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재집 제7권 / 갈명(碣銘)
호우 이공 묘지 갑진년(1664, 현종 5) / 湖憂李公墓誌 甲辰.
호우(湖憂) 이공(李公)의 장례가 끝났지만 묘지(墓誌)가 없었더니, 나를 보잘것없다고 여기지 않고 묘지를 맡기는 뜻이 매우 정성스러웠다. 나는 생각하건대, 선대부께서 교유하신 분들은 모두 일시의 명사들이었으며, 깊이 교유한 이는 수암(修巖) 유공(柳公)ㆍ국창(菊窓) 이공(李公)과 공(公)이었다. 수암은 서애(西厓) 선생의 아들이며, 공과 국창 선생은 서애 선생의 생질(甥姪)이다.
내가 관례를 올리기 전에 선대부께서 수암에게 예를 받도록 명하여서 장차 거행하려고 할 때 수암이 죽었다. 장성해서는 국창과 호우 공에게 수학하여 학문의 연원(淵源)에 대한 말을 들었다. 불행히도 근래에 선친의 친구 여러분들이 차례대로 세상을 떠나 내 마음이 위로되도록 믿은 이는 오로지 공뿐이었는데, 날마다 부지런히 모시지 못함이 한스러웠다.
신축년(1661, 현종2)에 유배지에서 돌아와서 자주 가서 문안을 드렸다. 공은 당시 나이 80세로 병으로 침상에서 지낸 지 몇 달이었다.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부축해 앉았는데, 정신은 맑아 혼미하지 않고 말씀이 간절하여 평소와 같았다. 아무 일 없이 지내는 것 같다가 공이 죽으니, 나는 부음을 듣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통곡하며 실성했다.
장례를 치를 때 병 때문에 직접 장지에 가보지 못했기에 지금 유사(遺事)를 편찬하여 무덤을 조성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나의 감회를 조금은 풀 수 있음은 여기에 달려 있을 것이로다.
공의 휘는 환(煥)이고, 자는 계명(季明)이며, 호우(湖憂)는 자호이다. 생각하건대, 이씨는 여흥(驪興)에 세거하면서 기우자(騎牛子) 문절공(文節公) 휘 행(行)에 이르러 더욱 소문난 집안이 되었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적(逖)을 낳았으며, 제학은 중추 부사(中樞副使) 자(孜)를 낳았는데, 그 부인은 양녕군(讓寧君)의 딸이다.
중추 부사는 중화 군수(中和郡守) 증석(曾碩)을 낳았는데 매계 선생(梅溪先生) 조태허(曹太虛)가 묘지명을 썼다. 군수는 사필(師弼)을 낳았고, 사필은 사도시 부정(司䆃寺副正) 태(迨)를 낳았는데, 등제(登第)하자마자 검열(檢閱)에 제수되었으며, 권간(權姦)의 배척을 받아 마침내 크게 떨치지 못하고 죽었다.
이 분이 공에게 증조부가 된다. 조(祖)의 휘는 원충(元忠)이며, 소고(嘯皐) 박 선생이 묘지명을 썼다. 고(考)의 휘는 윤수(潤壽)이며,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비(妣)는 유씨(柳氏)로 풍산부원군(豐山府院君)에 추증된 중영(仲郢)의 따님이다.
만력(萬曆) 임오년(1582, 선조15)에 공을 낳았는데, 천성이 영특하였으며 어려서 임진란을 만나 배움의 기회를 잃었으나, 정식으로 공부하기 전에 글을 읽을 줄 알았다. 처음 《사략(史略)》을 읽을 때 한신(韓信)의 일을 읊조리다가, “승상(丞相)이 추적해 되돌림은 승상의 속임수이니, 당일 서로 기변(奇變)이 없는 것만 못하네.”라는 시를 지으니, 일시에 전송(傳誦)되었다. 선생은 공을 매우 기량이 있다고 여기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전해주었다.
공은 배움에 힘써 경전에 침잠하여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기(志氣)가 고원하여 과거공부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병진년(1616, 광해8)에 사마시에 입격했지만 시사(時事)가 크게 잘못됨을 보고는 결국 벼슬에 나가려는 마음을 버렸다.
산수에서 마음껏 노닐며 문을 닫고 좌우에 도서(圖書)를 두고 손님을 받지 않았으며, 세상의 일을 대하지 않았다. 만년에 더욱 자신을 숨겼으나 명성은 더욱 알려져 중외(中外)의 학사 대부들이 모두 바라보며 중하게 여겼다. 처음에는 관직에 제수되어도 부임하지 않다가, 후에 목릉 참봉(穆陵參奉)에 제수되자 잠시 나갔다가 곧바로 돌아왔다.
공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고 초상과 제사를 삼갔다. 예법을 중시 했으며, 인척과 친족들에게 화목했으며, 환란 구제에 정성을 다하였다. 몸가짐과 남을 대함에는 늘 넘치고 모자람을 잘 헤아려 마을의 자제들이 모두 공경했다.
남을 접대할 때는 말이 신중했고 물러나서는 기쁘게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다. 무릇 사문(斯文)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번번이 공을 추대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하니, 공의 지시에 따라 사방에서 모였다. 무호(蕪湖)에 집을 지으니 낙동강 가에 호수와 산이 맑고 넓은 승경이 있어 그 곁 수백 걸음에 삼강서원(三江書院)을 건립해 포은(圃隱)ㆍ퇴계(退溪) 두 선생을 모시고 서애 선생을 같이 모시자고 앞장서 의견을 내었으며, 그달 초하루가 되면 엄숙함을 갖추어 갱장(羹墻)의 사모를 더하였다.
중씨(仲氏) 국창(菊窓) 및 숙씨(叔氏) 상사공(上舍公)과 강을 사이에 두고 왕래하며 정겹게 담소하니 흰머리가 서로 빛나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붕우와 사귐에는 신의(信義)에 유시유종(有始有終)이 있었다. 수암이 죽자 공은 매우 슬프게 곡했으며, 늘 선대부를 볼 때마다 번번이 서로 마주하며 눈물을 흘렸다. 수암이 죽은 지 12년 뒤에 선대부도 죽었다. 공은 매번 와서 매우 슬프게 곡했는데, 수암이 죽었을 때와 같이 곡했으니, 아, 감히 잊을 수 있었겠는가.
9년 뒤에 국창이 죽고, 또 8년이 지나 공도 죽으니, 10월 20일이었다. 이듬해 정월 아무 일에 용궁현(龍宮縣) 남쪽 구미촌(具美村) 선영(先塋)에 장례지냈다. 동래 정씨(東萊鄭氏)에게 장가들었으며, 자녀가 없었다. 계실(繼室)로 영가 권씨(永嘉權氏)를 들였으며, 딸 셋만 두고 아들이 없어 백형의 아들 장발(長發)로 후사를 삼았다.
맏딸은 이시항(李時恒)에게 시집가 선(瑄)을 낳았다. 차녀는 군수(郡守) 권단(權摶)에게 시집가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막내딸은 권탁(權𩆸)에게 시집갔다. 공은 몸가짐이 준엄하고 바르면서도 갈등을 빚거나 독단적인 일은 힘쓰지 않았다.
문장은 겉치레를 일삼지 않았지만 붓이 훨훨 날아 수천마디 말을 바로 이루었으며, 뜻은 넉넉하면서도 말은 간략하였다. 시를 더욱 잘 썼는데 맑고도 조용한 흥취가 있었다. 은거해 살면서 세상에 나가 시절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경륜이 익숙하고 기량이 있다고 여겨 공에게 귀의하였다.
비록 평소에 알지 못하는 이들도 문득 그가 한 번 세상에 시험되지 못함을 탄식했다. 이미 스스로 경박하게 세상에 합치되기를 구하지 않았으며, 또한 은둔으로 스스로를 표방하지 않았으니, 공의 학문은 서애 문하의 여운(餘韻)을 얻은 것이리라. 명(銘)은 다음과 같다.
겉으로 속여 높은 체 하지 않았고, 낮추어 받아들여지려고 하지도 않았도다.
가만히 전해준 공부에 열중하였고, 스스로 재능을 자랑하지 않았네.
후인들이여 공을 알고 싶다면, 어찌 여기서 징험하지 않으랴.
<끝>
[註解]
[주01] 선대부 : 홍호(洪鎬, 1586~1646)를 가리킨다.
[주02] 수암(修巖) 유공(柳公) : 호가 수암인 유진(柳袗, 1582~1635)을 가리킨다.
[주03] 국창(菊窓) 이공(李公) : 호가 국창인 이찬(李璨, 1582~1661)을 가리킨다.
[주04] 서애(西厓) : 호가 서애인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을 가리킨다.
[주05] 조태허(曹太虛) : 자가 태허인 조위(曹偉, 1454~1503)를 가리킨다.
[주06] 소고(嘯皐) 박 선생 : 호가 소고인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을 가리킨다.
[주07] 승상(丞相)이 …… 못하네 : 여기서 승상은 소하(蕭何)를 가리킨다. 유방(劉邦)이 한신을 대장으로 대우하지 않자, 한신은 서촉(西
蜀)으로 들어가는 험로에서 떠나버렸다. 그러자 소하는 한신을 달래느라 대오에서 한참이나 뒤쳐져, 겨우 설득해 데려온 일이 있
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08] 삼강서원(三江書院) : 1643년(인조21) 경상북도 예천군 삼강리에 건립된 서원으로, 정몽주(鄭夢周)ㆍ이황(李滉)ㆍ유성룡(柳成
龍)을 배향하였다. 현재는 소실되고 터만 남아 있다.
[주09] 갱장(羹墻)의 사모 : 사람을 앙모(仰慕)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권93 〈이고전(李固傳)〉에 “옛날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이나 앙모하면서 앉아 있을 때에는 요 임금이 담장〔墻〕 곁에 서 있는 듯하고 먹을 때에는 국물〔羹〕 속
에 비치는 듯 여겼었다.”라는 말이 있다.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전재동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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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湖憂李公墓誌[甲辰]
湖憂李公。旣葬而闕誌。不以走無似。見屬意甚勤。余唯先大夫論交。盡一時勝流。而其深契者。有修巖柳公,菊窓李公及公。修巖者。西厓先生胤子。而公及菊窓先生。甥也。余未勝冠。先大夫詔受禮于修巖。將行。修巖卒。及長。執贄于菊窓及公。得聞淵源之論。不幸邇來。先執諸公。相繼淪謝。所恃以慰此心者。獨公在爾。恨不得日從容陪侍也。歲辛丑。歸自謫。亟往省之 。公時年八十。病在牀累月。聞吾至。扶擁而坐。精爽不亂。談說亹亹。猶平日居。無何。公卒。余聞之。不覺哭失聲。其葬也 。病不克臨穴。今得撰次遺事。以相墓隧之役。則以少紓余懷者。於是乎在。公諱煥。字季明。湖憂。其自號也。惟李氏世居驪興。至騎牛子文節公諱行。益爲聞家。生藝文提學曰逖。提學生中樞副使曰孜。夫人讓寧君女也。中樞生中和郡守曰曾碩。梅溪先生曹大虛誌其墓。郡守生師弼。師弼生司䆃寺副正迨。登第卽除檢閱。擠於權姦。竟不振而歿。於公爲曾祖。祖諱元忠。嘯皐朴先生誌其墓。考諱潤壽。皆隱德不仕。妣柳氏。贈豐山府院君仲郢之女。以萬曆壬午生公。天資穎異。少遭亂失學。未授書 。先解屬文。始讀史略。詠韓信事。有丞相追還丞相紿。不如當日莫相奇之句。一時傳誦。先生深器公。授以爲學之方。公勵志力學。沈潛經傳。至忘寢食。然志氣高遠。不屑擧子業。及中丙辰司馬。見時事大謬。遂絶意進取。自放於山水間。杜門却掃 。左右圖史。不與塵事接。晩益韜晦。而聲聞彌彰。中外學士大夫。皆雅重之。始授官不就。後除穆陵參奉。纔赴旋歸。公性孝友。謹喪祭。重禮法。睦於姻族。恤患殫誠。其持己接人。動有幅尺。鄕人子弟。皆嚴憚之。及其延接。辭氣款洽。退而靡不悅服。凡有斯文重事。輒推公主其事。指顧而集。卜築蕪湖洛江上。有湖山淸曠之勝。卽其旁數百擧武。倡議建三江書院。祠圃隱 ,退陶兩先生。而配以西厓先生。月朔瞻肅。以寓羹墻之慕。與仲氏菊窓及叔上舍公。隔江往來。談笑怡愉。素髮交映。鄕里艶之。與朋友交。信義有終始。修巖卒。公哭甚哀。每見先大夫。輒相對泫。然後修巖卒十二年。先大夫捐館。公每來哭甚悲。如哭修巖。嗚呼。其敢忘諸。後九年。菊窓卒。又八年而公卒十月二十日也。用明年正月日。葬于龍宮治南具美村先麓。娶東萊鄭氏。有子女。不育。繼室以永嘉權氏。有三女無子。以伯兄子長發爲後。女長適李時恒。子瑄。次適郡守權摶。有子女。皆幼 。次適權𩆸。公制行峻整。而不務爲崖異斬截。爲文章不事畦逕。下筆翩翩。數千言立就。意贍詞約。尤工詩。有蕭散之趣。屛居隱約 。不出而應時須。然人皆以經鍊器局歸公。雖其素不識者。輒歎其不一試於用也。旣不自輕以求合於世。而亦不肯以隱遁自標揭焉。公之學。其有得於厓門之餘韻歟。銘曰。
不矯以亢。不卑以承也。旣膺密付。不自售其能也。後之人求觀乎公。盍於是徵也。<끝>
ⓒ한국문집총간 |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