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조선경비대 참모총장, 조선경비사관학교장
1950 3군 총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
1960, 1961 주미대사
1963 제3공화국 외무부 장관
1964 국무총리
1966 외무부장관 겸임
1973 제9대 국회의장
1976 국회의장 재선
● 정일권, 그는 누구인가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고관 현직들 가운데 정일권만큼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도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팔방미인' '한국의 부도옹(不倒翁, 오똑이)'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군의 최고 책임자인 총참모장을 거쳐 주미․주불 대사 및 외무장관을 지낸 다음, 최장수 국무총리, 최장수 국회의장을 역임하면서 이승만 정권 때부터 유신 말기에 이르기까지 순풍에 돛 단 듯 질주를 거듭해 온 정일권. 그러나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의 친일 경력과, 영욕이 부침하는 격동의 시국에서 권력에 영합하는 처세술로 목숨을 부지해 온 사실은 휘황찬란한 경력과 명성의 그늘에 가려 그 동안 어둠 저편에 파묻혀 있었다.
흔히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고 일컫는 국무총리를 6년 7개월,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을 6년 동안이나 역임하면서 최장수 신기록 타이틀을 아직까지 보유하고 있는 정일권의 드러나지 않는 뒷면에는 어떤 것들이 감춰져 있을까?
●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의 '우수한' 군인
1938년 광명중학교 교정. "앞으로 군에 입대하는 것이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유망하고 현명한 길이다." 번뜩이는 예복을 차려 입은 한 장교의 일장 연설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소위로 있던 정일권이 자신의 모교인 광명중학교에 가서 졸업 예정자들을 모아 놓고 졸업 후의 진학 지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 소위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설명하면서 특히 취업문이 넓지 않았던 한인 학생들에게 입대를 강력히 종용했다. 마침 당시는 중일전쟁이 일어나 중국 대륙에서 전쟁이 확대되고 있었고, 이듬해 4월에는 신경(新京)에 4년제 군관학교가 생기게 되어, 정일권의 설득은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우리 청년들에게 먹혀들어 갔다.
신경군관학교가 제1기생을 모집하게 되자 광명중학교의 우등생들도 다투어 몰려갔다. 그해 한인 13명이 입교했는데 그들 가운데 11명이 광명학교 출신이었다. 신경군관학교 제1기생들을 포함하여 그후 군관학교를 졸업한 만군 출신들이 이때부터 정일권과 친교를 유지하면서 가까운 선후배로 뭉쳐져 해방 후 한국군으로 옮겨오게 된다. 이주일(李周一), 박임항(朴林恒), 이한림(李翰林), 최주종(崔周種), 강문봉(姜文奉), 김동하(金東河) 등이 그들인데 모두 해방 후 국군으로 편입되어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정일권을 정점으로 한 관북파(세칭 알래스카 부대)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만주국 장교로서 정일권의 존재는 만주에 있는 모든 군인과 조선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봉천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서 수석을 한 후 만주국 사령관의 전속부관으로 배속된데다가, 일본 장교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만주군 육군대학에 근무할 때 그는 화려한 견장에 백마를 타고 출근했다. 그때 계급은 대위. 이 같은 견장이나 승마 출퇴근은 만주군 육군대학 출신에게만 주어지는 명예였다. 만주군 육군대학이란 일본 본토의 육군대학과 같은 격의 현역장교 교육기관인데 그곳을 거치면 중장까지의 진급은 보장되는 것이 관례였다. 한인으로는 일본에서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과 홍사익(洪思翊)등 두 명이 일본 육군대학을 나와 중장까지 올라갔고 만주에서는 정일권만이 그 과정을 거쳤다. 정일권은 일본 육사에서도 수석을 하여 만주 편입 수석생에게 주는 일본 군부대신의 군도(軍刀)를 상으로 받았다. 정씨는 이 군도를 집에다 잘 보관하여 있었는데, 당시 장교들은 정씨의 집에 왔다가 이 칼을 보고는 정중히 거수 경례를 했다고 한다.
이처럼 항일투쟁의 길이 아닌 일신의 출세와 장래를 보장받기 위해 일제에 투항하기를 종용한 정일권의 행위를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리고 그의 언변에 넘어가 압제에 시달리던 헐벗은 민족과 조국의 현실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만주군관학교에 진학한 자들이 이후 한국군의 주요한 흐름을 이루게 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한편 태평양전쟁 초기 위세를 떨쳤던 일본군도 시간이 흐를수록 패색이 짙어지다가 결국 항복하기에 이르고 만주군도 풍지박산되었다. 관동군 소속이건 만주군 출신이건 모두 어딘가에 거처를 잡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종전시 만주군 헌병 대위였던 정일권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재빨리 변신하였다.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만주교민보안대'를 만들어 사령관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보안대에는 이한림, 최장언(崔昌彦), 최주종, 김석범(金錫範) 등 만주군 출신의 정일권 추종자들이 참여했으며, 며칠 후에는 만주군의 고참 중교(중령)인 원용덕(元容德)이 가세했다. 보안대 창설 직후 이들은 모양상 광복군으로 조직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즉각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로 간판을 바꿔 달기도 했다. 또 뒷날까지 애창된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동치는 애국의 깃발, …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보아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을 가슴에 울리는 독립의 소리" 라는 가사로 이루어진 새 군가를 만들어 힘차게 불러제끼기도 했다. 선열들의 눈물과 땀과 피가 짙게 배어 있는 '광복과 애국'이라는 단어가 친일파의 재빠른 탈바꿈 속에서 졸지에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정일권은 최창언과 최주종을 대동하고 정세를 살피러 서울로 들어와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의 박승환(朴承煥) 등과 접촉했지만, 건준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곧 만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소련군에 의한 보안대의 무장 해제와 해산 명령, 그리고 자신의 체포였다. 체포된 후 수사관으로부터 소련 유학을 권유받고 유학의 결심을 굳힌 정일권은 유학 직전 자격시험에서 불합격함으로써 시베리아행 숙청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불합격의 사유는 '소련군 보초를 죽이고 도망하자'는 중학 동창 최 아무개의 제의를 덜컥 수락함으로써 반동분자로 몰리게 된 때문이었다. 그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만들어진 소련 정보부대의 함정에 빠졌던 것이다. 우수한 만주군 장교에서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관으로, 그리고 소련으로의 유학 결심에서 월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변신의 대가'로서의 정일권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대목이 아닐까?
● '일본군의 한국군화'와 이승만의 총애
소련군 포로 열차에서 극적으로 탈출, 월남한 정일권은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였다. 1945년 12월 5일 미군정에 의해 설치된 군사영어학교는 해방 후 최초로 설립된 군사교육기관이었다. 이 학교는 두 가지 목적으로 설립된 것으로, 하나는 흔히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기초적인 군사영어를 가르쳐 미군 지휘관의 통역관을 양성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30여 개에 이르고 있던 자생적인 민간 군사 단체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조선국군준비대와 학병동맹처럼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을 지지하는 민간 군사 단체들을 통제 또는 해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학교는 그 자체로서는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이 학교에서 배출된 인물들이 이후 군의 최고 요직을 점하면서 한국군의 형성과 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관이었다. 한마디로 군사영어학교는 한국군의 모태이자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군의 모태요 출발점인 이 학교에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946년 4월 폐교될 때까지 200명이 입교하였으나 총 졸업 인원은 110명이었다. 임관자 110명을 출신별로 보면 일본군 출신이 87명,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출신이 21명 그리고 중국군 출신이 2명이었다. 이는 사실상 거의 전부가 일본군이나 마찬가지였다. 정확이 말하면 '일본군의 한국군화'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1945년의 해방이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었다면 또는 미군정의 일제잔재 부활 정책이 없었다면, 전범자 또는 반민족행위자로 처벌되었을지도 모를 대상이었다.
이러한 일본군의 한국군화 현상은 군사영어학교가 해체된 후 1946년 5월 1일 설치된 조선경비대에도 그대로 지속된다.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정일권은 대위로 임관, 이후 조선경비대 참모총장 및 조선경비사관학교장을 역임하였다. 육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경비사관학교는 당시 광복군 출신들이 '미군의 용병'이라고 혹평하면서 입교를 거부할 정도로 친미 성향의 간부 양성소 역할을 했는데, 정일권은 그 학교의 교장을 지낸 것이다.
한편 한국군 창설과정에 주역을 담당한 정일권이 이승만(李承晩)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된 것은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수․순천 사건 이후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무장유격대를 소탕한 뒤부터였다. 1949년 3월 1일 당시 참모차장 자리에 있던 정일권은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관을 자청, 6개월만에 지리산과 백운산 일대의 무장유격대를 대부분 섬멸하고 그 과정에서 유격대장 김지회(金智會)를 사살한 후 서울로 귀향하였다. 이 일로 정일권은 경무대에서 이승만으로부터 직접 대한민국 개인표창 1호를 수여받게 되고, 이후 오랜 기간동안 이승만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다.
● 한국전쟁과 정일권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6월 30일 정일권은 제5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된다. 그의 총장 재임 중에 작전권 이양에 관한 협정(일명 대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일권의 회고록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자주권과 직결되어 있는 작전 지휘권의 이양에 대해 정씨는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는커녕 '유엔군과의 작전 통일을 기하기 위한 대통령 각하의 고충 어린 결정'이라는 이름 아래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일국 군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참모총장으로서는 너무 단견이 아니었나 하는 평가도 가능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전시 중이던 1950년 7월 말, 뒷날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바꿀 중요한 인사 발령이 있었다. 당시 육군정보국 소속 문관으로 근무 중이던 박정희(朴正熙)의 현역 복귀에 대해 정보국장 장도영(張都暎) 대령과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이 건의를 올린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일권은 '포병지휘관 확보가 시급한 만큼 박정희 문관을 현역으로 복직 상신함'이란 문서의 결제란에 흔쾌히 사인했다. 박정희 문관은 1950년 7월 31일자로 현역에 복귀, 소령의 계급장을 다시 달게 된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불필요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만약 당시에 정씨가 결재하지 않았다면 5․16군부 쿠데타와 그 이후에 전개된 왜곡되고 굴절된 정치를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정부가 또다시 부산 임시 수도에 정착했던 1951년, 세간의 관심은 대구로 집중되고 있었다. 한국군 내부에서 발생한 두 가지 사건에 대한 공판이 대구에서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발생한 양민 학살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민방위군 독직 사건이었다. 먼저 표면화된 것은 국민방위군 사건이었다. 국민방위군은 한국전쟁중인 19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설치법이 공포되어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만 17~40세의 남자들이 이에 편입됨으로써 만들어진 준군대조직이었다. 전선의 후퇴가 시작되어 방위군을 집단적으로 후방 이송하게 되자, 방위군 간부들은 이 기회를 이용, 막대한 돈과 물자를 부정 처분하여 사복을 채웠다. 그 결과 보급 부족으로 천 수백 명의 사망자와 병자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1951년 2월에 발생하였다. 당시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崔德新)준장〕과 제9연대〔연대장 오익경(吳益慶) 대령〕는 사단장의 방침인 '건벽청야(建壁靑野)'에 의한 지리산 남부지역 공비소탕 작전을 전개, 제3대대〔대대장 한동석(韓東錫) 소령〕가 2월 10일 신원면을 장악했다. 제3대대는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 8백~1천여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수용했다. 2월 11일 한 동석은 대부분이 노약자와 어린아이. 부녀자들인 수용 주민 가운데 군경가족이나 지방유지 가족을 가려낸 후, 나머지 6백여 명을 뒷산인 박산골짜기로 끌고 가서 기관총으로 집단 학살하고 시체에 휘발유를 끼얹어 불태워 버렸다. 그후 공비 및 통비분자 187명을 처형했다는 허위 보고를 올렸던 것이다.
6월 15일 헌병사령부에서는 국민방위군 사건의 피의자로 11명을 체포하여 고등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정가에서는 정일권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마침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이 사임하고 이기붕(李起鵬)이 후임에 들어앉자 정일권은 육군 참모총장직을 조용히 사임하고 미국 참모대학으로의 유학을 서둘렀다. 6월 23일 정일권의 미국 유학이 발령 났고, 그 후임으로 이종찬 소장이 취임하였다.
7월 5일 대구시 동인국민학교 강당에서 이례적으로 공개된 가운데 고등군법회의가 개최되었다. 증인으로 출정한 정일권의 증언에 대해 전시특명검열관 김석원(金錫源) 준장은 참모총장의 책임을 끈질기게 추궁하였다. 검찰관 김태청(金泰淸) 중령은 정 소장을 향하여 무슨 이유로 일등병의 경험조차 없는 김윤근(金潤根)이 준장과 사령관이 되었는가를 비롯하여 다섯 항목의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정 소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 모두가 대통령의 명령이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김석원 준장은 정 소장의 답변을 '책임회피'로 판정하고, 퇴장하는 소장에게 다가서서 "이봐, 지금의 답변이 그게 뭔가, 당장 견장을 떼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 준장은 달려온 장교에게 제지되었고, 정 소장은 말없이 사라졌다.
8월 13일 월요일, 사형이 구형된 5명의 피고에 대한 총살이 집행되었다. 그 얼마 전인 7월 19일 정일권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현실도피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미국 유학에 대해 정일권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합리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나의 진정이었다. 생각하면 나의 군력은 한쪽이 휑하니 비어있는 셈이었다. 사단과 군단을 지휘해 본 실전 경험이 없었다. 참모총장으로 껑충 뛰어오른 절름발이 군력이었다. 사실 나는 이 점에서 항상 남모를 고민을 안고 있었다.
한편 "나는 만주의 숨통을 따라 30~50발의 원자탄을 줄줄이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50만에 달하는 중국 국부군을 압록강에 투입하고 우리의 뒷편인 동해에서 황해까지에는 60년 내지 120년 동안 효력이 유지되는 방사성 코발트를 뿌렸을 것이다"라고 본인 스스로 밝힌 것처럼,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는 만주 원폭투하 및 방사성 코발트 폭탄살포 계획을 입안,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정일권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여기서 1959년 주불 대사로 재직 당시 만주 원폭투하 계획과 관련한 드골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드러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해보자.
드골 : 당시 3군 총사령관이던 당신은 맥아더의 만주 원폭투하 계획에 찬성했느냐, 아니면 반대했느냐?
정씨 : 대찬성이었다.
드골 : 그 이유는?
정씨 : 그래야 통일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패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골 : 전쟁이 확대되어 수만의 국민들이 죽고 폐허가 된 후 통일이 돼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정씨의 회고록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적혀 있다.
맥아더 장군의 전략은 한마디로 확전이다. 그리고 상대는 중공이다. 앞날을 내다보고 내린 결심일 것이다. 즉 이 기회에 중공군 주력을 한반도 전선에 끌어 들여 일격을 가하려는 것이다. 원자탄의 사용까지도 불사하는 철저한 섬멸 작전이다. 이러한 결론을 내렸을 때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었다. "미국과 소련이 전쟁을 그만두자고 뒷거래를 할 수 없게 중공군이 나타나는 것이 좋은 것이오" 라고 한 이승만 대통령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정략적인 탁견이었다.
원자탄과 방사성 코발트 폭탄의 사용까지도 불사하는 철저한 섬멸작전이 과연 정략적인 탁견이었을까? 전쟁으로 인한 한반도의 황폐화와 전 민족의 고통에는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아랑곳하지 않고, 원자탄의 사용을 불사하면서까지 오직 군사적 승리와 무력을 통한 통일 완수만을 염두에 둔 이들의 구상을 과연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 군복을 벗고 제2의 인생을 시작
제8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임 중이던 1956년 1월 당시 특무대장이던 김창룡(金昌龍) 중장 피살 사건이 터져 군부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발칵 뒤집힌 가운데 정일권은 같은 해 6월 제2대 합참의장으로 전보됐다가 1957년 5월 예편하게 된다. 김창룡 특무대장 피살 사건은 아직도 그 배후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김창룡은 당시 군 방한복 제조용 솜을 시중에 유출시킨 세칭 '국방부 원면(原綿) 부정사건'을 수사하고 있던 중 아침 출근길에 허태영(許泰榮) 대령의 하수인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피살의 배후조종 혐의로 심복이었던 강문봉 중장이 구속 기소되어 사형선고를 받는 등 정일권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군법회의는 강 중장의 배후에 사성(四星, 대장) 장군이 있다는 설을 수사하기 위해 이승만에게 품신(稟申)했지만, 이승만은 "대장을 조사하면 국제적인 물의가 발생한다"며 강 중장 이상의 배후에 대한 수사를 중단시켰다.
어쨌든 22년간 입었던 군복을 벗어버리고 1957년 대장으로 예편된 정일권은 주 터어키 대사로서 제2의 인생인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다. 군부 내의 세력 균형을 잘 요리하던 이승만이 정일권과 백선엽(白善燁) 등 장성들을 퇴역시켜 해외 공관으로 내보내는 궁정외교 스타일을 폈던 것이다. 직업군인 출신인 정일권이 자유당 말엽인 1957년 예편된 이래 맡게 된 직책은 주 터키, 주불, 주미 대사에 이어 외무장관, 국무총리 등으로 모두 외교와 관련된 자리였다. 당시 요직 중의 하나였던 주미 대사는 허정(許政) 과도정부 시절과 5․16군부 쿠데타 후의 군정 시절 등 두 차례에 걸쳐 역임하였다.
● 5․16군부 쿠데타의 정당성 선전에 동분서주
1960년 5월 말 정일권은 주미 대사로 아이젠하워에게 신임장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4․19혁명이 일어나 허정이 외무장관 겸 사실상 행정수반으로 과도정부를 이끌게 되자 정일권은 당초에 허정의 예비 내각에 국방장관으로 내정되었지만 국방장관이 이종찬(李鍾贊)으로 결정되자 그의 행선지는 미국으로 변경되었다. 3대 대사로서 그가 한 일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을 준비하는 실무적인 일이 고작이었다.
정일권이 주미 대사로 본격적인 활동을 한 것은 5․16군부 쿠데타가 나서 민주당 정권의 장이욱(張利郁) 대사로부터 배턴을 또다시 이어받은 1961년 6월 이후부터였다. 5․16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고 같은 만군 출신인 박정희 소장이 실력자로 부상한 군사 정부를 위해 5대 주미 대사로서 해야 할 그의 역할은 박 소장과 김종필(金鐘泌) 중령 등 새로운 한국 실력자들을 인상 좋게 미국에 설득하는 일이었다. 당시 워싱턴이나 서울의 미국 대사관은 쿠데타의 주역들이 혹시 공산주의자들이 아닌가 하여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던 숨가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판국에 ‘미국이 좋아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같은 만군 출신인 정일권이 미국에 있다는 것은 박정희에게는 매우 반가운 일이었을 것이다. 쿠데타 발생 나흘 후 하버드 대 연구실에서 정일권은 박정희로부터 직접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혁명을 도와 달라. 미국의 지지를 받도록 노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어 정일권은 현지에서 곧바로 미국 주재 대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사 발령을 받고 그가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미국의 조야에 쿠데타의 성격이나 주동 세력이 반공적이고 친미적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일이었다. 5․16군부 쿠데타의 정당성을 미국에 인식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한 그의 노력은 한미 외교에 큰 몫을 차지하면서 결과적으로 성공의 결실을 거두었다.
한편 군정 연장 선언으로 대사직을 사임한 뒤 정일권은 미 국무성으로부터 하버드나 조지 타운 대학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게 어떠냐는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의 국제문제연구소 유학을 결심했다. 그러자 수일 후 미 국무성은 한 달에 1 .200달러 짜리 장학금을 마련해 주었다. 당시 대한민국의 주미 대사 월 체재비가 900달러였다고 하니, 미 국무성이 정일권이라는 인물을 얼마나 후하게 예우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원만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으며 미흡한 감이 적지 않다. 철저한 친미적 인사였기에, 그리고 후일을 기약하는 의미에서 이처럼 후한 대접을 미국으로부터 받았다고 본다면 필자의 독단일까? 한국전쟁 초기 미 정보국(CIA) 한국지부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진 노블(Harold Noble)이 ‘나와 가장 친했던 한국군 장성’으로 정일권을 지목했다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은 아닐까?
● 한일회담의 측면 지원
막상 제3공화국이 시작되자 박정희는 정일권을 불러 국무총리를 시킬까 고려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군인정치의 연장이란 인상을 씻기 위해 정치적으로 무색 투명한 최두선(崔斗善)을 총리로 기용하고 정일권을 외무장관으로 귀국시킨다. 당시 박 정권이 사활을 걸고 타개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최대의 외교 현안은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였다. 한일협정은 일본과의 교섭을 통해 어떤 내용을 타결해 내느냐도 중요했지만, 이에 못지 않게 그것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것도 커다란 문젯거리였다. 당시 국민들은 대일 감정이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김-오히라 메모’ 등 막후의 비밀 외교와 저자세 외교가 정치자금과 관련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회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대는 1964년 6월 3일 중앙청과 효자동 어귀까지 몰려와 연좌 데모를 벌이게 된다. 소위 6․3사태가 터진 것이다. 이에 효자동 어귀에서 겁에 질린 경찰관들은 학생들에게 발포를 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비상계엄령하에서 수도경비사령부 산하의 강력한 폭동진압 군인들은 질서 정연하게 시위 대열을 분산시켰다. 정일권 등 군인 출신 각료들도 모두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데모 진압을 진두 지휘했다. 6․3데모의 파급 효과는 컸다. 한일회담이 중단된 것이다. 그러나 전국민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었고, 그해 8월 14일 야당 의원의 불참 속에서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14년 동안 끌던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한일협정 체결 과정에는 정일권의 드러나지 않은 숨은 공로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일본측 최대의 연결점은 기시(岸言介) 전 수상이었다. 그는 만주국 시절 산업부 차장과 총무처 차장을 거쳐 도조(東條英機) 내각의 군수차관과 상공대신을 지낸 사실상 만주국의 실권자였으며, 명실공히 한일 인맥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종전 후 A급 전범자로 복역하다가 석방된 뒤 그는 자민당의 전신인 자유당의 창당에 참여, 자민당 간사장, 고문, 총재를 거쳐 1957년에 수상이 되었다. 이복동생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에게 수상직을 물려 준 후로는 만주 관련 단체의 총 본산인 국제선린협회 회장직을 맡아왔고, 한일 협력위원회의 일본측 회장도 겸임하였다. 이러한 기시와 정일권과의 ‘뜻하지 않은’ 만남이 1965년 1월 30일 처칠(Churchill) 장례식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인연’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정일권은 한일 문제 타개에 대한 박정희의 결심을 기시에게 분명히 전달, 기시의 주선으로 그의 이복동생인 사토 수상과 1965년 2월 초 동경 회담이 성사되었다. 이 일로 그 동안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박정희의 의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사토의 불만은 회담 직후 말끔히 사라졌으며, 넉 달 뒤인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기에 이른 것이다.
● 정일권 ‘돌격 내각’의 출범
1964년 5월 10일 제3공화국 첫 내각으로 ‘방탄 내각’이라 불리운 최두선 내각이 다섯 달을 채우지도 못하고 물러나고 후임에 정일권이 들어섰다. 이때부터 한국정치사상 최장수의 정일권 내각 시대가 열리게 된다. 국무총리로 취임한 정일권은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 식량 증산 및 확보, 물가 안정, 공개 및 신속한 행정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빠르면 6개월 늦어도 1년 안에는 국민이 원하는 모든 일을 과감하게 실천하겠다고 스스로 시한을 그어 놓으면서 의욕에 찬 전진을 다짐했다. ‘방탄 내각’에 이은 ‘돌격 내각’의 출범이었다. 그러나 출범하기가 무섭게 정 내각이 겪은 것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범국민적 항의 시위, 언론 파동, 첨예한 여야 대립 등 연쇄적으로 나타난 일련의 정치 위기였다. 일명 ‘불도저 내각’이라고도 불리던 정 내각은 이 같은 위기의 고비를 비상계엄령 선포 등 강압 일변도의 대책으로 저돌적으로 밀고 나갔으며, 끝내 한일회담을 성사시켰다.
물론 정일권 자신의 이미지는 돌격이나 불도저와는 거리가 멀었다. 모든 행정 지침은 청와대에서 나왔으며, 내각의 얼굴에 지나지 않았던 정 총리는 이 지시를 그대로 행정 차원에서 실시했을 뿐이다. 청와대에서 국정 보고를 할 경우에도 정일권은 박정희의 의견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세운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스스로를 결코 실권자나 제2인자로 생각하지 않고 행정가로 한정시킴으로써 최고 통치권자의 신임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핵심 측근이라 할 수 있는 강문봉의 지적처럼 ‘생리적 욕구 내지 본능적 욕구의 억제’를 통해 난세를 헤쳐 나가는 것이 바로 그의 남다른 처세술이었던 것이다. 총리직에서 물러나던 날 정일권은 자신의 감회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박 대통령 각하는 정말 진실한 분입니다. 그분의 영도력과 애국심은 언제나 나의 거울이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자혜로운 인간성은 번번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총리직은 물러나지만 그 분을 언제 어디서나 성심성의껏 보좌해서 이 나라의 국력이 더욱 신장되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 유신독재하 국회의장감으로 적격인 인물
이러한 그의 처세술은 그후에도 지속된다. 3선 개헌을 치르고 이 헌법에 의한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70년 12월 정일권은 총리직에서 경질되었다. 최장수의 기록을 남긴 다음 총리직을 물러난 정일권은 생애 세 번째의 방향 전환인 정치인의 길로 접어든다. 1971년 5월 제8대 총선에서 공화당 전국구 의원 당선 이후 1973년 2월 제9대 총선에서 재선된 정일권은 9대 국회 개원과 함께 국회의장으로 피선된다. 그의 국회의장 재임 6년 동안 국회는 후퇴를 거듭하여 헌정사상 최악의 허약한 입법부로 전락하고 만다. 정치 부재란 말은 유신 국회의 상징이었으며 ‘행정부의 시녀’ ‘통법부’ 는 유신국회의 별명이었다. 의원들 스스로가 자조하듯 ‘어린 애기나 보는’ 무위도식 국회의 표상이 된 국회가 바로 9대 국회였다.
유신 국회가 입법부 본연의 지위와 역할에서 크게 벗어난 원인은 국정감사권의 폐지,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옥상옥(屋上屋)으로서의 통일주체국민회의 신설 등 국회의 권한을 약화시킨 제도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제도만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여야와 국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급 정치 인사들에게도 그 책임은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박정희를 제외한다면 국회의장인 정일권 바로 그였다. 유신 헌법하의 국회의장은 의원의 발언, 표결, 위원회 구성, 원내 질서 유지, 속기록 정정, 징계 등에 있어 역대 어느 국회의장보다도 여러 모로 그 권한이 강화되어 있었다. 정일권은 이 의장 직권을 유신 독재의 유지를 위해 충실히 행사했다. 그 결과는 온갖 변칙과 자기 격하로 얼룩져 있는 유신국회였다. 숱한 사례 가운데 형법 개정안 파동과 김옥선(金玉仙) 의원 파동 등 두 가지 예만을 들어보자.
정일권이 국회의장이 된 지 2년이 되는 1975년 3월 18일, 공화당과 유정회는 형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 내용은 대한민국이나 대한민국의 헌법 기관을 비방, 모독하거나 국내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같은 행위를 할 경우 이를 처벌토록 한 것이다. 야당은 이 개정안이 정부의 언론 말살책이라고 단정, 극한 투쟁으로 이를 저지하고자 본회의 단상과 법사위원회 회의실을 점거하여 동 법안의 심의를 봉쇄하려고 했다. 다음날인 19일 오후6시경, 법사위원회를 변칙적으로 통과한 개정안은 김진만 국회부의장의 사회로 국회의원 휴게실에서 단 1분 만에 여당 의원만이 참석한 본회의에서 처리되어 버렸다. 법안에 대한 설명이나 질의, 찬반 토론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참석 의원들의 수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그 동안 정일권 의장은 야당 의원들이 농성하고 있는 본회의장에 들어가 회의를 열 것처럼 양동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틈에 여당 의원들은 몰래 뒷문으로 통하는 휴게실로 빠져나가 법안을 일사천리로 처리해 버렸던 것이다. 거의 같은 시간에 한 국회에 두 개의 본 회의가 열리는 헌정사상 최초의 해괴망측한 사건이 국회의 수장인 국회의장의 사전인지하에서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유신 국회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사례는 김옥선 의원 파동이었다. 대통령 긴급조치가 발효중인 1975년 10월 8일 정기국회 본회의 석상에서 다섯 번째 대정부 질의자로 나선 신민당의 김옥선 의원이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강경 발언을 토했다. "우리 의회는 1인 통치를 합리화시켜 주는 한갓 장식물에 불과하게끔 되어 버린 정치적 현실의 표시다"라고 성토하는 한편, 당시 벌어지고 있던 각종 궐기대회를 관제대회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김 의원의 발언은 국회의원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의 원내 발언이었다. 그러나 정일권은 의장 직권으로 김 의원의 제명 징계안을 법사위에 회부했는데, 이 징계안에서 정 의장은 "초당적인 총력안보 태세를 마치 위장되고 조작된 관권의 조정에 의한 것처럼 왜곡, 허위 선동하는 것은 북괴의 허위 선동 전술과 그 취지를 같이 하는 이적 행위이며 이같이 국론 분열을 조장하고 총력 안보를 저해하려는 언동은 국가 안보에 위해가 되며 국회 위신을 손상하는 것이므로 국회법 제142조 소정의 징계 사유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신민당은 "면책 특권이 보장된 의원의 원내 발언을 문제삼아 다수의 횡포로 징계를 강행하겠다는 것은 의회의 권능을 스스로 무시하는 처사"라고 주장했지만, 정부 여당의 강경자세에 부딪쳐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김 의원은 사퇴 형식으로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났는데, 사퇴서를 처리하는 10월 13일 국회의사당 주변에는 정일권 의장의 경호권 발동으로 수백 명의 정․사복 경찰관들이 배치되어 삼엄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김옥선 의원 파동으로 한 가지 뚜렷해진 것은 유신 국회에서 국회의원의 원내 발언 면책 특권은 사실상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며, 정권에 도전하는 언동은 가차없이 징계된다는 전례를 남기게 된 것이었다. 이후 제헌국회 이래 한 번도 빠짐없이 국회에 진출한 9선의 정일형(鄭一亨)의원이 원내 발언을 통해 대통령의 하야를 거론하다 징계 대상이 되었고, 이른바 명동 사건에 관련되어 끝내는 의원직을 상실하고 만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의원들이 연이어 사퇴할 무렵, 신민당의 이철승(李哲承)의원은 "정일권 의장은 동 직원이 사망신고서에 도장찍듯 진상도 알아보지 않고 의원사퇴서에 도장을 찍는다"고 비꼬기도 하였다.
한편 정일권은 국회의원의 원내 발언에 곧잘 견제를 가해 의장 직권으로 속기록 삭제를 명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때문에 그는 사초(史草)에 손을 댔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한 재임기간 동안 ‘김대중 납치 사건’등 굵직한 국제 정치적 사건을 비롯하여 아파트 분양사건 등 토지건물 투기붐, 양도소득세․부가세제 도입 등 국회본연의 임무와는 달리 국민 부담은 가중시키는 행정부의 시녀 역할도 한층 충실히 해냈다. 연말 예산안 심의 때는 여당 의원들이 청와대를 드나들면서 ‘윤허’를 받아가며 예산 규모를 야당과 협상하는 폐습도 만들어졌다.
이처럼 정일권은 국회의장직을 맡고 있는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의장 직권을 행사하여 의회 고유의 권한 강화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권한 축소와 약화를 가져오게 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정일권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국회의장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신 독재라는 특수한 환경 아래서의 의장감으로는 적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유신 독재를 체현하고 있던 박정희에게는 충실한 봉사자로서의 맡은 소임을 다 했던 것이다.
정일권이 국회의장직에서 물러난 것은 9대국회가 끝난 1979년 3월이었다. 최장수의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것처럼 국회의장으로서도 가장 긴 6년간을 재임했다. 그는 역대 국회의장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가장 긴 임기를 채웠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가장 적은 회의일수를 기록한 국회의장이었다. 그의 임기 동안 이 나라의 자유와 인권은 크게 손상되었지만, 의원 외유나 세미나만은 풍성하게 치러졌다.
● 곤욕을 치른 ‘한국의 부도옹’
그러나 난세를 헤쳐 온 뛰어난 처세술에도 불구하고 그가 걸어온 길이 전적으로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국무총리 시절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인한 김두한의 오물 세례나 ‘정인숙 여인 사건’과의 연루설, 그리고 국회의장 시절의 ‘박동선 사건’ 연루설 등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과 김두한의 오물투척 사건
1966년 9월 22일 낮 12시쯤 제58회 정기국회장이 갑자기 소란해졌다. 일제 시대부터 서울 일대에서 주먹계의 왕자 노릇을 하던 한독당 소속 국회의원 김두한(金斗漢)이 각료석에다 오물을 뿌린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삼성 재벌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한창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밀수 사건의 내용은 삼성 재벌이 세계 최대 규모의 비료공장을 짓는다면서 건자재를 들여오는 짐 속에 사카린 원료와 백시멘트 등을 밀수해 시중에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세관은 법에 따른 가중처벌은커녕 간단한 추징금만 받고 밀수품을 그대로 내주었다 하여 정치문제화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구입대금 6만 840달러를 차관대금으로 결재했다는 사실이 문제를 더욱 가중시켰다. 신문들은 앞을 다투어 삼성의 밀수에 재무부와 그 밖의 정부기관들이 관련된 것으로 보도하고 있었으며, 국회는 연일 총리와 경제장관들을 불러 이 사건을 추궁하고 있었다. 김두한의 오물투척 사건은 그런 와중에서 파생된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이 나라의 모든 부정과 부패를 옹호하고 있는 현 내각은 피고 취급을 받아 마땅하다. 나는 행동으로 부정 불의를 규탄한다." "이것이 국민이 주는 사카린이니 골고루 나눠 먹어라"는 일갈과 함께 김두한은 각료석에다 대고 들고 있던 깡통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 속에서 ‘선열의 얼이 담긴 파고다 공원의 공중변소에서 퍼온’ 인분이 쏟아져 나왔다. 각료석에 앉아 있다 엉겁결에 날벼락을 맞은 정일권 총리 등의 얼굴이 오물로 범벅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건 직후 정일권 총리, 장기영(張基榮) 부총리, 김정렴(金正濂) 재무장관, 박충훈(朴忠勳) 상공장관, 민복기(閔復基) 법무장관 등은 “행정부의 권위와 위신을 위해 국정을 보좌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일괄 사표를 제출했고, 김두한은 의원직을 상실한 다음 구속되었다. 그러나 일괄 사표를 제출할 정도로 행정부의 권위와 위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밀수를 방조하면서 부정 행위를 옹호했을까? 앞뒤가 맞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정인숙 사건’의 의혹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나를 죽이지 않았다면/영원히 우리만 알았을 걸/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1970년 초 한 여인의 의문사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당시 대학가에서는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개사한 세태 풍자의 노래가 불려졌다. 세칭 ‘정 여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 본명은 정금지(鄭金枝)로 1968년 23세 때 아버지 불명의 사내아이를 낳은 미혼모인 정인숙(鄭仁淑)이, 외국을 전전하다가 1970년 귀국 후 서울 강변3로에서 25세의 젊은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정인숙이라는 여인이 자신의 오빠 정종욱(鄭宗旭)이 쏜 권총에 맞아 숨졌다는 것이 당시 검찰의 공식 발표였다. 검찰의 공식 발표대로라면 이 사건은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문젯거리가 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과 죽음에 얽힌 의혹은 당시 꼬리에 꼬리를 이으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아이의 아버지는 과연 누구이며, 누가 그녀를 살해했을까? 죽기 전까지 간직했던 그녀의 수첩에는 정․재계 요인 27명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정 여인은 아이를 낳고 미국 워싱턴과 일본 동경을 오갔다. 정체불명인 아이의 ‘아버지’가 후견한 해외생활이었다. 정 여인은 당시로서는 지극히 드문 회수여권(지금의 복수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 여권의 신원 조회는 문학림〔1969년까지 김형욱(金炯旭) 정보부장의 비서실장〕이 맡아 주었고, 발급 절차는 정일권의 비서관인 신성재가 도맡아했다. 그녀는 국무총리 정일권과 ‘깊이’ 알고 지냈고, 정․재계 요인들 사이에서 ‘밤의 요화’라는 이름을 얻고 있었다. 피살 직후 박정희는 김종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정 총리가 제 발로 와서 다 얘기했어. 그 여자와의 관계도 다 말하고 갖고 싶던 사내아이도 낳았다고 했어. 그런데 그 여자가 죽은 건 자기와 무관하다는 게야. 용서해 달라며 빌고 갔어." 세 살배기 사내아이의 진짜 아버지는 누구인가? 그 무렵 중앙정보부도, 영부인 육영수(陸英修)도 깊은 관심을 갖고 캤던 문제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정치인들도 관심을 갖고 지켜봤지만 ‘동시상영’으로 벌어진 일이기에 결론을 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1970년 3월 말 강권적인 보도 통제로 인해 신문지상에서 사라진 정 여인 사건은 두 달 뒤인 5월 19일 국회에서 다시 문제가 되었다. 당시 신민당의 조윤형(趙尹衡) 의원은 국회 본회의 석상에서 정일권을 가리키며 일갈을 내지른다. "내가 존경하는 정 총리입니다마는 지금 세상에서는 모두가 다 이 양반의 아들이라고 그래!" 의석이 술렁이는 동안 조 의원은 "살인 사건에 강력범 담당 검사가 아닌 공안 검사가 나선 점, 정 여인이 회수여권을 발급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청부 살인의 의혹이 있다"며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당시 정일권의 여성 편력은 정가의 여러 참새들이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었고, 웬만한 사람이면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터진 정 여인 사건을 계기로 정일권은 한때 정치적인 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정 총리를 공격한 세력으로는 야당말고도, 부총리를 지낸 장기영, 김성곤(金成坤), 백남억(白南檍) 등의 4인방, 그리고 영부인 육영수를 정점으로 하여 각계 상류층 부인들이 중심이 된 친목 내지는 봉사 단체인 양지회가 있었다. 그러나 사건은 진상규명 없이 유야무야된 채 종결되고 말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정 여인이 비명횡사한 이후 친자 확인 소동 말고도, 2, 300억원 규모의 소송 문제를 불러일으켰다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전모는 다음과 같다.
정인숙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박종규(朴鐘圭) 비서실장의 부탁으로 정 여인을 돌봐 준 사람은 동경 주먹계에서 ‘암흑가의 신사’ ‘긴자의 호랑이’로 불리운 정건영(일본명 마치이)이었다. 정씨는 그 대가로 거액의 사업 자금을 박 실장에게 부탁, 1968년부터 외환은행 동경 지점에서 100억 엔 이상을 빌려 썼는데 부도가 나는 바람에 원금도 못 건진 것이다. 그러나 정건영은 차용금으로 부동산개발사업을 하며 땅을 샀는데 땅값이 폭등해 떼돈을 벌기에 이른다. 외환은행은 1992년 10월 현재 실제로 동경의 정건영(동아상호기업주식회사 대표)으로부터 원리금을 합쳐 365억 엔을 받아 내기 위한 재판을 계속하고 있다. 관치금융시대 실력자의 입김에 빚어낸 대표적인 슬픈 유산인 것이다. 외환은행의 부실대출의 배후에 정인숙 여인이 자리잡고 있다면, 그녀를 죽음의 길로 몰고 간 어둠의 인물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국가적인 문제로 부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통일교 관련 여부 및 박동선 사건
주미 대사로 재직 시절 정일권은 김종필 특사의 방미를 맞아 뒤치다꺼리를 해주기도 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장으로 막강한 실력을 가진 김종필이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의 대사관에는 박보희(朴普熙)가 중령으로서 무관 일을 맡고 있었다. 박 중령은 김종필이 그 당시 매콘 미 CIA국장, 맥나마라(McNamara) 국방장관 등을 만날 때 통역을 맡는 등 잔무를 거들어 주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박보희와 통일교의 관계, 김종필과 정일권의 통일교 관련 여부가 먼 훗날 미국 매스컴의 시비의 대상이 되는 첫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한편 주미 대사 시절에 있었던 한 가지 특기할 일은 훗날 자칫했으면 큰 곤욕을 치를 뻔했던 이른바 박동선(朴東宣) 사건의 씨앗을 뿌렸던 사실이다. 이 시기에 정일권은 재미한인사회의 젊은층과 친숙해졌다. 이들 젊은 그룹 중 한 사람이 박동선이었다. 박동선은 한국인학생회장으로서 정일권과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한국 정부의 미국 의회에 대한 로비에 적잖은 도움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쌀거래를 둘러싼 커미션 관계에서 비롯된 박동선 사건은 정일권에게도 불똥을 튀겼다. 박동선 사건은 외국을 상대로 정치 자금을 잘못 쓰다가 나라의 위신이 말씀 아니게 실추되고 만 사건이다. 박동선을 처음으로 소개하여 권력층과 연계시켜 줌으로써 박동선으로 하여금 이권과 대미 공작의 주역으로 부상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정일권이었다. 중상모락이라는 정씨 측근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1970년대 말 이 스캔들이 악화되어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자 정일권은 상당히 난처한 입장으로 몰리게 된다.
● 한일간의 인맥 형성과 정일권
1957년 일본에서는 기시 내각이 성립하자 기시를 중심으로 축지회(築地會)가 결성되었다. 만주에서 활동한 자들의 유지를 모아 회고담이나 나누며 서로 왕래하자는 정도로 시작된 축지회는 1965년부터는 회원수가 1백여 명으로 늘어나 월례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종전 후 전범자 처리가 대충 마무리되고 생활이 안정되어 가면서 만주국 출신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1953년 기시의 축지회보다 4년 앞서서 난성회가 결성되기에 이른다. 축지회가 주로 만주국 관리들의 모임이라면 난성회는 만주국 장교들의 모임이었다. 따라서 이 모임에는 군관학교와 중앙육군훈련소 출신 장교들이 모두 회원으로 가입되었다. 이 모임에는 한국 내 동창생들도 가입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정일권으로 그는 이 두 곳 모두를 졸업했다.
한편 정일권은 1971년 한일협력위원회 회장을 거쳐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한일의원연맹 회장 및 한일친선협회장을 맡은 바 있으며, 1969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이라는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한일 양국은 "과거 두 나라 사이의 석연치 않았던 역사들을 청산하고 선린 우호를 다진다"는 구실 아래 한일의원연맹을 필두로 한일협력위원회, 한일민간합동경제위원회, 한일친선협회 등을 발족시켰다. 한일 친선단체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조직을 가지고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단체가 ‘한일의원연맹’이다. 이 단체는 당초 1972년 동경에서 한일의원간친회라는 이름으로 발족, 1975년에 한일의원연맹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한일친선협회는 일본측의 일한친선협회와 짝을 이루는 단체이다. 1961년 일본의 지방에서부터 창립되기 시작한 일한친선협회는 1977년 현재 전국 2개 현을 제외하고는 모두 결성되어 46개 지역에 지부를 가진, 소위 일본 전역에 걸친 일한 친선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한일 친선단체들은 형식적이나마 양국간의 유대를 강화시킨 반면, 내용적으로는 양국 엘리트 계층의 인맥 형성에 기여했으며, 특히 양국간 정경 유착에 결정적인 역할을 주도했다.
● ‘청사(靑史)’ 아닌 ‘탁사(濁史)’
정일권은 지난 1965년 이후 ‘청사(靑史)’라는 아호를 사용하고 있다. ‘靑’은 권세를 잡으면 맑게 잡아야 한다는 뜻이며, ‘史’는 그 맑은 권세를 오래 남겨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외교관,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공직 생활이 그 같은 아호에 걸맞는 것이었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는 권세는 오래 유지했으되 맑게 유지하지는 못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청사 아닌 탁사’로서의 모습만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보여 준 그의 반민족적 행위에서 연유한다고 보여진다.
1991년 3월 임파선 종양암을 치료하기 위해 하와이로 떠난 정일권은 1994년 1월 먼 이국 땅에서 생을 마쳤다. 출국하기 전 그의 서재에는 박정희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박정희를 지칭할 때에는 꼭 각하라는 존칭을 쓰며, 박정희를 민족주의자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그때 와는 달리 ‘문민 정부’가 출범한 오늘의 상황은 많이 변화했다. 그가 그토록 앞장서서 옹호했던 1961년 5․16은 김종필의 ‘기승전결론’을 허물어뜨리면서 정부측에 의해 군부 쿠데타로 규정되었으며, 그의 국회의장 재임 당시 벌어진 ‘김대중(金大中) 납치․살해기도 사건’ 및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가시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의 반민족적․반민주적인 행위에 대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재발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이 글이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변화하는 현실에 대해 그는 어떤 답변을 준비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