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전화번호에 깔려 죽어라.
까만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까맣게 내린 눈들은 내려서 녹지
않고 자꾸만 쌓여가고 있었다. 달려나가서 까만 눈들을 자세히 보니
그것은 눈이 아니라 전화번호들이었다. 그 동안 내가 광고를 실어준
많은 광고주들이 가지고 있는 전화번호들이 자꾸만 쌓이고 있었다. 이
삿짐 센타의 전화번호와 설비가게의 전화번호 간판가게의 전화번호 광
고회사의 전화번호 부동산의 전화번호 집수리 센타의 전화번호 중화
요릿집의 전화번호 등등이 자꾸만 내려 쌓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온통
온 세상이 전화번호에 깔려서 뒤덮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동안 허우적대다가 일어나니 꿈이었다. 마침 출근할 시간이었으므
로 나는 행복한 마을의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오랜만에 심 부장님과
임 실장님 그리고 안 대리와 박 대리가 나와있었다. 싱거운 소리를 잘
하는 안 대리가 한마디했다.
"이봐 김갑봉 씨!"
"예"
"내가 광고수주 잘하는 비결을 하나 알려주지"
"저야 고맙죠"
"내일부터 말이야 아기를 업고 나오라고 젖먹이 아기를 하나 업고 광
고주들을 찾아다니는 거야 사실은 마누라가 백혈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가 빚만 잔뜩 남겨놓고 죽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이 애랑 같이 먹고
살아야 하는데 당신이 광고를 해주지 않으면 난 이 아이랑 같이 굶어
죽고 말 거다 하하하 어때?"
곁에서 듣고있던 심 부장이 거들었다.
"그렇게 좋은 생각이 있으면 안 대리님이 직접 하시지 김갑봉 씨에게
알려주는 거죠?"
"아이고! 심 부장님도, 나는 천성이 착해서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인
거 아시잖습니까?"
"그럼 김갑봉 씨는 천성이 못됐다는 건가요?"
"그렇게 되나 하하하"
사무실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사실 이번 지역에서는 예상보다
광고 수주가 저조하고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모두들 침울해
있던 때였다. 정말 그렇게 라도 해서 광고를 많이 수주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더욱 침울해졌다.
"저는 고려아트에 수금하러 가야 하니 먼저 나가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뼈 속까
지 스며들었다. 겨울의 한가운데 서있었다. 영하의 날씨에 뼈저린 삶의
비정함에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문득 사장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어떻게 보면 잔인하달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영업 아닌 일은 없습
니다. 하다 못해 여러분이 부러워하는 은행장도 대부분의 시간을 저축
액이 많은 고객을 관리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삼 십 억 쯤을 자유저축통장에 입금해 놓은 고객이 갑자기 찾아와서
모든 돈을 찾아서 다른 은행에 입금시키겠다고 하면 그 은행의 잔고는
거의 바닥이 날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고객들을 관리하는 것이 은행장
의 일이고 그것도 영업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영업아닌 일은 없다. 하다못해 김치공장을 운영한다고
해도 영업을 해서 김치를 제대로 판매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맛있는 김
치공장이라고 해도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영업이야말로 현재
를 살아가는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고려아트
로 가기 위해서 마을 버스를 탔다. 영업사원 중에는 더러 자가용을 끌
고 다니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시간낭비였다. 주차공간이 마땅치 않
으며 언제 스티커를 발부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마
을 버스를 타고 한참을 빙빙 돌아서 고려아트로 갔다. 고려아트는 간
판제작을 주로 하는 광고회사였다. 간판 제작뿐이 아니라 스티커 전
단지 재떨이 볼펜 등 온갖 판촉 물과 그리고 현수막까지 하는 커다란
광고회사였다. 지역을 옮겨 다닐 때마다 칼라 전면광고를 양면으로 내
서 그리고 광고효과도 제법 본다는 곳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수금이
잘 안되기 시작하더니 삼 백 만 원 쯤의 광고비가 밀려있었다. 처음에
는 그러려니 하다가 전혀 수금을 해줄 생각을 안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전화로 독촉을 했다. 그러자 고려아트의 사장님이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오라고 했다. 고려아트의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내려서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한참동안 심호흡을 했다. 도대체 무슨 트집을 잡으려
하는가. 어떤 트집을 잡아서 광고비를 깎으려 한다거나 아니면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 사모님도 함께 계시네요"
나는 들어가면서 인사를 했다. 과도로 사과를 깎고 있던 아주머니가
차가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다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탁자 위에
과도를 놓았다.
"행복한 마을 아저씨 이쪽으로 앉아요"
눈빛만 차가운 게 아니라 말투조차도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고려아트
의 사장님을 힐긋 쳐다보니 사장님은 담배를 피워 물면서 침을 삼키고
있었다. 침을 삼킨 다는 것은 무언가 적의를 나타내는 전의를 다지는
행위이다. 나는 일이 어렵게 되어 간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
다. 나는 사모님이 앉으라고 가리키는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신 그거 좀 가져와 봐요"
사모님이 사장님에게 말하자 사장님은 방으로 가서 행복한 마을이라
는 책을 가지고 나왔다.
"이걸 광고라고 실은 거요?"
나는 갑자기 기가 막혔다.
"무슨 말씀이에요?"
"보면 몰라요 이게 광고라고 느껴져요?"
"이 도안은 사장님과 사모님이 원하는 대로 만든 것이고 여태까지 이
걸로 계속 고집을 했잖아요 도안이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도안으로
만들면 되는 거 아닙니까?"
"도안만 가지고 그라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장 마당에 광고를 내는데
당신들 보다 삼분의 이는 싸요 우리가 칼라 양면으로 내면 백 삼 십
만 원씩 그러니까 칼라 한 면 당 육 십 만 원씩 꼬박꼬박 받았지요?"
"그랬지요"
"그런데 장 마당에서는 칼라 양면으로 해서 팔 십 만원에 실어준다고
합디다, 우리는 당신 김갑봉을 믿고 행복한 마을을 믿고 여태까지 광
고를 냈는데 지금 보니 우리를 완전히 봉으로 알고 바가지를 옴팍 씌
웠잖아요"
"전에도 수 차례 말씀 드렸지만 장 마당은 지역 정보 지의 성격을 띄
고 발행 부수도 만 오 천 부로 우리보다 삼분의 일도 안 돼요 우리는
오 만 부를 찍고 부수 공개도 할 뿐더러 사장님도 와서 우리 책이 그
러니까 강서구 때는 하나익스프레스라는 이삿짐 센타의 창고에 쌓아
놓았고 양천구 때는 신정사거리에서 고려병원 못 미쳐 목 이 동 주차
장이라는 주차장에 쌓아 놓은걸 확인 하였잖아요, 그때 사장님은 목
이 동 주차장이라니까 목동 이단지로 갔다가 전화로 확인하시고 다시
신정사거리로 오신 걸 설마 부인하는 것은 아니겠죠?"
고려아트의 사장이 다시 담배를 피워 물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담
배를 피는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고려아트의 사장님과 사모님인 것이다.
"어쨌든 행복한 마을 아저씨 우린 광고비를 한 푼도 줄 수 없어요"
"억지 좀 부리지 마세요 행복한 마을에 광고를 내서 일도 많이 하시
고 그러면서 고려아트도 많이 커졌지요 초기 어려울 때 광고비도 많이
깎아 드리고 그리고 몇 달씩 광고비가 밀려도 사장님께서 어렵다고 하
면 독촉한 번 안 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장 마당이라는 책자와
비교를 하면서 저한테 이러시면 안돼는 것입니다."
사모님이 벌떡 일어서면서 갑자기 욕설을 퍼부었다.
"이놈 이거 순전히 날강도 아니야 장 마당에서는 팔 십 만 원인데 백
삼십 만원씩 받아서 중간에 가로채고 경찰서에 연락해야돼"
갑자기 머릿속에 수많은 벌떼들이 윙윙거리기 시작했다. 엊저녁 꿈자
리가 사납더라니 이런 봉변을 당하는 구나 싶었다.
"이것보세요 아주머니"
나는 의도적으로 사모님이라는 호칭대신에 아주머니라는 호칭을 썼
다.
"사람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막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놈" 이라니
요, 누군 뭐 욕 할 줄 몰라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요 만약에 내가 아
주머니한테 이년 저년 한다면 그게 듣기 좋겠어요, 그리고 청약서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남을 속이고 중간에 착복하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
다. 당장 사무실에 전화해서 우리 사장님한테 물어봐도 알 겁니다 내
가 입급가 보다도 싸게 당신들 실어 드린 거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이 년이라고?"
아주머니의 눈초리가 흰자를 들어내더니 벌떡 일어서면서 탁자 위에
놓여있던 과도를 집어들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아주머니가 과도로 찌
르려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손으로 과도
를 막았다. 아주머니는 일어서다가 탁자의 의자에 걸리면서 앞으로 그
러니까 내 쪽으로 엎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 양손으로
물컹한 느낌이 왔다. 아뿔싸, 고개를 들어보니 내 양손은 아주머니의
양 젖가슴을 움켜잡고 있었다.
"이놈 이거 성추행 범이다"
나는 얼른 손을 뺐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도대체 이 난관을 어
떻게 수습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행복한 마을 김갑봉이 놈이 나를 성추행 하려고 했다."
아주머니는 더욱 기세 등등하여 날뛰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사장님
을 보니 사장님은 아주 난감해 하고 있었다. 그렇다. 구원의 뿔은 사장
님인 것이다.
"이봐 요, 강형"
사장님의 이름이 강 형구이고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정도 많은 것을
알고있었으므로 나는 과감하게 나갔다.
"이것보시요 강 형 내가 당신 앞에서 당신 마누라를 성추행 했단 말
이요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의 전말을 지켜봤으니 내가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알 거 아니요"
사장이 한참동안 담배를 피우더니 사모님에게 말했다.
"여보 그만해 듣기 민망하게 무슨 성추행이야 당신이 공연히 과도 들
고 설치다가 그렇게 된 거 아니요 그러니 그만해요 그리고 행복한 마
을 아저씨 오늘은 일단 그냥 가요 그리고 내일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아무래도 오늘은 서로 기분이 많이 상했으니 더 이상 같이 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니 내일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납시다"
나는 인사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머리 검은 짐승은 잘해주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다던 할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자꾸만 눈물이 나
왔다. 하마터면 광고비도 못 받고 성 추행범으로 몰려서 더러운 오명
을 쓸 뻔했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화가 났다. 집으로 돌아와서 낮잠을
잤다. 화가 나서 잠이 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잠을 청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차희였다.
"요즘 전화를 통 안 하네"
"바빠서 그랬어 미안해"
"놀러와라 보고싶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고 내일 퇴근하고 갈 게"
"목욕재계하고 기다릴게"
"끊는다."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어 두 병을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억지로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엊저녁에 꾸던 꿈의 연속이었다. 다만 지난밤에
는 바라보기만 하던 까만 숫자들에 깔려서 발버둥치는 꿈이었다. 전화
번호에 깔려 죽는 꿈.
카페 게시글
창작詩, 창작소설..
김갑봉전.6.전화번호부에 깔려 죽어라.
백발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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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1.1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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