드가 없고, 등반 불가인 화강암 첨봉(尖峰)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 릿지의 조우 어느 쪽으로 등반해야 할지를 정해야 했다.
고정 로프 설치를 끝낸 밤, 쉽톤 스파이어가 지난 주 내내 우리로 하여금 먹게 했던 빌어먹을 샌드위치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먹여
주었다. 두 자나 되는 눈이 우리의 고정 로프를 반짝이는 얼음으로 코팅하여, 당장 해가 나더라도 일기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마음을 마비시킬 정도의 지루한 하루가 지난 후, 재릿이 새벽 네 시에 얼람을 맞추어 놓았는데, 내 마음의 반은 차라리 구름이
낌으로서 기상 시간이 불확실하게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렇게 되진 않아서, 정상 공략을 위해 최소한의 필요한 장비만 갖추고 옷을
입었다. 스크루 다섯 개, 스펙터 훅 한 개, 몇 개의 캠과 스토퍼와 피톤을 갖고 갔다. 하강을 위한 여분의 슬링, 세 개의 클리프
바아 그리고 각자 물 한 쿼트(quart)씩을 갖고 가되, 버너는 갖고 가지 않았다. 정상까지 갖고 가기 위해 가는 도중 마지막 두
동의 로프를 걷어 가기로 했다.
19,000 피트 고도 위의 ‘나이프 엣지’를 주마로 오르는 것은 상당한 심폐 기능상의 체력을 요했으며, 그 고정 라인 끝에 도착할
쯤에는, 한번에 우리가 가진 물 전부를 마셔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 릿지는 뾰족한 봉우리와 오버행 눈 버섯들을 우회하여 구불구불하게
이어졌다. 피치 몇 개에서는 완전히 트래버스를 해야만 했는데, 나중에 내려 올 때에는 - 아마 어두워졌을 때에 - 다시 한번 리딩을
해야 할 터이니 그것 또한 문제였다.
베이스 캠프 떠난지 2 주 후, 재릿과 내가 정상의 봉우리로 이르는, 길고 가늘게 얼어붙은 얼음이 있는 페이스에 진입했다. 내가
80도 각도의 긴 얼음 피치를 선등했는데, 편리하게도 30 피트 길이의 록 밴드 밑에서 끝났다. 재릿이 그 얼음을 떠나 단단하긴 하나
오버행을 이루고 있는 ‘핸드 크랙’ (hand crack) 안으로 나아갔다. 재밍 동작으로 몸을 고정하고, 코너에서 스테밍 자세를
취할 만한 곳을 찾느라고 크램폰으로 긁어대면서, 이 혼합 등반 크럭스를 돌파한 다음, 거기가 5.10이라고 밑에 있는 내게 외쳤다.
크럭스 마다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하고 우리가 생각하곤 했으나, 해가 지는 순간까지도 어려운 등반이 계속되었으며, 우리와 정상 사이에는
400 피트 거리의 미지의 지형이 남아 있었다.
얼음이 살짝 발라져 있는 침니 아래에서 달랑 너트 한 개에 매달려 있으면서, 발치에 쌓아놓은 로프를 풀어 주었고, 빌레이 플레이트
사이를 통해 1 인치라도 로프가 나아갈 때마다 기뻐했다. 재릿이 그 침니를 벗어나고 그의 헤드램프가 사라지기까지 그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로프가 좀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그러나 내가 일초 일초를 의식하자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마치 영겁처럼.
나는 배터리 절약을 위해 헤드램프를 꺼두었고, 크램폰을 얼음 속으로 걷어차며 시간을 보냈다. 몇 개의 어두운 구름 사이로 별이 빛나고
있었고, 우리가 있는 곳은 어둡지만, 남쪽으로 달빛 속에서 빛나고 있는 브로드피크와 가셔브룸 IV의 윤곽을 뚜렷이 식별할 수 있었다.
그 피치를 주마로 올라보니 회수할 확보물도 거의 없었으나, 만일 지향성 확보물 (directional piece) 하나가
빠져나오면, 크게 펜들럼을 하면서 떨어지므로 극히 조심해야 했다. 다행히도 로프가 끝날 때쯤 재릿이 큰 바위덩이를 발견했고, 그의
힘든 선등을 내가 축하해주었다. 15 미터 위에 있는 또 다른 바위덩이 위까지 또 하나의 눈 처마가 (snow cornice) 머리
위로 이어져 있었다. 이 코니스는 1996년 팀의 최고 도달 지점에서 사진에서 내가 본 적이 있다. 기어 랙을 집어 들고 완경사 눈을
지나 그 커다란 바위덩이까지 쉽게 등반했다. 작은 침니가 그 바위덩이를 둘로 갈라놓고 있었다. 그렉 차일드가 이 틈새에 으깬 감자
같은 눈이 흘러넘치고 있었다고 설명한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 그 후 일년이 지난 지금, 그다지 춥지 않은 겨울과 대단히 더운
여름이 지난 후, 그 눈이 단단한 눈이 되었다. 네베(neve) 밑에서 보면 이 큰 바위덩이가 실제로 정상 봉우리처럼 보였으나, 그
크랙을 침니로 오르고 나니, 정상 능선이 뱀이 또아리 틀 듯 다시 한번 되돌아 온 후 다시 위로 커브를 이루며 30 내지 40 피트
더 뻗어 있었다.
쉽톤 봉의 꼭대기는 너무나 뾰족하고 가팔라서, 오버행을 이루고 있는 그 코니스 뒤로 떨어질까 봐 걱정스러웠다. 일어서고자 하면
현기증이 날 것 같다고 어둠 속에서 느꼈고, 몇 피트 밑의 바위에 드릴로 볼트를 박는 방법 이외에는 아무데도 앵커할 곳이 없었다. 그
동안 꿈꾸어 왔던 봉우리 뒤쪽의 경치를 볼 수 없어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베이스캠프에서는 초현실적으로 보였던 바로 이곳에 서있게 되니
등반을 끝냈다는 느낌 그리고 운이 좋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꼈다. 꼭대기에 있은 지 60초도 안되어, 나는 다운클라이밍을 하여 이제는
재릿이 올라가도록 했다.
정상에 이른 것은 좋았으나, 도취감이라든가 클라이맥스의 느낌 같은 것은 없었다. 하산에 대한 숙고할 시간이 별로 없었고, 이제,
음식도 물도 비비 장비도 전혀 없이, 그 릿지 아래로 13 피치를 되돌아간다는 생각이 상당한 불안감을 주었다.
하산은 이제까지 내가 겪었던 것 중 가장 힘들은 편에 속했다. 텐션 받으며 트래버스 하는 구간도 많아서, 위험하고 복잡한 하강을
해야했다. 그 트래버스 구간에서는 크램폰이 한번 미끄러지면 그 어두운 허공으로 거칠게 스윙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발은 거의 감각이
없었고, 동상에 걸리지 않을까 하고 심각히 걱정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로프가 빌레리 장비를 슬슬 잘 빠져 나갔고 크램폰도 헤드램프가
비추는 그 작은 범위 안에서 엷은 푸른 빛 알파인 아이스 속으로 잘 박혀 들어갔다. 여러 해 동안 내가 꿈꿔 왔던 것을 실제로 지금
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래 이거야, 그 고통스러움이 점점 클라이맥스에 이르려고 할 때는 ‘그래 바로 이거야’ 하고 내 마음이 내게
상기시켜 주었다. 마크, 네가 꿈꿔 왔던 것이 바로 이거야, 이것이 네가 사랑한 거야. 아침 6시 우리가 캠프에 도착했다. 떠난 지
약 24 시간 후였다.
돌아오니, 사람들이 우리가 쉽톤 스파이어 정상 등정 상배(賞盃)를 흔들라고 원하는 것처럼 느꼈다. 실제로 우리로 하여금 초등을
주장하라고 강하게 권하는 친구들과 클라이머들이 있었다. 확실히 아는 유일한 사실은 우리가 분명히 정상에 있었다는 점뿐이었다.
등정에 앞서 이 문제를 나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고, 그 후에도 많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이른 결론은 항상 같았다: 그 결정은 거기에
있었던 클라이머들에게 맡겨 두어야 한다. 이 경우, 마이클 케네디가 클라이밍 지에 쓴 사설 속에서 그것에 관해 제기하지 않았다면
그것에 관한 논쟁이 있을 수조차 없었다. “정상 열병: 가까이 가는 것은 말발굽 놀이나 수튜탄에서나 인정 된다”라는 제목의 그
글에서, 어떤 경우가 됐든 간에, 산의 초등은 눈 또는 바위로 이루어진 그 최고 정점까지 이르러야만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쉽톤
초등이 그 구체적인 사례로 언급되었었고, “..... 외형적으로 확실한 성과가 없는 노력을 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방향으로
만들려고 서두르는 가운데 그 마지막 단계들의 중요성을 자칫 간과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put the best possilble
spin)
정상등정이 없는 초등에 관한 케네디의 생각은 어메리칸 알파인 저널의 편집인인 크리스챤 벡위드의 지지를 받았다.1997년도 AAJ에서,
벡위드가 "....앞으로도 어떤 지형의 실질적인 정상에 도달한 것을 초등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라고 AAJ의 논설에 썼을 때 논쟁의
여지를 별로 남기지 않았다.
모두 알다시피, 충분히 가까이 (close enough) 라는 기준이 종전에도 세계 각지의 매우 주목할한 그리고 인정받은 초등에 -
안나푸르나, 칸첸중가, 세로 토레 - 사용되었다. 문제는, 그 경계선을 어디에 긋느냐 하는 것이다. 클라이머 자신 보다 특정 등정의
정황에 대해 더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 논쟁은 사실 말의 의미에 관한 싸움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은 산의 정상을
반드시 도달해야 할 하나의 지점으로 본다. 또 어떤 사람은 어느 봉우리의 “꼭대기”를 포함하는 좀 더 넓은 곳으로 본다.
역사상, 산악등반은 적어도 20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까지 소급하는 무감독 시험제도 (honor system) 내에서 영위되었다.
이러한 자율적인 명예 제도 하에서는 진실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그에 따라, 누가 한 말은 항상 그 말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케네디와 벡위드는 거짓 주장을 하는 클라이머들이 산악등반의 종전의 엄격한 기준을 손상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와 반대라고 생각한다: 의자에 앉아 산악 등반을 논하는 것이 지나치면 이 제도를 손상하며, 너무 빨리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여러분이 기억해두기 바라는 것은, 쉽톤 스파이어의 마지막 30 피트는 4,500 피트의 수직 높이를 갖는 이 산에서 유일하게 테크니컬
클라이밍을 요하지 않는 구간이라는 점이다. 나는 우리의 쉽톤 재등을 위한 기반을 구축해준 모든 클라이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도 항상 클라이머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주는 혜택을 (the benefit of doubt) 준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쉽톤 스파이어: 바보들의 배
팀: 마크 시놋, 재릿 오든
시기: 1997년 6-8월
위치: 파키스탄 카라코람의 트랑고와 하이나블락 빙하
후원: 노스 페이스

http://www.marksynnott.com
shlee 초역
제공:Cimbextr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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