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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외대수필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미성
튼실한 개성, 수필의 희망
이상렬
문학의 고유한 성질이 개성이라면 수필은 더욱 그러하다. 장르 특성 때문이다. 수필은 개인의 체험에서 얻은 것을 고백체로 표현하는 문학으로 작가의 개성을 자유롭게 담는다. 이것은 자신의 견해를 객관적으로 설명하거나 논증하는 일반적 산문과는 특성을 달리한다. 개성의 문학으로서 수필은 산문의 문학보다 특징이 짙다. 산문은 시와 견주어서는 구별된 특징이 있고, 소설과는 같은 범주의 성격을 지니지만 수필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1인칭’이라는 ‘개성’ 때문이다. 나만이 간직한 고유성과 특수성이 개성의 본성이다. 그것이 개인의 각 작품 간에서 발생하는 개성이냐, 아니면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것이냐를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 충족된 개성을 의미한다.
일찍이 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들어왔지만 이제는 수필의 위기를 논할 때다. 제대로 된 수필의 학문적 기반을 구축하기도 전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말았다. 수필의 위기란, 단지 외양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수필에 대한 가독성의 위기도 아니다. 오히려 과잉의 위기다. 수필의 경우는 더 선명하게 그 양상이 드러난다. 매체의 다양성이 주는 기회는 되레 몰개성이라는 위기를 맞고 말았다. 디지털 매체는 수필 장르 특성상 가장 이상적인 문학적인 텃밭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개성이 사라진 과잉생산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작품’이 아니라 ‘제품’이 쏟아지게 된 것이다. ‘무형식의 형식’이란 수필의 자유분방함을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개념일진대, 언제부터인가 형식에 있어서 일치된 용어로 정돈시키려는 시도나 고정불변의 창작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개성의 문학으로서 수필은 위기와 호기의 양립적인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위태롭다. 위기란, 문학 전반의 위기에 관한 논의에서 수필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기회란, 매체가 주는 호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영역에서 취할 수 있는 더 나은 측면을 얻지 못했다. 즉, 위기의 단점을 최소화하지 못하고, 호기의 장점을 놓치고 말았다.
진단하면, 개성의 부재다. 수필인들은 살아왔던 경험을 노출하기에 두려움을 느낀다. 또 노출의 정도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체험에 대한 노출보다 사상의 노출을 두려워한다. 이유가 뭘까. 노출 방식을 모르든지, 아니면 아예 노출할 자신의 사상이 없든지 둘 중 하나다. 개성이란 견고한 내 생각과 사상을 기초로 한다. 개성적이란 ‘내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수필의 위기가 과잉의 위기라 한다면, 과잉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다. 홍수 끝에 먹을 물이 없듯, 수많은 작품 중에 견고한 개성을 지닌 작품이 흔치 않다는 것이다. 문장 하나를 붙들고 혹독한 시름의 과정을 겪는 만큼, 자기만의 견고한 개성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는 경홀히 여기고 있다.
동리목월 2017년 봄호에 발표된 5작품의 수필 중에서 4작품을 뽑아 작가만의 개성적 영역을 찾아보았다.
개성1. 사상과 감성의 융합
-박양근, 「십화화쟁十花和諍」(『동리목월』, 2017 봄)
작가는 근래 한꺼번에 피어나는 봄꽃을 보며 통찰한다. 순서에 따라 출현했다가 사라지는 것이 만물의 순리라지만, ‘음모를 꾸민 듯이 한꺼번에 피어나는’ 꽃들을 목도한 작가는 이런 현상을 ‘십화화쟁十花和諍’이라 했다. 여기에서 작가는 사유를 확장한다. 원효의 화쟁和諍, ‘함께 살아가는 사상’을 십화화쟁十花和諍을 통해서 본 것이다.
모처럼 만나는 중량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눈여겨 살펴보면 특징 하나가 있다. 여느 수필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1인칭의 표현이 없다. 그것은 개인사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변수필이 개인사를 주로 다루었다면, 중수필은 인간사의 본원적인 의문이나 철학을 논한다.
당연히 내용면에서 농밀하다. 어휘는 내용을 담기 위한 최소한의 정제된 도구로만 사용했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과정은 철학적 사유다. 이 절차를 통해서 자기 세계를 개진하고, 사물의 본질을 규정한다. 이런 흐름은 묘사가 주는 감각적 표현, 스토리가 주는 잔재미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작품에 특별히 개성적인 부분이 있다. 철학적 내용을 담은 도구를 보라.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소재와 문체다. 봄을 맞이하는 첫 꽃 영춘화, 봄꽃이 함께, 더불어, 사이좋게 핀다하여 십화화쟁. 소재가 꽃이다. 또 하나의 도구는 서정성이 깃든 문체다. ‘노랗고 희고 붉은 언어가 가지마다 피어난다. 꽃꽃꽃, 그 하나하나가 설법보다 귀한 말씀이다’ 서정성이 자칫 감성에 질척거리기 쉽다지만, 작가는 밀도 있는 메시지와 담백한 문체로 극복했다. 마지막 문장에서는 단출한 풍미를 느낀다. 중수필의 묵직한 쏠림을 서정의 추로 균형을 잡았다. 영민한 사상 체계를 미적 감성으로 달랬다. 사상과 감성의 융합이다.
작가는 시대를 읽었다. ‘조용하지도 평화롭지도 아름답지도’ 않는, 오직 내 것만 옳고 너의 것을 틀린 백가쟁명白家爭鳴의 정쟁세태를 피는 봄꽃으로 항변한다.
봄을 맞이하여 도처에서 영춘화가 핀다. 꽃잎을 열어 말을 하건만 사람들은 개화의 속뜻을 쉬 알지 못한다. 매화가 맺혀도 마이동풍이고 벚꽃이 피어도 서로에게 냉랭하다. 배나무 줄기마다 하얀 꽃이 얹히건만 아직 등 돌리고 복사꽃이 피를 토하듯 외쳐도 서로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사람들은 ‘기분 좋은 음모를 꾸민 듯 한꺼번에 피어나는’ 이 재미난 꽃들의 반란을 보면서도 도무지 경탄할 줄 모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들려주는 프란체스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밤 프란체스코는 아시시의 밤거리를 걷다가 머리위에 떠 있는 보름달을 보게 된다. 늘 존재하는 것이지만 마주침이 없을 때는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날따라 비로소 눈에 들어온 것이다. 마치 기적을 만난 듯 그는 황홀경에 빠졌다. 하지만 거리에는 어느 누구도 이 경이로운 광경에 취해있는 사람이 없었다. 프란체스코는 교회 종탑위로 올라가 종을 치기 시작했다. 종을 칠 시간도 아닌데도 말이다. 몰려든 사람들은 왜 종을 치냐고 화를 냈다. 프란체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세요. 하늘에 떠 있는 저 달 좀 보시라고요!”
망울 터지는 봄꽃에 시선을 주기에, 하늘에 뜬 둥근달을 보면서 감탄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퍅퍅하다. 냉랭하게 식은 가슴으로 천하를 움켜쥐려는 백가쟁면의 사람들에게 ‘꽃들의 거사’나, 보름달의 기적은 그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보라, 꽃들은 ‘꽃꽃꽃’하는데, 사람들은 ‘쟁쟁쟁’(전쟁, 논쟁, 정쟁)거리는 것을.
견고하게 구축된 철학성, 치밀한 논리적 체계, 냉철한 지성을 지닌 작가에게서 설핏 푸근한 감성을 보았다. 날렵한 사상 체계 위에다 감성의 옷을 입은 작가, 터지는 봄꽃들에 감동할 줄 아는 봄의 사람인 게 틀림없다.
개성2. 해석의 대상과 해석자의 일치
-윤상희,「반전」(『동리목월』, 2017 봄)
판은 구경꾼이 있어야 흥을 더 한다. 한 판의 윷놀이를 보았다. 뭇 이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묘사의 능력을 갖추었다. 안정감 있는 문장에다 예리한 시선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해석해 내어, 성찰의 단계까지 나아가는 저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작가는 윷놀이 과정이 인생 여정과 같다고 직접 기술했다. 작품 곳곳에 비교, 배치된 윷놀이 이야기와 더불어 인생 해석 장치들을 보자.
⓵엎치락뒤치락 펼쳐지는 윷판이 꼭 우리네 삶과 같다.
⓶되돌아보면 내 인생 판에도 윷판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⓷네 개의 말로 상대편과 함께 시작한 윷판이 나의 인생판이라면 나는 이제 몇 번째 윷말로 인 인생의 어느 지점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⓸목표에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길에 들어섰다가 예기치 못한 복병으로 허둥지둥 도망치던 부끄러운 모습들도 떠오른다. 속도에 연연하지 말고 차라리 먼 길로 돌아가는 것이 더 지름길인 것을 깨달은 것은 연륜이 더해진 뒤였다.
⓹설날 저녁의 윷놀이는 점점 무르익어가고 가족들의 흥은 고조되어 화합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내 생각도 점점 깊어져만 간다. 나는 지금 인생판의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⓺회한 가득한 마음으로 윷판을 바라보니 아직 모든 것이 갈무리지어지지 않았기에 안도감도 든다. 윷판도, 내 삶의 판도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윷판인가. 인생판인가. 윷놀이 장면 하나를 보여 주자고 무에 이렇게 긴 장면을 할애했을까. 작가는 제 인생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수필은 결국 ‘나’를 말하는 문학이다. ‘나’ 바깥세상을 말하기보다 내면의 세계에 더 집중하는 것이 수필의 보편 방식이다. 그렇다면 오늘 윷판을 보여준 것은 결국은 인생판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즉, 윷판에 대한 해석이 ‘인생판’이다. 그 해석의 지평에는 대상이 존재한다. 대개의 경우 해석의 대상과 해석자인 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해석의 대상은 객관적이라면, 해석자인 작가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여기서 개성적 측면을 보자면, 해석의 대상과 해석자의 일치다. 그리 먼 거리를 두지 않았다. 해석자의 언어표현 방식이 대상(윷판)이 아닌 해석자 자신(인생판)을 지시하고 있다. 작가는 윷판에다 인생판을 첨가시켜 녹여 넣었다. 즉 서사는 윷판, 사유는 인생판이다. 서사 일변도에 사유가 끼어들면 무드가 깨어지기 십상이지만 오늘의 경우는 다르다. 우리에게서 윷놀이란 그저 일상적 놀이요, 서사다. 작가는 윷판을 통해 서사를 보여주고, 인생판을 통해 사유했다. 윷판과 인생판, 서사와 사유의 절묘한 결합이다.
마주치는 모든 것이 해석의 대상이며, 객관적인 대상은 나의 주관적 해석을 통해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다. 나에 의해서 해석되고, 의미가 내포된 것이라면 무의미하는 것, 소외된 것, 하찮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 자체의 가치만큼이나 해석의 가치가 중요하다면 윷판뿐만 아니라 무엇이 인생의 판이 아니겠는가.
개성3.확정적 소재 활용과 결속
윤승원, 「옛 담, 그리다」(『동리목월』, 2017 봄)
소재 사용법이 개성적이다. 독특한 방식으로 소재를 다루었다. 대개의 경우 소재를 찾아 주제를 구현하는데 반해 산탄식으로 펼쳐 놓았다. 확장적 소재 활용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제재題材인 담을 중심에 세우고, 전국의 여러 담으로 소재를 확대시켰다. 동시에 소재의 유기적인 결합을 이루었다. 작가는 전국의 7개 담을 활용했다. 담들은 각각의 메시지를 품고 있다. 다음과 같다.
⓵운곡서원 담장-‘옛 담은 풍경을 안고 풍경은 옛 담을 안는다.’
⓶덕수궁 돌담-‘살아있는 궁궐을 안고’
⓷대릉원 담장-‘사후세계를 껴안고 있어’
⓸송소고택 담장-‘담은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경계이지만 또한 안과 밖을 끊임없이 소통케 하는 기능도 한다는 것.’
⓹구례 산수유마을 돌담-‘옛 집은 담이 있지만 외부와 소통이 되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웃과 주고받는 것이 많았다.’
⓺낙산사 담장-‘안쪽에서는 낮아 보이는 담이 밖에서 볼 때는 엄청 높다. 그건 아마도 속세의 것들이 담장을 넘어오는 것을 방지하는 한 편 수도자들은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⓻제주도 돌담-‘돌담은 집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목장과 무덤도 지켜준다. 목장의 돌담은 말을 방목하는 경계의 역할을 하고 무덤의 돌담은 뭇 짐승들의 폐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7개의 담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메시지는 큰 틀 안에서 하나의 주제로 통일성을 이룬다. 그것은 ‘소통’이다. 몸통은 담이다. 각각의 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소통’이라는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다. 서로 다른 지체의 마디가 엮어져 하나의 건강한 인체가 되듯, 한국의 서로 다른 담은 생명 있는 거대한 담으로 완성된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본 것이다. 하나 안에서 전체를 담고 있는 담, ‘내’가 ‘너’가 아닐 수 없는, ‘우리’와 연결된 ‘담’인 것이다.
비단, 담뿐이랴.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말하길, ‘문학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고, 발휘하도록 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존재한다는 것은 교류한다고 했던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정답도, 더 높은 수치도, 더 분명한 경계선도 아니라 소통이요 공감이다. 이것은 옛 담의 기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서의 속성이기도 하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웃과 팥죽, 호박전을 건네고 누구네 아들 장가간다는 소식을 주고받는 옛 담의 기능이요, 여럿이 함께 뒤엉킨 담쟁이 넝쿨이 느린 보폭으로 기어이 넘는 것도 ‘담’이었느니 가능한 속성인 것이다. 거기에다 ‘우리’와 ‘함께’라는 의미가 더해질 때 불통의 벽은 허물어질 것이며, 소통의 담벼락을 따라 채송화며 봉숭아, 해바라기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피어날 것이다.
개성4.역설의 힘
-박지영,「슬픈 축제」(『동리목월』, 2017 봄)
작가의 아버지는 주기적으로 밥상을 뒤집었다. 어찌 우리 옛날 아버지들은 툭하면 밥상을 뒤집었을까. 아버지의 밥상 뒤집기에 관한 작가만의 해석을 보자.
*현재의 삶을 홀라당 뒤집고 새 삶을 살고 싶은 마음 다짐.
*목표 미달한 이번 분기를 결산하고 다음 분기의 선전을 다짐하는 슬픈 축제.
*감정을 발산하는 시간.
*속상한 아이의 울음과도 비슷한 것.
*양은밥상의 힘을 빌려서라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 고단함을 발산하려 했던 것.
이것이 작가가 짐작하는 아버지가 밥상을 뒤집는 이유다. 밥상 뒤집기는 아버지에게만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고 작가는 말한다. 각자의 밥상 뒤집기(감정 발산하기)가 있었다. 어머니의 밥상 뒤집기는 아버지의 버럭 소리와 함께 공중2회전을 하고 낙하하는 양은밥상의 보며 속으로 삼 낀 눈물 맘껏 흘리기. 장남인 오빠의 밥상 뒤집기는 ‘몽땅 버리라’고 엄마에게 성화를 하고 자전거 타고 나가서 바람에 눈물 흘려보내기. 어린 작가의 밥상 뒤집기는 쭈그려 앉아 울면서 반찬 줍기였다.
개성적인 것은 해석의 힘이다. 해석은 내가 경험한 역사, 마주치는 대상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본다면 객관적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해석자는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느끼고 싶은 대로 느낀다. 작가는 ‘밥상 뒤집기’를 ‘슬픈 축제’로 보았다. 역설이다. 그 역설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함께 우는 것만큼 사람의 마음을 결합시키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사는 날 동안 숱하게 마음의 밥상을 뒤집어가면서 내면으로 다 걸러냈으리라. 역설! 잘만 활용하면 천하무적의 심리효과를 얻을 수 있다. 난장판을 난장판으로 보지 않으려는, 끝을 끝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초긍정의 역설이다. 그 절정은 다음 대목이다.
울고 싶었지만 가족 앞에서 울 수 없었던 아버지는, 대신 우리를 울게 만들고 자신도 결국에 파란 대문을 박차고 나가며 눈물 흘리지 않았을까?
이제야 알았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시도 때도 없이 밥상을 뒤집은 까닭을. 아버지에겐 울 수 있는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이여, 우는 방을 마련하라!
수필, 결국은 나를 말하는 장르다. 가장 나다운 것은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가장 나다운 것이 가장 확실한 보편성을 확보한다. 나를 잃고 세상을 얻으면 뭐하겠는가. 내가 없는데 말이다. ‘~답다’라는 단어는 일부 명사나 어근의 뒤에 붙어, ‘그것이 지니는 성질이나 특성이 있다’의 뜻을 더하여 형용사를 만드는 말이다. 만약 ‘대통령답다’, ‘남자답다’, ‘작가답다’면 대통령의 특성을 소유한 자, 남자의 특성을 소유한 자, 작가의 특성을 소유한 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답다’는 ‘가장 나다운 특성을 지닌 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나’는 ‘나’이다. 이것이 개성이다. 가장 나다운 것이 개성이다.
술이부작述而不作라는 말이 있다. ‘기술만 하고 창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자의 말인데, 당시 지자知者들이 갖출 겸손의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닌가. 하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철칙처럼 붙들고 살았다. 선배들의 글과 사상과 철학을 설명이나 인용은 가능하지만 어떤 형태의 변형도, 창작은 안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명문장가였던 박지원은 술이부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술하지 않고 당당히 창작을 했다. 특유의 자유분방함으로 정통적인 문체를 벗어나 패사소품체를 구사했다. 곧 〈열하일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다채로운 표현양식과 연암체라고 불리는 독특한 문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정통 고문에 구애되지 않고, 소설식의 표현방법을 과감히 도입하여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고 시어의 사용이나 고답적인 용사는 쓰지 않았다. 이에 정조는 박지원을 소환한다. 타락한 문풍이라 하여 반성문을 쓰게 하는 등 문체반정을 도모한다. 조선 판 율법주의가 아닌가. 이것은 개성의 말살을 의미한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성서/고후3:6)’라는 말이 있다. 문자에 갇힌 법조문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아래 새 것이 없다’고. 이 땅의 모든 것은 이미 창조된 것이니 새로울 것이 없다. 즉 헌 것이니 헛되게 살라(전1:2)는 말인가. 아니다. 성서(전도서)을 자세히 읽어보라. 성서는 물론이거니와 뭐든 제대로 해석되어야 한다. ‘헛되다.’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다.’이 말은 한 평생 권력자로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누렸던 왕의 고백적 선언이다. 이것은 이미 창조된 세계에 대한 모방적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에서 살아보니 별 것 없으니, 이제 별 다르게 살라는 말이다.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닌, 이제 다르게 보라는 말이다. 허무한 세상 허무하게 살지 말고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살라는 말이다. 이미 기술記述된 선조들의 사상에 술이述而만 하고 창작하지마라는 말이 아니다. 문자가 사람을 죽이듯, 내용 없는 문자는 사상과 개성을 죽인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듯이 개성 없는 기술記述은 수필을 죽인다.
이정도면 느꼈으리라. 여기서 끝내기 아쉽다는 것과 이즈음에 개성5가 등장해야 한다는 것을. 끝내면서 이윤기의 글 「야, 단수 한 번 높구나」일부를 소개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엄숙주의의 굴레를 벗고 청산유수로 글을 토해낸다. 화가가 쓴 글, 가수가 쓴 글이 인문학자가 쓴 글보다 부드러우면서도 정교한 경우를 자주 본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가? 나는 문어가 구어화하고 있는 것을 주목한다. ‘이메일’을, 많은 사람들은 쓴다는 기분으로 쓰지 않고 말한다는 기분으로 쓴다. 그래서 쓴다는 강박관념, 곧 생각의 흘게가 풀리면서 말이 술술 나오는 것 같다. 우리말은, 우리 문학은 그 쪽으로 가파른 기울기를 보일 것 같다. 김화영 교수가 한 일간지에 쓴, <시가 있는 아침>의 짧은 글들을 기억하시는지. 이 근엄한 문학평론가가 쓴, 내가 소설에다 실험하고 싶어 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기억하시는지.
“야, 요거 참 삼삼한 시네. 그런데 왜 삼삼하냐고 누가 물으면 뺨 맞은 듯 깜빡, 몰라져버리네.”
“여기까지는 어떻게 시인의 흉내를 내겠는데……야, 단수 한번 높구나.”
“그러니까 무슨 분위기 좋은 찻집 같은 데 남녀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단 말이지……농담 따먹기만 하고 있단 말이지……그만 앞에 놓인 찻잔을 엎질렀단 말이지……그런데 정작 쏟아진 것은 이쪽 마음이다 이거지…….”
고단수라는 말이다. 가장 높은 단수의 글은 견고한 개성을 지닌 글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다운 글을 말한다. 소설가 이윤기의 산문, ‘야, 단수 한 번 높구나’형식의 글을 수필에서는 불가능한 것인가. 어찌 보면, 전통적 경륜과 이론적 토대를 세우기도 전에 현장에서 만들어진 고정된 형식에 스스로 몸을 가두고 있지 않나 싶다. 항간에선 ‘왜 유독 수필인가’, ‘왜 수필로써 자유분방함을 표현하려는가.’라는 말을 하고, 다양한 미적 추구를 통한 외연확대를 수필의 정체성 훼손이라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수필이 아니면 안 되는 고유한 정격正格, 즉 사실과 진실 안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이상, 다른 목소리, 다른 표현,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할 수 있는 입지를 수필은 충분히 지니고 있다. 이것은 ‘불손함’이 아닌, 단수 높은 ‘튼실한 개성’이다.
동리목월 2017년 봄호에서 분석한 4편의 수필, 다 똑같지 않아서 좋다. 이것이 문학적 성공이다. 시대적 상황은 늘 그랬다. 위기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우리 수필이 문학적 환경이 변모할 때마다 요동치는 허술한 내공을 지닌 장르가 아니라, 작은 외풍에 바스락거리지 않을 견고한 개별성을 지닌다면 미래에 관한 과도한 위기의식은 불필요할 것 같다. 그다지 폼 나는 문학적 환경이 아님에도 수필 지키기 외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의 수필인들에게 공경의 마음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