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자살***
[여는 말]
최근 우리 사회에는 자살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지난날에는 전직대통령의 자살로 우리사회에 큰 충격을 받았는데, 이달에는 이적단체 범민련 초대의장을 지낸 강희남(89) 목사가 “제2의 6월 민중항쟁으로 살인마 리명박을 내치자"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6일 오후 전주에 있는 자기 집 보일러실에서 목매어 자살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잇따라 자살한 연예인들이 모두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들의 이름 석 자 앞에는 항상 ‘독실한’ 기독교 연예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인의 위패에는 십자가와 함께 성도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고, 모두 기독교 장례식을 치렀다.
OECD 가입 국가들 중에서 자살 율 1위인 불명예(不名譽)를 안고 있는 이 나라의 청소년들의 모방 자살(模倣 自殺)이 이어지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된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고 구원의 길을 여셨던 예수님처럼 세상을 이기고 살아가는 인내와 끈기, 용기를 불어넣는 기독교 신앙이 절실한 때이다.
연초에 자살한 성도의 영안실에서 위로예배에 기도를 드린 심경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기독교인의 자살-왜곡된 복음이 낳은 참상]
기독교인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심적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을 누가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마는, 기독교 신앙에서 자살은 결코 용인되거나 미화될 수 없는 참담한 죄악이다. 자살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지옥에 간다는 말이 아니다. 비록 한 순간의 치명적인 선택으로 이뤄진 죽음일지라도, 생전에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신앙을 가진 자였다면 천국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명분에서든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적 행위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비 신앙적 태도이다. 더구나 기독교인의 자살은 하나님의 영광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주변인들을 영적 도탄과 시험에 빠지게 한다. 자살을 완전히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최악의 죄인 것만은 확실하다.
자살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한국에서는 하루에도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자살에 이르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살을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자살은 개인적인 선택의 결과이지만, 기독교인들의 자살은 교회가 책임져야 할 공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자살은 복음에 대한 몰이해와 믿음에 대한 불확실성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비롯되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자살은 오늘날 많은 교회로부터 무분별하게 증거 되고 있는 왜곡된 복음이 낳은 참상이다. 물질적․육체적 번영을 신앙의 최우선 목적으로 보는 ‘건강과 부’의 복음, 하나님의 진노와 죄에 대해 침묵하며 마음의 안정과 평안만을 추구하는 심리적 복음, 하나님의 말씀보다 대중의 관심과 유행에 민감한 세속적 복음, 진정한 거듭남과 회심과 신앙 고백 없이도 누구나 그리스도인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쉬운 복음, 전통적인 교리를 떠나 감상적인 체험과 흥분에 의존하는 감정적 복음,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라면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다고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복음,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유용한 것이 진리라고 가르치는 실용주의 복음, 올바른 말씀 선포와 깊은 묵상보다 정형화된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기업형 복음, 믿음의 선한 싸움을 포기하고 세상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안정 추구형 복음, 좁고 협착한 신앙의 길보다 언제나 넓고 안전한 길만을 택하는 안이한 복음이 창궐(猖獗)하고 있다. 이것들은 복음을 가장한 다른 복음(a different gospel)이다. 이런 종류의 가르침으로 인해 이름뿐인 신자가 늘어나고 위선자(僞善者)가 교회에 넘쳐난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과 행복을 보장받기 위해 몰려들지만, 작은 환난과 시험에도 쉽게 고꾸라지고 마는 자칭 기독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구원에 대한 참된 확증이 없이도 교회에 적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가짜 기독교인들이 태반이다. 이런 왜곡된 복음이 죽음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양산(量産)하고 있는 주범이 아닌가?
[자살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성경은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이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신 32:39). 모든 생명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거두기도 하신다. 자살은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스스로 해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생명 주권에 대한 중대한 거역행위이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역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죄는 무엇보다도 "관계의 개념"이다. 즉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형성되어야 할 바른 관계가 파괴된 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자살은 살인죄이다.
십계명에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는데 이 계명은 십계명 전체에서는 제6계명에 해당하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할 계명 중에서는 두 번째에 해당한다.
자살은 바로 인간의 범죄행위 중 가장 큰 죄에 해당하는 살인죄이다. 살인이란 남의 생명만 죽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남의 것이건 자신의 것이건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 자체가 살인이다. 그래서 자살은 인간 사회의 가장 흉악한 범죄인 살인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자살을 아주 큰 죄악으로 간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경은 살인자가 받을 형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물론 살인자라고 해서 다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살인을 했어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자살은 회개의 기회가 없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기 어렵다.
*자살자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없다.
회개는 구원의 필수조건이다. 성경은 구원은 단지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고 회개함으로 얻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막 1:15;눅 13:3,5). 특히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거역이자 살인죄에 해당하는 중죄이므로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다.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이 같은 회개의 기회가 없어진다.
회개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자살하기 전에 회개하면 되지 않으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회개라는 것은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뉘우침이지 미래에 지을 죄에 대한 뉘우침은 아니다. 그래서 죄를 짓기로 작정하고 회개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자살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제시하는 근거는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다는 교리이다. 즉 구원은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 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자살을 했다고 해서 그 구원이 무효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믿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조건이라고 증거하지 않는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회개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다. 회개는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참 믿음이 아니다. 구원은 믿고 회개해야 얻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믿음을 배반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자살은 사탄의 미혹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자살 충동은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탄의 미혹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사탄에게 속고 있다. 사탄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지옥 불에 던지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지옥은 바로 사탄이 사는 곳이며 그들이 다스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질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끊도록 미혹한다.
가룟 유다(Judas Iscariot)가 자살을 하게 된 것도 사탄의 미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된 것은 사탄이 가룟 유다를 미혹했기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눅 22:3-4). 자살은 사탄의 미혹에 빠져 자신을 파멸시키는 확실한 지름길이다. 혹 우리에게 자살에 대한 충동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바로 사탄이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미혹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맺는 말]
자살이 비록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인 이유들로 궁지에 몰린 이들이 취하는 최후의 선택처럼 비추어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거역행위이며, 살인죄이며, 회개의 기회가 없으며, 사탄의 미혹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자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같이 구원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지옥 백성이 되어 사탄의 영원한 노예로 살겠다는 선택에 다름 아니다.
자살은 스스로를 더 큰 파멸과 더 큰 비극으로 몰아넣는 행위이다. 자살은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에 우리는 아무리 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 삶이 힘들고 죽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더욱 믿고 바라고 의지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3-4절에서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환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라고 증거 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2009. 6. 13
Passion Elder Song
첫댓글 목숨을끝는다는것 자기자신과에싸움에서 패배를 의미하는것 신에대한믿음을 의지하며 역경을이겨내야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