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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한 달을 내내 달군, 문창극 총리후보자 낙마 사건의 결정적인 원인은 그가 어느 지역 교회의 신앙 강연 중에 한 “하나님의 뜻” 과 관련된 근대사 발언과 서울대학교 강의시간에 행한 역사인식 발언이 어지럽게 뒤섞여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 중 여론을 극도로 자극한 두 가지 쟁점은 일제 식민지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며, 한국전쟁도 미국과 우리나라를 동맹으로 묶어놓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주장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두 사건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 고난이다. 그 발언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제의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으로 야기된 고통을 현재적 아픔으로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역사적 고난과 하나님의 뜻의 관계에 대한 오해를 촉발시킨 ‘단순화된 논리’임은 분명하다. 특히 한 국가와 민족에 강요된 모진 고통을 너무나 손쉽게 하나님의 뜻이라 단정한 것은 피상적인 성경 이해의 소치라는 비판을 촉발했다. 하지만 문창극 후보자의 발언과 유사한 고난 이해가 성경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고난과 연관시키는 성경의 맥락과 논리는 문창극의 단순화된 논리와는 전혀 다르다. 이 글에서는 고난과 하나님의 뜻을 연관시키는 성경적 맥락과 그 참된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을 무자비한 악행을 휘두르는 가해자와 동일시하는 듯한 통속적인 ‘하나님의 뜻(혹은 섭리)’ 사관의 난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민족사적 고난과 하나님의 뜻
일찍이 함석헌은 1920년대 중반부터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발생된 고난으로 점철된 우리 겨레의 역사를 ‘고난 섭리’ 사관으로 해명한 적이 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집약된 함석헌의 고난 섭리 사관은 고난받은 우리 겨레와 함께하는 고난받는 하나님의 고난 참여적 성품을 부각했다. 그런 점에서 함석헌의 고난 섭리 사관은 식민지 약소국을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강대국 일본의 폭력성을 하나님의 섭리나 뜻으로 곧바로 정당화하는 데는 인증(引證)될 수 없다. 우리 겨레의 역사적 고난과 하나님의 뜻을 누가 어떤 맥락에서 연관시키는지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일제로부터 식민 지배를 도와준 대가로 후작지위를 받은 윤치호 같은 인물이 일제의 조선 지배와 침략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친일행위의 자가정당화로 비칠 수 있다. 반면, 기독교인은 아니었으나 경술국치 이후 자결로 응답했던 유교적 선비인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은 조선 멸망의 원인을 우리 겨레의 누적된 죄에서 비롯된 것으로 암시한다. 그는 이사야나 예레미야처럼 조선 멸망의 원인을 논하면서 초보적이나마 예언자적 분석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매천은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 노예 백성으로 전락하기 이전에 조선의 유력계층이 빈궁계층을 노예화했다는 소위 조선 후기의 자매 문서(自賣文書, 자기를 노예를 매각한다는 증빙 문서)를 많이 예거했다. 조선은 헌종 이래로 양반 유력자들이 연약하고 미천한 양민들을 노예로 부리는, 스스로 해체된 공동체였으며 일제의 노예화 이전에 이미 노예처럼 고난을 받으며 사는 양민들이 넘쳤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민족의 멸망과 이민족의 지배를 자신들의 누적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결과라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실증적으로 논증한 인물들의 원조는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국가 멸망의 원인을 사회학적 시각으로 분석하되, 지배층의 이웃 학대와 이웃 살해적인 생존권 침탈 행위가 나라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국가멸망이 나라의 모든 구성원의 ‘N분의 1’ 책임이 아니라 왕, 지주, 재판관, 제사장, 예언자, 유력 농민들의 총체적 불의와 신앙파탄, 윤리적 일탈 행위가 누적되어 일어난 환난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지배층의 거짓 예배와 이웃에 대한 악행으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각각 나라 구실을 하지 못했을 때 앗수르나 바벨론 제국의 침략이 일어났다고 선언했다. 민족/국가의 운명을 책임진 핵심구성원들의 죄로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나라가 망했으며 앗수르나 바벨론은 하나님이 보내신 심판의 몽둥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마땅했다. 겨레의 멸망, 이산, 유배 등 참혹한 고난들을 자초한 자들이 회개를 통해 자기의 미래를 창조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책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영적으로 건강한 태도였다. 이런 것을 우리는 예언자적 민족주의라 부를 수 있다. 예언자적 민족주의는 민족 구성원의 자기 추궁적이고 주체적인 회개를 통해 민족의 활로를 개척하려는 입장이다.
우리 죄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예언자적 고백의 맥락
예언자적 민족주의는 민족을 대표하여 죄책을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써 민족의 미래 활로를 찾으려는 책임 주체적 역사의식의 발로로, 객관적인 역사분석이 아니라 실존적인 신앙고백이며 자기비판적이자 심지어 자기희생적인 담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내 역사서에는 예언자적 민족주의가 반영된 경우가 거의 없다. 신채호, 박은식, 함석헌 등의 역사서에는 이런 의식이 어느 정도 있으나, 성경적 의미의 자기책임 추궁적인 한국 역사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항일 정서를 앞세운’ 민족주의 사관과, ‘식민지배가 조선의 초기자본주의의 기틀을 형성했으며 그때 일어난 자본 형성이 박정희 조국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 이론, 곧 식민지 옹호 사관이 맞서고 있다.
문창극의 발언은 이 두 역사관 사이에 기독교적 역사 이해, 기독교적 섭리 사관의 단초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돌출된 발언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 발언 의도가 무엇이었든 상관없이, 일제 식민지배의 고난을 “게으르고 한심한 조선 민중”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었다고 보는 단순 논리는 하나님을 가해자의 자기정당화 담론에 연루시켜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구약성경 이사야서에는 유다를 철저하게 유린했던 앗수르의 정복군주 산헤립의 야전사령관 랍사게가 이런 논리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며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강요한다. “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니라”(사 36:10). 약소국 유다를 침략, 유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대행한다고 주장하는 이 야만의 침략 수사가 만일 유다의 친앗수르 지배층 유력자들의 매국 담론으로 변질된다면 얼마나 낯설까? 유다를 침략한 앗수르의 야전사령관 랍사게의 말과, 앗수르를 이스라엘과 유다를 징치하시려는 하나님의 분한의 몽둥이라 규정했던 이사야의 말(사 10:5-15)은 비슷해보이나 그 의도와 의미는 너무 다르다. 하나는 자신의 야수적 침략 행위를 관철하고 약소국을 신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지배하려는 침략 이데올로기요, 다른 하나는 죄책 고백을 통한 민족적 갱생을 기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강대국이 자기의 야만적 침략 행위를 신의 뜻으로 정당화하려는 경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인도를 지배한 영국과 아메리칸 인디언을 학살한 미국은 각각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으로 식민지배나 일방적 침략을 정당화하려 했다. 심지어 모르몬교 경전인 모르몬경 자체는 유럽 이민자들의 인디언 학살을 가나안 7부족을 정복한 이스라엘의 성전에 빗대어 해석하는 야만적 역사관을 거리낌 없이 내세운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죄책 고백과 민족사 고난에 대한 이해는 강자의 지배 담론과는 전혀 무관하다. 확실히 성경에는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고 자신들의 국란 초래의 죄를 회개한 자들의 책임 주체적인 역사 청산 시도가 기록되어 있으며, 심지어 나라의 멸망을 특정 계층의 죄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예언자적 탄핵도 없지 않다. 다만 민족 멸망과 외국 침략 같은 환난의 죄책을 모든 계층의 국민들에게 동등하게 N분의 1 분량으로 할당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한 고난 감수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성경의 죄책 고백 상황은 국가 기간 요원들(왕, 제사장, 예언자, 재판관, 장로, 그리고 중농 이상의 자유농민[암 하아레츠])이 중심인 죄책 고백이었다. 지배자나 가해자의 불의한 지배나 압제를 옹호하는 자기 정당화 맥락이 아니라, 과거의 죄와 단절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과거를 부정하고 배척하려는 종교적 의례였다. 국가 멸망이나 민족적 환난을 초래한 죄와 결별하지 않으면 새로운 미래가 열릴 수 없다고 보았기에 구약성경의 예언자들과 그의 지도를 따르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고 자백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교회사의 여러 세기마다 예언자적 설교가들도 민족사적 고난을 하나님의 심판, 채찍, 하나님의 뜻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앗수르 제국의 이스라엘-유다 침략과 유린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하나님의 징벌적 분노의 집행과정이라고 선언했던 고대 이스라엘 주전 8세기의 네 예언자,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와, 주전 7∼6세기에 유다를 침략한 바벨론 제국의 침략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규정하고 국가 멸망과 민족 전멸을 막기 위해서는 심지어 바벨론의 종주권을 받아들여 그 봉신으로라도 생존해가라고 설득했던 예레미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411∼413년 서고트족의 로마 유린 사태 안에서 아프리카 히포의 감독 성 어거스틴도 《하나님의 도성》에서 로마제국 지배층의 성 문란과 무신론적인 탐욕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후를 포착하여, 무신론적인 음란과 탐욕이 로마제국을 약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어거스틴은 로마에 닥친 서고트족의 침략을 초래한 중심 죄악 주체들과 그로 인해 극한 피해와 고통을 당한 로마의 성도들을 구분하여 다뤘다. 서고트족의 침략군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후 자살로 자기 명예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칭찬하고, 야만적인 노예 취급과 성적 폭력을 당하고도 살아가려는 여성 그리스도인들을 비하하는 로마교회의 분위기를 교정하기 위해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 1권을 저작했다. 서고트족의 침략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살아남은 그리스도인 여성들의 고통을 지극히 세심하게 어루만졌다. 고통당하는 여인들의 고난을 모든 로마인의 죄를 징치하기 위한 심판의 일부라고 뭉뚱그려 말하지 않았다. 문창극 후보자가 《하나님의 도성》 1권만 읽었더라도 정신대 할머니의 고통을 좀 더 세심하게 어루만지는 발언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거스틴보다 좀 더 후대의 교회사에도 자기 겨레의 환난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이 나타났다. 10세기 바이킹 족들의 침략을 받은 영국교회 주교들은 바이킹 족속의 영국 침략은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심판 분출이라고 강조하며 즉각적 회개를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1983년 템플텐상 수상 연설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동족 살해 유혈 혁명이었던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하나님 원인론적으로 해석했다. 솔제니친은 자신이 어렸을 때 자기 동족 5천만 명과 많은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에 몰아넣은 레닌-스탈린의 무자비한 공산주의 혁명을 겪은 러시아 사람들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라고 탄식하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김혜자가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는, 아프리카의 황폐한 들녘을 보고 “아프리카의 이 황량한 들판에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를 묻고 탄식하는 저자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지요”라고 답하는 두 명의 동행 목사들을 보고 “참 목사들은 좋겠다. 웬만하면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라고 논평하는 상황이 나온다. 성경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겪는 압도적 고통의 원인을 몇 가지로 설명한다. 아프리카의 기근과 농업 황폐화는 하나님의 신비한 뜻 때문이 아니라, 유럽의 아프리카 지배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 단작 재배로 식민지 플랜테이션 기업농을 실시한 역사와 긴밀한 인과관계를 이룬다. 이런 명백한 인과관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연막을 치는 목회자들의 피상적인 신앙에 대한 김혜자의 탄식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로 발생하는 고난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죄로 발생하는 고난, 제거 가능한 고난에 대한 바른 이해도 가져야 한다. 이제 우리는 성경의 고난 이해와 하나님의 뜻의 상관관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때다.
성경이 말하는 고통의 원인 세 가지: 신명기적 인과응보설, 애가형 저항과 탄식, 그리고 욥기의 고난 신비주의
첫째, 아담의 원죄로 악과 고통, 그리고 그 절정인 죽음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아담이 범죄하자 에덴동산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고 죽음과 고통, 인격적 분열과 적대가 시작되었다(“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가 나오는 창세기 3:17 이하). 이 죄와 벌의 논리가 고난과 악의 원인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논리다. 사사기에 가장 빈번히 나오는 죄 짓고 벌받는 현상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는 죄와 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와 벌의 논리는 신약에도 나온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참극은 그들의 성령훼방죄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징이었다. 이것은 신명기적 인과응보 사상이다.
그러나 미리 말해두지만, 성경에는 죄와 벌의 삼단논법을 뛰어넘는 은총 절대값 논리가 더 집요하게 작동한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참혹해도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다 소진시킬 수 없고 무효화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절대 은총은 죄와 벌의 논리를 압도하며, 죄인도 결국 용서하사 재활 갱생시켜주신다. 인과응보신학의 교과서인 신명기마저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보다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더 무궁하다고 말한다. 신명기도 절대적으로 무자비한 인과응보 사상을 말하지는 않는 것이다. 죄와 벌의 인과적 응보를 자세히 예거하는 28장(15-63절) 바로 뒤에는 인과응보신학을 초월하는 은총 절대 신앙이 나타난다. 신명기 29장에는 신명기 자체의 인과응보신학을 상대화하는 음성이 들린다. 이 본문의 화자는 고국 이스라엘 땅에서 뽑혀 이산과 유랑을 겪는 바벨론 세대의 일원이다.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8, 29).
29절에 인과응보적 신앙을 상대화하는 다른 논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감추어진 일과 나타난 일 사이의 변증법이 작동한다. 성취된 심판과 아직까지 감추어진 일이 구분되는 것이다.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께 속한 신비라는 말이다. 이미 드러난 일, 실행된 일인 유다의 포로살이와 유랑 생활에 하나님의 감추어진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JPS(Jewish Publication Society) 토라 번역(영어 성경)과 히브리어 원문을 검토해보면 드러난다. “Conceal acts concern the Lord our God; but with us overt acts, it is for us and our children ever to apply all the provisions of this Teaching.”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감추어진 것, 우리 하나님 야웨께. 그런데 펼쳐진 일은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영원히.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을 준행하도록.”
29절의 요지는 드러난 일, 집행된 심판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후손들의 율법 준행을 추동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즉 바벨론 포로살이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원인과 결과가 환히 드러난 일은 이 신명기 율법의 모든 조항을 실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감춰진 일, 즉 ‘하니써타로트’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여기서 감춰진 일은 “왜 이렇게 오랫동안 바벨론 포로살이가 지속되는지” 그 이유다. 이 소절이 바로 바벨론 포로살이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동원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바로 이 지점이 이사야 53장의 대속적 고난 사상이나 욥기의 이유 없는 고난 사상이 싹트는 곳이다. 그렇다면 신명기의 심판 신학에도 인과응보 원리를 뛰어넘는 고난 신비주의가 작동하는 셈이다. 신명기 29~30장 모압언약 단락에는 인과응보 논리를 초월하는 은총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신학이 득세하고 있다. 여기에 힌두교적 인과응보 신학은 없다. 하나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하나님의 인애는 무궁하다는 전제 아래 불완전하게 작동하는 인과응보, 죄-벌 신학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에 따라 비례적으로 응징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축소 심판하고 심판 유예하신다(시 103:11-14). 따라서 우리의 고난을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해석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
둘째, 역사의 고통과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의 사보타지(태업: 의도적으로 일을 게을리함) 때문이라고 불평하는 듯한 예언자적 탄식(렘 12:1-4; 20:7-13; 참조. 삿 6:11-14), 애가형 시편(시 12; 22; 44; 60; 74; 79; 80; 85; 89; 90편)과 예레미야애가 등의 논리도 있다. 특히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 성전 멸망을 방치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거침없이 터뜨린다. 자기 세대의 죄악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죄에 비하여 너무 지나치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예레미야애가에는 신명기적 자기추궁적인 회개보다는 “어찌하여? 이런 사태가 일어났습니까?”라고 대드는 듯한 불평과 그 어조가 자주 등장한다. 구약성경은 놀랍게도 환난을 당한 사람들이 고분고분하게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고 맞서며 하나님의 비활성화 모드 유지를 비판하는 것마저도 신앙행위로 받아준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상의 고난과 부조리한 사태를 보고 자학적인 죄책 고백 기도만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주관 자체에 대해 항의하고 불평하고 심지어 대들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죄 없는 자와 죄 있는 자를 동시에 진멸하려는 소돔성의 옥석구분(玉石俱焚) 상황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거론하며 맞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한발 물러나셨다(창 18장; 참조. 겔 22:30). 아브라함의 후손을 진멸하고 대신 자신을 조상으로 삼아 선민을 형성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들은 모세는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신실해줄 것을 거론하며 하나님께 맞서는 중보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한발 물러나셨다(출 32:10~14[특히 14절: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아모스가 미약한 야곱의 후손을 진멸하려는 하나님께 “왜 미약한 야곱을 진멸하시나이까?”라고 항의 기도를 드렸을 때, 그때마다 뜻을 돌이키시고 야곱의 남은 자를 살려두셨다(암 7:2~3, 5~6).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애가형 기도를 기대하시고 그 기도를 들어주심으로써 역사 개입의 명분을 찾으신다. 요즘이야말로 실로 이런 애가형 탄식과 기도가 필요한 상황이다.
셋째, 아무 죄 없이 고통을 겪거나 타인의 죄를 대속하여 고난을 겪는 경우도 있다. 창조의 신비에 속한 이유 때문에 환난을 당하는 욥이 바로 그렇다. 욥기는 죄만이 고난을 초래한다는 보수신학을 초극한다. 바벨론 포로기 1세대는 자신들의 죄로 인해 유배당해 이역만리로 끌려갔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태어난 2세대, 3세대는 자기 죄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다. 죄와 벌의 인과응보적 논리가 바벨론 유배 초래 당사자들에게는 통했지만 바벨론 포로 2세대부터는 안 통했다. 이처럼 욥기는 죄와 벌의 인과응보 논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황, 즉 신비한 고난이 닥치는 상황을 다룬다.
왜 슬하의 7남 3녀를 하루에 다 죽여버리고 자신의 명예를 음부에 집어던지는지를 하나님께 목쉬도록 묻고 항의하는 욥에게 하나님은 무려 70가지가 넘는 질문을 역으로 퍼붓는다(욥 38~39장).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1~4).
욥은 도저히 답변하지 못한다. 그러나 욥은 놀랍게도 하나님과의 화해를 맛본다. 자신의 항변을 듣고 나타나주신 하나님 자신이 욥에게는 응답이었다. 하나님이 자신을 여전히 버리시지 않은 것을 확인한 욥은 안도하고 위로받는다. 42장에서 욥은 뇌수술 받은 사람처럼 유순해져 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1~6).
욥과 하나님의 갈등이 너무 싱겁게 끝난다. 3~37장까지 욥과 친구들이 나눈 격렬한 논쟁과 욥의 항변에 비하면 이 결말부의 욥의 자세는 충격적으로 순응적이다. 이런 투항적인 욥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물질적 복(욥 42:12-16)으로 응답하시고, 둘 사이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행복한 평화가 감돈다. 도대체 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욥기 38~39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어느 정도 해명이 이뤄진다.
욥은 38~39장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은 창조질서의 일부라는 대답을 들었다. 38장부터 나오는 70가지 질문은 동물생태학, 식물학, 우주천체물리학, 인간심리학적 질문들로서, 창조주적 직관과 통찰을 통해 답변 가능한 질문들이다. 이런 모든 질문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대답은 풀어쓰면 이렇다.
“내가 굳이 말하자면 이 세상 창조질서와 그 운행원칙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법칙적인 것이 아니다. 창조질서에는 수학적 논리나 법칙도 작동 안 되는 빈틈이 있다. 신명기 28장의 인과응보신학을 갖고는 네 고난의 원인을 해명할 수 없다. 네가 고난받는 이유는 창조의 신비에 속한 것이다(특히 욥기 38:8~11). 죄 없는 자도 고난받을 수 있다는 확률적 가능성은 창조질서의 일부임을 기억해라.”
특히 욥기 38:8~11, 16, 34, 38을 깊이 묵상해보라.
8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9 그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10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 16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다녀 보았느냐 … 34 네가 목소리를 구름에까지 높여 넘치는 물이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 38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
창세기 2:6~7이 38절에서 새롭게 조명된다.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를 붙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섬세한 의지와 지성이 새겨져 티끌이 인간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티끌 같은 물리적-자연적 영역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궁한 자유와 지혜, 능력과 섭리가 작동하는 영적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도 수학적·물리적 법칙에 매인 것이 아니라 무궁한 하나님의 자유와 지혜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와 벌의 수학적 논리 외에 자신의 죄와 상관없이 창조주의 창조 섭리를 실현하기 위해 고난을 받는 자도 있을 수 있다는 또 다른 논리를 이 세상에 설정해두셨다는 의미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 고통과 고난을 예기케 하는 논리가 나온다(욥 19:25~26). 욥은 자신의 부조리한 고난의 원인을 수학적·물리적 논리로는 풀지 못했으나, 그 죄와 상관없이 고난당하는 일이 창조질서에 속한 일임을 깨달았고, 심지어 하나님도 창조 시에 죄와 상관없이 고난당할 수 있다는 일을 예상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었던 것이다.
욥기 38:10~11이 보여주듯이 이 창조세계를 뒤흔드는 혼돈세력은 해안의 바위를 치는 파도처럼 물러가 있으라는 창조주의 명령을 듣고도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세계의 정체를 욥은 보았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질서는 혼돈 세력의 침탈과 공격과 시위 앞에도 인간의 믿음과 순종, 진리 실천을 통해 의젓하게 지탱되는 질서임을 깨닫는 것이다. 죄 없이 고난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자야말로 이 창조세계가 악에 사로잡혔다는 묵시론적 비관주의를 이기게 만드는 신앙의 선봉대인 것이다. 하나님의 대답은 이런 것이다.
“내가 창조한 세계는 내가 엄청 깨어 있어서 세계를 통치하지만 그 통치는 혼돈세력의 파도에 침식당하면서 지탱되는 통치다. 죄 없이 고난당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주면 그것은 이 창조세계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려는 모든 무신론의 혼돈 물결로부터 이 세계를 지키는 일이다.”
욥은 보상 없이도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인물이었기에 이런 시험을 이길 수 있었다. 아마도 어떤 고난이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고 대표하고 대속하는, ‘대신적’ ‘대표적’ 심지어 ‘대속적’ 고난일 수도 있다는 사상이 욥기에서 싹텄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사상의 연장선 상에서 이사야 53장의 대속적 고난 감수 사상이 나왔을 것이다. 하나님은 죄와 벌의 인과응보 논리로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죄인들을 다시 살리기 위한 히든카드로 대속적 고난 신학을 창조질서의 일부로 이 세상에 설정해두셨을 것이다.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고난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손쉽게 단정하기보다는 긴 호흡을 갖고 다양한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겨레의 근대 역사에서 경험한 고난은 위의 세 가지 고난 상황과 부분적으로 모두 연결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지배층의 죄악으로 인해 우리 겨레 2천만 동포가 한일병탄으로 일제의 노예 백성으로 전락했다. 나라를 운영한 주체세력의 죄는 단지 2천만 분의 1의 죄책이 아니라 절대적 중대 죄책이다. 정신대나 징병으로 끌려간 동포들은 단지 그들의 개인 죄악 때문에 그런 비참한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유린당한 것이 아니다.
둘째, 우리 겨레의 고난에는 애가형 탄식과 항변을 불러일으킬 부조리한 상황이 있다. 왜 전범 국가인 일본은 번영 일로를 걷고 36년 일제 식민지로 고생한 우리 겨레가 분단의 고난을 더하여 받아야 하는가? 왜 우리 겨레는 30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1,000만 이산가족을 만들어낸 동족상잔의 전쟁을 3년간이나 치르며 8·15 해방을 기점으로 70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화해와 통일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는가?
아울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공의가 국제관계에서도 사회·경제·정치의 영역에서도 관철되게 해달라고 도고하고 간구해야 한다. 청년 기드온이 하나님을 향해 항변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불러 민족을 구원하는 사사로 삼아주셨다(삿 6:11-14). 애가형 기도와 탄식이 사라진 교회, 그것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지 않는 교회다. 히틀러나 스탈린, 모택동과 김정은 같은 이가 왕 노릇하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기도하는 성도들은 애가적 탄식과 항변을 통해 하나님의 역동적인 역사 개입을 간청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근대사 고난에는 욥의 고난과 같은 애매하고 억울한 고난도 있다. 열여섯도 안 된 나이에 남양군도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 노예로 전락한 우리 누이들은 대속적 고난은 아닐지라도 욥의 고난처럼 대신적 대표적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해자의 폭력이나 악행을 정당화하는 듯한 수사 맥락에 연루시키지 않아야 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아벨의 핏소리를 들으시고 신원하시는 보편적인 정의의 하나님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식민지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공동체의 죄 때문에 일제의 식민지 역사가 시작되었다”라고 스스로 죄책을 고백하는 것과, 일제나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가해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게으르고 악한 조선을 징치하기 위해 일제의 식민지가 되게 했다”라는 논리를 펴는 것은 전혀 다르다. 자칫 하나님의 섭리가 가해자의 압제 논리로 변질되지 않도록 정교하고 섬세한 하나님 섭리 이해에 이르러야 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섭리’라는 이름의 몽둥이를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변덕스러운 군주가 아니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심지도 다시 돋우시는 자비의 하나님이다. 당신의 독생자에게 인간의 모든 죄 짐을 떠맡기는, 사랑 때문에 친히 상처를 받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김회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