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폭풍의 바다 1 80.3 x 116.8cm, 1991
지난 8일 화가 변시지 선생이 향년 87세로 타계했다. 서귀포에서 태어난 선생은 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청년기를 보냈다. 약관 23세 때 일본 최고 권위의 '광풍회전'에서 최고상을 받아 유명화가 반열에 올랐고 전후의 혼란기에 귀국한 그는 서라벌예술대학을 거쳐 제주대학 교수로 근무하면서 고향에서의 작품 활동을 오랫동안 이어왔다. 현재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한국작가로는 유일하게 작품 두 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그가 남긴 500여점의 그림은 제주에 건립을 논의 중인 미술관에 소장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한 지역의 바람과 흙은 거기에서 나서 자란 예술가에게 어떤 의미로 나타나는지, 풍토는 어떻게 예술적 방법과 이념으로 승화되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내가 그의 그림에 열중하게 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는데, 오랜 일본생활 끝에 한국어에 서툰 그의 미술 에세이집을 교열하면서 선생과 인연이 되었다. 그 후 어느 해 봄 나는 서귀포에 내려가 선생과 이틀 혹은 사흘 걸러 만나 그의 그림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 달을 머물면서 나는 그것들을 원고로 만들어 출판사에 넘겼다. 그 출판사에서는 마침 드가, 세잔느, 로트렉, 김환기, 장욱진, 이쾌대 등의 작고 작가들의 예술생애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생존 작가인 그를 미술문고 시리즈에 넣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생은 화단의 소위 중심인물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후 책 제목으로 단 <폭풍의 화가>로 불리면서 대중에게 더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그림은 초기에는 서양의 근대미술의 이념과 한국의 고궁에 대한 극사실의 기법을 반복하다가 제주에 정착하면서 황토 빛과 먹선의 세계로 급변하였다. 화폭에 담긴 절제되고 생략된 구도 - 한 마리의 바닷새와 동화처럼 비뚜루 걸린 태양과 스러져가는 초가에 기대어 망연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허리 구부정한 사내와 돌담의 소나무 한 그루,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것을 휘몰아치는 바람의 소용돌이-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모두 황토 빛으로 열리며, 이를 묘사하는 먹 선은 고졸(古拙)하면서도 역동적이었다. 그의 화폭에 나타난 이 원초적 적막감과 비애감은 제주의 풍정을 빌어 표현한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상황에 다름 아니었으며,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의 단순성과 저돌성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우주적 연민은 경이로웠다.
그는 작은 키에 베레모를 단정히 쓰고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그는 아예 세상살이에 소년처럼 천진무구했으며, 사람들 앞에서는 다소 수줍음을 타기도 했다. 텔레비전 화면에 구렁이가 나오면 아예 고개를 아예 돌려버린다. 이러한 여린 심성 속에는 그러나 폭풍우와 격랑이 함께 일고 있음을 보게 되며, 한쪽으로 기우는 그의 걸음걸이에서는 양보할 수 없는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도저한 집념의 행보를 보게 된다. 광기를 갖지 않은 천재는 없다고 하지만 그는 차라리 근면과 신념의 천재였다. 서구적인 것의 수용과 저항의 갈림길에서 자기예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 그의 행보는 제주-오사카-도쿄-서울-제주로 이어지는 순례의 과정이 잘 보여준다. 선생의 이러한 구도자적 순례는 마침내 대지와 바람의 뒤섞임 속에서 황토 빛으로 열렸으며 이제는 그의 사상이 되었다. 선생의 그림처럼 예술과 풍토, 지역성과 세계성, 동양과 서양이 함께 어우러지는 희귀하고도 소중한 사례는 아직 없다.
그의 빈소는 소박하고 조용했다. 오후가 되자 문상객들로 조금 붐비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이내 옆집 상가와 방을 나누어 쓰기 위해 칸막이를 쳐놓아 공간이 좁아졌기 때문임을 알았다. 선생이 평생을 혼자 기거하던 서귀포의 작은 아파트, 검은색과 황토 빛의 물감과 캔버스로 가득 차 있던 그의 작은 작업실보다는 조금 넓어보였다. 그를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영결의 의식이 제주의 고향사람들에 의해 사회장으로 치러지는 모습은 소박하지만 경건해 보였다. 장례의 크기란 살아있는 사람의 허영 때문이지 죽은 사람의 영예 때문이 아님을 그는 역으로 보여주었다. 선생은 자신이 평소 좋아하던 방식대로 문득 떠났지만 그를 보내는 사람들의 소슬한 마음은 끝내 달래주지는 못했다. 내일신문 2013.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