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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 대한민국 [독도,간도,대마도] 원문보기 글쓴이: 고운소리
▲ 두모포(豆毛浦) : 현재 서울 성동구 옥수동 지하철 3호선 옥수역 주변이다.
▲ 입석포(立石浦) : 금호동과 응봉동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 매봉의 남쪽 기슭 한강연안을은 전부터 경도십경의 하나로 손꼽아 입석포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입석포는 두모포의 상류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두모포는 동호대교 바로옆 북단을 가리키는 표구였다. 한강변에 큰바위들이 사람과 같이 서 있다하여 입석포라 하였으며 선돌개라고도 하였다. 입석포앞 한강에는 저자도라는 섬이 있었는데 세종은 둘째딸 정의공주에게 하사하였는데 그의 공주으 아들 안빈세가 물려받았었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동서약2km에 달하는 섬이 있었는데 1970년대 강남 아파트 건설시 무분별한 골재채취로 자취를 감추고 형태만 겨우 남아있다.
▲ 입석조어 ; 옥수동 앞 한강은 입석조어의 명소였다. 매봉끝의 암석이 깎아진듯하여 절경을 이루었으며 중랑천과 합류지점으로 낚시의 명소였다. 당시에는 놀잇배의 선착장이 있었으며 성종시대의 월산대군,이심원,강희맹,서거정,이승소,성임 등의 문신들이 한성의 아름다운 열곳을 정해 한도십영이라 하였는데 이곳이 그중 하나인 입석조어이다. 1967년까지만 해도 빨래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위는 1956년 사진) |
▲ 쌍호정터 : 서울 성동구 옥수2동 삼성아파트內
▲ 익조(문조)의 비 조대비의 집 쌍호정의 옛모습 : 쌍호정은 현 옥수동 295번지 삼성아파트 109동 앞에 있었으며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구택지이다. 순조8년(1808년)12월6일 조대비가 이곳에서 출생하였는데 출생하던날에 정자앞에 두마리의 호랑이가 앉아있었다하여 쌍호정이라 이름하였다한다. 생가뒤편으로는 저만치 독서당이 있어 가끔씩 그곳에서 글을 읽었다하며 1958년까지 그 독서당은 남아있었다고 한다.
▲ 익조(문조)의 비 조대비의 집 |
▲ 동호독서당址
1426년(세종 8)에 집현전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이 세종의 명을 받아 재주와 덕행이 뛰어난 문신을 선정하여 장의사(藏義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게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세조 때 일시 폐지되었다가 1491년(성종 22)에 상설기구로 ‘남호(南湖) 독서당’이라는 현호(懸號)를 달고 복구되었다
1517년(중종 12)에는 지금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玉水洞) 한강 연안의 두모포(豆毛浦)에 독서당을 신축하고 ‘동호(東湖)독서당’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 소실될 때까지 학문연구와 도서관의 기능을 담당하였는데, 정조 때 규장각이 설치됨에 따라 완전히 소멸되었다
▲ 독서당 계회도<출처:국회도서관>
▲ 사진으로 남아있는 동호독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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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봉산의 팔각정 : 매봉산은 서울 중구,용산구, 성동구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보이는 팔각정은 매봉산 정상에 있다.
▲ 매봉산 정상에 있는 시비
▲ 서울성곽 중 남산(목멱산) 구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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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성곽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태조 4년(1395)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살피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인왕(仁王)·목멱(木覓)·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네 산을 연결하는 5만 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에 걸쳐 무려 11만 8,000여명이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지구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글자를 표시하여 백악 동쪽에서부터 천(天)자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 이르러 조(弔)자까지 구획하여 공사를 하였다. 공사는 구역마다 책임자를 두어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축성한 고을의 이름을 새겨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평지는 아래 부분이 25척, 윗 부분이 18척 되는 너비로 높이 25척의 규모로 흙을 쌓았는데, 그 성벽의 길이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구름다리를 쌓고 그 좌우에는 돌로 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해 가을에도 8만명의 정부(丁夫)를 동원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돌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4대문이란 동쪽의 흥인문(興仁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4소문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가르킨다. 이 가운데 흥인문에만 옹성(甕城)을 쌓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숭례문은 1396년에, 흥인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세종 4년(1422)에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바꾸면서 더 높게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女墻)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약 32만 2, 000명의 인부가 동원된 이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로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관리를 전담케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 때 수축이 있었고, 숙종(肅宗) 30년(1704) 3월부터 약 5년간에 걸쳐 3군영(三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 975보, 성첩(城堞) 7, 081개로 만드는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또한, 영조 19년(1743)에도 부분적인 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으며, 고종 6년(1869) 동대문의 개축이 있었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처음 축조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이 있었는데, 세 차례의 축조는 축조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이 쉽게 구분된다. 즉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래 부분은 비교적 큰돌로, 윗 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으나,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와 세로가 2척 규모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러한 축조술의 변화는 조선시대 축성술의 전반적인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지방의 읍성(邑城)과 산성(山城)에도 적용되어진 모범이었다. 1915년 일제는 근대 도시로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하여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그 결과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의 성벽과 숭례문·흥인지문·숙청문ㆍ창의문ㆍ광희문 등이 전체 또는 일부 남게 되었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돌로 된 성벽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 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이후 혜화문이 복원되고 숙청문ㆍ광희문의 문루가 복원되는 등 계속적인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남산(목멱산) 봉수대 : 서울 기념물 제14호/ 서울 중구 예장동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모두 남산 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였는데, 남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남산에 설치된 봉수대는 갑오개혁 다음 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 봉수대의 명칭은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木覓山) 봉수라고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라고도 하였다. 남산 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현재의 남산 봉수대는 《청구도》 등 관련자료를 종합하고 고증하여 현 위치에 1개소를 복원한 것이다. 봉수란 근대적 통신수단이 발달되기 전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제도이다. 변방에서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 경우 그 사실을 가까운 관아와 해당 지역에 신속하게 알려 위급한 사태에 빨리 대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곳에 설치한 봉수대를 릴레이식으로 중앙에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한국의 경우 봉수는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였다.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경계에서 적과 아군이 접전 중이면 다섯을 올리도록 하였다
▲ 서울 N타워
이 전망대는 1969년 12월 동양방송·동아방송·문화방송 등 3개의 민영방송국이 공동으로 투자하여 종합전파탑과 함께 관광전망대의 건설을 허가받아 한국 기술과 장비로 착공하여 6년간의 공사 끝에 1975년 8월 완공하였다
1981년 10월 15일 일반에게 공개(3층까지만)되어 관광명소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 탑에 올라가면 서울 전역은 물론 멀리 송악산(松嶽山)과 인천항까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2000년 YTN에서 인수하고, 2005년 4월 YTN이 CJ와 서울타워 리노베이션 계약을 맺고 전면 개설공사를 하여 2005년 12월 N서울타워로 개장하였다. N서울타워는 해발 479.7m이며, 철탑·탑신 높이가 각각 101m·135.7m이다
▲ 서울특별시 교육정보연구원앞 분수대에서 바라본 목멱산(남산)과 N타워
▲ 안중근의사 동상
안중근[安重根, 1879.9.2~1910.3.26]의사는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사형되었다.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안중근 의사 최후의 유언
▲ 김구선생을 기리는 백범광장
▲ 목멱산 백범광장에 있는 김구선생 동상
김구[金九, 1876.7.11~1949.6.26]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신민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목멱산(남산) 백범광장에 있는 이시영선생 동상
이시영[李始榮, 1869.12.3~1953.4.17]선생은 한말의 독립운동가·정치가. 만주 신흥강습소를 설립, 독립군양성에 힘썼다. 임시정부, 한국독립당에 참여했다. 1948년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 통치에 반대했다.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 낙선했다
▲ 숭례문 복구현장 모습 :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부른다.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의 우진각지붕인데, 원래는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처음 지은 시기도 정확히 알 수 있으며 견고한 수법과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조선 전기 건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이다.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짜리 목조 누각이 대부분 타버렸으며, 석축만 남았다
▲ 불타버린 숭례문
▲ 6.25 전쟁 상흔을 입은 숭례문의 1952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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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광장
▲ 서울광장과 분수대
▲ 황궁우(皇穹宇) : 서울시 중구 소공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제단/사적 제157호
원구단(圓丘壇)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말하는데 원단(圓壇)이라고도 한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 성종(成宗)때부터 원구제(圓丘祭)가 제도화 되었다 한다. 조선 초기에는 제천의례(祭天儀禮)를 억제함으로써 원구제(圓丘祭)가 폐지 되었다가 조선을 대한제국(大韓제國)이라하고 고종(高宗)이 황제(皇帝)로 즉위하면서 황제 즉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서부터 원구단이 다시 설치 되었다.
원구단은 1897년(고종34년)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수있도록 옛 날별궁(南別宮)터에 원단(圓壇)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이다. 그 뒤 단지내에는 화강암으로 된 기단위에 3층 8각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1899년 축조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봉안(奉安)하였으며,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처음 조성된 단지는 1913년 일제에 의해 원구단이 철거되고 그 다음해 조선호텔이 축조되었으며 지금은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아치모양의 석조 대문만 조선호텔 경내에 남아있다.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이다.
▲ 황궁우 앞의 아치모양의 석조대문으로 삼문이다.
가운데는 신문(神門)이고, 제관(祭官)은 동입서출(東入西出), 즉 동쪽으로 들어갔다가 나올때에는 서쪽으로 나온다.
▲ 석고(石鼓) : 북 모양을 한 돌이다.
석고는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3개의 석고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 석고에는 용무의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 무늬는 조선조 조각기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 2009년7월26일 일요일 오후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빗줄기가 폭포수를 이루는 황궁우 모습
▲ 덕수궁대한문[德壽宮大漢門]: 비오는 저녁 비를 피해 사람들이 서있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우진각지붕집이다. 원래 정전(正殿)인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의 정면에 있었던 것을 나중에 동쪽으로 옮긴 것이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명례궁(明禮宮)을 옛이름인 경운궁(慶運宮)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6년 4월에 그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쳤다. 수리하면서 겹처마에 단청을 하였으며 각마루에 양성(兩城)을 하고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얹었다.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南廷哲)이 썼다
▲ 정동극장쪽으로 가는 길목의 덕수궁 돌담길
▲ 경교장(京橋莊) : 김구(金九)의 개인 사저이다.
이화장(梨花莊)·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건국활동 3대 명소의 하나로 불린다. 서대문경교장이라고도 한다. 광화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던 동양극장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자리이다. 최창학 소유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竹添莊)이라 하였으나, 김구가 경교장이라 개칭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당초 2001년 4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한국 근현대사에서의 동 건물의 중요성 등이 재평가되면서 2005년 6월 13일 국가 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되었다. 현재 동 건물 2층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김구 선생의 옛 집무실이 원형대로 복원되어 김구 기념실로 운영되고 있다.
▲ 흥화문 :
흥화문(興化門)은 조선시대 광해군 10년(1618년)에 세운 경덕궁(현재 경희궁)의 정문이다. 1910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들을 헐고, 몇몇 건물들을 매각하고 이건하면서 흥화문도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장충동 박문사(博文寺)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박문사는 안중근에 의해 포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일제가 지은 사당이었으나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폐사되었다. 그 후 박문사에 영빈관이 들어서고 신라호텔이 서면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의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은 원래 궁궐의 동남쪽 모퉁이, 지금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 동향하여 서 있다가 1915년 도로공사로 남쪽으로 이전되었으나, 현재 복원된 흥화문은 원래의 위치와 향이 다르게 남향으로 되었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興元門), 오른쪽에 개양문(開陽門), 서쪽에 숭의문(崇義門), 북쪽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이다. 흥화문은 건립 당시에는 다른 궁궐의 정문과 같이 중층으로 세울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인경궁(仁慶宮)의 정문이 층문(層門)이어서 단층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덕궁이 피우처(避寓處)였기 때문이다.
흥화문의 초석과 기둥은 원형이며, 가운데 기둥 열 3칸에는 문짝을 달았다. 문틀 위에는 홍살을 달았고,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두었다. 천장은 가운데 칸은 연등천장, 좌우 협간은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다. 지붕마루에는 취두·용두·잡상 등이 장식되어 있다.
▲ 경희궁 숭정문과 숭정전
1974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이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에 해당하는 건물로서 왕이 대소 신료들의 조하를 받던 곳이다. 숭정전은 조선 광해군 9년(1617)부터 12년(1620) 사이에 지어진 궁궐로, 경희궁과 연관된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1829년(순조 29) 대화재가 일어나 회상전(會祥殿), 융복전(隆福殿) 등은 소실되었으나 숭정전은 피해를 면하였다.
숭정전은 1926년 일제에 의하여 조계사로 이전되었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 안의 정각원(正覺院)이라는 법당으로 쓰이고 있으나 건물이 낡아서 이전이 어렵게 되었다. 그후 1980년에 경희궁터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1985년부터 다섯 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숭정전 2중 기단을 근거로 1989년부터 6년에 걸쳐 경희궁의 본래 숭정전 자리에 복원하게 되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기둥이 있는 위쪽만 공포를 얹은 주심포식에 팔작지붕으로 대궐의 정전다운 품격을 갖추고 있다. 남쪽에는 숭정문(崇政門), 동쪽에는 여춘문(麗春門), 서쪽에 의추문(宜秋門), 북쪽에는 후전(後殿)인 자정전(資政殿)의 정문(正門)인 자정문이 자리잡고 있다경희궁에 있던 1백여 채의 건물 가운데 흥화문(興化門)·황학정(黃鶴亭)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이 정전뿐이어서, 경희궁의 건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 구세군회관 건물앞 좌측에 있는 흥화문터 : 현 경희궁에 있는 흥화문이 원래 잇던 자리이다.
▲ 훈련도감터 : 구세군회관 앞 우측에 있다.
▲ 야주개터 ; 야주개터는 신문로 18번지와 20번지 사이 당주동과 신문로 1가에 걸쳐있던 고개이다. 야주개는 근처에 있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현판 글씨가 캄캄한 밤에도 이 고개까지 빛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야주개는 아동문학가인 소파 방정환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각(高宗卽位40年稱慶紀念碑閣)
비각안에는 대한제국의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1902년 세운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의 비문에는 고종이 황제를 칭한 것과,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 그리고 고종이 즉위 40년이 된 사실 등을 기록하였다. 1969년 7월 28일 사적 171호로 지정되었다.
▲ 보신각 :
서울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조선시대 한양(漢陽)에 종을 처음 건 것은 1398년(태조 7)으로, 광주(廣州)에서 주조한 종을 청운교(靑雲橋) 서쪽 종루에 걸었다. 1413년(태종 13)에 종루를 통운교(通雲橋:종로 네거리)로 옮기고 1458년(세조 4)에는 새로 대종(大鐘)을 주조하여 달았으나 임진왜란으로 종루는 소실되고 종도 파괴되었다. 그후 1619년(광해군 11)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을 걸었는데 이때 세운 종각은 임진왜란 전의 2층 종루가 아니고 1층 종각이었으며 여기에 건 종은 명례동(明澧洞) 고개에 있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이 종은 본래 원각사종으로 세조 때에 주조한 것인데 1536년(중종 31)에 남대문 안으로 옮겨놓았다가 1597년(선조 30) 명례동 고개로 옮겼던 것을 광해군 때 종각을 복구하면서 이전한 것이다. 그후 조선 후기까지 4차례나 화재와 중건이 있다가 1895년(고종 32)에 종각에 '보신각'이란 현액(懸額)이 걸린 이후 종도 보신각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종각이 파손된 것을 1953년 중건하였다가 1980년 다시 2층 종루로 복원하였다. 원래 보신각터는 이곳과 조금 떨어진 서울시 종로구 종로2가 102 일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