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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 7. 16. 03:33
■ 23世 이석손(李碩孫)
[세계] 경주이씨 익재공 후 소경공파(少卿公派)
[생졸년] 1397(태조 6)~1481(성종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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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경주(慶州). 초명(初名)은 중손(仲孫), 자(字)는 사언(士彦), 호(號)는 돈암(遯菴)으로, 요(瑤)의 아들이다.
배위(配位)는 충순위대호군(忠順衛大護軍) 돈재(遯齋) 박연생(朴衍生)의 딸 태인박씨(泰仁朴氏)이다.
그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문인(門人)으로, 벼슬은 세종조(世宗朝)에, 세자좌빈객(世子佐賓客)을 거쳐 사직(司直-正五品)에 이르렀다. 단종(端宗)의 숙부(叔父)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簒奪)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장인(丈人) 박연생(朴衍生)과 함께 담양(潭陽)의 월산(月山)에 은거(隱居)하였으므로, 포옹(逋翁)이라고 불렸다.
중종조(中宗朝)에 은일(隱逸)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고, 숙종조(肅宗朝)에 담양(潭陽)의 월산사(月山祠)에 배향(配享) 되었다. 저서(著書)로 《경해록(經解錄)》 두 권과 《망세음(忘世音)》 한 권이 있다.
[참고문헌]
◇韓國人名大辭典 ◇朝鮮人名辭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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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암(遯菴) 후손의 집성촌(集姓村)
돈암(遯菴) 이석손(李碩孫) 선생이 전남 담양(全南 潭陽)의 솔대봉 아래인 월산리(月山里)에 낙향(落鄕)한 이후 557여년이 지난 지금 전라남도(全羅南道) 담양군(潭陽郡) 월산면(月山面)의 월산리(月山里), 동산리(東山里), 월평리(月平里) 등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전남 장흥(全南 長興 : 27世 계민(繼民)의 3형제 중 2子)과 경남 거제(慶南 巨濟 : 29世 점(坫)의 5형제 중 4子), 전북의 부안군(扶安郡) 위도면(蝟島面 : 31世 원거(元擧), 4형제 중 막내) 등, 전국 각지에 약 1,500여호가 된다고 한다.
2, 제향소(祭享所)
●東鶴寺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忠淸南道 公州市 反浦面 鶴峰里) 789번지에 소재하는 이 사찰(寺刹)은 계룡산 상봉(鷄龍山 上峯)의 북동쪽 골짜기에 위치한 절로서,「동계사(東鷄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724년(성덕왕 23) 상원(上願)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懷義)가 절을 창건하여 청량사(淸凉寺)라 하였고, 920년(태조 3) 도선(道詵)이 중창한 뒤 태조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유거달(柳車達)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기 위해 동학사(東鶴祠)를 지었다. 그리고 사찰을 확장한 뒤 절 이름도「동학사(東鶴寺)」로 바꾸었다.
1394년(태조 3) 고려의 유신(遺臣) 길재(吉再)가 동학사의 승려 운선(雲禪)과 함께 단(壇)을 쌓아서 고려 태조(太祖)를 비롯한 충정왕(忠定王)· 공민왕(恭愍王)의 초혼제와 정몽주(鄭夢周 : 1337년~1392)의 제사를 지냈다.
1399년(정종 1) 고려 유신 유방택(柳芳澤)이 이 절에 와서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길재(吉再)등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다음해 이정한(李貞翰)이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와서 단 이름을 삼은단(三隱壇)이라 하고, 또 전각을 지어 삼은각(三隱閣)이라 하였다.
1457년(세조 3) 김시습(金時習)이 조상치(曺尙治)· 이축(李蓄)· 조려(趙旅) 등과 더불어 삼은단 옆에 단을 쌓아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어서 단종의 제단을 증설하였다.
다음 해에 세조(世祖)가 동학사에 와서 제단을 살핀 뒤 단종(端宗)을 비롯하여 정순왕후(定順王后)· 안평대군(安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정분(鄭奔) 등과 사육신(死六臣), 그리고 세조찬위로 원통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서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고 인신(印信 : 도장)과 토지 등을 하사하였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한 다음 승려와 유생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으로 이 절과 초혼각이 모두 소실되었고,1785년(정조 9) 정후겸(鄭厚謙)이 위토를 팔아버리자 제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814년(순조 14) 월인(月印)이 예조에 상소하여 12차례의 소송 끝에 잃었던 토지를 되찾았았다.
옛 원당 터에 실상암을 짓고 절을 중건하여 절 이름을 개칭하되「진인출어동방(眞人出於東方)」이라 하여「東」자를 따고「사판국청학귀소형(寺版局靑鶴歸巢形)」이라 하여 학(鶴) 자를 따서 동학사라 명명했다는 설이 있으며, 10여 칸의 사옥과 혼록봉장각(魂錄奉藏閣)을 세웠다.
1827년 홍희익(洪羲翼)이 인신을 봉안하는 집을 따로 지었으며, 충청좌도어사 유석(柳奭)이 300냥을 내고 정하영(鄭河永)이 제답(祭畓)을 시주하여 다시 제사를 베풀었다.
1857년(철종 8)에는 우운 아준 스님이 동학사에서 지장계를 주관하였고, 이어서 1864년 갑자(고종 원년) 봄에 금강산에 있던 만화 보선 스님이 이곳으로 와서 제자인 우운 아준 호봉스님 등과 함께 오래된 건물을 전부 헐어내고 전각 40칸과 초혼각 2칸을 새로 지었는데, 초혼각(招魂閣)은 1904년(광무 8) 숙모전(崇慕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만화 스님의 제자 경허성우(1849-1912)스님이 1871년(고종 8)에 이곳 동학사에서 강의를 열었고, 1879년에는 이곳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한국의 선풍을 드날렸다.만화화상이 중흥주라면 만우상경(萬愚常經, 1855~1924년)은 한말과 일제 초의 격심한 사회혼란과 불안속에서 동학사를 잘 지켜나간 수성주라 할 수 있다.
1889년 주지직을 승계받은 만우스님은 1898년 대웅전에 탱화 4폭을 안치하여 봉안하고, 10년 뒤(1909년)에 기와중수 불사를 하였다. 근대에서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절의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다.
6·25전쟁 때 옛 건물이 모두 소실되자 1960년 이후에 중건(重建)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大雄殿)· 무량수각(無量壽閣)· 대방· 삼은각·(三隱閣). 숙모전(崇慕殿)· 범종각(梵鐘閣)· 동학사(東鶴寺)· 동학강원(東鶴講院) 등이 있다.
이 중 동학강원은 운문사(雲門寺)의 강원(講院)과 함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比丘尼) 수련도량(修鍊道場으로 손꼽히고 있다. 산내암자로는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석봉암(石鳳庵)· 천장암(天藏庵)· 마쇄암· 보현암· 실상암· 옥천암· 극락암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관음암· 길상암· 문수암· 미타암· 귀명암· 상원암 등이 있다.
동학사에는 다른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이 있는 건축물이 있다. 동학사 경내에 들어서려면 사찰과는 어울리지 않는 30자 이상의 두 기둥이 우뚝한 홍삼문을 볼수 있는데, 이것은 동학사가 사원(寺院)이면 서도 경내에 유신(儒臣의 사당(祠堂)인 동계사, 그리고 삼은각과 숙모전이 있는 점들과 상호 연관된 인연들이 어우러져 세워진 것이다.
1) 동계사
신라가 멸망한 후 신라의 遺臣이자 高麗의 開國功臣인 柳車達이 高麗太祖 19년(丙申年 서기 936년)에 太祖의 願堂으로 된 동학사에 와서 遊觀하던 次에 山中에 모셔진 신라 始祖王 朴赫居世 및 朴堤上의 影幀을 보고 朴公의 忠烈을 思慕하여 東鷄祠를 創建하고 社公을 招魂하여 始祖王과 함께 제사지내 오다가 朝鮮 英宗 戊申(서기 1728)에 申天永이 衡火하여 全燒된 후 제사 지내던 것이 폐해졌다가 1956년(丙申) 9월에 중건되었다.
2) 삼은각
근세조선 태조 3년(갑술년-서기 1394)에 조선조 이성계의 집권에 등을 돌리고 방랑하던 고려말의 학자 야은 길재는 이곳 동학사에 와서 이성계에 저항하다 죽은 충신 포은 정몽주의 넋을 위로했다. 방황하는 충신의 넋을 불러 박제상을 모신 동계사 곁에 설단하여 포은 정몽주를 위해 초혼제를 지냈던 것이 당시 삼엄했던 조선조 집권 체제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칭은 제2대 정종원년(1399) 고려 유신인 금헌 유방택이 포은의 신당 옆에 목은 이색을 초혼하여 포은과 함께 제사지내고 그후에 야은 길재등을 함께 모셔 삼은각을 창설하였다고 한다.
초혼단 건물은 그 이듬해(조선조 제2대 정종2년) 1400년에 지었으나, 제7대 세조 때에 와서야 정식 각을 짓게 되었고, 그 후 금알 유방택·도은 이숭인·죽헌 나계종을 추가 배향, 현재 6위를 향배하고 있다.
3) 숙모전(肅慕殿)
이곳은 매월당 김시습의 충절과 애통함이 깃들인 곳이다.
매월당은 당대걸승으로서 생육신의 한 분이다. 제7대 세조 원년 거지꼴의 한 승려가 삼은각에 엎드려 통곡을 하고 있었는데 이 거지승려 매월당은 제6대 단종이 숙부(세조)에게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후 여기에 와 그들의 혼백을 붙들고 통곡을 했던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조선 제7대 세조2년(1456년) 6월에 사육신의 비극이 일어나고 사육신이 피화를 당하자 서울 노량나루언덕에 널려있는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 강언덕에 암매장하고 다음해 정축에 동학사에 와서 삼은각 곁에 단을 설하고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이어서 단종의 제단을 쌓아 숙모전을 세웠다.
그로부터 세조에 반대하는 조상치(당시 부제학)를 비롯한 선비들이 몰려들어 단종의 어포를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며 초혼제를 지냈다. 매월당은 또 방랑 길에 올랐으나 죽기 전까지 해마다 제사를 지낼 때 어김없이 찾았다.
대왕 꿈에 단종왕모가 나타나 애원하기를 그대 이미 왕위를 차지하였으니 어린 단종의 생명을 보살펴 달라고 삼일을 거듭 현몽하였으나 세조대왕이 영영 거절하므로 최후에는 더럽다고 용안을 향해 침을 뱉었으니, 용안을 돌이키자 뱉은 침은 등에 떨어졌는데 깨어난 후 당처가 가려움으로 불치병 만신창이라는 병이 발생하였다.
다음해 세조 대왕은 옥체에 발생한 만신창 병이 더욱 심하여 백약이 무효라 명승사원에 가서 불보살의 가피로 고쳐볼까 하고 빌던 중 동학사에 다음해 세조 대왕은 옥체에 발생한 만신창 병이 더욱 심하여 백약이 무효라 명승사원에 가서 불보살의 가피로 고쳐볼까 하고 동학사에 불공을 드렸다.다.
당시 동학사의 삼은각 옆에 품자의 단을 보고 이것은 무슨 단이냐 물은 즉 단종 승하 후 매월당 김시습이 내사하여 초혼제를 지냈다 하니 세조대왕이 한 때의 생각을 뉘우쳐 단종의 원한을 풀어주면 몸의 병이 나을까 하여 1457년(세조 3)에 단종을 비롯하여 정순왕후·안평대군·금성대군·김종서·황보인·정분 등과, 세조의 왕위 찬탈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사육신 및 그 밖의 280여위의 병자 원적과 추가원적(명박)을 만들어 비단에 써서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을 짓도록 했다.
세조가 서서 울었던 바위를「울 바위」걸음을 자작거렸다고 해서「자작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지금도 동학사 입구에 남아있다. 그 후 제21대 1728년(영조 4)에 신천영의 난으로 소실되어 혼기를 잃어 삼상육신 등 58위 만을 봉안하였던 것을 1869년(고종 6)에 만화화상이 건물 3간을 중건하였다.
1883년(고종 20) 충청좌도어사(忠淸左道御使) 유석(柳奭)이 동서무를 건립하여 군신을 나누어 봉사하였고 1904년(고종 41)에 숙모전으로 이름을 고쳐 사액(賜額)하였다. 그 후 충신 26위를 추가해 현재 89위만 봉안(奉安)되어 있다.
돈암(遯菴) 이석손(李碩孫) 선생은 이곳 숙모전(肅慕殿) 동무(東廡)에 41번째로 배향(配享)되 있다.
향사일(享祀日)은 매년 음력 10월 24일 단종의 승하일이다
4) 월산사(月山祠)
전남 담양군 월산면 월산리 711번지에 소재하는 이곳은 경주이씨(慶州李氏) 23세(世)인 돈암(遯菴) 이석손(李碩孫) 선생이 1453년(단종 1) 솔대봉 아래인 월산리(月山里)에 낙향(落鄕)했다.
그의 후손(後孫)들이 선조(先祖)의 위업(偉業)을 받들고, 학문수업(學文修業)의 도장(道場)으로, 삼고자 1788년(정조 12) 이곳에 월산사(月山祀)를 창건(創建)하여, 고려(高麗)의 문신(文臣)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 1287~1367) 선생을 배향(配享)하였다.
그 후 1826년(순조 26) 전라도(全羅道) 유림(儒林) 59명의 상소(上疏)로, 담양부사(潭陽府使) 이관식(李寬植 : 1384~1436)과 돈암 이석손(遯菴李碩孫),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 1454~1492)). 지지당 남포(知止堂 南褒 : 1459~1540), 돈암공(遯菴公)의 손자(孫子) 지정 이윤공(池亭 李允恭 : 1489~1571) 선생을 차례로 종향(從享)하고, 1840년(헌종 6)에 야은 전록생(埜隱 田祿生)을 추배(追配) 하였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 1820~1898)의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 에 의(依)하여, 훼철(毁撤) 되었다가 1922년 재건(再建)하여, 익재공(益齋公), 돈암공(遯菴公), 지정공(池亭공)을 복설(復設)하고, 1931년 충북 진천(忠北 鎭川)에서 익재공(益齋公)의 영정(影幀) 이모본을 인수봉안(引受奉安) 하였고, 1925년 종앙재(宗仰齋)를 중건(重建)하여, 서원(書院)으로도 활용(活用)되 왔다.
이 건축물의 구조(構造)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월산사(月山祠) 앞에는 1984년에 세워진 문충공 익재선생 월산사 비(文忠公 益齋先生 月山祠 碑)와 1985년에 세워진 문명공 야은 전록생(文明公 野隱 田祿生)의 비(碑)가 있으며, 종앙재(宗仰齋(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가 있다.
월산사(月山祠)는 내외부에 단청을 겸한 벽화로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데, 내부에는 1931년 충북 진천에서 모셔와 배향한 이모본인 익제 이제현 초상을 비롯하여 소나무, 바위 등과 장혀에 그려진 두 마리의 용틀임이 인상적이다.
외부에는 정면부의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를 비롯하여 학, 사슴, 호랑이, 토끼, 매화, 기러기, 꿩, 잉어 등 우리나라 전통문양 상징물을 다양하게 그려놓았다. 제향일(祭享日)은 춘향(春享)은 매년 음력 3월 15일 정일에 유림(儒林)에서 봉사(奉祀)하고, 추향(秋享)은 매년 음력 9월 15일 정일에 후손(後孫)들이 봉사(奉祀)한다.
5) 도산재
전남 담양군 월산면 월평리 872번지에 소재하는 도산재는돈암 이석손(遯菴 李碩孫) 선생께서 1453년(단종 1) 단종(端宗)의 숙부(叔父)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한 계유정란(癸酉靖難)이 일어나자, 이를 개탄(慨歎)하고, 이곳 월산리(月山里)에 낙향(落鄕)해서 자연을 벗삼아 음영수작(吟詠酬酌)하며, 청유은거(淸遊隱居)하던 정자(亭子)이다.
그 후 후손들이 이곳을 조상의 숭모정신((崇慕精神)과 학문(學文)을 도야(陶冶)하는 종회각((宗會閣)으로 사용하였으나, 소실되고 없던것을 2009년 10월에 李復雨를 비롯한 후손들이 재건(再建)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