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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유고 제20권 / 신도비(神道碑)
지사 사서 전공 신도비명병서(知事沙西 全公 神道碑銘 幷序)
증 좌의정 사서(沙西) 전공(全公)이 별세한 지 17년 뒤에 공의 둘째 아들 전 선공감 감역 극념(克恬)이 공의 사손(嗣孫) 후(后+山)를 시켜 고(故) 동지중추부사 황호(黃㦿) 씨가 지은 행장을 가지고 상산『商山: 상주(尙州)』에서 북쪽으로 천여 리를 달려와 한양(漢陽) 조경(趙絅)에게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청하며 말하기를, “우리 선인(先人)께서 조정에서 벼슬하며 오랫동안 집사와 가까이 지냈으니, 감히 선인의 영령을 빌어 집사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선인의 사적이 묻히지 않도록 묘지명을 지어 주시기를 청합니다.”하였다.
나는 자리를 털어 예를 표하고 나이가 여든에 가까워 억지로 글을 짓기 어렵다고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공의 행장을 반도 읽기 전에 책을 덮고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남쪽 지방의 사우(士友)들이 사서공(沙西公)에게 세상 누구보다 탁월한 행실 두 가지가 있다고 칭송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행장을 보니 정말 그렇다.
광해(光海) 무신년(戊申年,1608, 광해군 즉위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정인홍(鄭仁弘)을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삼아 세력과 기염(氣焰)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 기세를 거스르지 못했으니 부딪치면 부서지고 덤비면 타버릴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공이 창졸간에 열변을 토하여 그 잘못을 분변해 지적하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상공(相公)의 정론(正論)을 변호하였으니, 진 충숙(陳忠肅)이 장돈(章惇)에게 반박한 것도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요동(遼東) 전역이 오랑캐에게 함락되자 명(明)나라로 가는 길이 바뀌어 배로 바다를 건너게 되었는데, 왕명을 받고 사행 갔다가 그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장사 지낸 사신이 속출했다.
공은 이때 나이가 예순이 넘었는데도 연로했다는 이유로 조금도 피하려는 기색이 없었고 젊고 건장한 이들보다 먼저 자원하여 떠나 거대한 파도 위를 마치 대로를 가는 것처럼 여겼고 죽고 사는 것을 마치 집에 왕래하는 것처럼 여겼으니, 사안석(謝安石)이 배를 타면서 두려워하지 않은 일은 대수롭지 않아 거론할 가치도 없다.
이로 말미암아 명나라 사관이 “조선의 사신 전모(全某)가 조회 왔다.”라고 기록하였으니,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이윤경(李潤慶)이 《가융양조문견기(嘉隆兩朝聞見紀)》에 이름을 올린 뒤로 처음 있는 일이다. 《춘추좌씨전》에 “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전해지는 것이 세 가지이다.”라고 하였는데, 공의 행적이 어찌 공적과 언론에 부끄럽지 않은 정도에 그치겠는가?
사관이 대서특필(大書特筆)할 일이 한 번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한미한 촌부의 말이 어찌 공을 불후하게 전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다만 비문에 이름을 의탁하여 후세에 전하는 일은 내가 평소 많이 해왔다. 공은 50여 년 동안 벼슬하면서 30여 자리의 관직을 지냈는데 지위의 높고 낮음과 내직(內職), 외직(外職)을 막론하고 한 일과 말이 안에 쌓인 충직(忠直)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었으니 모두 세상의 준칙과 사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사우(士友)들이 이른바 ‘세상 누구보다 탁월한 행실’이라는 말은 다만 그 중에서 큰 것을 거론했을 뿐이다.
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기 전에 선묘조(宣廟朝)의 이름난 정승 김응남(金應南)의 천거를 받아 연원 찰방(連源察訪)에 제수되었는데 은혜와 사랑으로 보살피고 어루만져 피폐했던 역참이 완전하게 회복되었다.
관찰사가 공의 재능을 인정하여 가흥창(可興倉)을 맡겼는데 세미(稅米)를 거두어 창고를 채우고 왜적이 올 것이라는 말 때문에 창고의 곡식에 손실이 생기게 하지 않았으며, 또 군량을 주관하여 호서(湖西)에 군량을 공급하게 하니 군량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졌다.
기해년(己亥年,1599, 선조 32)에 예빈시 직장으로 전임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계묘년(癸卯年,1603,선조 3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을사년(乙巳年,1605,선조 38)에 승정원 주서로 선발되었다. 권력을 잡은 상신(相臣)이 존호(尊號)에 대한 논의를 앞장서서 주장하자 삼사가 덩달아 영합하였는데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공을 미워하였으므로 공은 마침내 불길한 낌새를 알아채고 떠났다.
정미년(丁未年,1607,선조 40)에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608)에 병조의 낭관에 천거되었다가 얼마 뒤에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에 임명되어 변방 백성을 쇄환(刷還)하면서 허위를 적발하여 제자리로 돌려놓았는데 일처리가 매우 분명했고, 관찰사를 대신하여 적체된 송사를 해결하여 책상에 쌓인 문서가 없었다.
기유년(己酉年,1609, 광해군 1)에 예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공론을 견지하는 사람이 공을 이조에 두려고 무척 힘썼다. 그가 실권을 쥐고 있는 낭관을 만나 보도록 공에게 권했으나 공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
신해년(辛亥年,1611,광해군 3)에 울산 판관(蔚山判官)에 제수되었는데 교화가 널리 행해졌다. 이듬해 병 때문에 금교 찰방(金郊察訪)으로 부임하지 않았고,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로 나갔다. 당시 광해군의 정사가 혼란하여 인륜이 거의 무너졌으므로 공은 벼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고향에 물러나 은거하면서 정 우복『鄭愚伏: 정경세(鄭經世)』, 이 창석 『李蒼石: 이준(李埈)』과 더불어 산수 사이를 소요하니 세상 사람들이 ‘상사삼로(商社三老)’라고 하였다.
기미년(己未年,1619,광해군 11)과 경신년(庚申年,1620,광해군 20)에 잇달아 양친의 상을 당하여 슬픔과 예법을 모두 극진히 하였고 여묘살이하면서 상제(喪制)를 마쳤다. 계해년(癸亥年,1623, 인조 1)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하여 종묘사직을 안정시키고는 우수한 인재들을 불러들였는데 공은 예조정랑 겸 기주관지제교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수찬, 교리에 임명되었다. 학사 임숙영(任叔英)이 항상 칭찬하기를,
“경연관 중에 고금에 통달한 사람은 정경세(鄭經世)요, 사리에 통달한 사람은 전식(全湜)이다.”하였다.
오랜 뒤에 전적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는데 기탄없이 탄핵하였다. 갑자년(甲子年,1624,인조 2)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서 어가를 호종하여 남쪽으로 갔다. 천안(天安)에 이르러 집의에 임명되었는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군대를 통솔할 때 법을 어긴 것과 원수 장만(張晩)이 늦게 오는 바람에 적을 마구 날뛰게 한 것을 논죄하자, 장만 휘하의 무사들이 모두 시끄럽게 다투며 “주장(主將)은 아무 죄가 없는데 함부로 지껄인다.”라고 하였다.
공이 대문(臺門)에 딱 버티고 서서 큰소리로 꾸짖기를,
“종묘사직이 먼지에 뒤덮이게 하고 군주를 피난가게 한 것이 누구의 죄이냐. 너희들도 신하인데 감히 이런단 말이냐.”하니, 모두 혀를 깨물고 잠잠해졌다. 3월에 예빈시 정을 거쳐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니, 호종한 공로를 포상한 것이었다.
겨울에 대언(代言)에 임명되었다. 주상이 김공량(金公諒)에게 절충장군의 품계를 내려주었는데 공이 반려하니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을축년(乙丑年,1625,인조 3)에 좌승지로 옮겼으나 사직하고, 호군을 거쳐 형조 참의로 옮겼다. 정사(正使)로 연경에 사신(使臣)으로 갔는데 공을 본 중국 사람들이 모두 공의 덕성과 국량을 칭찬하였으며, 등주(登州)의 군문(軍門) 무지망(武之望)은 더욱 공경히 예우하였다.
이듬해 복명하였다. 또 이듬해 정묘년(丁卯年,1627,인조 5) 2월에 오랑캐가 변경을 침입하여 해서(海西: 황해도) 지방까지 이르자, 주상이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오랑캐의 사자 유해(劉海)가 국서를 가지고 와서 주상과 맹약을 맺고자 하였다.
묘당의 논의가 화친으로 기울자, 공이 항소(抗疏)하여 화친은 절박한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예조 참의로 옮기고, 얼마 뒤에 대사간에 임명되어 6조목의 차자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 치우침과 사사로움을 버릴 것, 군정을 정비할 것, 군관을 감원할 것, 화의를 믿지 말 것, 기찰(譏察)을 하지 말 것이었다.
군관과 기찰은 나라를 병들게 하고 혼란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나 훈귀(勳貴)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홀로 그 실상을 다 아뢰어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었으니, 그 말을 들은 자들은 머리털이 설 정도였다.
경오년(庚午年,1630,인조 8)부터 신미년(辛未年,1631)까지 예조 참의를 오가며 맡은 것이 네 번이었고, 이조와 병조의 참의가 된 것이 두 번이었고, 사간원 대사간이 된 것이 네 번이었다. 공은 번번이 “늙고 병이 심해 조정에 오래 있을 만한 힘이 없다.”라고 말하고 간곡하게 외직을 구하였다.
마침내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었는데 그야말로 급암(汲黯)이 청정(淸淨)하게 규합(閨閤) 안에 누워 있던 것처럼 고을을 다스려 체득하여 온 경내가 교화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가자, 백성이 비석에 시를 새겨 찬미하였다.
갑술년(甲戌年,1634,인조 12)에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옛날 우리 선왕께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만드셨는데 비록 왕자, 대군이라도 감히 그 제도를 어기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혼례 때 의복과 기물이 너무 사치스러우니 선왕의 제도에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논하니, 주상이 훌륭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또 기강이 점점 해이해져 궁궐의 금령(禁令)이 엄하지 않다고 논하였다. 또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득실과 군주의 호오(好惡), 하늘의 재앙과 백성의 원망을 논하였는데 확실하게 지적한 수백 자의 글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예전에 배운 것을 복습하고 다시 새로운 것을 더 배워 얻도록 주상께 권하였으니 참으로 유신(儒臣)의 말이었다. 사직하여 체직되고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고,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는데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병자년(丙子年,1636,인조 14) 1월에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상(喪)에 달려가 곡하고 대궐에서 사은(謝恩)한 뒤에 즉시 돌아왔다.
대사간,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2월에 서쪽의 일병자호란이 급박하여 주상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자, 공은 창의(倡義)하여 병사를 모집하였다.
정축년(丁丑年,1637,인조 15)에 포위가 풀려 어가가 서울로 돌아오자 공이 즉시 달려가 문안하였는데, 이미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사은숙배하고 청대(請對)하자 주상께서 정좌하지 못하고 하교하기를, “경이 창의했다는 말을 듣고 내가 몹시 훌륭하게 여겼다.”하며 극진히 위로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영남의 군대가 부래(負來)한 뒤에 재차 집결한 것은 참으로 영남에는 임금을 존중하는 의리를 아는 사대부가 많기 때문이니 호남 사람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공은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기를, “늙은 신이 병 때문에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하고 적과 싸우지 못해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는 의리를 저버렸습니다.
지금 문석(文石)의 섬돌에 올랐는데 얼굴이 철갑 열 겹보다 두껍습니다.”하고, 이어 진언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큰 어려움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성인(聖人)의 용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상께서는 유독 옛날의 제왕이 나라를 잃었다가 보존한 것을 살피지 못하셨습니까. 스스로 실의에 빠지지도 마시고 스스로 안일하지도 마시며 날마다 신하들과 흥망성쇠의 도를 강론하여 밝히시기 바랍니다.”하였다.
도성을 나간 뒤로 전좌(殿坐)가 몹시 드물었기 때문에 공이 이 일을 언급한 것이다. 얼마 뒤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몇 달 뒤에 특별히 참판으로 승진하고 가선대부에 가자되었는데 사직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말미를 청하여 선인(先人)의 묘를 이장하였다.
무인년(戊寅年,1638,인조 16)에 세 번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한 번 사헌부 대사헌으로 옮겼으며 예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겼다. 주상이 호남의 군대가 군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석 달 동안 남한산성에서 노역을 하도록 명하고, 또 순검사(巡檢使)에게 삼도의 수군을 정비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은 모두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주장을 견지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여덟 가지 일을 논하였는데, 그 조목은 성상의 몸을 조양(調養)할 것, 실질적인 덕을 힘써 닦을 것, 사치하는 풍조를 통렬히 혁파할 것, 언로를 널리 열 것, 기강을 엄숙히 확립할 것,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할 것, 백성의 고통을 부지런히 돌아볼 것, 내수사를 혁파할 것이었으니, 모두 나라를 치료하는 양육(粱肉)이자 약석(藥石)이었다. 식자들이 탄복하였다.
그 뒤 두 해 동안 사헌부 대사헌과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된 것이 각각 세 번이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당시 대신(大臣)이 “전모(全某)는 본디 덕망이 높고 이미 나이가 많으니 마땅히 서둘러서 크게 써야 합니다.”라고 건의하니, 공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겸손하게 물러났다.
임오년(壬午年,1642,인조 20) 2월에 주상이 특별히 자헌대부에 가자하여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에 제수하였으니 이는 상신(相臣) 이성구(李聖求)의 계사를 따른 것이었다. 공의 나이가 비로소 80세가 되었으므로 곧이어 대사헌에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 12월 7일에 상주(尙州)의 성 밖에 있는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부음이 전해지자 주상이 조회를 정지하고 의례대로 부의하고 치제하였으며,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추증하였다.
훗날 장남 극항(克恒)이 원종공신에 책록되어 좌의정 겸 영경연사 세자부 감춘추관사에 추증되었다. 이듬해 2월에 상주의 치소(治所) 서쪽 백전산(柏田山)에 있는 선영 아래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유언을 따른 것이었다.
공의 휘는 식(湜),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이다. 계보는 옥천(沃川)에서 나왔는데, 그 선대에 학준(學浚)은 고려에 벼슬하여 영동정(領同正)이 되었다. 전해 내려와 태자 중윤(太子中允) 효격(孝格), 형부 시랑 대부(大富), 판도 판서 숙(淑)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알려졌다.
공의 고조는 응경(應卿)인데 석성 현감(石城縣監)을 지냈다. 증조는 팽조(彭祖)인데 성균관 진사를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혼(焜)인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여림(汝霖)인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이 귀해졌기 때문에 추은(推恩)된 것이다. 모친은 월성 이씨(月城李氏)는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는데 참봉 신(信)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계해년(癸亥年,1563, 명종 18) 1월에 태어났는데, 영특하고 탁월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겨우 이를 갈 나이에 마을 사람들이 효동(孝童)이라고 불렀다. 열 살이 되기 전에 서당 훈장에게 가서 배웠는데 학문이 날로 진보하였다.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은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이 있었는데 공을 보고 칭찬하며 훗날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기축년(己丑年,1589, 선조 2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임진년(1592)에 창의(倡義)하여 군사를 모집해서 왜적 수십여 명을 찔러 죽였으니 공이 자신을 잊고 순국하려는 뜻이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공의 외모와 성품은 피부가 희고 키가 컸으며 화락하고 도량이 넓었다.
지킨 절조는 오직 의와 도였으므로 비록 험난하고 어려운 일을 겪더라도 죽을 때까지 의기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여항의 학구(學究)들에 이르기까지 탄식하고 애석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또 한 시대에 재상이 되어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으니, 공의 덕망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아! 공은 나에게 아버지뻘이 되는데도 나를 대할 적에 나이가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차이를 두지 않았다. 내가 계미년(癸未年,1643, 인조 21)에 일본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갈 때 덕공(德公)의 상(牀) 아래서 작별 인사를 드리려고 하였는데 도리어 영좌(靈座) 아래에서 곡하며 절하게 되었으니 슬픔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공은 모두 두 번 장가들었는데, 전부인 강화 최씨(江華崔氏)는 부사 거원(巨源)의 4세손으로 후사 없이 일찍 죽었다. 후부인 홍씨(洪氏)는 남양(南陽)의 세족(世族)으로 사인(士人) 천서(天敍)의 딸이다. 2남 1녀를 낳았다. 극항(克恒)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을 지내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문학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나 병자호란 때 죽었다. 극념(克恬)은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전 감역(監役)이다. 딸은 사헌부 감찰 황덕유(黃德柔)에게 시집갔다. 측실에게서 4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극개(克慨), 극항(克㤚), 극징(克憕), 극칭(克𢜻)이다. 딸은 생원 강유(康鍒), 유지수(柳之洙)에게 시집갔다.
극항(克恒)은 후사가 없고 서출로 숭(崈)이 있다. 극념은 2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학(嶨), 후(后+山)인데 후는 극항의 후사가 되었다.
딸은 이학(李皬), 이채(李埰), 김학기(金學基)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문(𡵡)은 극항(克㤚)의 소생이다. 흠(欽+山)은 극징의 소생이고 딸은 어리다.
부(峊)는 극칭의 소생이다. 황덕유는 3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빈(霦), 연(𩃀), 정(霆)이다. 정언 홍여하(洪汝河), 유학 성석하(成錫夏)는 사위이다. 나머지는 어리다. 강유는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후학(後學), 만학(晩學)이고, 딸은 어리다. 홍여하는 자녀가 있는데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훌륭하다 전공이여 / 懿哉全公
누가 그대와 필적하랴 / 世孰與侶
인을 이고 다녔고 / 於仁戴行
의를 안고 살았네 / 於義抱處
쉬운 일은 반드시 양보하였고 / 於夷必讓
어려운 일은 시급히 여겨 떠맡았네 / 於病必急
신중하고 고요하여 장수를 누렸고 / 愼靜而至壽
강하고 굳세면서도 남을 포용하였네 / 強毅而容物
아, 이러한 분을 / 噫嘻斯人
오늘날 다시 볼 수 있겠는가 / 其可復見於今日也哉
<끝>
[註解]
[주01] 지사 사서 신도비명 : 이 글은 전식(全湜, 1563~1642)의 신도비명이다. 전식의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
(沙西)이다.
[주02] 진 충숙(陳忠肅)이 …… 것 : 진 충숙은 송(宋)나라 진관(陳瓘)으로, 충숙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장돈(章惇)이 재상이 되었는데,
진관이 장돈에게 무슨 일부터 먼저 하겠느냐고 물었다. 장돈이 간사한 사마광(司馬光)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대답하자,
진관은 “지금은 오직 붕당을 없애고 중도를 지켜야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宋史 卷345 陳瓘列傳》
[주03] 사안석(謝安石)이 …… 일 : 사안석은 진대(晉代)의 고사(高士) 사안(謝安)으로, 안석은 그의 자이다. 사안이 손작(孫綽) 등과 함
께 바다를 건너는데, 바람이 일어 파도가 출렁이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사안은 큰소리로 읊조리며 태연자약하였다. 뱃사공은 사안이 좋아한다고 여겨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바람이 더욱 거세지자 사안이 천천히 말하기를 “이렇게 장차 어디로 돌아갈 셈인가?” 하니, 뱃사공이 즉시 뱃머리를 돌렸다.
사람들이 모두 사안의 도량에 탄복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주04] 죽은 …… 가지이다 : 노(魯)나라 목숙(穆叔)이 말하기를 “최상은 덕행을 수립하고, 그 다음은 공업(功業)을 세우고, 그 다음은 후
세에 전할 만한 말을 남겨서 세월이 아무리 오래 흘러도 폐기되지 않는 것을 불후라 한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24年》
[주05] 대언(代言)에 임명되었다 : 대언은 승지이다. 한국문집총간 103집에 수록된 《만랑집(漫浪集)》 권9 〈지사 전공 행장(知事全公行
狀)〉에는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라고 하였다.
[주06] 급암(汲黯)이 …… 것 : 한(漢)나라 때 급암이 동해 태수(東海太守)로 옮겼다. 급암은 병이 많아 관아에 나오지 않고 내실(內室)에
누워 있었는데, 한 해 뒤에 동해가 잘 다스려졌다. 《史記 卷120 汲黯列傳》
[주07] 정좌하지 못하고 : 원문의 ‘측석(側席)’은 겸손하게 현자를 대하는 태도이다. 《後漢書 卷3 肅宗孝章帝紀》
[주08] 문석(文石)의 섬돌 : 무늬 있는 돌로 만든 궁정의 계단을 말한다. 《漢書 卷67 梅福傳》
[주09] 전좌(殿坐) : 임금이 조정에 임어(臨御)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10] 양육(粱肉)이자 약석(藥石) : 몸에 유익한 음식과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양육은 기장으로 밥을 짓고 고기로 반찬을 삼는다는 뜻으
로 좋은 음식을 가리킨다. 약석은 약재와 돌침으로 경계를 비유한다.
[주11] 덕공(德公)의 상(牀) 아래 : 후한(後漢) 때 양양(襄陽)의 현산(峴山) 남쪽에 인품이 고결한 방덕공(龐德公)이 살았다.
제갈량(諸葛亮)이 그의 집에 찾아갈 때마다 상(牀) 아래서 절함으로써 특별히 존경을 표하였다. 《襄陽記》
[주12] 쉬운 …… 떠맡았네 : 《국어(國語)》에 “현자는 곤란한 일은 자기가 떠맡고 편한 일은 남에게 양보한다.〔賢者急病而讓夷〕” 하였
다. 《國語 魯語上》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김하라 김재영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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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知事沙西 全公 神道碑銘 幷序
贈左議政沙西全公旣卒之十七年。第二子前繕工監役克恬。使嗣孫 [후(后+山)]手故同樞黃㦿氏之狀。自商山北走千餘里。乞銘于漢陽趙絅曰。吾先人位於朝也。獲私於執事久。敢藉先人靈。徼惠於執事。以不朽請。絅襒席爲禮。以齒近耄矣。難強筆硯。屢辭不得。則讀狀未半。掩卷而歎曰。余嘗聞南中士友之誦沙西公有高世行者二。今見狀良然。當光海戊申年間。頻頻之黨。推鄭仁弘爲奧主。勢焰焄灼。人莫敢迕其鼻息。觸碎犯焦不足言也。公能造次奮舌。辨揠其誤。申梧里相正論。陳忠肅之拄章惇。不及是矣。全遼陷虜。朝周之路變而航海。受命冠蓋前後葬魚腹者相銜。公於是時年過耳順矣。無幾微以老爲解。取先少壯而行。履鯨濤如康莊。視死生如往還。謝安石之無怖舟楫。敖而不足數者。由是。皇朝史氏書曰。朝鮮使臣全某來朝。特筆也。此則李潤慶登名嘉,隆錄後刱見事也。傳稱死而不朽者三。公之行奚遽不愧功與言而止哉。太史氏將大書特書不一書已也。冷淡傖父語
。何足輕重於公之不朽。顧托名顯刻以垂來許。則吾庸多矣。蓋公立朝五十餘年。歷職三十有奇。亡論高庳外內。率所事所言無非發於積中。忠直皆足以爲世則世師。士友所稱高世之行。特擧其大者耳。公未釋褐。宣廟朝名相金應南薦公除連源察訪。吹喣摩撫。赦郵以完。臬臣才公之爲。委以可興。收稅倉實。不以倭警而損。又令主饋。給湖西軍餉。餉事擧。己亥。轉禮賓直長不就。癸卯。登上第。乙巳。選入起居注。柄相倡尊號議。三司從臾之。惡公異於己。公遂色擧。丁未。陞典籍。戊申薦騎省郞。旋佐幕忠淸。刷邊民剔僞歸眞甚晢。代道臣決滯訟。案無留牘。己酉。拜禮部員外。陞正郞。時有持公議者欲置公選曹甚力。鉥公見用事郞。公笑而不答。由是事不諧。辛亥。除蔚山判官。風化大行。明年。以疾不赴金郊。出爲全羅都事。時光海政亂。彝倫垂斁。公不樂爲官。退藏于鄕。與鄭愚伏,李蒼石相羊山水間。世以爲商社三老。己未庚申。連遭內外艱。易戚俱盡。廬墓終制。癸亥。仁祖大王靖宗祊。收召畯良。公拜禮曹正郞。兼記注官,知製敎。俄錄弘文。拜修撰,校理。學士任叔英常稱經筵官通古今鄭經世。達事理全湜。久之。由典籍拜司憲府掌令。擧彈無所避。甲子逆适亂作。公以太僕正。扈 駕而南。至天安拜執義 。論延平君李貴視師左律之罪。元帥張晩緩期縱賊之律。晩幕下武士輩盡讙。訟主將無罪發逸口。公當臺門叱曰。使宗社蒙塵。 君父播越。誰之罪也。汝等亦人臣子。敢爾。皆咋舌而戢。三月。由禮賓寺正陞通政。拜兵曹參議。賞羈靮勞也。冬拜代言。上賜金公諒折衝資。公繳還。物論多之。乙丑。遷左承辭。由護軍改刑曹參議。以上价朝京師。華人見者咸稱公德器。登州軍門武之望尤致敬禮焉。明年復命。又明年丁卯二月。奴穿塞綴海西。帳殿闢于江都。奴使劉海持奴書至。要與主上歃血。廟議折入和套中。公抗疏指摘和事之非切刻。改禮曹參議。俄拜大諫。進六條箚。曰納諫諍。曰去偏私。曰修軍政。曰減軍官。曰勿恃和議 。曰勿爲譏察。軍官與譏察。夫人莫不知病國召亂。而畏勳貴無敢發口。公獨盡陳其狀。無毫髮爽。聞者髮豎。自庚午至辛未。往來禮部左侍者四。爲東西銓議者再。爲諫長者四。公輒自言老甚病。力不可久廁朝端。求外補堅懇。遂尹鷄林。爲治眞得汲黯之淸淨臥閤。一境化之。瓜熟而歸。民刻石爲詩美之。甲戌。拜大諫。論昔我先王製經國典。雖王子大君不敢越其制。今麟坪大君昏時衣服器用太侈。恐累先王之制也。上嘉納。又論紀綱漸弛。宮闈不嚴。又上疏論時政得失。人主好惡。天災民怨。鑿鑿累百言。無非中端。又勸上益溫舊學。更加新得。眞儒臣之言也。辭遞拜兵議。還都諫辭。拜禮議。賜告歸鄕。丙子正月。奔哭仁烈王后喪闕下。謝命卽歸。拜大諫,副學。咸辭以病。十二月。西事急。上避之南漢城。公倡義募兵。丁丑圍解。大駕還都。公卽奔問。業有副學之命矣。肅謝請對。上側席而敎曰。聞卿倡義。予甚嘉尙。慰諭之至。且詔之曰。嶺軍再集於負來之後。良由嶺南士大夫知不後君者多。湖南能無愧乎。公涕泣而前對曰。老臣病不能衽金革。孤負主辱臣死之義。今登文石之陛。顏不翅十重鐵甲。仍進言曰。古人有言曰。臨大難而不懼者。聖人之勇也。聖上獨不觀前古帝王喪國而存國者乎。願毋自沮毋自逸。日與群臣講興衰之道焉。蓋自出城。殿坐甚罕。故公言及此。俄拜吏議。閱數月。特陞參判。加嘉善資。辭不 許。乞暇遷先墓。戊寅 。三拜諫長。一遷憲長。改禮曹參判,國子大成。上以湖南軍犯律。命役南漢三月。又命巡檢使整三道舟師。公皆執非時。又上箚。其目八。調養聖躬。懋修實德。痛革侈風。廣開言路。振肅紀綱。崇奬節義。勤恤民隱。革罷內需。盡醫國之粱肉藥石也。識者歎服。後兩歲。拜府院長俱三。皆辭。時大臣建全某德望素高。年齡已暮。宜急大用。公聞之。尤自謙謙斂退矣。壬午二月 。上特加資憲。除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從李相聖求之啓也。公年始滿八十。故尋拜大憲不赴。是年十二月初七日。考終于尙之城外第。訃聞。上輟朝。贈賻賜祭如儀。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後用長督克恒原從功。加贈左議政。兼領 經筵事,世子傅,監春秋館事。明年二月。葬于尙治西柏田山先壟下巽坐原。治命也。公諱湜。字淨遠。沙西號也。系出沃川。其先有學俊者。仕麗朝爲領同正。傳至太子中允孝格,刑部侍郞大富,版圖判書淑。始大著。爲公高祖曰應卿。石城縣監。爲曾祖曰彭祖。國子上庠。贈承政院左承旨。爲大父曰焜。贈吏曹參判。爲皇考曰汝霖。贈吏曹判書。以公貴推 恩也。妣月城李氏。封貞夫人。參奉信之女。公生於嘉靖癸亥正月。穎卓異凡兒。才毀齔。閭里稱孝童。未十歲。就塾師學。學日進。金沙潭弘敏有人倫鑑。見之稱賞。期以遠到。己丑。中司馬試。壬辰。倡義募士。鏦殺賊數十餘。公之忘身殉國之志發軔於此云。公爲人白而長身。和易有量。所操者唯義與道。雖歷險阻艱難。意氣不少變。以終其身。是以。其沒也上自薦紳大夫。下至閭巷學究輩。無不嗟惜。又恨不得爲宰相於一時。膏澤生民也。公之德望。於此可見。於戲。公吾丈人行也。公視我。不以幼壯先後致異。不佞於癸未歲。奉使日域。意敍別於德公床下。反哭拜靈座下。愴何可已。公凡再娶。先夫人江華崔氏。府使巨源之四世孫。未乳早世。後夫人洪氏。南陽世族。士人天敍之女。生二男一女。曰克恒。文科禮曹正郞。贈都承旨。以文學著名。死丙子難。曰克恬。進士。前監役。女適黃德柔。司憲府監察。側室四男二女。克慨,克㤚,克憕,克𢜻。康鍒,生員柳之洙。克恒無嗣。庶出崇。克恬有二男四女。曰嶨。曰[후(后+山)] 。爲克恒後者。女李皬,李㥒,金學基。餘幼。𡵡。克㤚出。[흠(欽+山)]。克憕出。女幼。崈。克𢜻出。黃德柔三男三女。霦,𩃀,霆。正言洪汝河,幼學成錫夏。其壻也。餘幼。康鍒有二男二女。後學,晩學。女幼。洪汝河有子女而幼。銘曰。
懿哉全公。世孰與侶。於仁戴行。於義抱處。於夷必讓。於病必急。愼靜而至壽。強毅而容物。噫嘻斯人。其可復見於今日也哉。<끝>
용주유고 제20권 / 신도비(神道碑)
沙西先生文集附錄卷之一 / [神道碑銘]
▲대사헌 전식선생 신도비 ⓒ상주문화원
신도비는 1700년(숙종 26)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의 찬자인 조경(趙絅,1586~1669)의 문집 용주집(龍洲集) 권20에
'지사 사서 신도비명(知事沙西神道碑銘'이란 제목으로 비문이 수록되어있다. 신도비는 비신(碑身). 이수(螭首). 귀
부(龜趺).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수는 운용문(雲龍紋)의 새김이 뚜렸하고, 귀부도 귀갑문(龜甲紋)을 포함한 전
신의 새김이 섬세하게 조식(彫飾) 되어있는 반면, 비신의 전면과 후면의 하단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대사헌 전식선생 신도비각(2019년 비각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