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서 > 석주집 > 석주집 제8권 > > 權韠
솔(松)
솔이여 / 松
솔이여 / 松
눈을 굽어보고 / 傲雪
겨울을 이기나니 / 凌冬
흰 눈이 네게 깃들고 / 白雲宿
푸른 이끼가 너를 덮었다 / 蒼苔封
여름 송화에는 바람이 따스하고 / 夏花風暖
가을 잎에는 서리가 흠뻑 젖도다 / 秋葉霜濃
곧은 줄기는 붉은 벼랑에 우뚝 솟았고 / 直幹聳丹壑
맑은 빛은 푸른 봉우리와 잇닿았어라 / 淸輝連碧峯
그림자는 빈 단상의 새벽 달빛에 떨어지고 / 影落空壇曉月
소리는 먼 절의 잦아드는 종을 흔드누나 / 聲搖遠寺殘鐘
가지는 싸늘한 이슬 뒤집어 자는 학을 깨우고 / 枝翻凉露驚眠鶴
뿌리는 깊은 땅속에 박혀서 숨은 용에 가까워라 / 根揷重泉近蟄龍
①초평은 너를 먹으며 수련해 신선이 되었고 / 初平服食而鍊仙骨
②원량은 네 곁을 서성이며 가슴을 후련히 씻었지 / 元亮盤桓兮盪塵胸
구태여 ③완생을 대하고 절품을 논할 것 없나니 / 不必要對阮生論絶品
④무엇 하러 다시 위언 시켜 기이한 모습 그리게 하랴 / 何須更令韋偃畫奇容
땅에 명을 받아 독야청청함을 이에 알겠노니 / 乃知獨也靑靑受命於地
너의 ⑤늦게 시드는 자태가 아니라면 내가 그 누구를 따르랴 / 匪爾後凋之姿吾誰適從
① 초평(初平)은……되었고 : 초평은 황초평(黃初平)이다. 그는 단계(丹溪) 사람으로 열다섯 살에 양을 치다가 도사(道士)를 따라 금화산(金華山) 석실(石室)로 가서 수도(修道)하였다. 그 후 40년 만에 그 형 초기(初起)가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가 만났더니 양은 보이지 않고 흰 돌들만 있었다. 초평이 “양들은 일어나라.”고 소리치자, 흰 돌들이 모두 수만 마리의 양으로 변했다. 《神仙傳 黃初平》
② 원량(元亮)은……씻었지 : 원량은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자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햇살은 흐릿하게 저물려 하는데, 외로운 솔을 어루만지며 서성이도다.〔景翳翳以將入 撫孤松而盤桓〕” 하였다.
③ 완생(阮生)을……없나니 : 두보의 〈절구(絶句) 4수〉에 “매화가 익었으니 주로와 함께 먹고, 솔이 높으니 완생을 대하여 논하고자 하노라.〔梅熟許同朱老喫 松高擬對阮生論〕” 하였다. 주로(朱老)와 완생은 두보가 촉(蜀) 땅 검외(劍外)에 있을 때 사귄 주씨(朱氏)와 완씨(阮氏)이다.
④ 무엇……하랴 : 두보가 당대의 유명한 화가인 위언(韋偃)이 그린 소나무 그림을 보고 지은 〈희위위언쌍송도가(戲爲韋偃雙松圖歌)〉에 “나에게 한 필 좋은 동견이 있으니, 그 값어치가 금수단보다 못하지 않다오. 이미 깨끗이 소제해 빛이 찬란하니, 그대 붓을 휘둘러 곧은 솔을 그려보오.〔我有一匹好東絹 重之不減錦繡段 已令拂拭光凌亂 請君放筆爲直幹〕” 하였다. 동견(東絹)은 사천성(四川省) 염정현(鹽亭縣)에서 나는 아계견(鵝溪絹)이란 좋은 비단으로, 회화에 많이 쓰인다.
⑤ 늦게 시드는 자태 :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罕》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2007
권필(權韠)
권필(權韠)은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여장(汝章), 호(號)는 석주(石洲)이다. 승지 권기(權祺)의 손자이며, 습재(習齋) 권벽(權擘)과 경주 정씨 사이에서 난 다섯째 아들이다.
석주 권필은 정철(鄭澈)의 제자로, 성격이 자유분방(自由奔放)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野人)으로 일생을 마쳤다. 선조 때 시인으로 목릉성세(穆陵盛世)로 일컬어지는 당대 문단에서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이재(二才)’로 불렸다.
젊었을 때에 이안눌과 함께 평안북도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철을 찾아갔다. 19세에 과거 시험을 보았는데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장원(壯元)을 하였다. 그러나 글자 하나를 잘못 적은 일로 인해 내쫓김을 당하자, 술과 시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권필의 부인이 그에게 금주를 권하자, 권필은 「관금독작(觀禁獨酌)」을 지었다.
권필은 동료 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 · 동몽교관(童蒙敎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강화에서 송희갑(宋希甲) 등 많은 유생(儒生)을 가르쳤다.
권필은 시를 짓는 재능이 뛰어났다. 이 때문에 그는 1601년(선조 34) 원접사(遠接使) 이정귀(李廷龜)의 추천을 받아, 1602년(선조 35)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埈) · 최정건(崔廷健)이 왔을 때 백의제술관(白衣製述官)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1606년(선조 39) 주지번(朱之蕃)과 양유년(梁有年)이 중국 사신으로 왔을 때는 한강 접빈(接賓)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구용(具容)과 함께 주전론(主戰論)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광해군 초에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이 권필에게 서로 가깝게 지내길 청했으나, 권필은 이를 거절했다.
한편 임숙영(任叔英)이라는 인물이 과거 시험의 「책문(策文)」에서 전란 후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표출하면서, 유희분(柳希奮) 등 권신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 공격했다가, 광해군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삭과(削科)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들은 권필은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이를 풍자(諷刺)하고 비방하였다. 이 때문에 광해군이 크게 화를 내며 시의 출처를 찾았다. 그러던 중 1612년 김직재의 옥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권필이 조수륜과 연관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권필은 전라남도 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귀양지로 가던 도중 동대문 밖에서 그를 동정하는 행인들에게 받은 술을 폭음(暴飮)했다가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나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함으로써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호방하면서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는 성품으로, 중국 당나라 시풍의 낭만적인 서정과 당대 현실을 풍자한 사회성 높은 시를 많이 남겼다는 평을 듣는다. 『석주집』과 한문소설 「주생전」이 현재 그의 저서로 전해진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지평에 추증(追贈)되었고, 전라남도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모셔졌다. 그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위양리에 있으며, 묘갈(墓碣)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