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13-14절, 13장 22-30절을 정독하신 후에 본 설명을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구원받은 수(교회원)는 얼마나 되는가?
교회는 예수님께서 구주이심을 믿는 사람들이 함께 연합하여 신앙공동체를 이룸으로써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된 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구주 예수님의 보혈에 의해 깨끗함을 입은 사람들이며, 이들은 셀 수 없는 큰 무리입니다(계 7:9, 19:7). 이것은 창세 이후로 세상 끝 날까지 구원 언약의 씨의 하늘의 총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자손 언약'에서 알려 주신대로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창성(昌盛)한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누구나 쉽게 교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에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복음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도록 빛으로 왔지만, 세상은 전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영접하지 않습니다. 자극적인 표현을 쓴다면 적극적으로 대적하며 거부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타락하여 본성이 부패한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육체의 본능을 따라서 자의적 숭배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불신자요, 이방 종교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교회는 보편적이요 우주적 교회로서 비가시적인데, 이 교회가 지상에서는 가시적인 교회로 그 형태를 드러내고서 이 세상에서 성도들을 모으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데, 어떤 교회에서는 그런 교회의 정체성이 명확하게 잘 나타나는가 하면 어떤 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한 모습을 띠기도 합니다. 그것은 보편적이요 우주적인 비가시적인 교회의 일원인 개별 교회들은 복음의 도리가 가르쳐지고 받아들여지는 여하에 따라 순수해지기도 하고 덜 순수해지기도 하며, 또 성례의 집행과 공 예배의 실행 여하에 따라서도 좀 더 순수해지기도 하며 그렇지 않게도 되기 때문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5장 4항). 가령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구성하고 주관하는 때에, 그것은 분명히 참 교회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연합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도리가 가르쳐지고 받아들여지는 데에 있어서 속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견해를 같이할지라도 선택이나 견인 교리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른 경우가 있으며, 성례와 공 예배를 집행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도 그 입장이 현저히 다른 경우가 있어서, 그에 따라서 다소 불순하거나 아주 불순한 교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보다 순전한 교회를 이루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때는 교회였던 자였거나 또는 어떤 조직체들이 너무나 타락해서 전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모임들이 되어 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5장 5항). 이럴 경우 그 교회는 교회의 일원이 되는 회원권, 그러니까 교회원의 가입이 취소됩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교회의 현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질 만큼 교회는 극도로 타락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의 현상은 본문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진정 구원받아 천국 문을 들어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이냐는 점에 있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문은 좁아 그리로 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누구든지 쉽게 교회원으로 가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누구든지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의 조직체에 들어와 있으면서 그리스도인의 흉내를 내며 그 행세를 할지라도 그것으로 그들이 교회원으로 가입되는게 아닙니다. 그들은 교회가 아닌 사단의 공회에 불과하며, 그런 존재로 있는 한, 그들은 결코 교회원으로 가입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천국 문이 닫혀 있습니다. 그래서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십시오"하고 애원할지라도 주님은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니 너희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실상 교회는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비록 이 지상에서 교회의 모습을 띠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반드시 교회의 속성을 점검 받게 됩니다. 교회로서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지, 교회의 정체가 참된지 아니면 거짓인지를 확인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원으로의 가입을 너무도 쉽고 안일하게 생각해 온 경향이 있습니다. 그저 사람을 이끌어서 교회 예배당에 나오게만 하면 그들이 교회원으로 가입되는 것으로 알아왔습니다. 그들에게 학습과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에 따른 당연한 인준 절차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과연 그런 것으로 학습과 세례가 행해지는 것이겠습니까?
하늘의 온전하고도 영원한 참된 교회를 구성할 구원받은 수는 이 지상에서 도대체 얼마나 될 것이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과연 얼마나 되는 수를 우리가 볼 수 있겠습니까? 좁은 문에 대한 또 한 곳인 마태복음 7장 13-14을 보면, 천국은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 온 땅에 창성해 있을 무리, 그러나 이들은 정말 좁은 길을 걸어서 좁은 문을 통과할 적은 수로서 이 땅에서는 보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성경의 전체에 흐르는 구원받은 교회원의 수는 '남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몇이나 볼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교회의 책임이 막중하고도 큽니다. 교회는 불순해져 가는 것을 막으며, 극단적으로는 사단의 공회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나 함부로 쉽게 교회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과연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 교회가 될 수 있는 자들인지에 대한 점검과 그 확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고백을 같이 해야 하며, 그래서 신앙의 동질성을 온 교회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원으로 가입하여 함께 연합을 이루어 한 몸의 생명으로서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교회의 일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일치
교회의 일치는 영적이며 교리적으로 하나 되는 데서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생각을 같이 가지고 마음을 같이 나눌 만한 관계를 가질 수 없고서야 같이 교회를 이룰 수 있는가? 또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믿는 복음 진리의 내용이 같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된 교회의 모습을 지닐 수 있습니까? 몸은 같이 있어도 이미 마음이 서로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믿는 바가 다르다고 하면 교회의 일치를 가져올 수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나와 신비적 연합을 갖는 것이며, 또한 다른 믿음의 형제와도 신비적 연합을 갖음으로써 그 모습을 갖춰 가는 것이기에 믿는 자들간의 일치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그리고 교리에 근거하여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영적으로 일치가 있어야 하는 것은 교회원은 다 한 성령 안에서 난 믿음의 한 형제들로서 하나님 한 분을 모시고 섬기며 그분의 거룩한 뜻을 이루며 사는 신앙공동체의 일체성이 그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서 교회원은 성령님의 생각을 좇아 그분의 거룩한 일을 도모해 가는 면에서 하나 된 모습을 띠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원 하나 하나가 모두 성령님을 좇아서 산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들 각자의 생각과 그 주장으로 제 각각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교회의 불일치에서는 신앙공동체의 일체성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참 교회원이 아닌 거짓 교회원이 가입되어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교회의 일치를 볼 수 없습니다. 사단의 고등 전술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거짓 교회원으로 위장시켜 교회에 가입하게 한 뒤에는 교회의 연합을 깨뜨려 분리시키는 활동을 하게 합니다. 그것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서로 다른 생각과 주장을 하게 함으로써 교회의 하나되는 것을 막고 점차 분열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로부터 나누이게 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며 배교하게 합니다.
또한 교리적으로 일치가 있어야 하는 것은 교회원의 가입은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신앙고백을 갖고 신조를 따라 일치된 신앙과 사상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서 허락한 데서 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분열의 중요한 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리의 불일치입니다. 가령 기독교의 분파는 교리의 불일치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교파는 형식상으로는 그들이 믿는 도리의 주창에 의해서 생겨나지만, 실제는 다른 교파와는 믿는 도리가 다르기 때문에 연합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독립을 고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용어 하나 가지고서도 목숨 거는 것이 지상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례와 침례, 구원의 절대 주권적 은혜와 구원의 보편적 은혜, 제한적 구원과 만인 구원 등. 그러면서도 교회의 활동에는 서로가 어깨동무를 하고 사이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교파와 지역 교회 간의 불일치는 그만큼 교회가 순전하지 못하며, 극단적으로는 사단의 공회의 모습으로까지 전락하는 상태를 가져옵니다. 이는 교회원 간에도 그렇습니다. 같은 교파, 한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성도 간에 갖고 있는 믿음의 지식과 그 이해 차이로 인해서 하나 된 몸의 모습을 띠고 있지 못하고 갈등과 분열 속에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이는 필연적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공존하지 못하고 대립되어 있으면서 투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진리와 비진리 간의 싸움, 복음과 다른 복음과의 싸움의 차원이지, 교회는 교리적으로 일치되어 가야 하는 존재임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온전해져 갈 수 있도록 성직과 성경과 성례전을 주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교회원 스스로 진리를 깨우침을 받고 자라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 연약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람의 본래 상태입니다. 그러기에 목사의 가르침을 받고 그 진리를 깨달은 신앙 위에서 같은 지식과 같은 믿음의 모습을 지니도록 성도는 함께 돕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 동일한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영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일치된 모습을 지니며 나갈 때 교회는 불순해져 가는 것을 막고, 타락하여 사단의 공회가 되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교회의 순전함을 보전하여 왔습니까? 정말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발휘하면서 지켜 온 것이 아닙니까? 영적으로, 또한 교리적으로 하나 되어 가는 일이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 길을 걸으며 좁은 문을 통과하기를 힘쓰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 그 나라를 소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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