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없는 개발/ 허수열 지음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수탈론’ 혹은 ‘자본주의맹아론’간의 최근 논쟁에서 우세한 쪽은 놀랍게도 식민지근대화론이었다. 일제시대 조선이 4% 수준의 기록적인 성장을 이뤘다는 통계자료를 ‘물증’으로 내놨기 때문이다. 근대경제학적 방법론에 따른 과학적 증거가 제출되자 ‘맹아와 수탈’에 대한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때마침 불어온 탈민족주의 바람까지 가세했다. 이제 물증을 내놓지 못하면 꼼짝없이 폐쇄적·국수적 민족주의자로 몰릴 판이다.
●조선인의 발전 아닌 일본인의 발전
충남대 허수열 교수의 ‘개발 없는 개발’(은행나무 펴냄)은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건 책이다. 책의 논지는 제목과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다. 제목은 종속국가에는 ‘저개발이라도 있었지만’ 식민지 조선은 ‘개발 자체가 없었다.’는 의미로 읽힌다. 또 ‘일제하 조선경제개발의 현상과 본질’이라는 부제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통계수치라는 ‘현상’만 봤을 뿐 그 뒤에 숨겨진 민족간 차별이라는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흥미로운 점은 허 교수가 식민지근대화론자의 ‘대부’로 꼽히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제자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반론의 무기도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쓰는 근대경제학적 통계수치다.
식민지근대화론은 거칠게 세가지로 요약된다.‘첫째 조선후기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다, 둘째 일제시대 때 놀랍게 성장했다, 셋째 이런 기반이 해방 이후 한국 근대화의 밑거름이 됐다.’는 것.
허 교수는 짧은 질문으로 두번째 주장을 반박한다.1911년 조선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777달러,1937년에는 1482달러를 기록하다 전쟁 때문에 1944년에는 1330달러로 줄었다. 그런데 해방되던 1945년에는 1911년만도 못한 616달러로 감쪽같이 내려 앉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바로 일제시대 조선의 성장은 조선인의 발전이 아니라 일본인의 발전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단순히 볼때 일본인의 조선농지소유율은 18% 정도지만 그 토지의 생산력까지 감안하면 이 수치는 50%대까지 치솟는다. 알짜 땅을 다 차지한 것이다. 교육·취업·승진 등에 있어서 조선인은 철저한 차별을 받았다. 물론 일제시대 말기에 이런 차별 가운데 일부가 완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허 교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으로 일본인이 동원되면서 생긴,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일제시대 때 성장했다는 조선이 해방 직후 1911년 수준의 가난한 농업국가로 되돌려진 데는 이런 배경이 숨어 있었다.
동시에 일제의 유산이 한국의 근대화에 그다지 기여한 것도 아니다. 근거는 맥아더사령부가 한국·타이완·중국 등에 남아 있는 일본인 재산을 조사해 1948년 펴낸 통계다. 여기에 따르면 해방 뒤 한국에 남은 재산은 북한의 25% 수준이었다. 질적인 차이는 더 심했는데 주요 시설이 북한에 있었고 남한은 조선총독부가 서울에 있는 덕을 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마저도 한국전쟁에서 반 이상 파괴됐다.60년대 경제개발기 한국에 남아 있던 일제의 물적 자산은 원래의 10분의1 수준도 채 안된다. 여기에 이승만 정권이 미국 원조로 연명했다는 사실까지 보태면 일제 유산의 영향이라는 것은 극히 미미했다.
그러나 이는 ‘물질적’ 유산에 한정된다. 그 외 법률이나 행정 등과 같은 제도적·정신적 영향에 대해서는 뭐라 대답할 것인가. 허 교수는 “경제사학자로서 계량화된 수치만 다룰 수 있다.”고 답한 뒤 “일제가 ‘남북분단과 민족갈등’을 남겼다는 점까지 함께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통계수치 뒤에 숨겨진 민족차별
허 교수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과 똑같은 접근법을 썼지만 결과는 달랐다. 그는 “나 역시 한때는 일제시대 우리가 발전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조선인과 일본인간 차별 등을 발견하고는 달라졌다.”면서 “식민지근대화론자들도 전체 통계에서 그치지 말고 더 깊이 연구한다면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첫번째 주장에 대한 반론은 ‘높은 교육열’ 외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 허 교수는 “전공분야가 아니라 말하기가 어렵다.”며 평가를 유보했다. 풀어야 할 숙제인 셈이다.(기사 퍼온 이의 의견 : 그걸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하는 기자의 마인드가 의심스럽다. 남의 주장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껀 뭐든지 트집잡으려 하나? 그것을 꼼꼼한 준비타령 할 건가...? 굴속의 곰이 되기 보다는 굴을 뛰쳐나온 호랑이가 되라!)
[책과세상] 개발 없는 개발
일제강점기 근대화 문제는 역사학계와 경제사학계가 꽤 오랫동안 공방을 벌여온 주제다. 논쟁은 식민지 시기 성격 규정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어 학계의 갑론을박 치고는 과분하한 대중의 관심을 얻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립각이 예리한 데 비하자면 내용은 다소 지루했다고 할 수 있다. ‘개발’과 ‘수탈’로 초장부터 문제를 보는 시각 차이가 너무 확연했고, 논쟁의 소주제가 그때그때 다르긴 했지만 핵심은 그 평행선을 내달렸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경제 통계라는 강력한 무기를 앞세운 경제사학계의 활발한 연구 덕에 ‘식민지 근대화론’의 목소리가 커 보였고, 그 중심에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1980년대 후반에 토대를 닦은 낙성대경제연구소(옛 낙성대연구소)의 연구 성과가 자리잡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전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 부닥친 조선후기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일제시기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경제사학계가 경제수치라는 실증 자료를 풍부하게 제시한 것 때문에 역사학계의 주장이 다소 공허해 보인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허수열 충남대 경제무역학부 교수의 ‘개발 없는 개발:일제하, 조선경제 개발의 현상과 본질’은 다소 뻔해 보이는 일제 근대화론 논쟁에 새로운 장을 열 역작으로 평가할만하다.
낙성대연구소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던 그는 경제사학계가 개발을 강조하기 위해 주 무기로 삼는 통계와 그래프를 앞세워 반대로 그 개발이 얼마나 큰 수탈이었는가를 입증하려고 했다.
허 교수는 두 가지 문제에 집중해서 일제하의 조선 경제를 분석했다. 우선 세계 전체가 저성장의 시기였던 양차 대전 사이에 4%를 넘는 조선의 성장률은 드물게 높은 것이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성장의 과실이 누구에게 갔는가를 따진다. 또 하나는 일제의 강점이 끝난 뒤 그 성장의 결과물이 광복 이후 한국 경제의 토대가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허 교수에 따르면 일제 강점 시기에 농업생산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1910년 이후 30여 년 동안 미곡생산량이 52.3% 증가한 데 비해 조선인 농업인구는 63.8% 늘어나 농업인구 1인당 미곡생산량은 감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다, 일본인들이 비옥한 경작 지역에 집중해 조선 논의 5분의 1을 소유하고 있어 조선인에게 돌아갈 소득은 매우 적었다.
근대적 공장공업이 발전했지만 그것도 80%가 일본의 소유였다. 성장이라는 외투를 입었지만 실제 개발의 과실은 일본인의 손에 돌아간 것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광복 직후 조선의 1인당 국민총생산은 616달러로 1911년(777달러)에도 못 미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으로 되돌아갔다는 점이다.
분단과 한국전쟁의 영향도 있겠지만 어쨌든 60년대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러한 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일제하의 성장이 ‘개발 없는 개발’이며, 실제로는 종속과 차별을 강요하고 그런 구조를 항구화 하려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개발 없는 개발’이라는 명제가 타당하다면, 일제시대의 개발이라는 것이 한낱 신기루와 같은 것이고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었으며, 조선인들이 자신의 힘으로 이룩할 수 있는 개발을 식민지적 개발로 대체한 것이었고, 따라서 조선의 개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던 20세기 전반기의 조선인 자신에 의한 개발을 저해한 것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개발 없는 개발(허수열 지음·은행나무)=일제강점기가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켰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수량 경제학적 반론서. 조선의 1인당 국내총생산이 1911년 777달러에서 한때 1482달러까지 올라갔다가 일제가 물러난 1945년 616달러로 급전 직하했음을 보여주며 일제강점기 개발의 허구성을 제기했다. 1만8000원.
▲개발없는 개발 = 허수열 지음. 저자(54)는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현재는 충남대 경상대학 경제무역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책 서문에 열거하는 은사들 명단에는 이헌재, 김종현 교수와 함께 안병직 교수가 거론되고 있다.
한데 이 책에서 시종일관하고 있는 논조는 안병직 교수와는 상당히 다르다. 물론 안 교수 또한 식민지시대 경제사에 관한 견해가 초기와 현재의 후기가 판이하게 다른 측면도 있다. 따라서 그 제자인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식민지시대 경제사는 안 교수의 초기 견해와 상통하는 대목이 많다.
서문에서 저자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가장 대표적인 주장의 하나인 '개발'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었는지를 명백하기 밝히기 위한 책"이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만 보면,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일본 우익의 주장, 혹은 식민지근대화론을 반박하기 위한 것처럼 해석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책이 겨냥하는 주 공격대상은 동문인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대표되는 '낙성대경제연구소'로 보아야 할 듯싶다.
이를 위해 허 교수는 "조선에서 개발이라는 것이 일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이 조선인의 개발로 이어져야 하지만, 민족별로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와 그에 따른 분배의 불평등, 또 거기에서 파생하는 민족차별로 인해 식민지체제가 지속되는 한 조선인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개발을 없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런 수탈적 개발을 추진한 일본인들이 일거에 물러간 해방 후 한국경제는 다시 일제 초의 상태로 되돌아 갔으므로, 일제의 식민지배가 해방 후 급격한 한국의 경제성장에 직접 동인이 되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결국 이와 같은 견해는 현재 한국학계 다수가 따른다고 할 수 없는 '일제=강포한 도적집단', '조선 혹은 조선인=선량한(혹은 압박받은) 백성'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반복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은행나무. 360쪽. 1만8천원.
식민시대 '조선경제'와 '조선인경제'는 엄청나게 다르다
지난 주말에 필자는 모처럼 책 한 권을 내어 놓았다. 제목이 <개발없는 개발>(은행나무)로 일제시대의 개발이라는 것이 조선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책이었다.
오비이락이라고도 할까. 지난 2년을 준비하여 모처럼 책을 내놓았는데, 한일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일본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때에 출간되어 버렸다. 집필을 시작할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오랜 산고 끝에 내놓은 책이 시의에 적합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저절로 책 선전이 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더 많다. 이번에 출판한 책이 학술서이니만큼 학술적으로 진지한 토론이 뒤따라서 나의 주장의 옳고 그름이 명백히 밝혀져야 하는데, 시대적 분위기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운 것이다.
내 주장은 결과적으로 시류에 영합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나를 비판하면서 자칫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친일파 혹은 그 앞잡이로 몰려 몰매를 맞을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지한 학문적 토론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일제시대 조선경제 유례없을 정도로 개발
필자가 바라는 것은 거리낌없는 비판을 이겨내어 이 연구서가 학문적으로 인정받는 것이지, 모든 비판에 재갈을 물린 채로 혼자 우쭐거리는 우물 안 개구리 노릇은 싫다는 것이다. 그간 한국사에서 독보적 지위를 차지해 왔던 수탈론도 오랫동안 우물 안 개구리 노릇만 해 왔기 때문에, 우물 밖으로 나왔을 때 한없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한국경제가 세계를 향해 열리게 되었을 때, 한국사도 세계를 향해 열리게 되었다. 이제 한국사는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한국사 연구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흔히 맹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 용어에 대해 불만이 많아 ‘이른바’라는 수식어를 붙였다)과 같은 것도 한국사의 세계화 과정에서 태어났고 학문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 책은 이런 연구와 대립적인 입장에 서 있지만, 내용 면에서는 그런 연구결과에 크게 도움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일제시대 조선경제가 세계적으로 유례없을 정도로 크게 개발되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과 아무런 차이도 없고 오히려 수탈론과 대립적이다.
일본으로부터 대량의 자본이 투입되고 선진기술이 도입되었는데 조선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을 것이다. 이런 접근방법은 종래의 수탈론과 사뭇 다르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예 수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일부러 피하였다.
왜냐하면 일제시대의 거의 모든 경제관계는 교환관계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럴 때는 폭력적인 방법 혹은 경제외적인 방법으로 빼앗아간다는 뉘앙스를 수탈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수탈의 본질을 흐려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흔히 미곡수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지주의 입장에서 볼 때 좀더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는 시장에 그것을 내어놓는 경제적 관계를 통해 미곡이 일본에 수출된 것을 말할 뿐이다.
일제시대 '조선인경제', 개발 없는 개발
그럼에도 결론은 ‘식민지 근대화론’과 크게 다르고 종래의 수탈론을 적극 지지하는 모양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조선경제에 대한 분석을 단순히 조선이라는 지역에 한정하지 않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에 살고 있는 조선인을 중심으로 하여 분석하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식민지 근대화론’이 조선이라는 지역에서 이루어진 변화의 현상에 대한 분석에 그쳤다고 한다면, 필자의 분석은 그러한 분석을 민족문제까지 집어넣어 좀더 깊이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점은 이렇게 조선경제를 분석했을 때와 조선인경제를 분석했을 때 양자간에 엄청난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조선경제를 분석하면 개발이라는 측면이 뚜렷이 나타나지만, 조선인경제를 분석하면 개발의 징후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이 책이 주장하고자 하는 '개발 없는 개발'인 것이다.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필자는 그것이 민족별로 지극히 불평등한 소유관계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농업생산이 크게 늘어났지만,그것과 동시에 일본인이 소유하는 경지 특히 논의 면적이 매우 빠른 속도로 증대되었다.
그 결과 증산된 미곡의 대부분 은일본인의 몫으로 귀착되었다.조선인의 분배몫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민족별 소득격차가 확대되고,소득의 불평등은 다시 소유관계의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었다.그리고 이런 식민지적 구조는 공업,광업,수산업 등 모든 산업부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고,식민지적 교육제도가 이런 민족별로 불평등한 관계를 확대재생산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방 뒤 일제시대 물적 유산 1/10 이하만 기능
결국 식민지적 개발이란 불평등과 종속 그리고 차별을 확대재생산했을 뿐이고 식민지체제가 지속되는 한 조선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개발은 기대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입증하려고 한 또 하나의 과제는,일제시대에 조선에서 개발이 있었다면 그 개발의 결과 남겨진 것이 해방 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 어떤 역할을 했을 것인가 하는 점을 명백히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자료를 사용하여 해방 후 조선에 남겨진 일제의 물적 유산이 남북분단,해방 후 혼란기 및 한국전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크기가 어떻게 변해갔는지 수량적으로 밝혀 보려고 노력하였다.
결과를 보면 일제시대의 물적 유산의 1/10 이하의 것만이 기능했고,그것은 해방 후 한국에 주어진 미국 원조의 1/7 수준에 불과하였다.일제시대의 개발은 조선인들 자신에 의한 개발을 식민지적 개발로 치환함으로써 한국의 본격적 개발을 오히려 저해한 측면이 강한 것이었다고 본다.
이 책은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실증한 것이다.대부분 것들은 숫자로 표현된다.모든 데이터를 시시콜콜 따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독자들이 읽기 매우 지루할지도 모른다.그러나 그 옳고 그름은 명백할 것이다.
단 이 연구로 일제시대 개발의 모든 측면이 실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실증할 수 있는 것만 실증했기 때문이고, 실증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실증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확실히 해 두자는 것이다.필자가 학문적으로 활발한 논의를 기대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부디 유익한 비판이 있기 바란다.
"일제시대 조선은 개발 없는 개발"
허수열 교수 '식민지 근대화론' 정면반박
“일제시대 조선은 외형적으로는 개발됐지만 조선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며, 훗날 한국의 근대화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경제사학자 허수열 충남대 교수(54)가 일제시대 한국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면 반박하고 나섰다.
일제시대 경제사 연구자인 허 교수는 최근 ‘개발 없는 개발’(은행나무)을 펴내고 자신의 30년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일제가 남긴 경제적 유산이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의 산업화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주장도 잘못입니다.”
허 교수는 “일제의 공업자산 중 남한에 있던 것은 25%에 불과했고, 그나마 광복 후의 혼란과 6·25전쟁 때 대부분 파괴됐다”며 ‘이바지론’을 부정한다. 허 교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가 작성한 ‘1945년 8월 현재 일본인 해외자산’이란 자료를 토대로 “일제가 남긴 물적 자산이 1960년 시점에서 미국 원조액의 7분의 1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허 교수는 일제시대 식민지 조선의 경제가 성장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자본과 기술이 대규모로 도입된 만큼 경제의 양적 팽창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수탈론자’와는 구별된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다. 농지와 공장 등은 일본인에게 집중됐고, 조선과 일본의 분업과 무역 발전도 두 지역의 일본인 사이에서 전개됐을 뿐이다.
일제는 오히려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았다. 일제시대 조선인에게는 기술계를 비롯한 고등교육의 기회가 거의 제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흔히 일제시대 평균 경제성장률이 4%에 이른 점을 경제성장의 증거로 들지만 민족별 생산수단의 소유와 소득분배는 극단적으로 불평등했습니다. 또 1911년의 777달러였던 조선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37년 1482달러까지 올라갔지만 이후 다시 떨어지기 시작해서 1945년에는 616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인 허수열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창립 멤버이지만 지금은 견해를 크게 달리한다.
그는 “낙성대연구소가 내놓는 연구의 수치는 대체로 맞지만 식민지 경제의 분석에서 ‘민족’ 문제를 제외하는 것은 껍데기만 보고 알맹이를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식민조선 근대화? 낱낱이 캐묻다!
‘개발 없는 개발’ 비약적 성장을 거듭하던 식민지 조선은 해방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으로 되돌아갔다. “놀라운 개말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 또다른 ‘사실’ 이다. 식민지근대화론과 수탈론(또는 내재적발전론)의 논쟁은 치열하고도 질기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식민사관의 재현” “과학이 아닌 추정의 이데올로기”라는 원색적 비난까지 오간다. 관련 논쟁이 한창이던 지난 98년 봄, 김동노 연세대 교수가 계간 <창작과비평>에서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활용을 통한 실증적 연구가 제시되거나 기존의 자료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고 일찍이 지적한 것도 이때문이다.
5년여만에 이에 대한 응답이 나왔다. 당시 논쟁에도 참가했던 허수열 충남대 교수(사진)가 <개발없는 개발>(도서출판 은행나무)을 내놓았다. 그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진앙지인 낙성대연구소 출신이다. 1987년 연구소 창립 멤버였다. 경제성장사학의 방법론을 체화한 연구자다. 그런 면에서 민족주의 사학을 주축으로 한 수탈론자들과 분명히 구분된다.
그런데 허 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국주의적 침략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대표적 주장인 ‘개발’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명백하게 밝히고 …(일제 시기)‘개발’의 실상은 ‘종속’과 ‘차별’의 강요였음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민족주의자들이 크게 반길 법한 내용이지만, 허 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못 박는다. “이 책이 진정으로 목적하는 바는 민족주의 혼을 다시 불러일으키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수탈론과 다른 경제사학 프리즘 방대한 자료통해 ‘개발의 지표’ 반박 그가 목적한 바는 “일제 지배에 대한 종합적 평가”다. 무수한 통계자료 더미에 학문의 토굴을 파고 들어간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수탈론이 갖추지 못했던 실증경제사학의 방법론을 적극 활용했다. “지금껏 어디서도 공개되지 않았던 여러 통계 자료를 발굴”하기도 했다. 실증을 무기로 삼은 식민지근대화론과 맞서기 위해 실증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그 숫자들은 일단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과 일치되는 결과를 보여준다. “일제 시대에 조선이 개발됐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 등 여러 통계들은 이 시기 조선이 ‘고도성장’을 이뤘음을 증명한다. 이는 수탈론이 좀처럼 직시하지 않으려는 ‘사실’이다.
동시에 또다른 숫자가 있다. 비약적 성장을 거듭하던 식민지 조선은 해방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으로 되돌아갔다. “놀라운 개발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 또다른 ‘사실’이다.
허 교수는 ‘민족’이라는 핀셋으로 이를 헤집었다. “민족별로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와 그에 따른 분배의 불평등, 이에서 파생한 차별”을 드러낸 것이다. “식민지체제가 지속되는 한 조선인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개발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인다.
이 책에는 무려 190여개의 통계표와 그래프가 등장한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개발’의 지표로 삼는 농업·공업 개발, 근대교육과 근대기술 발전 등을 모두 실증적으로 반박하는 자료다. 그 원자료의 방대함은 짐작조차 힘들다.
<개발 없는 개발>의 가치도 여기에 있다. 실증적 방법론으로 민족의 범주를 불러와 일제 시대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다들 말만 하는 동안, 허 교수는 솜씨좋게 이를 해치웠다. 덕분에 ‘개발-수탈’ 논쟁은 이제부터가 진짜 2라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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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근대화론 주도 ‘낙성대사단’ “고도성장 원인은 식민역사”
1987년 안병직교수 주도 창립
이영훈교수 시장경쟁원리 강조 국내 역사학계의 주류는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발전의 싹이 텄으나(자본주의 맹아론), 일제 침략으로 자생적 근대화가 지체됐으며(수탈론), 해방 이후 급속한 공업화는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 내부의 동력에 따른 것(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입장에 서있다. 이는 “정체된 조선을 타율에 의해 근대화한다”는 일제 식민사관에 대한 강력한 반대 명제다. “(학문이 아닌) 제국주의 비판을 위한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수탈론에 대한 역공의 진원지는 다시 일본이었다. 70년대 들어 일본 학자들이 한국·대만의 고도성장의 원인으로 ‘식민지 역사’에 주목한 것이다. 이는 조선에 대한 일본 경제사학자들의 본격적 연구로 이어졌고, 비슷한 분석이 미국 등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
국내에 이를 소개한 사람은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다. 그는 80년대 후반, 일본 학자들의 경제사방법론을 받아들이면서 1987년 낙성대연구실(현 낙성대경제연구소)을 창립했다. ‘낙성대사단’은 이후 <근대조선공업화의 연구>(일조각·1993),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민음사·1997) 등의 연구성과를 내놓으면서 관성에 젖어 있던 국사학계를 ‘충격’으로 몰고 갔다. 90년대 중후반 <창작과비평> <역사비평> 등 주요 계간지에는 관련 논란이 꼬리를 물었다. 지난해에도 <교수신문>을 통해 관련 논쟁이 재점화됐다.
‘식민사관의 재현’이라는 원색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연구 성과를
꾸준히 발표하면서 저변을 넓히고 있다. 그 저력은 방대한 수치와 통계를 분석하는 ‘실증적 방법론’에 있다. “(민족주의라는) 추측과 아집을 넘어 진정한 실증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식민지근대화론은 민족주의 비판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최근 들어 안 교수는 한·미·일 우호 관계 강화를 자주 언급하고, 현 낙성대연구소장인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시장경쟁원리 확대를 강조하고 있다. 관련 연구자들이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전경련 부설 연구소 등과 공동 심포지엄을 열고 이른바 ‘뉴라이트’ 등의 명단에 오르내리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경제성장사학에는 복지·분배·환경·평화·연대 등을 탐색하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선망이 자리잡고 있다. 경제성장사학의 귀착점은 신자유주의다”(정연태 카톨릭대 교수)라는 지적은 식민지근대화론의 앞 길에 놓인 가장 강력한 비판이다.
■ 허수열 교수 일문일답 “낙성대연구소 현상분석 그쳐
민족 불평등문제 더 연구해야” 실증을 앞세운 식민지근대화론을 실증적으로 비판했는데. =낙성대연구소 등의 시도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방법론으로 일제 시기를 보는 건 타당하다. 다만 그들은 현상을 분석했을 뿐, 본질에 대한 모색까지 이르지 못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미화론과 어떻게 다른가.
=그 이론 안에는 다양한 의견이 포함돼 있다. 이를 단순히 식민사관의 아류로 취급하는 것은 무리다. 경제성장사학은 일제 지배에 대해 분명한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이 이론을 제기한 일본 학자들은 오히려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수탈론의 한계는 무엇인가.
=한국에서는 통하지만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수탈을 입증할 실증적 토대가 빈약하다. 일제 시대 모든 통계는 근대화를 입증한다. 그렇지만 (수탈론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내재적 발전론은 용도폐기할 것이 아니라 더욱 강화해야 한다. 다만 내부의 ‘도그마’를 극복해야 한다.
실증연구의 어려움은.
=국내 경제성장사학은 일본학계의 장기경제통계 활용 방식을 원용했다. 그런데 조선과 관련한 1920년대 이전의 통계가 없다. 조선 말기와 일제 초기를 비교하는 데서부터 어려움이 있다. 그 이후 일제가 만든 통계에도 오류가 많다. 아울러 이런 통계에는 민족이 들어갈 지평이 없다. 요즘으로 치면 국가성장률만 보다가, 정작 계급별 분배 불평등의 문제를 무시하는 꼴이다. 민족 불평등 문제를 실증적으로 더 연구해야 한다.
허수열 교수 '일제하 高성장' 재반론
조선의 공업화는 '일본인 공업화' 였을뿐 높은 성장률은 富의 불평등 심화 드러내 ‘일제 식민지시대 고성장’ 논쟁 중 차명수 영남대 교수의 답변에 대해 일제시대 경제 통계의 원 작성자인 허수열 충남대 교수가 재반론을 보내왔다.
이번에 낙성대 경제연구소에서 1912~1940년 조선의 연평균 실질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이 4.1%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자 여러 언론사들로부터 그것이 맞는 말이냐는 문의가 있었다. 상당히 쇼킹했던 것 같다. 일제시대라면 수탈만 있었다고 생각해 왔고, 개발이나 발전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로 되어온 우리의 한국사 지식에서 보면 4.1%라는 높은 성장률은 믿기 어렵든지, 아니면 믿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4.1%라는 추계치가 정확한지 아닌지는 불분명하지만 비슷한 정도의 고성장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러한 조선의 개발이 조선인의 개발로 이어졌는가 하는 점에 있다. 조선의 1인당 미곡 소비량이 감소했다는 계산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바로 이 고성장의 시대에 조선인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조선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작농의 생활이 향상되었다거나 조선인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증가했다는 증거도 없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생산수단인 토지나 자본이 민족별로 극단적으로 불평등하게 소유되어 있었고, 그 불평등도가 후기로 갈수록 점점 심해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지에서 일본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1910년에 1.6%이던 것이 1935년에는 10.3%로 늘어났다. 논만 보면 2.8%에서 18.6%로 늘어났다. 소수의 일본인들 소유지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민족별로 경지 면적의 격차가 확대되어 갔다. 농업 인구 1인당 경지면적의 민족별 격차는 1915년 15.5배이던 것이 1942년에는 63.6배로 커졌다. 정말로 “일본인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부자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공업 부문에 대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1942년의 경우, 공업 자산 중에서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잡아 95%에 달한다. 나머지 5%가 조선인 자산인데, 거의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비중이 낮다. 간단히 말해 조선에서 일어난 공업화는 일본인 공업화이다.
지역을 단위로 하는 총생산(GDP)의 추계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유용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지적 특징을 감안하지 않고, GDP 성장률 혹은 1인당 GDP 성장률을 계산하게 되면 그것이 조선인 경제의 발전을 연상케 하는 공연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성장률이 높다는 것이 민족별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를 의미하는 상황에서 연평균 4% 성장하면 무엇하나? 앞으로 낙성대 경제연구소가 GDP 추계라는 현상 분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별 분배라는 본질적인 측면까지 포함하는 연구를 내어 놓을 때 비로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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