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욱아, 학교가자”
지난 9월 27일 동기 동창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동일>이 한테 네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참으로 마음이 아펐다. 내가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고, 신당동으로 이사를 한 후에는 나와 한 반을 한적도 없고, 같이 어울린 적도 없지만, 상욱이는 후암동에서 함께 지낸 중학교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상욱이는 선천적으로 힘이 장사라서, 힘을 자랑하고 싶어는 했지만, 일부러 남을 해하거나, 시비를 걸어 싸움을 하지는 않는 착한 심성을 가진 친구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 3교시가 끝나면 벌써 도시락을꺼내들고, 책상 위를 걸어 다니면서, 남의 도시락 을 털어 먹었는데, 그것은 그가 가난하거나 못 먹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장난 치기를 좋아 하였기 때문이었다. 상욱이 부친은 후암동에서 유리 가게를 운영하였고, 후에는 남대문 시장 한 복판에서 술 도매상을 한 여유있는 집안이었다.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하여, 지금도 생각하면 상욱이와 같이 어울려 다니다가, 낙제를 해서 쫓겨나지 않은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가까운 친구들은 상욱이를 통상 “상옥”이라고 불렀다.
상욱아, 지금부터 55년전, 너를 처음 만나던 때가 생각나는구나.
1953년 8월 중순, 피난지에 있던 내가 환도후 처음 학교에 갔을 때, 특별 교실에는 2반 밖에 없었지.
1반에는 이철주가 반장, 김길환이가 부반장, 2반에는 서광식이가 반장을 하고 있었지. 도서관 건물에 있었던 교무실에 들려서 담임이신 송수찬(송영선 부친) 선생님을 따라 산길을 지나 특별 교실에 도착하였으나 아는 친구가 하나도 없이 모두가 낯설은 얼굴뿐인데, 행여 텃세하는 놈 한테 얻어터질까봐 겁을 잔뜩 먹고 있었지. 송 선생님의 소개가 끝나자 어리버리하는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던 반장 <이철주>와 부반장 <김길환>에게는 아직까지도 고마운 마음 금치 못하고 있다. 뒤이어 같이 후암동 사는 친구라고 너와 <이번송>이를 소개하여 주어, 3년 동안 너와의 동거동락이 시작되었지.
가깝기는 번송이네 집이 더 가깝지만, 번송이는 신문사에 다니시는 아버지가 엄하여 한번 집에 들어가면 우리와 같이 나와 돌아다니며 놀지를 못하니, 그 다음에 가까운 나는 아침 저녁으로 너의 집을 나의 집처럼 드나들게 되었지.
그로부터 고등학교로 진학, 내가 후암동에서 신당동으로 이사 가기까지, 춘하추동 비오는 날이나, 눈오는 날이나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마다 너의 집에 들려서 너를 불러 데리고 학교에 다니지 않았니. 방학을 빼놓고 매일 아침 너의 집에 들려서 빨리 나와야 5분, 보통은 10분, 15분을 기다려야 나오니, 서울역에서 남대문, 배재 학교, 대법원, 이화 여고 앞을 지나 교문까지 챙피를 무릅쓰고, 가방을 옆에 끼고 달려야 했고, 때로는 서울역, 이화여고 뒷문, 서대문 농협을 거쳐 불이나케 숨을 헐떡 거리며 학교에 오던 때가 어디 한두번 뿐이었겠니. 사실, 솔직히 내가 아니면 너는 매일 학교에 올 수도 없었다.
그래도 학교가 끝나면, <정수웅>, <오중규>와 같이 산에서 오디를 따먹고, 때로는 깜깜할 때까지 운동장에서 놀던 생각이 난다. 한번은 광화문에 살던 <여영구>와 <인형달> <고재홍>이네 집에 놀러 갔다가, 길건너 남아 있는 높은 굴뚝 꼭데기에 혼자 올라가 친구들에게 흉내 낼 수 없는 용기를 자랑하기도 하였지. 그리고 2학년에 올라와서는 남영동 성남 극장 옆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김광평>이와 원효로에 살던 <채송경>이와 같이 매일 너의 이층 다다미 방에서 장난을 치며 놀았지. 그리고는 가방을 팽개치고, 넷이서 남산이나 이태원에 나비, 메뚜기, 매미와 같은 곤충채집과 때로는 개구리, 다람쥐를 잡으러 돌아 다니고, 어떤 때는 뱀을 잡아왔다가 집안에서 놓지는 바람에 혼이 난적도 있었지. 그리고 잊지 못할 것은 넷이서 틈만 나면 몰래 성남 극장에 들어가 영화 보던 생각이 난다. 그 중에는 유명한 케리 쿠퍼와 잉그릿드 버그만이 나오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로버트 테이러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오는 "아이반호(흑기사)", 그리고 버트 렁커스타가 나오는 해적 영화가 재미 있었지.
너는 집에서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매일 괴도 “루팡 소설”만 즐겨 읽더니, 호기심이 발동하여 장난칠 생각만 하고, 2학년에 올라와서는 공부가 끝나면 전지와 촛불을 켜들고, 방공호 안으로 들어가 무너진 벽돌을 헤치며 3학년과 경쟁을 해서 처음으로 굴을 통과, 뚫린 것을 찾아내어 함께 환성을 지르던 생각도 난다.
너는 또 아버지 체질을 닮어, 선천적으로 힘이 장사라서 나와 광평이와 송경이와 함께 셋이서 덤벼 들어도 너를 제압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층 다다미 방에서 세 놈이서 너를 올라타고, 네 얼굴이 새파랗게 되는 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너의 목을 누르다가 너를 죽일 뻔 한 일도 있었지. 선천적으로 힘이 장사인데다가 겁도 없어서 동네 개라는 개는 보이는 대로 주둥아리를 걷어차서, 네가 나타나면 동네 개가 모두 도망을 가곤 하였지. 그리고는 후라이 판에다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돼지 기름에 김치와 밥을 섞어 볶아 먹던 일이 생각나는구나.
싸움에는 일가견이 있어 물러설 줄을 모르고, 내가 알기로는 중학교 때까지는 학교 안팎이나, 동네에서 싸움이 붙었다 하면 얻어 맞거나 진 일은 없었다. 가끔 용산 중학교 애들과 남산 언덕에서, 그리고 후암동 골목에서 같이 싸운던 생각도 난다. 그리고 가까이 살던 이익흥 경기 지사의 딸(경기여중)이 지나가면 같이 놀리기도 하였지. 또 국방부 앞 비탈길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차에 깔려 죽을 뻔도 하였지. 좌우간 너하고 같이 다니면, 순간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가는 길도 그저 순순하게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구루마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앞에 가는 이화여고 학생의 하얀 하복 등판에다가 갔다 몰래 부쳐 놓지를 않나, 남산 고개에서 캬라멜을 쌓아 놓고 콜크 총을 쏘면 다들 맟추지 못하는데, 혼자서 백발백중을 해서 맟추니, 네가 나타나면 장사꾼들이 아얘 총을 쏘지 못하게 하였었지.
지금 생각하면, 너와 같이 다니며 공부는 안하고 장난만 치다가, 낙제를 해서 다른 학교로 쫓겨나지 않은게 천만 다행으로 생각한다. 후암동 패거리에도 공부 잘하던 <김우>, 그리고 <한영일>, 그 밖에 다른 친구들이 진학을 못하고 다른 학교로 갔었지.
하기야 매일 아침 너를 불러서 학교에 같이 가는 이유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할머니를 위시해서, 너의 부모님, 특히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많이 사랑해 주신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네 동생 광욱이와 잔잔한 여러 여동생들이 생각나는구나.
고등학교를 졸업후, 후암동에서 유리 가게를 하시던 너의 부친이 남대문 시장 한가운데서 술 도매상을 할 때, 어쩌다 그 가게에 들리면, 너는 고대(高大) 다니는 친구들을 불러다 뒷 방에서 술을 먹였는데, 그것도 한 두명이 아닌, 한 번에 20 ~ 30명씩 되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와서 바로 미국에 들어오는 바람에 너를 볼 수 없었지만, 너는 중학 시절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잊지 못할 친구였다. 벌써 세월이 많이 흘러, 친구들의 부음이 하나 둘씩 들리니 마음이 착잡하기 한량없구나. 너와 같이 해가 져서 깜깜한데도 집에 갈 줄을 모르고, 운동장에서 놀던 때가 어제 같은데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매일 아침, 하루도 걸르지 않고, 너를 불러서 학교에 가던 때가 그립다. 언제 한번 만나서 같이 경희궁에 가 보겠니. 상욱아 보고 싶구나. 도시락을 급히 싸들고 가방에 넣으면서, 현관문을 나서던 너의 모습이 그립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너를 다시 볼 수 없다니, 슬프기 짝이 없구나. 이제 멀리서 너의 부음을 듣고, 마지막으로 너를 불러 본다.
“상욱아, 학교 가자”
(2008. 9. 30.)
첫댓글 지나간 일들을 돌아 보면 모든게 그리운,그런 나이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