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아라는 왕관이 아니다. 왕권을 산징하는 왕관은 오직 왕과 왕비만이 쓸 수 있는 것에 비해, 티아라는 왕족이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누구든지 착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시대에 많이 쓰여졌던 티아라는 기독교의 등장으로 점점 쇠퇴하게 되었으나 18세기말 다시 큰 붐을 이르키며 귀족 여성들 사이에 인기를 누리게 된다. 고대 로마에 대한 관심이 주 이유였는데, 이것은 나폴래옹이 스스로 자신을 황제라 칭하면서 로마 제국에 대한 향수를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폼페이 유적의 발굴 등 고고학의 발달로 인해 티아라의 인기는 점점 높아지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유럽의 제국주의가 한창이었을 때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은 보석으로 장식된 티아라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프리카나 인도 등 식민지에서 많은 양의 질 좋은 다이아몬드를 비교적 저렴 (?)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귀족이나 왕가의 딸이라고 아무나 보석으로 장식된 티아라를 착용할 수 는 없었다. 특히 청교도 정신이 엄격하게 살아있는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다른 유럽의 나라들도 마찬가지 였지만), 오직 결혼한 여자만이 다이아몬드나 다른 보석을 착용할 수 있었다. 정숙한 처녀는 번쩍거리는 다이아몬드나 값비싼 보석을 달면 않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진주같은 보석은 비교적 얌전하다고 여겼기에 허용이 됬으나, 다이아몬드는 대부분 결혼 후에나 쓸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한 후에도 티아라나 다른 보석 장식은 저녁에 쓰는 것이 애티켓이었다.

다이아몬드와 진주로 장식된 이 티아라는 작센주의 마리아 안나 공주 (Princess Maria Anna of Saxony)와 토스카나의 레오폴도 2세 대공 ( Leopoldo II, Grand Duke of Tuscany)의 결혼식을 위해 만들어졌다. 마리아 안나 공주는 1832년 잚은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고, 레오폴도는 그 다음해 1833년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리아 안토아네타 공주 (Maria Antonietta of the Two Sicilies)와 재혼한다. 이 티아라는 레오폴도의 딸 마리아 이사벨라 공주 (Archduchess Maria Isabella of Tuscany)가 그녀의 외삼촌 트라파니 백작 (Francesco, Count of Trapani)과 결혼하기 위해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갈때 (외심촌이였지만 마리아 이사벨라보다 겨우 7살 연상이었다) 그녀에게 주어지게되고, 그후로 계속 양시칠리아 왕국에 있게 되었다. 1999년 이 티아라는 경매에 붙여져 팔리게 되었지만, 양시칠리아 왕국의 칼라브리아 공작부인인 카밀라 (Camilla, Duchess de Calabria)가 다시 사들이게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 (Queen Victoria)의 남편 알버트공 (Prince Albert)이 그의 아내를 위해 직접 디자인한 다이아몬드와 에매랄드 티아라. 1845년에 만들어졌다.
나폴래옹 3세 (Napoleon III)의 아내 유지니 황비(Empress Eugénie)를 위해 1885년에 만들어진 진주 티아라. 당시 유명한 보석상이었던 가브리엘 레무니에(Gabriel Lemonnier)가 재작했다.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의 소유.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셋째 아들의 딸 마가렛 공주 (Princess Margaret of Connaught)가 1905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 (Prince Gustaf Adolf of Sweden)와 결혼했을때 그녀의 친삼촌이었던 영국 국왕 애드워드 7세 (King Edward VII)와 알랙산드라 왕비 (Queen Alexandra)로 부터 선물받은 티아라. 다이아몬드와 루비로 장식된 이 티아라는 마가렛 공주를 따라 스웨덴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지금까지 스웨덴 왕가의 소유이다. 마가렛 공주는 그녀의 시아버지가 1907년 스웨덴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왕세자비의 칭호를 받게 되지만, 1920년 38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게된다. 그녀의 남편은 1950년, 67세의 나이로 스위덴의 국왕 구스타프 6세가 된다.
1910년 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국제 티아라. 총 765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이 티아라는 2000년 미국의 팝가수 마돈나 (Madonna) 가 영국 감독 가이 리치(Guy Richie)와의 결혼식에서 썼던 것으로 유명하다. 목걸이로도 쓸수 있는 이 티아라를 마돈나는 영국 보석상 애쉬프리 (Asprey of London)으로부터 샀으나, 2006년 자선 바지회를 위해 이 머리장식을 경매에 붙이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공작 (2nd Duke of Westminster)이 1911년 그의 첫번째 아내 콘스탄스 콘월리스-웨스트 (Constance Edwina Cornwallis-West)에게 결혼 선물로 준 티아라. 프랑스의 쇼메 (Chaumet)에게 주문 재작한 이 티아라는 280개의 다이아몬드와 푸른색 에나멜로 장식되어 있으며, 러시아의 전통적인 머리장식 코코쉬닉 (kokoshnik)을 본따 만들어 졌다. 공작과 콘스탄스 양의 결혼은 1919년 이혼으로 끝나게 된다. 한동안 웨스트민스터 가문을 떠나있던 이 티아라는 현재 웨스트민스터 공작 (6th Duke of Westminster)이 다시 사게 되었고, 지금은 웨스트민스터 집안의 소유이다.



캐임브리지 연인의 티아라 (Cambridge Lover's' Knot Tiara)라고 불리우는 이 머리장식은 영국의 앨리자베스 2세 여왕 (Queen Elizabeth II)의 할머니였던 매리 왕비 (Queen Mary)가 1914년에 주문 제작한 티아라. 매리 왕비는 그녀의 할머니 독일 헤세의 아우구스타 공주 (Princess Augusta of Hesse)가 1818년 영국의 캐임브리지 공작 (Duke of Cambridge)과 결혼했을때 선물받은 티아라를 본딴 것을 갖고 싶어 했기 때문에 보석상에게 주문을 했다. 사실 이 디자인은 당시 인기가 있었던 디자인이 었으므로, 여러 유럽의 왕실들을 걸쳐 5개의 연인의 티아라 (Lover's' Knot Tiara)가 만들어 졌다.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이 머리장식은 원래 38개의 진주가 달려 있었으나 (위의 매리 왕비의 사진을 보면 아래에 진주 19개, 위로 19개가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매리 왕비는 1935년 부터 위에 장식된 진주들을 때어내고 이 티아라를 쓰기 시작했다. 앨리자베스 여왕이 이 티아라를 물려받았고, 그녀는 이 머리장식을 다이애나 왕세자비 (Princess Diana)가 1981년 찰스 왕세자와 결혼했을때 며느리에게 선물로 물려 주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로 인하여 유명해진 이 티아라는 1996년 그녀가 찰스와 이혼했을때 다시 영국 왕실에 반환되었다.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자주 이 티아라를 썼으나,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사실 이 티아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너무 무거워 두통이 생긴다고 호소하곤 했다), 대신 결혼식날 썼던 스팬서 가문의 티아라를 자주 친정으로 부터 빌려 썼었다.

1930년 웨스트민스터 공작 (2nd Duke of Westminster)이 그의 세번째 아내 롤리아 폰손비 (Loelia Ponsonby)에게 결혼 선물로 준 티아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결혼은 1847년 이혼으로 끝나게 된다.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 디자인은 종전의 다른 티아라들과는 틀리게 둥그런 모자가 아닌 머리띠모양을 닮았다. 목걸이로도 쓸수 있는 이 티아라는 맨위 중앙과 양옆에 세개의 큼직한 다이아몬드가 달려 있었으나 (롤리아 폰손비는 훗날 그 다이아몬드들이 너무 커, 마치 유리로 만든 가짜로 오인 받을 정도였다고 술회한다), 1959년 공작의 사촌 (공작이 1953년 후손이 없이 죽자, 그의 사촌이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된다)이 많은 재산새를 감당히지 못하여 이 티아라를 팔게 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보석상 해리 윈스턴 (Harry Winston)이 티아라의 새 주인이 되었고, 그는 세개의 큰 다이아몬드를 더 작게 쪼개어 다시 티아라에 장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