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설교 하나 32.(새 사람의 기도)
아들과 둘이 사는 아내의 친구가 있다. 그 아들이 얼마 전 원하던 대학원에 합격했다. 그런데 목사 사모인 아내의 다른 친구가 그 아들의 합격을 위해 남편과 함께 매일 기도를 해왔다. 그러니까 그들의 기도 제목에 친구의 아들의 대학원 입학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내의 친구는 사모인 그 친구와 그 남편 목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선물을 했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아내에게 뭐라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많이 불편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나도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고 나 역시 그런 일이 옳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기도를 전혀 드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드리지 않는다.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경우도 화살기도가 대부분이고 제목을 정해 날마다 드리지는 않는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제목을 나누며 친밀한 교제를 나눈다. 기도제목을 나누기는 하지만 돈을 나누는 일은 없다. 기도제목을 통해 다른 사람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알게 되었어도 그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놓는 경우는 없다. 내어놓는 경우에도 가진 것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거나 상조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기도의 타락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다른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아니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 한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기도를 생각해보자. 나는 교회에 근무하며 새벽기도회의 문을 열고 닫는 일을 하며 자연스럽게 교인들이 드리는 기도를 듣게 되었다. 특히 가장 오래도록 기도하는 분의 기도는 더 많이 듣게 되었고, 그런 기도의 내용이 매일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벽기도회에 참가하는 교인들의 기도는 정해져 있다. 대부분 기도제목을 정하고 기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내용이 정말 단순하다. 자기 자신과 자기 가정을 위한 기도가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가 포함되어 있는 분도 있지만 그럴 확률은 매우 낮다.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여 기도를 많이 드리는 분의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의 내용은 거의 포함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자기들의 교회와 형식적으로 드리는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한 기도가 포함되기도 한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인 내용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매우 심각한 질문이다. 한 번 자신의 경우를 생각을 해보라.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의 경우도 중보기도라는 자랑을 하며 주변 아는 이들의 문제나 바라는 것을 기도한다. 그 기도 역시 기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기도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그런 기도를 단호하고 정확하게 이방사람들의 기도라고 정의하신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정확하게 그런 이방사람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르지 않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정화수를 떠놓고 서낭당이나 부엌에서 기도를 드리던 할머니들의 기도와도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목사라면 그런 기도의 제목 따위는 나누지 말아야 한다. 만일 목사가 교인들로부터 기도 제목을 받아 그것을 날마다 기도한다면 그가 하는 일은 목사가 아니라 무당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을 하는 목사들이 아주 많다. 특히 개척교회나 작은 교회 목사들의 경우 그러한 경우가 현저하게 많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대해 문외한이 되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들에 핀 꽃들과 공중을 나는 새들도 하나님께서 입히시고 먹이신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런 것들 때문에 염려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염려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분명한 표지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걱정이나 염려를 하지 않게 된 사람들은 기도를 멈추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도를 드리게 된다. 그 기도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아는 이들이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평등한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하면 그것을 공산주의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공산주의자, 빨갱이, 종북 좌파라고 생각한다. 특히 소외된 사람, 경쟁에서 진 사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진저리를 치며 돌아선다. 그들이 바로 죽은 후 심판의 근거가 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 13장을 잘못 이해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들이 무슨 일을 하건 어떤 사람이건 간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세운 것이라며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이유 역시 복음의 알짬인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교와 교회 안에서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다. 기도를 많이 할수록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사람처럼 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되었다.
회심만 변질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역시 변질된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사데 교회를 향해 성령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드리는 기도를 통해 자신이 살아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물론 먼저 드려야 한다는 것은 나중에 자신의 필요를 위한 기도를 드려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기도한 사람은 자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은 잘 산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지난 이십여 년의 삶이 그것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이다. 새 사람은 이방사람들처럼 기도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다.
첫댓글 새 언약의 하나님나라의 사람은 기도부터 달라져야 한다. 성장한 사람은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자기 필요를구하고 반복할 필요를 못느껴야한다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