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조 : 최원호[崔元浩]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우봉(牛峰)은 황해도에 있었던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우잠군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때
우봉으로 고쳤다. 1652년 우봉현은 금천군에 병합되었다. 우봉최씨(牛峰崔氏)는 경주최씨에서
분적하였으나 그 상계는 알 수 없고, 최치원의 후손으로 전하는 최원호(崔元浩)가 고려 명종때
삼중대광으로 문하시중을 거쳐 우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영렬(英烈)이란 시호를 하사받았다.
그후 그의 아들 충헌(忠獻)이 고려 중종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진강군 개국후에 봉해졌으며,
충헌의 아들 우(瑀)가 고려 고종때 강화천도의 공으로 진향후(晋陽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우봉에 세거하면서 최원호(崔元浩)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우봉으로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 인물로는 충헌(忠獻)이 음보(蔭補)로 양온령이 되어 1174년 조위총의 난을 토벌하여
별초도령에 올랐으며, 1196년 동생 충수(忠粹)와 함께 이의민 일당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당시 누적된 폐정의 개혁을 위한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려 왕의 측근자를 모두 추방하고
좌승선을 거쳐 지어사대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충성좌리공신의 호를 받았다. 1197년 9월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의 낭비만을 자행하자, 왕을 유폐한 뒤 평량공(平凉公) 민(旼)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후 동생 충수(忠粹)가 자기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의견충돌이 일어나 군사력으로 대결하여 동생을 죽게 하였다. 1209년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국정 전반을 감찰하였고, 장기간 계속된 민란을 진압하여 기강의 확립, 풍속의 순화 등
여러 가지 업적을 이룩했다. 그의 동생 충수(忠粹)는 1196년 동부녹사로서 형 충헌을 설득하여
함께 이의민을 죽이고 벼슬에 올라 1222년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했다.
충헌의 손자 항(沆)은 처음에 송광사의 중이 되었으나 1248년 아버지의 명으로 환속하여 상호군과
호부상서를 거쳐 추밀원지주사에 올랐다. 뒤에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으며 진평공(晋平公)에
추증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봉최씨(牛峰崔氏)는 남한에 총 94가구,
36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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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 최씨 (牛峰崔氏)
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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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13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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