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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전 메시야 언약
본문 <고전2:6~8>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퍼즐 맞추기 게임을 해본 경험들 있지요? 퍼즐이 다 완성되면 어떤 형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때 아하, 이거였구나? 감탄을 연발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신구약 전체 66권이 바로 퍼즐 게임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 퍼즐의 완성은 무엇일까요? 전체가 다 조합되면 무엇이 나타날까요? 다시 말해서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퍼즐의 완성은? 바로 IX(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어떤 예수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 이지요.
2장 2절을 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성경은 이 십자가 예수를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세 전, 영원 전,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신 그 어마무시한 계획이 바로 십자가 예수를 통한 구속사를 작정하시고 역사 운행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은 이것을 전혀 모르고 있답니다. 누구만 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만 안다. 그래서 그들만이 십자가 예수께서 이루신 십자가 공로인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지요.
‘6절’~온전한 자들이란 IX안에 있는 자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복음을 믿는 자들을 지칭합니다. 앞에 1장 24절에서 설명을 이미 해준 말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나 가능한 일이지 세상은 모른다는 것이지요.
‘7절’~이같은 하나님의 지혜는 비밀한 가운데 감추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비밀은 누구만 알게 되어 있나요? 같은 편만 알지요. 그래서 비밀입니다. 다 알면 비밀이 아니겠지요. 즉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 예수를 세상은 알 수가 없고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허락된 것이랍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믿는다는 것처럼 복된 일이 세상 어디 있겠습니까?
왜 복된 일이지요? 7절에서 우리의 영광을 위한 것이랍니다. 우리의 영광이 무엇일까요?
지금 기독교인들이 알고 믿고 있는 세상 복주는 예수일까요? 예수 믿으면 성공출세하고 부자 되고 문제 해결되고 병 고침 받고 자녀가 형통하게 되는 복일까요? 맞아요? 틀려요?
100% 틀려요.. 그런 헛된 신앙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광이란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생복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바로 이 말씀대로입니다. 낙원..즐거움이 넘치는 동산 거기가 천국 아닙니까?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세계를 의미적으로 풀어쓰면 낙원이 됩니다. 바울도 그 3층천을 보고 와서는 낙원이라고 말하면서 사람의 말로 가히 표현할 수 없다고 입을 닫아 버렸습니다. 인간 세상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차원의 세계라는 뜻이지요(고후12:3).
암튼, 이러한 큰 영광을 위한 계획을 언제부터 작정하셨다? 7절 후반부에 보니,..만세 전에요.
무엇을 미리 정했다고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말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우리를 살려 하나님의 자녀 삼을 것을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랍니다. 이것을 줄여서 말하면 어떻게 되지요? 저는 이것을 ‘창세전 메시야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즉 ‘창세전에 메시야이신 예수를 통한 자기백성의 구원을 언약하셨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언약이란 약속의 대상이 있다는 뜻인데 누구와 언약했다는 말일까요? 만세 전에 아들 예수와 합의해서 결정한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요17:1절 이하를 보면 주님이 십자가를 앞두시고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하면서 십자가 죽음을 창세전 언약에 대한 영화로운 성취로 표현합니다(요17~:1~5)
이처럼 주님은 창세전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백성의 구원을 위해 자원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작정하셨고 이것을 성취하는 것을 영화로운 일로 여기며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아들 예수의 대속의 피 흘림 외에 죄에 빠진 자기백성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기에 십자가가 이미 창세전에 기획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십자가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이루어진 언약으로 성립되었다는 비밀한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만세 전의 하나님의 작정을 더 살펴봅니다.
<딤후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우리를 구원한 근거를 밝힙니다. 우리의 행위는 일체 고려되지 않고 오직 ㅎ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의한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부르심이지요. 부르심이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신분으로의 격상이니까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 내용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영원 전부터 XI안에서 주어진 은혜로 되는 구원이랍니다. 아까 퍼즐 얘기 했었는데, 퍼즐의 완성이 십자가에 달린 IX라고 말했지요? 십자가 예수를 해석을 하면 은혜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하나님 사랑이지요.
<롬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복음은 사람의 행위를 기각합니다. 나 이것 했어요, 저것 했어요. 나 좀 잘 봐주세요. 이게 종교인들의 마인드이지요. 그 대표주자가 바리새인들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하는 삶을 살았지만 주님은 그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들, 회칠한 무덤,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질타를 하십니다. 아니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 친 이들에게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주님은 왜 그들을 내치셨나요? 은혜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바리새인의 신앙의 판박이가 욥의 신앙관이었습니다. 완전하고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지요.
욥의 삶은 1절부터 소개하는 내용대로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ㅎ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욥이야말로 사람이 행함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봉의 의에 오른 사람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의가 얼마나 허접한가를 보여주는 게 욥기의 전체의 맥락입니다.
욥은 자신의 행함이 반듯해서 그 보상으로 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고 열 자녀라는 자손의 복과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사는 형통을 누린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함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완전히 뒤집히는 재앙을 만났습니다. 졸지에 거지가 되고, 열 자녀가 다 죽고, 몸은 악창이 나고, 아내마저 떠났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배가 파선된 것입니다.
너무도 의아했습니다. Why Me! 왜 내게 이런 재앙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아니 무슨 죄를 저질렀어야 재앙이 닥쳐도 인정이 될 텐데, 아무 잘못도 없고 오히려 남들은 못하는 크고 많은 선행을 베풀며 살았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도저히 수긍이 안 되었습니다.
아무 내막도 모르는 친구들은 찾아와서 네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재앙이 왔지 이유 없이 재앙이 닥쳤겠냐고 어서 잘못한 것들을 회개하라고 독촉을 합니다. 그러나 욥은 아무리 돌아봐도 죄 지은 게 없어요. 정말 미치고 환장할 일입니다.
그런데 세 친구가 물러가고 욥35장에서 엘리후가 등장하여 핵심적인 조언을 합니다. ‘네가 행한 일이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일이라도 그게 ㅎ님과 무슨 상관이 있냐? 설사 네가 악한 일을 한들 그게 또한 ㅎ님과 무슨 상관이 있냐? 다 너희끼리 정한 선악 지식에 따른 일들이지 ㅎ님과는 무관한 일들이야.’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욥의 선악지식이 일순간에 거덜 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싶으신 말씀이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선과 악이란 선악과 먹은 인간 세계에서 갖는 선악개념일 뿐, ㅎ님의 선악관하고는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우리끼리 정한 윤리 도덕적 개념을 가지고 잘한 것은 선, 벗어난 것은 악이라고 규정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와 용서로 대하시는 분임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악이란 인간의 행함에 가치를 두고 자긍하는 게 모두 악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반듯하게 살아도 악이고 나쁜 짓을 하고 살아도 악이지요. 이래저래 사람은 죄를 안고 태어나는 태생적인 죄인인지라 무엇을 하고 안하고를 떠나 존재 자체가 악이라는 말입니다.
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얄팍한 인간의 선악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분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엘리후의 말을 듣고 비로소 자신의 선악 지식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너는 어디 있었느냐”고 질문하십니다. 광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먼지와 같은 네가 어떻게 알아서 그리도 잘난척하느냐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절대주권에 따라 섭리하시는 자연의 현상들에 대해 장대하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욥은 너무도 미천한 자신의 모습과 하나님에 대해 우매무지한 자신을 깨닫고 입술을 닫게 됩니다.
욥기를 요약하면 욥에게 먼저 평강의 삶을 살게 한 것도, 갑자기 고난이 닥친 것도 ㅎ님의 절대 주권으로 하신 일이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선악과 따먹고 심판에 떨어진 인간이 ㅎ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을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말 그대로 태생적인 죄인들인지라 욥이 단한 재앙처럼 지옥 형벌 같은 비참한 재앙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은혜를 받고 긍휼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중보자의 대리 희생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유일한 특징입니다. 한 분 중보자 IX의 희생이 있기에 우리가 살았고 또한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극심한 고난 중에서 욥이 중보자의 필요성에 대해 간구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욥기 16:19절 이하를 보면,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자신을 변호해줄 중보자를 찾는 내용입니다.
사실 인간은 죄 밖에 없는 존재라서 죄의 저주로 지옥 형벌이 마땅하지만 중보자 IX의 은혜로 살게 된다는 계시가 욥기에서도 복선에 깔려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은혜는 인간의 행함과는 무관한 전적 ㅎ님의 택하심으로 오는 은혜임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욥이 최종적으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만이 자신이 살길임을 깨닫고 회개를 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3~6)’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렸다는 말이란 무엇입니까? 욥 자신이 반듯하게 살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었으니 ㅎ님께 복받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겨온 모든 생각에서 나온 말과 행동들이 어리석은 것이었다는 자백입니다. 자신에게 가치를 두고 행한 일들이 죄악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나 ㅎ님의 은혜를 발견한 지금은 영의 눈이 열려서 ㅎ님을 귀로만 아니라 눈으로 뵙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한낱 티끌이요 먼지와 같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안다고 자부한다 할지라고 은혜로 일하시는 사랑의 ㅎ님을 모르면 헛된 신앙입니다. 고전 13장에서 잘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고전13장을 봅니다(1~3절)...봉독..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한다면 대단하잖아요? 또한 성경의 모든 비밀 지식을 안다? 게다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면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리고 내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면 이 보다 더 한 사랑이 있을까요?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사랑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 모든 게 헛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는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니 이보다 더 진한 사랑을 어떻게 실천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사람의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대는 과연 하나님의 사랑인 IX의 십자가 사랑을 알며 그 십자가 사랑을 받았는가를 묻는 겁니다. 즉 복음을 믿어 생명의 구원 받은 자인지 묻는 것입니다.
<고전13:11~13>
‘11절~ 어릴적 어린아이 같은 것들이란, 십자가로 나타난 IX의 사랑을 모르고 율법 행함을 가치로 여기던 모든 과정을 말합니다. 많은 은사, 해박한 성경 지식, 굳건한 믿음, 욥 같은 구제와 선행, 혹은 테레사 수녀와 같은 일생을 헌신하는 실천 등이 있다 해도 죄인을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십자가 사랑을 모르면 모든 게 헛된 것이라는 말이지요.
‘12절’~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만난 자는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되어 온전히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때란 먼 미래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만난 그 때를 말하는 거지요. 그러면 욥이 ㅎ님을 귀로만 듣다가 눈으로 뵙는다는 말처럼 ㅎ님을 사랑 안에서 만나는 것이니까 온전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하, 하나님이 벌주는 무서운 분이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구나.’ 깨닫게 되면 마음이 녹지요.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강과 안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13절~믿음, 소망, 사랑은 신앙을 이루는 핵심 요소들입니다. 거기서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은 차등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믿음이어야 하고 사랑에서 비롯된 소망이어야 생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랑이지요? 하나님이 나 같은 엉터리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이 바탕이 된 믿음일 때, 그 믿음이 능력이 됩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바탕에서 나온 소망이 참된 소망이 된다는 말입니다.
<딤후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IX가 하신 일이 나옵니다.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썩지 아니할 생명을 드러내셨 답니다. 주님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사망 권세가 깨뜨려 졌습니다. 창3:15절의 예언대로 다 성취된 것이지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린다는 의미가 바로 사망을 폐하셨다는 말입니다. IX안에서는 죽음이 없고 영생만 있습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딤후1: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바울이 깨달은 복음의 능력이 이와 같기에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에 인간의 행함인 율법을 지켜야 온전한 구원이 된다고 가르치는 거짓교사들에 대해 완강하게 대항하며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질타를 하면서 순수한 복음을 지켜내기에 전력을 기울입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입장에 대해 공감을 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정말 죄 밖에 나오지 않는 존재들이라서 구원은커녕 지옥이 마땅한 자들인데, 아무 조건 없이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다시는 죄를 기억치 않으시는 무궁한 용서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는데, 이 위대한 희생과 사랑을 가볍게 여기고 다시 인간의 행함을 보탠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악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영원 전에 정하신 언약에 대해 더 살펴봅니다.
<딛1:1~3>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1절~바울의 사명에 대해 설명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의 명령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3절). 여기서 전도의 대상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라는 분명한 구분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에게 믿음과 진리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주려는 것이라는 목적까지 열거합니다.
‘2절~그리고 이 영생은 영원한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고 밝힙니다. 즉 성도의 구원이 결과가 영생인데 이것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영생인 구원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지 사람들이 자신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따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자기 때에 자기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다는 말은 복음이 구약에는 계시로 감추어져 전해지다가 주님이 십자가로 성취하신 후에는 전도로 전파하게 되어 바울 자신에게도 전해졌고, 이제 자신도 복음의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서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전도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고전1:21절을 보면 ㅎ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식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즉 사람의 언변과 온갖 수단 방법으로 끌어 모으는 것을 거절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부활을 전할 때에 택한 백성들이 반응하게 함으로 구원하시니까 처음부터 ㅎ님의 주권으로만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잠깐 정리하자면, 만세 전에 하나님이 아들 예수와 함께 언약하시기를 당신의 택한 백성을 아들 예수의 대속의 피로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이를 믿고 구원 얻도록 믿음도 주시고 진리 지식도 주셔서 영생의 복을 얻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근거인 십자가 복음도 하나님이 마련하시고 그 복음을 믿는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믿음을 유발시키는 전도도 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펼쳐진다고 하시니 우리가 할 일이 전혀 없이 다 삼위일체 ㅎ님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역할이 있다면 ㅎ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런 내막을 아는 것이 진리인데 , 진리를 안다는 것은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입니다. 결국 언약도 하나님 사랑이고 복음도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가 뭐라고요? 사랑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합니다(요일4:18). 그래서 진리 안에서 자유가 넘치는 것입니다.
이제 창세전 언약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한 엡1장을 봅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1:3~7>
‘3절~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왜지요? 이제부터 전개되는 내용이 너무도 망극한 은혜의 내용들이기에 먼저 찬송이 흘러넘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IX를 통해 주시는 것인데,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복이랍니다.
‘4절~ 그 복의 내용입니다. 첫째는 IX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답니다. ’나‘가 아니라 ’우리‘에 주목해야 합니다. ’나‘라는 개인의 특성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정하신 ’우리‘입니다. 이렇게 창세전부터 우리는 택함을 입었습니다. 둘째 복은 그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자들이랍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깨끗하게 씻겨 졌기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이지, 사람의 그 어떠한 행함으로 거룩과 흠 없는 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탐하고 죄 앞에서 실패하는 자인데 ㅎ님은 나를 거룩하고 흠이 없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사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5,6,7절~우리를 예정하신 근거가 기쁘신 뜻이라고 합니다. 4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곧 5절의 기쁘신 뜻과 동일한 맥락이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택하심은 아무 감정도 없이 기계적으로 찍은 게 아니라 ㅎ님의 사랑과 기쁨의 일환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IX의 십자가 대속의 피라는 대가를 치루고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는 것이라고 구원의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택함 받은 우리 역시 다른 이들과 똑같이 죄 아래 있는 면에서 동일하지만, 오직 택하심을 입은 까닭에 주님의 십자가 피를 믿게 하여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부연 설명하는 내용이 2장입니다.
<엡2:1~7> 봉독
우리 역시 죄와 허물로 죽었었고 그래서 공중 권세자 사단에 속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지만 4절의 말씀처럼 ㅎ님의 긍휼하심과 큰 사랑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효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하늘에 앉혀졌다고 합니다. 즉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8,9절~IX의 십자가 피로 대속을 하시고, 그 대속이 믿어지게끔 하신 것이 은혜입니다. 왜 이렇게 오직 은혜를 주어 믿게 하셔서 구원하시는지 이유가 나옵니다. 행위에서 난 구원이 아니기에 구원받은 자 구 누구도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자기 업적을 자랑하는 자를 가장 미워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행위를 가치로 여기던 바리새인을 향해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질타를 하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성경 전체가 언약으로 꽉 차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누는 내용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엡1장과 짝이 되는 창15장의 아브라함의 횃불 언약을 통해 택한 백성이 어떻게 탄생되어 구원을 받는지를 살펴봅니다.
<창15:7~17>
‘7절~이 땅을 네게 주어 기업으로 삼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땅이란 문자적으로는 가나안 땅이지만 영적인 의미는 천국을 의미하고 더 궁극적으로는 바로 IX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수가 나의 안식처요 피난처이며 생명과 평안이요 기쁨과 행복이고 영원한 만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신부의 생명은 돈도 아니요 하려한 궁궐이 아니라 신랑이듯이, 성도의 생명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곧 천국입니다.
‘8절~가나안 땅에 가나안 백성들이 살고 있는데 이 땅을 어떻게 기업으로 주실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으로, 사탄의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가(본질: 가나안 원주민) 사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지 알려달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 이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9,10절~제물에 쓰일 3년된 암소, 암염소, 수양 등은 공생애 3년 만에 죽으실 IX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라는 뜻으로 역시 IX에 대한 이중 계시입니다.
‘11절~솔개를 쫒았다는 말은 제물로 비유된 십자가 복음을 훼손하려는 사단의 훼방을 하나님이 막아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12절~해질 때에란 주님이 죽으시는 때가 유월절 저녁 해질 때라는 말입니다. 아브람이 깊이 잠들었다는 말은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할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종노릇하다가 400년이 차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게 된다는 것은 역사에서 430년 만에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감으로 이 말씀이 성취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IX의 십자가 사건으로 연결해 봅니다. ㅎ님은 400년만에 출애굽을 약속했는데 실제는 430년에 실현되었습니다. 오차가 없으신 하나님이 왜 30년의 차이를 굳이 만들어내셨을까요? 30년의 차이는 예전에도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깊은 뜻이 있습니다. 400년은 구약 전체를 상징하는 기간입니다. 4, 40, 400, 4000은 모두 어둠, 죽음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30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나이입니다. 실제는 33세에 죽으셨지요.
세상 역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BC와 AD로 나누어집니다(예수 전, 예수 후). 그런데 예수님은 실제로는 만으로 BC 3년에 탄생하십니다. 그래서 정작 주님이 죽으시는 AD30년은 33세가 되시는 해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430년과 짝을 맞추시기 위해 역사적 오류를 간섭하셔서 스스로 BC 3년에 탄생하신 것이고, 구약의 상징 수 400에다가 주님이 죽으시는 33세가 합해져서 430년에 출애굽한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영적인 출애굽인 새언약의 시대는 주님의 육신의 탄생으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주님이 죽고 부활하신 AD30년부터 된다는 것을 강조하여 부각시키는 뜻이 숨어있다고 보여 집니다. 그리고 위의 14절에서 출애굽할 때에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다는 말의 영적인 뜻은 복음을 갖고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17절~십자가에 대한 구체적 계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달리시는 시각과 형벌의 어떠함을 증거 합니다. 연기 나는 풀무란 제물이 타는 모습으로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났다는 말은 자기백성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ㅎ님 자신의 죽음으로 언약을 성취한다는 묵시입니다(행20:하나님의 피로 산 교회)
13절의 말씀으로 언약을 하셨지만 다시 17절 말씀을 덧붙이는 것은 죽음으로서 맹세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히6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6:17>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우리로 하여금 제발 믿어 달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추가로 맹세로 보증하셨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 약속과 맹세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택한 백성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여 의롭다고 여겨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의 행함이라는 더러운 쓰레기가 들어갈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IX의 십자가 대속이 은혜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십자가 복음 안에서 영생의 복을 이미 가진 자로서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