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바라밀(六波羅蜜, sat-paramita) >
바라밀(波羅蜜, paramita)이란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도 하며,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를 음역한 것이고, 산스크리트어 ‘최고’라는 뜻의 파라마(parama)에서 파생된 말이어서 ‘완성, 완전한 상태, 구경(究竟)의 상태’를 뜻한다. 불교 교의에서는 ‘바라밀’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피안에 도달한[parami]+상태[ta]>를 말한다.
그리고 이를 한문으로 번역할 때, 처음엔 도(度)라고 번역했으나, 당나라 때부터 도피안(度彼岸)이라고 의역했다. 대승불교의 주요 논서 중 하나인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의 ‘도(度)’ 역시 바로 파라미타(Paramita)의 번역어이다.
‘도(度)’라는 것은 미혹의 세계인 현실의 차안(此岸)에서 깨달음의 세계이고 이상적인 세계인 피안(彼岸)으로 사람들을 보내기 위한 수행덕목 또는 그 실천을 의미하며, ‘도피안(到彼岸)’은 열반이라는 이상적인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도피안은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교의 교리 상으로 바라밀은 미망(迷妄)과 생사(生死)의 차안(이 언덕)에서 해탈과 열반의 피안(저 언덕)에 이르는 것이며, 이를 위해 보살이 닦는 수행덕목 및 그 실천을 의미한다.
한데 불교 경전에 따르면 피안은 이 세상에서 동떨어진 곳이 아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이데아와는 다르다. 피안은 자신 속에 내재하며 자신의 변화된 상태, 변화된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비슷한 용어로 열반, 해탈, 무위, 적정, 감로, 안온 등이 있다. 모두 번뇌가 소멸된 상태를 뜻하며,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바로 피안이다.
대표적인 바라밀로는 <반야경>에서 설법하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이 있다. 이 6바라밀은 대승불교의 가장 기초적인 수행덕목으로서 생사의 세계를 넘어서서 열반에 이르게 하는 6가지의 바라밀이며, 6바라밀다(六波羅蜜多), 6도(六度), 6도피안(六到彼岸)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6바라밀에서 마지막의 지혜바라밀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라고도 하는데, 다른 다섯 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근거인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원래 바라밀의 개념은 원시불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파불교의 논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는 보시, 지계, 정진, 반야의 4가지 바라밀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6바라밀은 원시불교에서 말하는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과 대승불교에서 수행의 목표로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이념에 근거한 팔정도(八正道)를 비롯한 모든 수행법들을 체계화한 것이다.
결국 바라밀은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한 방법을 말하는데, 육바라밀은 팔정도(八正道)를 포함하지만, 팔정도가 육바라밀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대승불교에서 등장하는 보살이라는 개념 때문에 그렇다.
보살은 팔정도의 수행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들었지만, 열반, 즉 입멸의 경지에 들기를 보류하고 있는 경우이다. 열반의 경지에 들기를 보류하고 있는 이유는 아직까지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들지 못한 중생들을 해탈의 경지로 이끌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보살은 모든 중생을 해탈의 경지로 이끈 이후에 열반의 경지에 들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어떤 수행자가 보살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팔정도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일단 보살의 경지에 도달한 이후에는 팔정도의 방식을 여전히 따라야 함과 동시에 중생들을 해탈의 경지로 이끌기 위해 육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팔정도는 수행 방법이고, 육바라밀은 (제도를 위한) 교육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 6바라밀은 피안(彼岸)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 수행의 총칭으로서 대승(大乘), 즉 보살의 큰 수레로 표현될 만큼 중요시됐다. 6바라밀의 내용과 순서 및 상호관계 등에 대한 해설은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을 비롯한 여러 반야사상 계통의 경전과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여러 대승경론에 자세히 논술돼 있다. 이런 내용을 근거로 좀 더 구체화하면 다음과 같다.
(1)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단나바라밀(檀那波羅蜜 dana-paramita)의 번역어이다. 보시는 베풂을 뜻한다. 베풂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한 베풂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중생들에게 조건 없이 베풀면서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상이 남아 있지 않은 맑고 청정한 베풂을 의미한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보시의 구성요소인 베푸는 자(施者), 받는 자(受者), 그리고 베푸는 내용이 되는 것(施物)의 3가지 모두 청정한 것을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 했고, 삼륜청정이 될 때 보시바라밀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즉 보시를 행하면서도 보시라는 선행에 집착하지 않고 공덕의 대가도 바라지 않는 무주상(無住相)의 보시가 보시바라밀이다.
이는 대승불교의 실천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이타정신(利他精神)의 극치이고, 모든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이타의 서원(誓願)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나아가서 보시는 자신의 깨달음이나 일체 중생의 성불(成佛)이라는 데로 그 뜻이 확산돼 간다.
대승불교 성자들은 ‘보시’를 단순한 윤리적인 선행 개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보살의 실천적 수행 개념으로 정한 것이다. 대승불교 사상은 나의 존재가 남을 이롭게 하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원천적인 에너지가 바로 베푸는 마음이다. 베풂으로써 함께 즐거워하는 삶, 이것이 보살도의 삶이고, 현대적인 용어로는 복지사회이다.
아프리카 오지의 열악한 환경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주민들을 위해 헌신적인 베풂을 실천한 이태석(李泰錫) 신부의 노력이야말로 보시바라밀의 극치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보시의 정신적 기반을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 하며, 이는 곧 자비희사(慈悲喜捨)를 뜻한다.
‘자(慈, maitri)’는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열정과 사랑을 말하고,
‘비(悲, karuna)’는 남의 슬픔을 함께 나누어 고통을 들어주려는 마음이며,
‘희(喜, mudita)’는 남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사(捨, upeksha)’는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는 평등한 마음, 득과 실 혹은 찬사와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의 마음이다.
그리고 보시에는 재물을 베풀어 주는 재시(財施),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법시(法施),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의 삼시(三施)가 있다.
① 재보시(財布施)---어려운 사람에게 자신이 소유한 돈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것. 즉 재보시는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능력에 따라서 재물을 베풀고, 스스로 인색하고 탐욕한 생각을 버려서 구하러 온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을 얻게 하는 것이다.
② 법보시(法布施)---부처님의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것. 즉, 중생들이 열반에 들도록 바른 불법(佛法)을 전해 선근(善根)을 증장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계행을 잘 지켜 남의 본보기가 됨으로써 중생들이 그의 행을 보고 흠모한 나머지 불법을 따르도록 하는 것도 좋은 법보시의 한 가지라 할 수 있다.
헌데 법을 전하는 과정에 자칫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을 해서 중생들을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이처럼 복을 지으려다 악업을 지을 수도 있으므로 올바른 법보시를 해야 한다.
③ 무외시(無畏施)---시무외(施無畏, abharanda)라고도 하며, 무외심을 베푸는 자를 시무외자라 한다.
무외시란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보호해 두려운 마음을 없애 주는 것을 말한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시무외보살이라고도 하는 것은 관세음보살이 33가지로 변신해 나타나서 일체중생을 교화하며 모든 중생을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게 하기 때문이다.
실제 생활에서, 위험에 직면해 공포를 느껴 울고 있는 아기를 발견하고 뛰어들어 자기가 스스로 그 난을 받아 감당하고 아기를 공포 속에서 구출해 내어 안전을 베풀어 줄 때 그 분의 마음이 바로 무외시이고, 그 분이 바로 시무외자이다.
그리고 위험한 먼 여행길에 오르면서 부처님의 가피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 자신감이 생긴다고 할 때, 부처님의 가피 또한 무외시이고, 사찰의 호법신장(護法神將)은 언제나 불자들을 보호해서 신행생활에 차질이 없도록 도와주고 마군(魔軍)으로 부터 보호해 준다. 이처럼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을 외호(外護)하는 것도 무외시에 해당된다.
(2)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 sila-paramita)의 번역어이다. 재가와 출가, 대승과 소승의 모든 계율(戒律)을 잘 지켜 악업(惡業)을 멸하고, 몸과 마음의 청정을 얻는 것을 말한다.
지계(持戒, sila)란 말은 말 그대로 ‘계를 지킨다.’는 의미이다. 전통적으로 계에는 재가신자들이 지켜야할 오계(五戒)와 출가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250계와 350계가 있지만 대승 범망경(梵網經)의 보살계는 10중금계(10重禁戒)와 48경계(48輕戒)가 있다.
범망경의 10 중금계에는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을 말하지 말라, 술을 팔지 말라,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남을 비방하지 말라, 제 것을 아끼려고 남을 욕하지 말라, 성내지 말고 참회를 받아 주어라,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 등이 있다.
한데 계는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이니 모든 수행자의 스승이다. 과거의 부처님도 이로 인해 불도를 이루셨고, 현재의 보살들도 이로 인해 중생을 제도하시고, 미래의 수행자들도 이로 인해 해탈하시니, 범망경에 말씀하시기를 “계는 평지와 같으니 만 가지 선(善)이 여기서 생기고, 계는 용한 의원과 같으니 어두움을 물리치고, 계는 나룻배와 같으니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고, 계는 값진 장식품이니 법신을 장엄해준다.”라고 하셨다. 따라서 지계는 불교가 지향하는 가치관이라 할 수 있고, 계는 이상적인 불교인이 되는 일종의 표지판이다.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Pratimoksya)---불교에서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의 모든 조항을 모아 놓은 것. 산스크리트 프라티모크샤(Pratimoksya)를 음역한 말이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귀의해 교단을 이룸에 따라 이들을 이끌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지계바라밀 수행으로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곧 말과 뜻과 행동을 절제할 줄 아는 것을 의미하며, 지계는 우리가 부처님 법을 공부하고 수행하는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울타리와도 같은 역할을 해준다. 그러기에 계를 ‘아름다운 구속’ 혹은 ‘성스러운 구속’이라 말한다.
그런데 대승의 지계는 소승과 같이 ‘무엇을 하지 마라’는 소극적, 수동적, 타율적인 계율 지상주의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렇게 행동하라.’는 이타정신이 깃들어 있는 긍정적, 능동적, 자율적 정신을 강조하는 실천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계는 선악의 기준이고, 지계(持戒)는 선업이고 범계(犯戒)는 악업이다. 따라서 지계의 목적은 수행에 있고, 계율의 본질은 탐욕을 버리는 것이며, 지계의 목표는 해탈, 성불에 이르는 데에 있다.
인간의 모든 삶은 인과의 법칙에 따른다. 즉,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에 따르는 과보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항상 자신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열반경(涅槃經)>에서 제자들에게 계를 스승 삼아 열심히 정진하라고 하셨다.
(3)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찬제바라밀(?提波羅蜜 ksanti-paramita)의 번역어이다. 인욕(忍辱, ksanti)이란 참고 용서하는 것이고, 인욕바라밀은 참는 실천행이다. 즉, 탐(貪), 진(瞋), 치(痴)의 마음 중에서 성내고 화내는 진심(瞋心)을 잘 닦을 수 있는 실천행이 인욕바라밀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고통이라서 살아가노라면 타인으로부터 받는 온갖 고통이 비일비재 하지만, 잘 참고 견디며, 나아가 그것을 잘 받아들여 원한과 노여움을 없애고, 마음을 안주(安住)시키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미움은 오히려 더 큰 미움을 부르기 때문에 참음으로써만 미움이 극복되는 것이다. 즉, 인욕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없다. 불교 수행으로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잘 참는 사람이 마음 깊은 사람으로 존경받는다.
그리고 인욕바라밀은 참는 수행이라 하지만 그냥 성나는 마음을 꾹 눌러 억지로 참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음에 걸리거나 휘둘리지 말고, 잘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올라오는 성난 마음이 공한 줄 바로 깨쳐 알 수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나는 마음을 놓아버릴 수 있다.
그러니 인욕바라밀은 지혜로운 안목으로 행할 일이지, 그냥 꽉 눌러 참기만 한다고 해서 인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참는다면 도리어 마음에 병을 만들어 더 위험할 수 있다. 마음에 꽉 채워두면 언젠가는 넘치고 폭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법을 잘 관찰해 자연스럽게 성나는 마음이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인욕에는 복인(伏忍), 유순인(柔順忍), 무생인(無生忍), 적멸인(寂滅忍)의 4인(四忍)이 있다.
① 복인(伏忍)---복인은 비위에 거슬리거나 괴로움을 당해 성이 나면 먼저 성나는 그 마음을 조복(調伏; 마음과 몸을 제어하는 것)해 억누르는 것이다. 그러나 역경(逆境)만 참아서는 안 되고, 순경(順境)도 참아야 한다. 그 이유는 역경을 참지 못하면 번뇌가 치밀어서 투쟁하기 쉽고, 순경을 참지 못하면 유혹에 빠져서 몸과 마음을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순경(順境)---역경(逆境)의 반대말, 마음이 즐겁고 순탄한 생활, 편안하고 안락한 경계이다. 그러나 이에 의해 탐욕의 번뇌가 생기게 됨을 명심할 일이다. “순경(順境)의 미덕은 절도(節度)이고, 역경의 미덕은 인내이다.” -베이컨]
② 유순인(柔順忍)---유순인은 사람이 참기를 많이 하면 저절로 조복돼져서 역경이나 순경을 만날지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복인을 통해 마음이 다스려지면 역경이나 순경을 당했을 때 스스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③ 무생인(無生忍)---무생인은 참고 견디어 보살의 지위에 오른 사람의 인욕행으로서, 인생이 무상하고 허황함을 깨닫고, 일체만법(一切萬法)이 불생불멸(不生不滅)임을 깨달으면, 별로 성낼 것도 없고 참을 것도 없어지는 경지이다.
④ 적멸인(寂滅忍)---적멸인은 인욕행을 애써 닦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한 생각도 일으킴이 없음을 체득해 인욕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의 경지에 오른 인욕바라밀로서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고 적멸한 경지인 열반에 드는 것이다.
즉, 인욕은 괴로움을 받아들여 참는 것[안수고인(安受苦忍)]이다. 불교를 흔히 수행의 종교라고 한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을 말하며, 참는다는 것은 탐내고 성내는 마음을 자제하는 것을 말한다. 참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며, 또한 현실의 상황이나 남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와 포용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바로 삶의 여유와도 직결된다. 인욕의 자세를 지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라고 하는 아상(我相)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안수고인(安受苦忍)---추위나 더위, 질병이나 천재지변, 폭력적 가해 등의 나쁜 조건과 해악 등에 의한 고통이 죽음이 닥쳐올 만큼 힘들더라도 초연하게 이를 극복하고, 지혜롭게 피하고, 이를 능히 참으면서 보살도를 수행하는 것이다.]
(4)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 viryav-paramita)의 번역어이다. 정진(精進, virya)이란 부지런히 노력해 방일(放逸)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데, 나약함이 없는 부동심의 실천이며 불퇴전의 노력이다. 즉,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선행과 바라밀을 힘써 실천해 나태한 마음을 버리고 선법(善法)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정(精)은 순일무잡(純一無雜)을 뜻하고, 진(進)은 용맹무퇴를 의미하며, 정진은 사정진과 이정진으로 나뉜다.
사정진(事精進)---‘사정진’이란 이 육신(肉身)으로 세간(世間)사업이든지 출세간(出世間)사업이든지 그것을 한 번 이루려고 결심했으면, 그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생의 일반적인 정진을 말한다.
이정진(理精進)---중생의 정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보살의 정진은 집착함이 없는 이타(利他)의 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정진’이란 악한 생각을 없애고 선한 마음을 내어, 자신과 이웃에게 좋은 일이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기어이 성취하도록 노력하며, 일념도 놓치지 않고 용맹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과 중생을 위해 선업(善業)을 닦는 보살의 정진이다.
(5)선정바라밀(禪定波羅密)---선나바라밀(禪那波羅蜜, dhyana-paramita)의 번역어이다. 선정(禪定, dhyana)의 정(定)은 삼매(三昧)란 뜻으로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히 진리를 바르게 사색하는 것’을 뜻하며, 이를 정려(靜慮)라고도 한다. 정(靜)은 지(止)에 해당하고, 려(慮)는 관(觀)을 의미한다. ‘고요히(靜) 생각하는 것(慮)’이 선정이다.
그리고 선정은 모든 실상이 무자성(無自性), 공(空)임을 삼매(三昧, samadhi)로서 직관해 그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정은 깊이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수행이며, 지혜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세계를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3계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분해 계층적으로 배열하는데, 각 단계에 따라 4선(四禪), 8정(八定) 등의 선정이 있으며, 반야사상 계통의 경전에서는 108삼매(三昧)의 수행을 설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생활에 있어서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어묵동정(語?動靜)의 일상사 모든 것이 (다만 모르고 있을 뿐)참선의 과정이 아님이 없다. 누구든지 자신과 사물에 대한 관심을 갖고 깊이 생각한다면 전체의 모습과 삶의 전 과정을 깨닫게 되고, 그에 따라 폭넓고 깊고 올바른 판단력을 기르게 되며, 나아가 향기로운 삶의 지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바른 지혜를 얻거나 지혜를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공부를 하든, 운동을 하든, 바둑을 두든, 그리고 어떤 일을 할 때도 정신집중이 안 되고, 마음이 산란하면 능률이 오르지 않고 발전이 없다.
[※삼매(三昧)와 선정(禪定)의 차이---삼매와 선정, 이 둘을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다소 차이가 있다. 명상을 말하는 사마디(samadhi, 삼매)가 선정을 말하는 드야나(dhyana)보다 상위 또는 광의의 개념이다. 따라서 삼매(사마디)는 보다 넓은 의미를 가진 개념이고, 선정(드야나)은 그런 명상의 특수한 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단, 정(定)의 원어를 사마디로 보고 있는 반면에, 육바라밀의 선정바라밀에서 선정의 원어를 드야나(dhyana)로 보고 있는 만큼 사마디와 드야나를 함께 사용할 수도 있다.]
(6)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na-paramita)의 번역이다. 반야(般若, prajna)란 ‘수승한 지혜’라는 뜻이고, 이때의 지혜는 사유분별의 망상을 떠난 지혜를 일컫는다. 그리고 그 지혜란 “공에 대한 지혜이며, 집착 혹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여읜 지혜이며, 존재의 본질을 직관하는 지혜이다.” 즉, 모든 분별지(分別知)를 떠난 궁극적인 지혜라는 말이다.
모든 존재자는 연기(緣起)하기에 그것에서 실체적인 무엇을 기대할 수 없다는 그런 통찰로 존재에 얽혀서 일으킨 온갖 분별과 번뇌를 씻어 없앤다는 것. 나아가서 모든 존재자가 실체 없이 공함을 통찰하는 게 반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의 법문이 최상의 법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지도론>에서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의 어머니이며, 앞의 5바라밀 수행의 바탕이 된다. 즉, 위의 다섯 바라밀은 반드시 반야바라밀이 이끌어 줄 때 가능하다. 따라서 육바라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바라밀이다.’라고 했다.
그러니 반야가 있으면 참다운 수행자이고, 반야가 없다면 수행자가 못 된다. 반야와 더불어 있어야 참다운 창조가 있고 참다운 수행이 있다. 반야가 없다면 모두가 다 범부의 허물을 벗지 못하는 것이고, 어떤 행동도 때 묻은 유루행(有漏行)밖에는 못 된다.
그런데 반야면 반야지 왜 반야바라밀이고, 보시면 보시지 왜 보시바라밀인가. 보시나 지계 등은 대승불교 이전부터 존재한 개념이지만, 거기에 ‘바라밀’이 붙으면 그 때부터 대승의 교의가 된다.
왜 대승인가. 바라밀이 되려면 철저하게 무집착이 실현돼야 하기 때문이다. 즉 보시가 보시바라밀이 되려면 철저하게 무집착이 실현돼야 한다는 말이다. 무집착은 무자성(無自性), 즉 공의 실현이고, 바라밀은 공에 대한 통찰과 결부된다는 말이며, 그래서 반야인 것이다.
이처럼 반야바라밀은 앞선 다섯 가지 바라밀과 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반야계 경전이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단 것처럼 반야바라밀은 대승불교의 실천과 이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 실천으로서 반야는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다. 여섯 바라밀 가운데 앞선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의 실천이고, 행위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즉, 반야나 바라밀이란 말이 꽤 추상적이지만 다섯 바라밀은 구체적인 실천 덕목이다. 보시바라밀이나 지계바라밀은 무아(無我)나 무자성(無自性)의 실현이고, 그것을 통해서 수행자는 끊임없이 상승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굳이 다섯 바라밀 상위에 반야바라밀이 놓인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이 각각의 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이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무주상보시를 실현할 때, 반야바라밀이 저절로 실천되고 있고, 인욕바라밀을 행할 때 역시 반야바라밀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이 진전돼 궁극적인 한계를 넘을 때, 그것이 완성이고 깨달음이다.
대승불교란 바로 이 육바라밀, 즉 여섯 가지의 덕목을 완성의 단계로 끌어올려 실천하는 가르침이다. 즉 대승불교는 반야의 지혜에 근거해 자리이타의 보살행을 무한히 펼쳐 나가는 보살의 불교이다. 따라서 육바라밀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고, 자신의 공덕에 대한 집착이나 의식에서 벗어나야 하며, 목적의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또한 무엇인가를 완성했다거나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조차 없는 무자성(無自性)의 상태가 돼야 한다.
이처럼 바라밀의 수행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이타(利他)에 전력하는 입장이며 성불(成佛)도 도모하지 않는 끊임없는 수행이기 대문에 이 수행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대단한 결의가 필요하다. 보살은 무량무수(無量無數)의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면서도 인도된 사람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도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렇게 해서 반야의 지혜는 바로 나와 이웃, 나아가서 세계를 정화시키는 감로의 물줄기가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반야바라밀, 즉 지혜의 완성이 선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일체법(一切法)의 자성(自性)이 공(空)함을 깨달아 진여실상(眞如實相)을 바로 보는 지혜의 완성을 말한다.
부처님의 세계는 부처님만 따로 갖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 생명 모두가 본래부터 부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지혜, 반야의 눈으로 보면 모든 법이 꿈 내지 허깨비 같고, 번뇌 망상 또한 원래 없는 것이다. 본래 공이어서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은 바로 그 깨달음의 지혜이고, 이 지혜의 눈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이 이미 반야바라밀의 지혜를 갖추고 있다. 다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은 ‘얻을 것도 없고, 얻는 바도 없다(不可得 無所得)’라고 한다.
[가져온 곳 : 다음 블로그 >amisan511, 글쓴이 : 아미산(이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