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상실증에 걸려 과거를 잊으면 과거 뿐 아니라 현재는 물론 앞으로 살아갈 길까지 모두 잃는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정체성의 상실을 뜻한다. 노동운동사도 마찬가지다. 지금 노동운동의 현실(노동운동의 수준- 조직, 의식, 투쟁, 노동조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지금까지 선배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의 결과이며 노동운동 전개 과정의 일부이다. 노동운동의 현실이 어떠하며 앞으로의 방향을 전망하기 위하여는 역사적인 점검과 비판적 반성이 필요하다.
또한 전체 역사, 변혁운동에서 노동운동의 역할과 위치, 자본가 지배세력들의 지배정책과 이데올로기의 본질, 숱한 우여곡절(승리.패배.침체.고양.정체.비약)을 겪으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조직과 투쟁을 줄기차게 이어 온 선배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정신을 배우고, 선배 노동자들의 ‘축적된 실천’ 경험 속에서 노동운동이 가야할 미래의 중요한 내용들을 찾아 낼 수 있다. 해방의 역사는 먼저 간 선배들의 과거와 손잡고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o 역사 변화 발전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 - 희망의 인식, 희망의 실천
역사를 통하여 배워야할 중요한 내용은 긴 역사의 흐름을 볼 때 역사는 제 갈 길을 향해서 여기까지 왔으며 앞으로도 가야할 곳으로 갈 것이라는 인식이다. 역사에서 때로는 정체와 후퇴의 시기도 있었지만 끊임없이 변화해왔고, 지금 여기의 현실은 고정불변한 완결체가 아니라 변화 과정의 일부이며, 앞으로도 있어야 할 것을 있게 만들고 없어야 할 것을 없게 만드는 노동과 투쟁, 창조와 파괴를 통하여 변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과 인식을 통하여 희망을 얻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실천해도 안된다면 지금 여기서의 투쟁은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역사를 통하여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ㅇ자연의 변화에서도 희망을...
변화를 통한 희망은 자연을 통하여도 배울 수 있다.
■ 해돋이와 해넘이
아침마다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고 저녁이면 서산 넘어로, 서해 바다로 해가 진다. 어둠이 주위를 감싼다. 그러나 새벽이 오지 않는 밤은 없고,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온다. 천둥번개치며 비가 퍼붓는 칠흙같은 밤길을 걸을 때, 어디선가 공포스런 소리가 끊이지 않는 칠흙같은 밤이 계속된다면 그 밤을 버텨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태양보다 먼저 새벽은 오고 다음날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른다.
■ 먹장 구름과 푸른하늘
지금 하늘에는 먹장 구름이 짙게 덮여있지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구름을 밀어내면 그 위로는 언제나 늘푸른 하늘이 있다.
■ 가을 낙엽과 눈꽃, 봄
가을이면 너른 잎 활엽수 나무들은 봄에 새잎을 틔워 한여름 손바닥처럼 펼쳤던 자기의 잎들을 자기의 몸에서 떼어낸다. 낙옆이 진다. 그 넙적넙적한 잎들을 달고 한겨울 내리는 눈을 다 받아 이고있다면, 꽁꽁얼어붙은 가지와 잎파리 위로 눈보라 세찬 바람이 몰아친다면, 그 잔가지들은 부러지고 찢어 지고 말 것이다. 엄동설한 겨울을 버텨나려고 나무는 잎을 자기 몸에서 떼어 버린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욕망과 욕심을 버리고 가진 것까지 덜어내야 모진 세월을 견디고 버티고 이겨낼 수 있으리라. 버리고 비워야 더 채울 수 있다. 버리고 비워야 더 채울 수 있다. 그리고 한겨울에도 나무는 더 단단하게 자라면서 얇지만 단단한 나이테를 만든다. 겨울은 깊어가고 겨울이 깊을수록 봄은 가까이 온다. 봄이 오지 않는 겨울은 없다.
계절이 바뀌어 단단한 바위틈새에서도 새싹이 자라고 봄 꽃이 봄을 알린다.
ㅇ사회 역사의 새벽과 봄, 해방은?
사람사는 세상의 새벽과 봄도 언젠가는 올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새벽과 봄처럼 시간이 흘러가면 자연히 오거나 예측 가능하지 않다. 하기는 지금처럼 인간들이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가 계속된다면 자연의 새벽과 봄도 오지않을지도 모르지만...사회와 역사의 새벽과 봄은 역사의 흐름을 알고 역사의 갈 길을 따라 사람들이 노력하고 실천할 때 가까이 올 것이다. 그 노력과 실천의 핵심은 역사의 단계에서 요구되는 창조를 위한 노동과 낡고 썩은 질서를 깨트리기 위한 투쟁이다.
■ 모란 공원 이형관의 묘비
전태일 열사가 묻혀있는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에는 노동열사들의 무덤 뿐 아니라 민주화`통일운동 과정에서 숨져간 많은 열사들의 무덤이 있다. 그 가운데 이형관 학생의 무덤과 그 앞에 세워진 묘비가 있다. 묘비에 쓰여있는 글을 본다.
“선배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머리나 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일출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정과 준비없이, 통밥만 굴리고 이빨만 까서는 좋은 결과를 볼 수 없다는 내용이다.
2. 노동자 다운 생각을 가로 막는 매체와 선전
ㅇ어떠한 희망인가?
♩♪ 희망의 아침(이광수 작사, 홍난파 작곡)
'희망의 아침'은 1941년에 만들어진 행진곡 풍의 '힘찬' 노래이다. 3절 가사는 "대륙 이만리 대양 10만리 대아세아의 대공제국의 우리 일장기 날리는 곳이 자자손손 만대의 복누릴 국토"로 되어있다. 대동아 공영권의 확대와 영원무궁하게 일장기 날리는 세상이 희망의 아침, 소리높여 만세 부를 곳이라는 내용이다. 설명을 보태지 않아도 의도가 바로 들어나는 친일 노래이다.
'희망의 아침'은 이광수가 노래말을 만들고 홍난파가 작곡하여 일제가 널리 보급했던 1940년대 '국민가요'였다. 이광수가 적극 친일 행위를 한 사실은 알만큼 알려졌지만, '홍난파도 친일행위를 했다니?'하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음악 분야에서는 안익태가 애국가를, 홍난파가 봉선화를 작곡하였는데, 당시의 음악인들은 일제에 억눌린 민족의 감정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표현하였다"(1996년)고 서술하여 홍난파가 마치 대표되는 민족음악가인 것처럼 다루었다. 그러나 홍난파는 1930년대 후반 사상전향서를 발표하고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1941년 늑막염으로 삷을 마감함으로써 더 이상 친일활동을 할 수 없었지만, 그는 작곡 활동뿐 아니라 최대의 친일 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과 친일 음악단체인 '조선음악협회'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ㅇ처지에 따라 다른 관점과 이해 관계
■ 김홍도의 타작도 - 은폐·왜곡
■ 고구려 고분벽화 - 국수주의, 파시즘
■ ‘노사분규’ 선전 - 가부장적 가족주의
■ 걸프전 파병 - 시점 촛점의 차이
1991년 걸프전선에 의료지원단 파견을 보도한 사진들의 초점. 한국전쟁 뒤 ‘구직’ 청년.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해석과 평가와 의의가 달라진다. 역사와 사회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도 마찬가지다.
■ 금강산 댐, 평화의 댐 - 반공이데올로기
1993년 ‘금강산댐, 평화의 댐’에 관한 감사원 발표를 보도한 주요 일간지의 지면과 사진 배치
ㅇ머리-가슴-팔-다리-의식에서 행동으로
■ 만공탑 - 천사불여일행 - 백문·백견·백사·천사
-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 머리
- 백견불여일사(百見不如一思) - 가슴
-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 - 팔·다리·손·발
발딛고 있는 장소, 서 있는 곳 - 처지(處地), 입장(立場)
지금여기 서 있는 곳과 실천에 따라 인식에 차이
2. 선배 노동자들의 삶-투쟁-죽음
(1) 일본제국주의시기 노동운동의 발전
일제하 노동자계급의 형성은 18~19세기 조선봉건사회 말기부터 그 맹아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이 근대적 사회계급으로 형성된 것은 일제하 식민지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시기부터이다. 이 시기의 노동자들은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기아적 임금, 공장법 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수탈에 노동자들의 유일한 무기인 파업으로 저항하면서 자신들의 계급적 의식을 스스로 성장시켜 갔다.
1910년 일본제국주의의 독점적 식민지로 전락한 식민지조선은 1919년 3․1운동을 통하여 민족적․계급적 각성을 심화시키게 된다. 이후 조선의 노동자들은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등 전국적 노동운동단체를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초과이윤 착취에 대항하게 된다. 이러한 노동운동단체들은 항만․공업지대를 중심으로 산하 노동운동단체 또는 직업별, 지역별 노동조합 등을 조직하는 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전개된 대표적 파업사례는 1921년 9월 임금인하에 항거하여 5000여명의 부산부두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을 비롯하여 1923년 평양양말직공총파업, 1926년 1월에서 4월까지 전개된 목포제유공장노동자들의 파업투쟁, 1927년 영흥흑연광산노동자들의 파업투쟁 그리고 1929년 3개월에 걸쳐 전개된 원산총파업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원산총파업투쟁은 일본인 악질감독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로부터 비롯되었지만 민족적 차원을 넘어 최초로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지지와 연대가 이루어진 일제하 식민지시대 조선노동자들의 대표적인 파업투쟁이었다.
이후 1930년대 노동운동은 세계대공황과 일제의 전시경제체제로의 전환 속에서 불법화되고 한층 탄압이 거세어 가지만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라는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시기 서울을 비롯하여 인천, 원산, 부산, 평양 등 대공업이 발달한 지역을 중심으로 공장내에 공장반 --> 공장분회--> 산업별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이를 기초로 전국적 혁명적 노동조합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이무렵 전개된 대표적인 활동은 함남 흥남일대를 중심으로 4차에 걸친 '태평양노동조합사건(1930-35)'과 1933-36년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재유그룹의 활동이었다. 이재유그룹은 ‘경성트로이카’라는 전위조직을 결성하여 영등포, 용산 등 공장지대에서 노동자를 획득하여 화학․섬유․금속 등 산업별로 혁명적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식민지시기에 치열하게 전개된 노동운동은 해방후 마침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라는 전국적 산별노동조합 건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 전조선노농총동맹 창립(1924.4.20)
1924년 4월 전노선노농총동맹을 창립하고 찍은 기념사진. 노농총동맹은 전국 260여 노농단체와 5만 3천여 회원을 포괄한 전국조직으로 노동자·농민 계급을 해방하여 완전한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철저하게 자본가계급과 투쟁한다는 강령을 내걸었다. 노동자 농민의 사회적 처지가 점점 달라지고 계급의식이 높아지면서 조선노농총동맹은 1927년 9월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립하였다.
■ 원산총파업(1929.1-4)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원산의 2천 여명의 노동자가 80여 일 동안 계속한 파업투쟁. 원산의 노동자들은 한 개피의 담배, 한 잔의 술, 허튼 낭비도 반동이라고 선언하고 금연 금주와 1일 2식을 하면서 2400여 가마에 해당하는 파업기금을 뫃고 파업투쟁을 벌였다. 원산 총파업은 1920년대 노동운동을 결산하면서 30년대 새로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다리를 놓은 식민지 최고의 파업투쟁이다.
원산의 노동자들은 장기 싸움에 대비한 파업 자금의 비축 “한 잔의 술, 한 개피의 담배, 한 푼의 낭비도 반동” - 1일 2식과 금연 금주운동. 파업기금 1만2천 원 마련(쌀 한가마에 5원)
1929년 2월 7일 김경식 위원장을 포함하여 20명이 잡혀 들어갔다. 원산노련은 2월 9일 원산총파업의 진상을 조사하려고 내려온 변호사 김태영을 직무대행으로 선출. 직무대행 김태영은 총독부에 진정하고 원산경찰서에 조정을 청우원하는 등 타협적인 방법에 매달렸다. 일제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조건을 달지 말고 작업장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 그는 파업 배후에 ‘공산주의자가 관련된 혐의가 있다’고 몰아부치 일제의 위협에 굴복하여 파업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다.
■ 을밀대에서 농성하는 노동운동가 강주룡(1931.5)
1931년 5월 16일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에서 회사 쪽이 일방적으로 임금을 내리겠다고 통고하자 노동자들이 격분하여 파업을 시작하였다. 28일 밤, 파업이 시작된 뒤 공장을 점거하고 시위를 계속해오던 노동자들이 餓死동맹을 결의하자 기업주가 경찰을 불러들여 노동자들을 회사 밖으로 내 쫓았다. 회사에서 쫓겨난 강주룡은 광목을 사가지고 한밤중에 을밀대로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하였다. 그는 일제가 얼마나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탄압하는지 고발하면서 9시간 반 동안이나 외치고 외쳤다.
우리 49명은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국은 평양의 2천3백 명 고무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뿐입니다.
그때 신문들은 ‘평양 을밀대 체공녀 돌현’(동아일보), ‘을밀대 옥상에 올라가 파업선동’(매일신보), ‘아사동맹을 시작 을밀대에서 철야 격려’(조선일보)라고 제목을 뽑아 강주룡의 농성을 보도했다. 경찰에 잡혀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사흘넘게 말한마디 하지 않고 먹지 않고 버티다 풀려났다. 풀려난 뒤에도 계속 파업단 대표로 활약하다 ‘평양적색노조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구속되었다. 역시 비타협적으로 버티던 강주룡은 극심한 ‘정신 쇠약과 소화불량’ 증세로 풀려나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동료 노동자 1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30대 초의 한창 나이로 숨졌다.
■ 식민지 노동운동가 이한빈 동지
1929년 함남 신흥탄광 습격사건으로 망명하다 1936년 검거되어 감옥에 있을 때의 이한빈 수형기록과 사진. 1946년 5월 1일 메이데이 행사를 앞두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에 실린 허성택의 연설문에 소개된 이한빈 이야기.
“특히 여러분에게 소개하려는 것은 함남 신흥 출생 이한0(李翰0) 동지는 1929년 신흥 탄광 습격 사건으로 망명하다가 1936년 검거되어 5년형을 마치고 강도 일제가 만들어 놓은 정치 예방 구금소에 구금됨으로부터 ‘정치 운동자를 내놓아라’ ‘예방구금소를 철폐하라’ ‘야만적 박해와 비인간적 취급을 하지 말라’는 등 7개 요구를 들고 두 번 단식 투쟁에 적지 않은 승리를 하였으나 놈들은 제일로 미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온갖 모략, 위협, 00 무고와 테러를 하였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하여 1943년 3월 1일에 단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놈들은 단식한지 20여일 후에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국 일본에 반역자임으로 죽이라고 말로서 다할 수 없는 능욕을 가하였습니다. 그는 단식한지 백 오일 만인 6월 13일에 39세를 최기(最期)로 영원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뼈만 남았던 그는 죽기 삼일 전에 나에게 부탁하기를, 나는 더 살 수 없으니 나의 뒷일을 동무들이 계승하여 조선 독립을 완성하기를 바라며 만일 동무가 살아 나가거든 동무들에게 일제가 이같이 나를 죽인 것을 전하여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고 기회를 얻지 못하여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지 못하고 오늘 이 기회에 소개합니다. 그는 적과 가장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비참하게도 장렬한 전사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선배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이와 같이 싸웠습니다. 우리들은 선배들의 위대하고 장렬한 투쟁을 본받아 이 기념을 통하여 더욱 굳게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2) 해방직후 노동운동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노동자들은 경제적 고통과 대량실업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고, 공장을 접수하여 공장관리운동을 벌였다. 이를 기반으로 1945년 11월 5일에는 노동자들의 전국 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결성하였다.
노동자들은 전평을 중심으로 산업건설에 협력하였으나 그들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미군정의 노동운동 탄압도 계속되었다.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1946년 9월 철도노동자들이 앞장서고 전평 산하 주력 노동조합이 참여하여 전국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9월총파업은 10월 1일 ‘대구사건’을 계기로 일반 대중들이 참여하는 10월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1948년 2월 전평은 미군정․우익세력이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음모에 맞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입국을 반대하는 2.7 총파업 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또 5.10 남한단독선거에 반대하는 투쟁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군정과 우익세력은 단선 단정 과정에서 전평을 집중하여 탄압하였다. 전평은 남한에 이승만 정권이 세워지자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다. 전평 노동운동의 지향과 경험이 철저히 제거된 공간에 대한노총이 자리를 차지하고 체제에 복종하는 어용노동조합운동을 벌였다.
■ 해방의 기쁨과 감격
■ 미군의 진주와 미군정, 친일파의 부활
♩♪ 해방의 노래(김순남 곡)
1.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 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2.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여 놈들에게 빼앗겼든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 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 1946년 9월 총파업
9월 총파업은 1929년 원산 총파업 이후,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노동자 투쟁이었다. 9월 총파업은 미군정이 그것을 ‘전쟁 상황’으로 인식하고 대응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강력했던 파업이었다.
9월 총파업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해방공간에 그토록 강력하고 역동적인 노동운동의 힘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며, 3.1운동이래 최대의 민중봉기였던 ‘10월 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6년 미군정의 민중탄압과 미곡정책에 항의하는 민중의 불만과 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남한 민중과 미군정의 대립은 조공의 신전술의 영향을 받아 9월 총파업으로 발전하였다.
미군정은 강력한 조직적 주체 역량을 가진 전평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전평 내에서 가장 강력한 공공부문 단위 노조인 「철도노조」를 파괴하려 하였다. 미군정청 운수부는 9월 초 ‘적자타개와 노동자 관리의 합리화’라는 산업합리화 정책을 운수부 종업원의 25% 감원과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려고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철도국 서울 공장 노동자들 3천7백 여명은 1946년 9월 13일 ‘노동자대회’를 열어 가족수당과 물가수당 인상, 일급제 반대, 식량배급 증대, 해고 절대 반대, 임금인상 등의 경제적 요구를 제시하고, 21일까지 회답이 없으면 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통보하고 태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청 운수부장 코넬슨은 “인도 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를 먹으니 행복하다”면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거절하였다. 이에 분노한 부산 철도 노동자 약 7천여 명이 23일 오후 1시부터 가장 먼저 파업투쟁에 들어갔다.
같은 날 전평은 철도 총파업을 전국의 모든 공장과 사업체의 총파업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파업을 지도하였다. 전평이 총파업선언서에 제기한 요구사항은 이렇다.
쌀을 달라. 노동자와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
물가등귀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전재민,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달라!
공장 폐쇄,해고 절대 반대!
노동운동의 절대 자유!
일체 반동테러 배격!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민주주의운동의 지도자에 대한 지명수배와 체포를 즉시 철회하라!
검거 투옥중의 민주주의 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라!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립대학교안을 즉시 철회하라!
해방일보, 인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중의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을 석방하라!
25일에는 출판노조가 파업에 돌입했고, 같은 날 대구우편국 종업원 4백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23일 철도노조에서 시작한 파업은 10월 초까지 출판, 금속, 체신, 섬유, 전기, 해원 등 각 산별노조 조합원들이 참가하여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확대되어 25만여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가하였다.
■ 두 개의 정부
■ 한국전쟁과 분단시대
■ 이승만 독재의 끝 - 4월 혁명
(3) 60․70년대 노동운동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월 혁명의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실업자 구호를 요구하였고, 언론, 금융, 교직 분야의 노조 결성과 노조 민주화운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실업자운동과 교원노조의 설립 투쟁은 4․19시기 노동운동의 특징적인 모습이었다.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거머쥔 군사정부는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한편, ‘경제개발에 적극 협력하는’ 어용 한국노총을 설립하였다.
1960년대 경제 성장 정책은 노동자들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하였다. 처참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깨드리려는 전태일 분신을 계기로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 신규노조결성 투쟁, 민주노조 사수투쟁을 비롯하여 노동조합 조직의 민주화와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같은 경제투쟁이 중심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동자투쟁은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동력이 되었으며, 80년대 민주노동운동의 디딤돌이 되었다.
■ 5.16 군사쿠테타와 박정희 정권
■ 국민교육헌장
■ 전태일 열사의 분신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40분쯤,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한 재단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면서 청계천 평화시장 앞길에 쓰러졌다. ‘그늘과 그늘로 옮겨 다니며 자라온’ 23살 노동자 전태일. ‘대학생 친구 하나 없이’ 근로기준법을 혼자 공부하면서 ‘바보회’를 만들어 참담한 노동조건에 맞서 싸웠던 전태일. 그가 스스로 몸을 불태워 이 땅에 저항하는 노동자가 있음을 역사에 알렸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전태일 1970년 8월 일기)
■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9호
■ 동일방직 노동조합 똥물투척 사건(1978.2)
1972년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동일방직 노동조합은 한국 최초로 민주적인 여성지부장을 선출하였다. 회사측의 극심한 탄압에 대항하여 1976년에는 ‘나체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마침내 1978년 2월에는 민주노조를 깨트리려고 남성 노동자(?)를 동원하여 똥물을 퍼부기까지 하였다. 동일방직 조합원들은 “배우지 못해 아는 것은 없지만 불의와 타협할 수 없었고, 가난하게 살아 왔지만 똥을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하고 외쳤다.
■ YH노동조합원들의 신민당사 점거농성(1979.8)
1966년 자본금 100만원과 종업원 10명으로 시작한 YH무역회사는 1970년에는 4천여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국내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하였다. 회장 장용호가 미국으로 돈을 빼돌리고 빚을 갚지 않아 사세가 급속도로 기울어지자 1979년 폐업을 단행하였다. “배고파서 못살겠다!”, “일자리를 달라!”, “위장폐업 철회하라!”고 외치던 노동자들은 8월 9일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하였다. 8월 11일 새벽 신민당사에 진입하여 폭력으로 농성자를 연행하는 과정에서 21살 김경숙 양이 목숨을 잃었다. YH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은 김영삼 총재 제명, 부마항쟁, 10·26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유신지배체제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 부마 항쟁과 유신체제의 종말
■ 광주민중항쟁
♩♪ 임을 위한 행진곡
1982년 광주에서 만들어져 1990년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노동자 민중의 애국가 처럼 부르고 있는 민중가요이다. 1987년 6월항쟁, 7·8·9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 70년대와 80년대 초반 운동가요 가운데는 찬송가나 미국, 남미의 인권가요 또는 흑인 영가에서 곡을 빌려온 것이 많은 데 ‘임을 위한 행진곡’은 동아시아 활동가들의 모임에서도 함께 부를 정도로 ‘수출’되는 노래이기도 하다.
1980년 광주항쟁은 80년대 내내 그리고 1995년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 노태우를 감옥에 집어 넣을 때까지 이 땅 민주 민중운동의 끊이지 않는 샘, 마르지 않는 저수지 노릇을 하였다. 끝까지 투쟁하는 역사의 주체가 노동자 민중임을 일깨워 주었고, 계엄군의 투입을 승인하고 전두환 정권을 인정한 미국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5월 27일 도청이 함락된 뒤 1981년까지도 광주의 학살과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엄척난 패배감 자괴감과 죄의식에 떨게하였다. 이를 벗어나고자 황석영과 극회 ‘광대’에 모여 있었던 광주지역 연행예술운동패 성원들은 시민군 대변인으로 도청에서 전사한 윤상원 열사와 들불야학을 같이하다 1979년 연탄가스로 숨진 후배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을 준비하였다. 그 때 만든 노래굿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삽입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작곡자는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을 부른 김종률이다. 80년대 전반까지도 이 노래의 작사자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아 민중가요집에 김종률 작사 작곡으로 노래가 실려있었다. 뒤에 1980년에 쓴 백기완의 「가신 님」 「우리들의 합창」에서 따와 노래말로 가다듬은 것임이 알려져 지금은 백기완 시 김종률 곡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리리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갈대마져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4) 198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과 구로동맹파업
1980년대 초 전두환정권의 폭압적인 탄압으로 무너졌던 노동운동은 차츰 70년대 민주노동조합운동을 복원하는 한편, 광주민중항쟁의 처절한 경험을 통하여 새로운 변혁적 노동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83년말 유화조치 뒤부터 그동안 가라앉아있던 노동자들의 불만과 요구가 다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5월의 사납금 인하를 요구하는 대구 택시노동자들의 시위와 농성, 200여개에 걸친 신규노동조합의 결성, 임금인상 요구 투쟁이 벌어졌다. 1985년 4월 대우자동차의 파업.농성투쟁은 대공장 노동자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설 것을 예고했다. 1985년 6월 구로지역의 10개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가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으로 커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민주노동운동을 짓밟는 모든 노동악법철폐’, ‘구속자석방’, ‘임금동결정책 포기와 최저생계비 보장’, ‘집회 및 시위법의 철폐, 언론기본법의 철폐’같은 정치적 제도개혁까지 요구한 구로동맹파업은 80년 전반기의 노동운동이 집약된 결심임과 아울러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정치적 동맹파업이었다.
♩♪ 아 대한민국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총칼로 짓밟고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의 사회정화위원회에서 ‘국민들에게 주인의식을 고취시키자’는 의도로 1983년에 주문하여 만든 노래이다.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정수라는 이 노래로 그해 MBC 10대가수 신인상을 안게되었다. 1983년은 전두환 정권이 폭력 통치에 따른 모순의 심화를 ‘유화정책’을 통하여 바꾸어 나가려던 시점이었고, 아 대한민국은 그 일환으로 만들어진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화국면에서도 노동자 민중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고 있었다. 1980년대 전반의 상황이 누구나 원하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었던가.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드는 산과 들
우리의 마음속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 ...
이 노래는 그렇지 않은 현실을 철저하게 왜곡하고 은폐하며 대중에게 허위의식을 불어 넣어주는 체제중심 대중가요였다. 그 즈음 공해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때라 이 노래를 ‘아, 공해민국’이라고 노래가사를 바꾸어 부르기도 했고(노가바), 더 쉽게는 사이사이에 ‘돈 있으면’을 넣어 부르면서 이 노래의 허구성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 구로노동자 동맹파업(1985.6)
1986년 6월22일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간부들의 구속에 대응하여 6월 23일부터 29일까지 10개 사업장 2500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동맹파업. 50년대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이었으며, 투쟁의 성격 또한 초보적이나마 정치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 노동운동사상 하나의 획을 긋는 투쟁이었다.
(5)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노동운동의 발전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4`13 호헌조치’에 맞서 전국민이 참여하는 6월항쟁이 일어났다. 6월 10일, 운동세력들은 명동성당 점거농성투쟁을 계기로 격렬한 가두투쟁을 벌였다. 사무직 노동자와 중소상인들이 폭넓게 참여하였으며 투쟁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로 번져갔다. 이에 당황한 전두환정권은 직선제 개헌안을 받아들인다는 6`29선언으로 부분적인 양보를 했다. 민중이 대규모로 참여한 6월 항쟁은 노동자 계급이 조직적으로 참가하지 못하였고 보수야당의 영향력을 무력화시키지는 못했다.
6` 29선언 뒤 보수 정치권과 ‘민주화운동세력’이 주춤하는 사이 맨 처음 투쟁의 불길을 지핀 것은 노동자였다. 노동자 투쟁은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가 민주노조 결성과 파업투쟁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번졌다. 이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전쟁 뒤에 벌어진 투쟁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컸다. 노동자 가운데 독점재별 계열 기업을 비롯한 대공장 노동자가 투쟁을 이끌었다. 선진노동자에서 노동자 대중으로 투쟁이 번지고 서비스 사무직 노동자들이 노동운동 대열로 들어오면서 노동운동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 노동자 대투쟁은 8월말부터 정부의 강경탄압으로 차츰 수그러들다가 9월 중순 무렵에는 거의 끝맺었다.
노동자들은 확대된 공간을 바탕으로 한국노총과 구분되는 민주노조의 전국조직을 건설하려 했다. 마산` 창원 등 각 지역에서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잇달아 건설했다. 마침내 1990년 1월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을 건설했다. 전노협에 포괄되지 않은 비제조업부문 노조 가운데 사무금융노련` 병원노련` 전문기술노련` 언론노련 등은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를 구성했다.
이렇게 활성화되던 노동운동은 1989년 노태우정권이 만든 ‘공안정국’의 폭력적 탄압과 ‘현존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국제정세 속에서 차츰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총자본의 집중적인 탄압과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도 1990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과 91년 5월 총파업투쟁 등이 줄을 이었다. 전노협은 노동운동 탄압분쇄 투쟁과 노동법 개정투쟁 등을 이끌면서 노동운동의 큰 줄기를 이어갔다. 이를 바탕으로 1995년 11월 11일 업종과 지역의 50만 노동자를 아우르는 민주노총이 닻을 올렸다.
김영삼 정권이 1996년 12월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것에 맞서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벌였다. ‘날치기 통과’가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을 반영한 지배세력의 정치공세였다면, 96-97년 노동자 총파업 투쟁은 지난 10년동안 쌓아온 민주노조운동의 반격이었다. 이 총파업은 전국적인 ‘정치적 총파업’이었으며 정권과 자본이 ‘신경영전략’을 관철시키려는 것에 맞선 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노동자 대중의 투쟁력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과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을 주도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 87년 7·8·9노동자투쟁 - 울산 현대의 노동자 군단(1987.8.18)
6월항쟁으로 열린 정치 사회적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생존권 보장과 노동현장의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7-9월 3개월에 걸쳐 대규모의 파업투쟁을 전개하였다.
노동자 파업투쟁은 독점재벌의 심장부인 울산에서 타올랐다.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가 민주노동조합을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현대 그룹 전체에 민주노조가 결성되었다. 독점재벌과 정부는 어용노조를 만들어 민주노조를 방해했지만 노동자들은 파업과 농성으로 맞서며 울산지역 전체 노동자의 연대투쟁으로 이어갔다.
울산에서 시작한 노동자투쟁은 곧바로 부산 마산 창원 거제 등지의 경남 공업지대와 전국의 공단지대로 퍼져나갔다.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을 뿐 아니라 대기업에서 중소기업, 중화학공업에서 경공업으로, 광공업에서 운수, 부두, 선원, 사무직, 전문직, 판매서비스직 등 전 산업으로 파급되었다.
8월 17일 울산 현대그룹 4만 노동자의 가두시위에서 정점에 오른 노동자 투쟁은 8월 22일 거제 대우조선의 이석규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뒤 더욱 격렬해졌다.
노동자들의 공세적 진출로 수세에 몰렸던 정부와 독점자본은 8월말 9월초부터 역공을 개시하였다. 자본가들은 권력과 언론을 방패삼아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빼앗고, 노동조합의 주요 간부를 강제로 납치하는가 하면, 심지어 폭력배인 파업깨기꾼을 동원하여 농성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키는 등 온갖 방업을 동원하여 민조노조의 설립을 방해하였다. 이 밖에도 정부는 자본가의 이해를 일방적으로 앞세우며 현대중공업, 대우자동차 등의 파업 현장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7, 8월 거세게 타올랐던 전국의 노동자대투쟁은 8월 말부터 정부의 강경 탄압으로 점차 수그러들다가 9월 중순무렵에는 거의 끝맺었다.
이 기간 동안 무려 3,337건의 쟁의가 일어났다. 8월 들어 하루에 400건이 넘는 쟁의가 일어났고, 20일에는 하루 500건, 29일에는 743건이 터지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절정에 이르렀다. 특히 종업원 1천 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75.5%에서 쟁의가 일어날 정도로 노동운동은 널리 일어났다. 노동자대투쟁은 6.29선언의 허구성을 그대로 드러내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진출을 알리는 거대한 물결이었다.
ㅇ 7-9노동자 대투쟁의 특징.의의.한계
① 전국 전 산업에 걸친 대규모 단기간 집중적 폭발 - 울산에서 시작해서 온나라를 들끓게 했던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전쟁 뒤에 벌이진 투쟁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노동자 1/3가량이 참가해서 3300건 남짓 벌인 투쟁에서 노동자야말로 생산의 원동력이며 사회 변혁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② 노동자 가운데 독점재벌 계열기업을 비롯한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이 경공업, 중소기업, 여성노동자 사업장 투쟁을 이끌었다. 지난날 중소기업과 여성이 많은 사업장에서 투쟁을 많이 벌인 것에 견준다면 커다란 변화였다. 이것은 앞으로 대공장이 노동운동의 요새로 탈바꿈할 토대가 마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선진노동자에서 노동자대중으로 투쟁이 번지고 서비스 사무직 노동자들이 노동운동 대열로 들어오면서 노동운동의 폭이 더 넓어졌다. 나아가 노동자 가족들이 참여하는 일도 많았다.
③ 노동자들은 주로 파업을 무기로 삼았지만 곧잘 농성과 가두 시위로 나아갔다. 규찰대를 조직하고 구사대나 전투경찰 백골단 따위와 드러내놓고 싸우기도 했다. ‘노동쟁의 조정법’의 쟁의 발생신고나 냉각기간 따위를 무시한 채 먼저 현장을 점거하고 파업농성을 한 뒤 나중에 협상하는 ‘탈법투쟁’이 많았다. 이것을 두고 노동부 쪽에서는 “노동자가 준법정신이 없어서”(조선일보 1987년 8월 4일)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자에게 냉각기간을 지키자고 말했다가는 돌팔매를 맞기가 십상”(조선일보 1987년 8월 4일)이라는 노조대표자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노동자들은 이 법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거의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④ 마치 전국총파업을 벌이 듯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대중이 생활에서 느끼는 여러 모순을 없애려고 스스로 싸움터로 나섰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대투쟁은 광범위한 노동자들을 단련시키고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 대투쟁이 ‘인간적 대우’부터 ‘임금인상’과 ‘민주노조쟁취’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건 경제투쟁이기 때문에 커다란 한계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대중파업은 경제적 영역에서 정치적 영역으로 또는 정치적 영역에서 경제적 영역으로 거의 느낄 수 없게 옮겨간다. 모든 정치행동의 물결 뒤에는 수많은 퇴적물이 남는데, 그 퇴적물 위에서 경제투쟁이 싹을 틔운다. 물론 거꾸로 일이 진행되는 수도 있다. 사실이 이렇다면 6월 항쟁이라는 정치행동 뒤에 노동자들이 생활에서 나타난 요구들을 내세우며 싸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⑤ 6· 29선언 뒤 중간층이 민주화투쟁을 멈추거나 뒤로 물러섰지만 노동자들이 투쟁에 앞장선 것을 볼 때 끝까지 투쟁할 세력은 노동자뿐이라는 사실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힘과 단결의 의미를 자각함으로써 사회적 무력감이나 패배주의를 상당한 정도로 깨달을 수 있었다. 요즈음 노동자 계급을 제쳐두고 사회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난 날 역사에서 다시 배워야 한다. 또 개량을 마구 외쳐대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조그만 개량마저도 노동자 자신들이 투쟁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었던 87년 역사나마 곱씹어야 한다.
⑥ 대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지도자나 활동가에 의해 계획되고 지도된 쟁의라기보다 일반 노동자의 자연발생적인 욕구분출에 따른 쟁의가 빈번하였다. 몇 사람의 제의에 수십명이 모여 곧바로 파업과 농성으로 들어가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투쟁을 전개하는 경우가 흔했다. 일반 노동자들의 노동자 의식은 극히 초보적인 권리의식과 연대의식을 넘어서지 못하였으며, ‘외부세력’의 개입에 대해 국가 자본의 논리에 함몰되어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처럼 조직적 지도력이 취약하였기 때문에 강고한 투쟁을 벌이고도 그것을 광범한 조직적 역량으로 결집시키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운동에서 조직적 지도력의 중요성과 연대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⑦ 쟁의의 요구사항이 단위 사업장 내에서 임금인상에 집중(70%)되었고, 지역별 산업별 연대 통일 투쟁이 전면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고, 나아가 민중운동과의 연대가 부족하였다.
■ 전국노동자대회(1988.11.13)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 노천 강당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 전국의 5만여명의 대중이 결집하여 한국전쟁이후 최대의 노동자대회를 열었다. 연세대부터 여의도까지 행진하는 행렬의 첫머리에는 노동자들이 피로 쓴 ‘노동해방’ 깃발이 자리를 잡았다. 여의도에 도착한 노동자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개폐 촉구대회’를, 전경련 앞에서 ‘노동악법 옹호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를 열었다.
■ 지하철 파업투쟁(1989.3.16)
1989년 3월 16일 일반직, 기능직, 고용직 사이의 차별적인 직급체계를 통일하는 직제개편을 요구하며 벌인 파업투쟁. 파업을 벌이기 전 3월 6일부터 9일까지 시민과 연대하여 무임승차투쟁을 벌였다.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 1만 5천여 명이 투입되었으며, 노조원 1천여명 징계, 5명 파업, 30명이 구속되었다. 경찰이 투입된 뒤 지하철 노조는 민주당사와 평민당사에서 1주일간 농성을 하였고, 현장에 복귀한 노동자들도 일주일 동안 파업을 계속하였다.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창립(1989.5.28)
1989년 5월 28일 연세대에 1천 5백여 명의 교사들이 모여 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발대식. 전국의 교사들은 86년 5월부터 시작한 교육민주화선언, 87년 9월 27일 전국교사협의회 결성, 88년 9월 3만8천6백43명이 서명한 교육법개정안 국회 청원의 성과를 모아 89년 5월 14일 발기인대회를 거쳐 5월 28일 민족·민주·인간화 교육 실천을 위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창립하였다. 1550여 명의 해직교사, 67명의 구속자를 낳았지만 전반적인 교육 개혁과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토대를 쌓았다.
■ 전노협 창립대회(1990.1.22)
1990년 1월 22일 낮 12시 40분 성균관대 수원캠퍼스에서 열린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대회. 전국의 대의원 4백여명이 참석하여 창립대회를 열고 초대 위원장에 단병호(41)를 선출하였다.전노협에는 전국 14개 지역노조협의회와 2개 업종노조협의회에 속한 6백여개 단위노조 조합원 20여 만명이 가입하였다. 차별임금 철페, 고용안정 보장, 안전한 작업환경, 노동 3권 완전 쟁취, 여성노동자 차별 처폐 등 12개의 강령을 내세우고, 자신의 깃발 위에 ‘평등세상 앞당기는 전노협’을 뚜렷하게 새겨 놓았다.
■ 삼당합당-민자당 창당(1990.1.22)
♩♪ 우리들의 죽음(정태춘 글.곡) 1990.3
(낭송) “맞벌이 영세 서민 부부가 방문을 잠그고 일을 나간 사이 지하 셋방에서 불이나 방 안에서 놀던 어린 자녀들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질식해 숨졌다. 불이 났을 때 아버지 권씨는 경기도 부천의 직장으로, 어머니 이씨는 합정동으로 파출부 일을 나가 있었으며 아이들이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방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바깥 현관문도 잠가 둔 상태였다. 연락을 받은 이씨가 달려와 문을 열었을 때, 다섯 살 혜영양은 방 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군은 옷더미 속에 코를 묻은 채 숨져 있었다. 두 어린이가 숨진 방은 3평 크기로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와 비키니 옷장 등 가구류가 타다만 성냥과 함께 불에 그을려 있었다. 이들 부부는 충남 계룡면 금대2리에서 논 900평에 농사를 짓다가 가난에 못이겨 지난 88년 서울로 올라 왔으며, 지난해 10월 현재의 지하 방을 전세 4백만원에 얻어 살아왔다. 어머니 이씨는 경찰에서 평소 파출부로 나가면서 부엌에는 부엌칼과 연탄불이 있어 위험스럽고, 밖으로 나가면 길을 잃거나 유괴라도 당할것 같아 방 문을 채울 수 밖에 없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평소 이씨는 아이들이 먹을 점심상과 요강을 준비해 놓고 나가 일해 왔다고 말했다. 이들 사는 주택에는 모두 6개의 지하방이 있으며, 각각 독립구조로 돼 있다. ”
(노래)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춮부 나가고
지하실 단칸방엔 우리 둘이서 아침 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방문은 밖으로 자물쇠 잠겨있꼬, 윗목에는 싸늘한 밥상과 요강이
엄마, 아빠가 돌아올 밤까지 우린 심심해도 할 게 없었네
낮엔 테레비도 안 하고 우린 켤줄도 몰라
밤에 보는 테레비도 남의 나라 세상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안나와 우리 집도, 우리 동네도 안나와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밥은 다 먹어치우고 오줌이 안 마려우데도 요강으로
우린 그런 것 밖엔 또 할 게 없었네, 동생은 아직 말을 잘 못하니까
후미진 계단엔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고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말야
옆방에는 누가 사는지도 몰라 또 어쩌면 거긴 낭떠러지인지도 몰라
성냥불은 그만 내 옷에 옮겨 붙고, 내 눈썹, 내 머리카락도 태우고
여기 저기 옮겨 붙고 훨, 훨 타올라 우린 놀란 가슴, 두 눈에도 훨, 훨
방문은 꼭꼭 잠겨서 안 열리고 하얀 연기는 방 안에 꽉 차고
우린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만 흘렸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낭송 1)
엄마, 아빠! 우리가 그렇게 놀랐을 때 엄마, 아빠가 우리와 함께 거기 있었다면 ···
(낭송 2)
우린 그렇게 죽었어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 함께 있었다면 ··· 아니, 엄마만이라도 함께만 있었다면 ··· 아니, 우리가 방 안의 연기와 불길 속에서 부둥켜 안고 떨기 전에, 엄마, 아빠가 보고싶어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기 전에, 손톱에서 피가 나게 방 바닥을 긁어대기 전에, 그러다가 동생이 먼저 숨이 막혀 아푸러지기 전에,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 함께만 있었다면 ··· 아니야, 우리가 어느 날 도망치듯 빠져나온 시골의 고향 마을에서도 우리 네 식구 단란하게 살아 갈 수만 있었다면 ··· 아니, 여기가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내리는 그런 나라였다면 ··· 아니, 여기가 엄마, 아빠가 주인인 그런 세상이었다면 ··· 엄마, 아빠! 너무 슬퍼하지마 이건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냐,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냐 여기, 불에 그을린 옷자락의 작은 몸둥이, 몸둥이를 두고 떠나지만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천사가 되어 하늘 나라도 가는거야 그런데 그 천사들은 이렇게 슬픈 세상에는 다시 내려 올 수가 없어 언젠가 우린 다시 하늘 나라에서 만나겠지 엄마, 아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가장 예쁜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어 엄마, 아빠···엄마, 아빠···이제, 안녕 ··· 안녕···
■ 1993년 메이데이 집회(1993.5)
1993년 5월 1일 연세대에서 3만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치룬 5·1절 메이데이 집회. 이승만 정권이 1958년 10월에 5월1일 노동절을 3월 1일 어용 대한노총 창립일로 바꾸고, 1963년 박정희 정권이 이름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꾼 뒤 35년만에 공공연하게 연 5·1 세계노동절 기념집회였다. 1985년부터 빼았겼던 메이데이 노동자의 날을 다시 찾으려는 끊임없는 투쟁의 성과이기도 하였다.
■ 민주노총 창립(1995.11.11)
1995년 11월 11일 연세대 강당에서 전국에서 모인 대의원들이 조합원들의 뜻을 대표하여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을 창립하였다. 민주노총에는 15개 산업별(업종) 조직과 8백 61개 노조 조합원 41만 8천 154명이 가입하여 3공화국 이후 처음으로 복수노총 시대가 열렸다. 민주노총 창립은 87년 이후 계속된 민주노조운동노선의 승리였으며, ‘민주노조 총단결’ 구도가 1차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민주노총 창립선언문은 “자! 자본과 권력의 어떠한 탄압과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민주노동조합연맹의 깃발을 높이들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 보장되는 통일조국, 민주사회 건설의 그 날까지 힘차게 전진하자!”고 마무리 짖고 있다.
■ 민주노총 창립 노동자대회 행진(1995.11.12)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을 창립하고 다음날 민주노총은 연세대에서 여의도까지 행진하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창립 노동자대회를 열었다. 금속노동자들이 ‘건설! 금속연맹’, ‘강화! 민주노총’, ‘쟁취! 산별노조’, ‘제정! 5·18특별법’, ‘철폐! 노동악법’, ‘석방! 구속노동자’라고 쓴 플랭카드를 높이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루어진 것은 무엇이고 이루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 96년말 -97년초 총파업 투쟁
문민정부가 들어선 93년 뒤부터 김영삼 정부는 노동운동 진영의 온건노조 지도부의 입지를 살려주려고 그들에게 복수노조를 허용할 수도 있다는 시늉을 했다. 경총을 비롯한 자본가 단체들은 ‘재야 노동계’에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만약 복수노조가 허용된다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등과 쟁의 제한 규정들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추세는 1994년부터 본격화되었고 1996년에 ‘노개위’(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발족되었다.
1996년 12월 26일 신한국당의원 150여명이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 개정안을 포함하여 11개법안을 날치기로 통과했다.
ㅇ 개악노동법의 주요 내용
가) 착취 강화--변형근로시간제, 정리해고제
나) 노조 무력화--- 대체근로제, 무노동 무임금, 전임자 임금 지급 않는 것,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 제한
다) 민주적이고 전투적인 민주노조운동 기풍을 말살 - 교섭권과 체결권을 일원화, 비공인 파업금지 등.
ㅇ 파업의 전개과정
ㅇ핵심 공공부문의 파업을 시한부 파업으로 한정; 12월 29일 저녁 지하철 노동조합 집행부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파업 유보 --> 한국통신노동조합 집행부 파업불참 결정, 파업을 진행하고 있던 자동차와 금속 노동자들의 기세가 꺽이는 계기가 되었다.
ㅇ신정연휴 뒤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파업을 부분 파업으로 바꾸어 몇몇 핵심적인 단위노조 집행부가 총파업 대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
ㅇ1월 15일부터 다시 시작된 ‘3단계 총파업’ - 총파업이 최고조에 올라 부분파업이 벌어지면서 전국에서 공권력과 직접 대결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 시기동안 총파업 투쟁 대오는 최대치를 기록했고 총파업투쟁을 지지하는 각계각층의 참여 또한 확대되고 있었으며 민주노총은 정세의 주도권을 확실히 쥐고 있었다. 그러나 투쟁이 최고조에 오른 1월 17일에 민주노총은 3단계 총파업을 18일까지 진행하고 ‘수요파업’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것은 총파업을 접기 위한 절차나 마찬가지였다.
‘수요파업’으로 전환한 뒤 노동법 개정의 장은 공장· 거리에서 국회로, 개정하는 주체는 노동자계급에게서 ‘정치권’으로 바뀌어 버렸다.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정세가 급격하게 바뀌었으며 그와 함께 개별 사업장에서는 자본의 공격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무노동 무임금, 손해배상 청구, 고소, 고발, 징계, 해고에 이르기까지 그 수단은 실로 다양하였다.
ㅇ 2월 28일부터 시작된 ‘4단계 총파업’ - 여야 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민주노총은 권영길 위원장의 지시대로 총파업에 들어갔다. 2월 28일이었다. 그러나 1시 뒤부터 4시간 시한부 파업이었고 공공부문은 참가하지 않았다. 이 파업에 10만 남짓 참가했다고 하지만, 대부분 사업장에서 파업참가율이 떨어졌기 때문에 총파업의 위력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4단계 총파업은 대국회 압력용으로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채, 3월 8일 여야가 합의한 기만적인 노동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민주노총은 3월 28일 종묘집회에서 임금투쟁을 앞당겨 배치하고 대통령선거까지 노동법문제를 연계시켜 대선에서 심판하겠다는 입장을 내놓는 것으로 총파업을 마무리하였다.
■ IMF 구제 금융과 김대중 정부 출범
■ 1998년 메이데이 투쟁(1998.5)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정부가 수립된 뒤 처음으로 최루탄이 난사됐던 5월 1일 종묘공원 메이데이 집회에 등장한 ‘구직’ 깃발. 97년 12월 3일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아래 400여 만명에 이르는 실업자가 발생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구직이라는 글자는 한국전쟁이후 ‘求職’ 팻말을 가슴에 두르고 시름에 겨워 벽에 기대있는 청년 실업자 사진에서 베껴 쓴 것같다. 그만큼 실업문제의 심각함을 보여주고 있다.
■ 1998년 현대자동차와 만도파업투쟁(1998.7-9)
■ 한라중공업 파업투쟁 (1999.8-10)
전라도 영암의 한라중공업 노동조합이 공장 출입문을 봉쇄하고 파업투쟁을 벌일 때 경비실에
써놓은 ‘노동자 세상이다’. 한라중공업의 플랜트 사업부 노동자 120명이 8월 10일부터 파업을 시작하였고, 8월 18일 13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9월 8일부터는 5개 문을 봉쇄하고 80여 만평 공장 곳곳에 천막을 치고 공장점거 파업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요구사항은 위탁경영기간 동안 고용보장, 고용조정시 노사합의, 단체협약 원상 복귀, 해고자 원직복직과 징계철회였다. 한라중공업의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전면 공세에 72일 동안의 총파업(플랜트 80일, 공장점거 52일)으로 맞서 일정한 승리를 쟁취하였다.
■ 1999년 노동자대회(1999.11.14)
1999년 11월 14일 여의도 공원에서 열린 99년 제1차 민중대회 앞자리에 열린 노동자대회. 99년 민중대회의 주요 슬로건은 ‘생존권사수·경제주권 수호! 국가보안법 폐지! 노동시간 단축! 농가부채 해결!’이었다. 3만에 가까운 노동자·민중이 대회를 마치고 서울역까지 행진하여 마무리 집회를 가졌다.
■ 1999년 2차 민중대회(1999.12.10)
1999년 12월 10일, 11월 1차 민중대회에 이어 서울역에서 열린 2차 민중대회의 요구를 보여주는 만장형 프랭카드. 2차 민중대회의 5대 과제는 ‘민중생존권 파탄 문제 해결, 경제주권 수호, 국가보안법 철폐, 노동시간 단축, 농가부채 해결’이었다. 농민 2만여 명이 주축이 된 2만 5천여 명이 집회를 끝내고 명동성당으로 행진하였다. 서울역에서부터 경찰병력과 심한 몸싸움을 벌였으며, 신세계 앞 사거리에서는 치열한 가두투쟁을 벌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폭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주력 대오였던 농민의 요구는 철저히 외면한 채 폭력시위와 노조전임자 임금문제만을 부각시키면서 노동자 민중에 대한 강경탄압을 계속하였다.
♩♪ 끝내 살리라 - 모란공원, 망월동, 솥발산 묘역의 열사들
가세 가세 내조국 해방의 땅 살아서는 못가던 길 찾아가세 잔악한 독점재벌 폭력과 맞서다
쓰러진 동지여 순박한 소망과 뜨거운 동지애 오직 그 하나로 맞섰던 열사여
끝내 살리라 노동자 한가슴 해방의 땅 금남로에 되살아나리리 살아서 춤추리니
죽음을 딛고 노동해방 그날에 꼭 살리라
■ 2000년 6월 지금 여기
우리는 ‘그때 거기’서 살았던 선배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지금 여기’서 돌이켜 보면서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모색하며 실천을 통해 역사와 미래를 만들어 간다. 10년이 지난 뒤 ‘나는 2000년 6월 그때 거기서 무엇을 했지’하고 물었을 때 할 수 있는 대답은 바로 지금 여기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과 투쟁이 우리의 역사와 미래를 만드는 것이고, 다시 ‘그때 거기’가 되어 후배들에게 돌이켜 보기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노동운동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고, 우리가 밟아 가는 길이 우리 사회가 나가는 길이며 노동자 민중의 미래이다.
♩♪ 민들레처럼
민들레 꽃처럼 살아야 한다 내가슴에 새긴 불타는 투혼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대도 민들레처럼 모질고 모진이 생존의 땅에
내가 가야할 저 투쟁의 길에 온 몸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
■ ‘노동해방’의 불꽃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목표로 내 세웠던 노동자 농민이 해방되는 신사회 건설, 해방후 곳곳에서 외쳤던 노동자 농민이 공장과 토지, 권력의 주인이 되는 사회, 1988년 11월 노동자대회 때 앞세웠던 피로쓴 노동해방의 깃발, 그 목표와 표상인 ‘노동해방’의 불꽃을 여기서 꺼트려서는 안된다.
노동운동사 주요 연표
1903.11.16 목포 부두노동자 동맹파업(~12.24)
1919. 3·1운동
1920. 4.11 조선노동공제회 창립
1921. 9.26 부산부두노동자 5000여명, 임금인상을 요구 총파업
1922. 5. 1 조선노동공제회 주최, 최초의 메이데이 기념 강연회 개최
10.18 조선노동연맹회 결성
1923. 5. 1 조선노동연맹회 메이데이 시위 계획, 일제의 봉쇄로 강연회
8.21 평양 양말공장 노동자 1천여 명 파업
1924. 4.20 전조선노농총동맹 창립
1925. 4.17 조선공산당 창당
1927. 9. 7 조선노농총동맹,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립
1927. 2.15 신간회 창립
1929. 1.14 원산총파업(~4.6)
1930. 1.10 부산 조선방직회사 노동자 2천여 명 파업
8. 7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1800여 명 파업
1931. 4. 태평양노동조합운동(~1934)
1933.12.18 경남 적색교원노조사건 관련 30명 검거됨
1935. 7.13 진남포제련소 노동자 1200명 파업
1937. 1.29 부산 조선방직회사 노동자 3천여 명 파업
1945.11. 5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결성
1946. 3. 10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 창립
5. 1 전평·전농 주최 메이데이 기념대회(20여 만 참석)
대한노총 주최 메이데이 기념식(노동자 200여 명, 우익청년 800여명 참석)
8.15 전남 화순탄광 노동자와 미군·경찰관 충돌, 사망 30여 명, 부상 500여 명
9. 9월 총파업(철도노동자 4만여, 총 25만여 노동자 참가)
10. 10월 인민항쟁
1947 3.22 남한전역에 24시간 총파업, 피검자 2076명
1948 2. 7 남한단독선거반대 전국 총파업(2·7구국투쟁)
1951. 12. 조선 방직노동조합 투쟁(~52.3)
1952. 7 부산 부두노동자 파업투쟁
1953. 3-4 노동관계법 통과
1958.10.29 3월 10일을 노동절로 결정
1959.10.26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 결성
1960. 4.19 4월 혁명
5.22 대한교원노조연합회 결성(7.17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로 개편)
11.25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
1961 5.16 군사쿠테타
8.30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결성
1970.11.13 전태일 열사 분신
1976. 7.24 동일방직 노동자 1000여명 농성
1978. 2.21 동일방직 노동자 똥물투척 사건
1979. 8. 9 YH 여성노동자 신민당사 농성(~8.11)
1980. 4.21 사북광산노동자 투쟁
1981. 7.23 전국민주노동연맹사건 관련자 구속
1983. 8.23 야학연합회사건
1984. 3.10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창립
5.25 대구 택시운전사 시위
10.12 청계노조합법성 쟁취 시위
1985. 4.15 대우자동차 노동자 파업
6. 구로노동자 동맹파업
8.25 서울노동운동연합 결성
1986. 5. 3 인천항쟁
1987. 6. 6월민주항쟁
7·8·9 노동자 대투쟁과 민주노조 건설
11. 사무전문직 노동조합협의회 결성
12. 마산 창원 노동조합총연합 결성
1988. 5. 2 1981년 강제해산된 청계피복노동조합 설립 신고증 교부
5.21 현대그룹 산하 18개사 노조대표 현대그룹노조연합회 결성
5.29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창립
8.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 결성
11.13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
12. 지역 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
12.12 현대중공업 노동자 파업투쟁(~89.3.30)
1989. 3.16 서울시 지하철노동조합 파업, 평민·민주당사에서 농성
5. 세계노동절 100주년 기념 한국노동자대회
5.28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9. 8 MBC 노조 전면 파업
1990 1.22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
4.13 KBS 노동조합 2000여 명, 서기원 사장 퇴진 요구 무기한 제작거부 결의
4.25 현대중공업 파업, 골리앗 농성(~5.10)
5.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 결성
12. 9 포철 대우 현대중공업등 16개 대기업노조 대기업노동조합연대회의 결성
1991. 5. 6 부산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안양병원에서 치료중 추락, 사망 발표
7.14 전국 28개 노동관련 단체, 전국노동단체연합 창립
10. ‘ILO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
1992.12. 노동법 개정과 민주대개혁을 위한 노동운동단체 공동실천위원회’
1993. 6.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회의(전노대)
1994. 6.24 전국지하철노동조합 협의회 파업
11.13 민주노총 준비위 결성
1995. 5. 한국통신 노동자투쟁 - ‘임금인상 가이드라인 철폐’ ‘통신개방 반대’,
11.11 민주노총 창립
1996.12-1997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
1997. 3.10 국회, 노동관계법 국회통과(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 노조 정치활동금지 삭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정지, 정리해고 입법후 2년간 시행유보)
9. 5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 권영길 위원장 대선후보 승인
12. 3 IMF 구제금융 신청
1998 2. 9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 협약안 승인거부
2.15 전국금속산업연맹출범식(민주금속연맹, 자동차연맹, 현총련)
2.25 김대중 정부 출범
7-8.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천막농성투쟁(34일)
9. 3 만도기계에 공권력 투입
9.29 은행노조 총파업
1999. 4.19 서울지하철노조 등 공공연맹 총파업
6.22 이상관 자살 및 근로복지공단 개혁투쟁(~12.30)
8.10 한라중공업노조 공장점거 파업투쟁(~10.27)
11.23 민주노총 합법화
삼미특수강 원직복직 3년투쟁
첫댓글 안 읽어 본 책 너무 많다. -,.- ;;;;
주인장님! 이 글은 다른 곳에 옮기는 게 낫겠습니다. 귀한 자료입니다. ^^
어데로 옴길까요
엥? 아고..... 월권? ^^ ;;; 아마, 기본자료실? 아님....에고 괜히 말했다 싶슴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