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절약은 우리 모두의 생활
서울 강남구 반포 1동 부녀회장 최 영 례
알뜰한 살림꾼
아파트촌은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곳이지만 이웃과는 단절되어 있고 핵가족이 많이 살고 있어 노인들은 더욱 외로움을 느끼는 곳으로 생활필수품의 가격은 다른 시장에 비해 턱없이 비싸지만 별 항의 없이 그대로 받아드리고만 살아가는 곳이다. 그러나 반포 1동 주공아파트 반포단지 부녀회장인 최 영례 여사는 이러한 아파트단지의 병폐적인 요인을 앞장서서 하나하나 고쳐나간 장본인이다. 최 여사는 평범한 공무원 아내로 적은 봉급을 가지고 10여 년간의 결혼생활을 꾸려왔고 한 푼이라도 아껴서 최 여사가 정착할 마땅한 집을 마련하는데 온 식구가 힘을 모았고 그런 노력 끝에 77년 9월 드디어 대한주택공사가 무주택국민을 위하여 건설한 반포 3단지 16평 아파트에 당첨되었고 그 이듬해 8월 무덥고 긴 장마철에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안고 이사를 했다.
10여 년간의 꿈을 달성하여 이사를 간 최 여사 앞에는 기쁨에 앞서 어려운 일들이 너무나 많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지 내 초등학교 조기건설, 시내버스 정류장 설치, 고속도로 진입로 공사 중지 등등 주민들의 요구사항은 집단 소요사태와 허망한 유언비어의 난무를 유발하여 아파트 주민들은 갈팡질팡했으며 게다가 배추 한포기 2000원이라는 치솟는 물가에 대한 공포, 아파트 강도사건 등등 주변에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최 여사는 이를 방관하고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하나 둘 주민들에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황하고 한숨만 쉬며 입방아만 찧고 있을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문제점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도록 힘을 합칩시다.」라고 의견을 내었고 그래서 54개 동의 동 대표를 선출하여 임원 15명과 12부의 전담기구로 구성된 부녀회를 발족하였으며 처음 주동이 된 최 영례 여사가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알뜰하고 봉사정신이 강한 최 여사가 자신의 가정과 단지주민을 위해서, 나아가 사회복지를 위하여 절약운동을 전개하고 인보운동을 전개하고 충, 효, 예의 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알뜰 장사 시작하는 부녀회
가장 시급하고 필요한 것은 치솟는 물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녀회 슈퍼에서의 독점 상행위에 대한 가격견제를 위해 생활필수품을 판매하고 안 Tm는 물건을 바꾸어 쓰는 알뜰구판장을 개설하였으며, 수협중앙회에 의뢰하여 이동수협 판매차를 최초로 아파트 단지에 주 2회 유치하는데 성공하므로 서 시간과 경비를 절감하고 시장시세의 30~40% 정도의 저렴한 가격으로 싱싱한 생선을 살 수 있었다. 또한 채소류는 새벽 통금해제와 함께 용산시장을 샅샅이 뒤져 값싸고 품질 좋은 것을 골라 4.5톤 타이탄 트럭으로 싣고 와서 구입가격 그대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몰려오고 잠깐 사이에 물건은 동이 나 버렸고 「횟수를 거듭하면서 김, 미역, 멸치 등 서민 생활의 식단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부식물로 취급품목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으며」연말 연시에는 단지 내에 방앗간이 없어서 주민들이 영동시장까지 가서 장시간 기다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가래떡을 뽑아 팔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횟수를 거듭하면서 주민의 찬동을 얻었고 특히 아파트 단지에서 시작된 도시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주택공사의 끊임없는 지원을 얻게 되었고 관리소 측의 조언, 그리고 주민들의 힘찬 박수와 격려에 힘입어 물량의 확대와 종류가 다양해졌으며 운영과정에서 터득한 구판사업의 개선점과 문제점을 하나하나 시정해 나갔다. 중간상인의 횡포로 산지에서는 농민의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고 도회지에서는 생산가격의 몇 배의 값으로 거래되는 모순점을 해결하고 생산자와 소비자 양측의 보호를 위하여 산지구입을 결심하고, 충청북도 충주 탄금대 채소 작목반이란 농민들로 구성된 단체와 농민들이 땀 흘려 가꾼 이 채소를 헐값으로 넘어가지 않고 소비자인 이들 3단지 부녀회와 연결되어 배가 넘는 중간 마진을 없앨 계획을 세웠다.
우선 대상 지역을 선정하고 농민을 만났으며 채소류의 유통과정을 소상히 다시 확인한 다음 현지실정 파악을 위해 8명이 충주 탄금대에 도착하여 현지 상황을 알았다. 그 때 그 넓은 벌판을 둘러보는데 서울에서 값이 금처럼 비싸서 금치라고 불렸던 배추, 파, 상추 등의 야채가 일손이 모자라 그대로 방치되어 며칠만 놓아두면 그 비싼 채소가 퇴비로 버려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농민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고 소비자도 이익 되게 하기로 결심하고 생산자와 소비자와의 직접거래를 함으로써 중간 상인에게 돌아가는 50%의 이익을 각각 25%를 나누어 갖게 되는 산지구입을 시작하였다. 품질이 양호할 뿐만 아니라 묶음 자체에서 오는 물량도 많아 물건은 날개 돋친 듯 팔렸으며 피땀 흘려 농사지은 농민에게는 훨씬 많은 이익을 주게 되었고 부녀회에서는 보람을 느끼면서 이보다 더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많은 일을 해나가자고 다짐하였다.
호사다마
상가에서는 부녀회활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비싸게 팔던 채소를 원가이하로 판매하기 시작하여 부녀회 판매가격이 비싸다는 인식을 주기에 혈안이 되었고 일부 잡상인들은 자기물건 안 팔아 준다고 주야로 폭언과 욕설로 부녀회를 괴롭히고 일부 주민들마저 부녀회가 장사를 주업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어 나누어 갖는다는 등 중상과 모략이 끊일 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생기는 것 없이 어느 미친 사람이 저 고생을 하겠느냐, “부녀회 임원들은 관리비도 면제되고 주택공사에서 아파트도 한 채씩 준다.”더라는 등 심지어 주민 중에서 도매시장에 점포와 농장을 갖고 있다며 자기물건을 팔아줄 것을 강력히 요구해와 시중 가격과 비교해 보고 높아서 거절하니 부녀회를 규탄하고 해체를 요구하며 집단 성토를 계획한 일도 있었다. 너무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이 마음들을 어떻게 선도해야 할 것인가? 하고 부녀회는 암담하기만 했다. 그러나 2년여 동안 3일에 한번씩 150여회에 걸쳐 직매가격으로는 5천여만 원, 시중가격으로는 8천여만 원의 판매실적을 올리면서 부녀회원은 거의 쉬는 날이 없었고, 이익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고 굽힐 줄 모르는 부녀회의 노력에 차츰 변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못 살게 굴던 잡상인들도 가격이나 품질 면에서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지 오히려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주민들의 인식과 슈퍼마켓의 가격도 상당히 떨어졌으며 주민에 대한 서비스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산지 구입 후 저렴한 가격과 묶음이 크고 싱싱한 야채를 여러 번 구입한 주부들은 부녀회가 결코 이익을 추구하고 개인을 위한 활동이 아니며 순수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이해하게 되었고 그 후 서로 부녀회원이 되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어 하게 되었다.
새 마음의 따뜻한 사랑을 싣고
차츰 단지가 안정되고 부녀회가 주민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새로운 일을 계획하여 부녀회의 소득사업으로 단지 내 폐품을 수집하고 연초 소매상을 운영한 결과 78년 첫해에 폐품에서 30만원과 연초판매수익금 40만원 그리고 공동구판에서 얻어진 12만원과 합계 82만원의 자금이 마련되었으며 이 자금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자 여러 번 논의하고 생각한 끝에 불우한 이웃돕기에 보태어 쓰자고 결정을 하여 평소 뒷바라지에 애쓴 단지 내 청소원과 경비원에게 조그만 선물을 기증하고 강남구 청소년학교에 연탄을, 그리고 국군 장병에게도 위문대를 보내기도 했으며, 특히 79년도에는 "세계 아동의 해"를 맞아 낙도어린이를 서울에 초청 발전된 서울과 번영해가는 우리나라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앞으로의 희망을 북돋아주고자 뱃길로 2시간이 걸리는 전북 부안군 위도면 위도국민학교 파장금 분교 5,6학년 어린이 40명과 학교장, 분교장, 학부모 6명 등 모두 46명을 4월 20일~4월 25일 까지 5박 6일 기간으로 서울에 초청하였다.
이들은 단지 내에서 희망하는 세대에 민박하기로 하고 희망자를 접수받았을 때는 숙식 제공자가 밀려 한사람이 2집에서 일정을 나누어 기거하리만큼 호의적이었으며 거기에 해당이 안 된 주민들은 성금과 선물로 이들을 환영하였다. 이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처음으로 5박 6일 동안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었다. 낙도 어린이들의 서울 견학을 계기로 도시와 농촌어린이 상호간의 친선과 유대가 강화됐으며 한마음 갖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발전하는 국력을 직접보고 인식할 수 있도록 했으며 낙도 어린이들에게도 그곳 고유민속 자연의 풍요로움의 혜택을 입고 있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 주었다. 민박 시킨 주민들이 낙도 어린이들과 헤어질 때에 서로 이별을 아쉬워하는 모습은 흔히 보는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가슴을 찌릿하게 했다. 또한 부녀회에서는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단지주민 체육대회를 개최하여 주민 400여명, 어린이 900여명이 함께 건강한 체력을 어린이에게 단련시켰고 좋은 동요 부르기 운동을 전개하여 주민과 더불어 정서생활에 도움을 주었으며 충효는 인간의 근본이라는 새마을정신에 입각하여 노인들을 위한 경노 잔치도 베풀었다. 그리고 부녀회는 촌각도 허황되게 보내려고 하지 않았고 여가가 있을 때에 건전한 취미생활하기, 단지 내 잡초와 잡석제거와 일선장병위문, 수재민 돕기 자선바자회 등 이웃을 위해, 국가를 위해, 봉사활동과 여러 가지 일을 기꺼이 했고 앞으로도 더욱 확대 발전시킬 계획으로 되어 있다.
새마을 운동의 핵이 되자
최 여사가 세상에 태어나서 조그마한 일이지마는 우리의 이웃을 위해 일할 수 있게 정신을 키워준 새마을정신과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시새마을 운동을 핵이 되게 일깨워 준 주민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평범한 일생 생활에서 일정한 봉급으로 한 푼이라도 아껴서 가계부의 적자를 흑자로 메워 남편을 보필하자는 데서 비롯된 평범한 진리를 실천한 것이라 힘주어 말하며 우리 모두가 절약을 생활화하게 되면 세계적인 유류파동과 물가고를 슬기롭게 이겨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자료출처 : 새마을운동 1979 내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