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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밑의 백조 다리’ 라는 우스개가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백조의 자태는 우아함 그 자체지만
물 속에 잠겨 있는 두 다리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다는 뜻이다.
발레리나 강수진(35)의 발 사진을 본 사람은 누구나 충격을 받는다.
열 개의 발가락마다 박혀 있는 뭉툭한 굳은살,
단 하나도 성치 않은 발톱들. 사람의 발이 아니라 나무둥치 같다.
이 끔찍하게 망가진 발은 강수진이 살아온 인생을
어떠한 미사여구(美辭麗句)보다 더 확실하게 말해준다.
그녀의 인생은 발레 그 자체였다고.....
누구의 발인지 짐작이나 하시겠습니까...
희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발이 아닙니다.
사람의 발을 닮은 나무뿌리도 아니고
사람들 놀래켜 주자고 조작한 엽기사진 따위도 아닙니다.
예수의 고행을 좇아나선 순례자의 발도 이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명실공히 세계 발레계의 탑이라는 데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을,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입니다.
그 세련되고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세계 각국의 내노라 하는 발레리나들이
그녀의 파트너가 되기를 열망하는,
강수진 발입니다.
처음 이 사진을 보았을 때 심장이 어찌나 격렬히 뛰는지
한동안 두 손으로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답니다.
하마터면 또 눈물을 툭툭 떨굴 뻔 하였지요.
감동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예수가 어느 창녀의 발에 입 맞추었듯,
저도 그녀의 발등에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마치 신을 마주 한 듯, 경이로운 감격에 휩싸였던 것이지요.
그녀의 발은,
그녀의 성공이 결코 하루 아침에 이뤄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루 열아홉 시간씩, 1년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지도록,
말짱하던 발이 저 지경이 되도록..
그야말로 노력한 만큼 얻어낸 마땅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녀의 발을 한참 들여다 보고..
저를 들여다 봅니다.
너는 무엇을.. 대체 얼마나... 했느냐..
그녀의 발이 저를 나무랍니다.
인정합니다..
엄살만 심했습니다..
욕심만 많았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고은님 작가의 글중에서-
독일 슈투트가르트는 발레리나 강수진의 도시다.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 벤츠의 본사가 독일 굴지의 공업도시지만 적어도 발레 팬들에게는 강수진의 도시다. 지난 198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최연소 단원으로 입단, 크르 드 발레, 솔리스트를 거쳐 1996년 프리마 발레리나로 당당히 등극한 강수진은 지금 이 발레단의 간판 스타이자 슈투트가르트에서 가장 사랑받는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됐다.
슈투트가르트에 가면 공연장이 아니더라도 도시 곳곳에서 강수진을 만날 수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우선 거리에서는 강수진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반긴다. 시내를 오가는 전차를 장식하고 있는 공익광고에서 강수진이 환히 웃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노선버스에도 강수진이 클로즈업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광고가 등장해 거리는 그야말로 강수진으로 넘친다.
또 화원에는 강수진이라는 이름의 난(蘭)이 인기다. 서양에서는 난의 신품종을 개발할 때 유명인의 이름을 붙이곤 하는데, 슈튜트가르트 난 재배업 협회가 지난 1998년 노란색 꽃이 피는 신품종을 개발하면서 인기 절정의 발레리나 강수진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강수진 난 또한 인기가 높아 분양을 받기 위해서는 여섯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전해진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주무대인 바덴 뷔르템베르크 주립극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사백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시즌 오프닝을 비롯해 주요 공연의 주역은 그가 도맡고 있다. 한마디로 활약이 눈부시다. 그러나 강수진이 슈투트가르트의 자랑이 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멀고도 고독했다. 그 과정은 한 명의 발레리나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모나코의 악바리
강수진이 발레와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이었다. 어릴 때 리틀엔젤스에서 활약한 경력도 있어 선화예중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하던 그는, 어느 날 수업시간에 발레 하고 싶은 사람 없느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무심코 "예"하고 대답한 것이 인연이 돼 발레를 시작했다.
그때가 열두 살, 서양에서는 대개 여덟 살이나 아홉 살쯤 발레를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늦은 셈이다. 하지만 처음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강수진은 발레와의 사랑에 쏙 빠졌다. 발레가 너무 좋아 밤에 잠자리에 들 때도 포인트슈즈를 벗지 않았을 정도였다. 강수진의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 보면 어느 틈에 혼자 찬밥을 챙겨 먹고 새벽부터 학교 연습실에 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균형잡힌 체형, 이국적인 외모, 그리고 한번 시작한 일에는 전력투구하는 성실함까지 더해져 그는 곧 눈에 뛰는 발레 지망생이 됐다. 그러던 중 마침 선화예중을 방문한 모나코 발레학교의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교장의 눈에 띄게 된다. 베소브라소바 교장의 권유로 유학 길에 오른 때가 선화예중을 졸업하고 선화예고에 막 진학했던 시절, 굳은 각오로 모나코행 비행기에 올랐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첩첩산중이었다. 말 한마 디 통하지 않는데다 출발이 늦어 남들이 팔구 년 동안 배우는 과정을 3년 만에 끝내야 했다.
악바리 기질이 동했다. 밤 아홉시면 도두 불을 끄고 취침해야 하는 기숙사 생활이었지만 수위 아저씨들의 순찰이 끝나는 밤 열한 시까지 숨죽이고 기다리다가 몰래 기숙사 위층의 스튜디오에 올라갔다. 창 밖으로 모나코의 야경이 펼쳐지는 스튜디오에서 홀로 달빛에 의존해 새벽까지 땀을 흘렸다. 춤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유학 보낸 딸의 근황이 염려돼 모나코를 방문했던 강씨의 부모는, 신발 밑창이 다 해진 것도 모르고 발레에만 매달리고 있는 딸의 모습이 대견한 한편으로 안쓰러워 목이 멜 정도였다고 들려줬다.
그렇게 노력한 보람이 있어 강수진은 졸업을 한 학기 남겨 둔 1985년 1월, 발레리나의 등용문이자 세계 최고 권위의 주니어 발레 콩쿠르인 로잔 콩쿠르에서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이는 개인적으로도 영광이었지만 한국 발레리나가 메이저 국제 콩쿠르에서 상위 입상한 첫 사례였다.
이후 강수진의 행보는 바로 우리나라 발레의 해외 개척사가 되기도 했다. 로잔 콩쿠르 제패는 발레리나 지망생에게는 엄청난 기회를 거머쥐었음을 의미한다. 세계 유수의 발레단에 입단할 기회가 성큼 다가오기 때문이다. 강수진은 많은 단체 중에서 슈투트가르트를 택했다. 클래식과 모던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도 정점이었지만, 그보다 2차대전 후 최고의 발레리나로 일컬어지는 마르시아 하이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베소브라소바 교장은 독일의 인종차별주의를 염려하기도 했으나, 최선을 다하면 어디서나 인정받게 된다는 믿음으로 강수진은 슈투트가르트 행을 택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16개국 사람들이 단원으로 활약하고 있어 '발레의 유엔'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국적인 단체였다.
세사람의 어머니
현명한 선택이었던 셈이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엄했다. 이 발레단 창단 이해 최연소 단원으로 당당히 합격한 그였으나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다. 처음 얼마간은 공연 출연조차 할 수 없었고, 겨우 무대에 서게됐을 때도 코르 드 발레, 그것도 뒷줄 맨 구석이었다.
독일에 간 첫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음습한 기후에 뼛속까지 추위가 밀려들었다. 게다가 그는 지하 셋방에서 초라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외로움과 스트레스로 자포자기해 체중은 56킬로그램까지 늘었다. 발레를 그만둘까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연습에만 매달렸다. 밤을 새워 새벽까지 연습실을 홀로 지키기가 다반사였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 입단 3년 만인 1989년 처음으로 솔로를 맡았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중 1막의 요정 역할이었다.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4년 뒤인 1993년 그의 발레 인생이 새롭게 열렸다. 드디어 주역을 맡게 된 것이다. 그것도 존 크랑코 안무의 <로미오와 줄리엣> 초연 30주년 기념무대였다. 믿지 못할 일은 또 일어났다. 초연에 출연했던 하이데 예술감독이 공연을 며칠 앞두고 자신이 입었던 무대의상과 크랑코로부터 선물받은 반지를 물려주었다. 꿈만 같았다. 발레리나에게 의상을 물려주는 것은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강수진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세 사람의 '어머니'가 있었다. 물론 가장 앞자리에 설 사람은 그를 낳아준 어머니 구근모 씨다. 우리 근대 화단의 개척자이며 '한국의 로트렉'으로 불리는 구본웅 화백의 딸인 그는, 아버지에 대한 동경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세 자매를 모두 예술가로 키웠다. 불구의 몸이었던 선친이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실내에서 그림을 그리던 모습이 어린 눈에도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는 구씨는 세 딸에게 어릴 적부터 예술가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래서 언니(여진)와 동생(혜진)은 하피스트가 됐다. 모나코 발레학교의 베소브라소바 교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강수진의 성실함과 가능성을 높이 산 베소브라소바 교장은 그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며 뒷바라지했고, 아예 어머니로 부르라고 했을 정도로 그를 아꼈다. 강수진이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한 이 후에도 주요 공연에는 직접 달려와 격려했고, 지금까지도 끈끈한 유대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이 마르시아 하이데다. 1961년 존 크랑코의 예술감독 부임과 함께 슈투트가르트에 입단한 하이데는 드라마틱 발레의 금자탑을 쌓은 크랑코의 신작 대부분에서 주역을 맡아 그와 함께 슈투트가르트 발레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특히, 크랑코가 1976년 미국 순회공연 귀국길에 갑자기 사망한 이후 예술감독직을 이어받아 1996년 물러나기 30년 동안 슈투트가르트를 이끈 명실상부한 크랑코의 후계자이다. 강수진의 발레 인생이 하이데 예술감독 아래서 개화했고 의상까지 물려받았으니, 하이데는 어머니나 베소브라소바 교장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강수진에게 발레리나의 길을 열어 준 인물인 셈이다.
강수진은 <로미오와 줄리엣> <오네긴> <카멜리아 레이디> 등에서 하이데 이후 최고의 발레리나라는 찬사를 이끌어내며 커리어를 쌓아왔다. 하이데는 강수진을 "독특한 카리스마와 미모, 노력하는 자세 등 세 박자를 두루 갖춘 드문 발레리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추어지지 않으면 영혼이 아프다
강수진의 주역 데뷔 소식은 당시 한국 발레계를 술렁이게 했다. 한국 출신 발레리나의 외국 진출 자체가 쉽지 않던 시절에 유서 깊은 발레단의 주역을 맠게 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당시 무용계 인사들이 단체로 공연 관람차 독일을 방문했던 것만 봐도 그 기대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일행 중에는 강수진의 공연을 보고 눈물을 흘린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하니, 당시 강수진의 주역 데뷔는 그야말로 하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듬해 강수진의 첫 금의환향 무대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날 공연을 강수진의 세 자매가 함께 출연한 전무후무한 무대였다. 이날 연주에는 두 명의 하피스트가 필요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시 공연의 연주를 그의 언니가 하피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부천시립교향악단이 맡았다. 게다가 독일에서 하프를 공부하고 있던 동생이 마침 서울에 머물고 있던 바람에 자연스레 세 자매가 한 무대를 꾸미게 됐던 것이다.
세 자매는 정식으로 함께 공연할 계획은 없느냐는 물음에 완벽한 무대를 보여줄 자신이 생길 때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것이 언제일까. 그의 첫 귀국 무대는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멀리서나마 그의 활동을 격려하자는 국내 후원회가 결성되고 발레 붐이 일었다. 인기도 치솟았고 우리 발레리나로서는 처음으로 상업광고에도 출연했다.
경사가 이어졌다.
1995년에는 발레단의 쟁쟁한 선배들을 뒤로 하고 시즌 오프닝 공연의 주역을 따냈다. 말할 것도 없이 시즌 첫 공연을 그 발레단의 대표 주자에게 맡기는 것이 상식이다. 그때까지도 발레단에서의 직급은 솔리스트였다. 하지만 슈투트가르트 최고의 발레리나로 사실상 인정받은 셈이었다. 작품은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클래식 발레 중에서도 가장 격식이 엄격한 대작이며 강수진과는 인연이 깊은 작품이었다. 군무에서부터 '파랑새 파 드 되'까지 안 해 본 배역이 없을 정도로 익숙한 작품이었다.
초연 이후 가장 훌륭한 공연이었다는 독일 언론의 상찬이 이어졌다. 고전보다 현대에 어울린다는 평을 받기도 했던 강수진 개인으로서는 클래식 발레리나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은 무대이기도 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정상을 향한 향해가 이어졌고 이듬해에는 당당하게 주역 무용수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빛나는 영광 뒤에 숨은 상처를<잠자는 숲 속의 미녀> 공연 때도 그는 부상을 입었다. 네 명의 왕자로부터 차례로 청혼을 받는 유명한 로즈 아다주 장면에서 너무 바짝 다가선 파트너의 몸에 손가락이 부딪치며 골절을 입은 것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지만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손가락은 금세 퉁퉁 부어올랐고 수술을 해야 할 정도였지만 공연 스케줄 때문에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해당 시즌 공연을 강행했음은 물론이고 바쁜 스케줄 때문에 그 이듬해 여름 휴가 때야 비로소 서울에서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고통을 잊게 할 만한 낭보는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1999년은 강수진에게 잊을 수 없는 해일 것이다. 발레의 아카데미 상이라고 해도 좋을 '브누아 드 라 당스'의 베스트 댄서 상을 받은 것이다. 1992년 국제무용협회 러시아 본부가 제정한 이 상은 아마추어 대상의 콩쿠르와는 달리 한 해 동안 세계 각국의 정상급 단체들이 공연한 작품을 대상으로 수상하는 권위있는 무용상이다.
강수진의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존 노이마이어의 발레 <카멜리아 레이디>로 수상했다. 키로프, 볼쇼이,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 등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수상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슈투트가르트 출신 발레리나가 이 상을 탄 것 또한 처음이었다.
강수진은 시상식 갈라 공연에서 3막의 '블랙 파 드 되'를 선보였다. 이 장면은 마그리트(베르디의 오페라에서는 비올레타)가 죽기 직전 연인과 만나 마지막으로 추는 애절한 2인무로, 2000년 서울에서도 공연했다. 쇼팽의 선율에 맞춰 펼쳐진 강수진의 암울한 춤사위는 발레가 왜 예술인지를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이 무대를 통해 강수진을 무르익은 표현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강수진은 한 인터뷰에서 "춤이 잘 추어지지 않으면 영혼이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블랙 파 드 되를 보면서 이 말이 떠오른 것은 무대 위에서의 강수진은 바로 영혼으로 춤을 추고 있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표현력이 생명인 드라마틱 발레의 요람, 슈투트가르트에서 최고를 지키는 비결은 바로 혼신을 다하는 호소력 넘치는 춤에 있었던 모양이다.
스타의 화려함속에 감추진 한결같은 소탈함
그해 강수진은 국내에서는 보관문화훈장을 수상했으며 세계적인 고급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의 모델로 발탁되기도 했다. 모델 발탁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팜플렛에서 강수진을 본 바브리츠 페리라는 사진작가가 제안해 이뤄졌다. 인기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은 셈이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식으로 미뤄 보건대 강수진은 일단 발레리나로서의 경력의 정점에 가까이 다가선 듯하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화려한 스타의 대열에 올라섰지만 인간 강수진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무방비에 가까울 정도로 소탈한 태도는 스타의 그것이 아니다. 자신을 내세울 줄 몰라 인터뷰는 늘 무덤덤하다. 무대 밖에서는 화장도 잘 하지 않고 바지를 즐겨 입는다. 하지만 신발만큼은 구두다. 운동화는 너무 편해서 퍼지지 쉽다는 것이 이유다. 발레리나로서의 프로의식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는 발레단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의 아파트에 살면서 걸어서 극장과 집을 오간다. 타고난 연습벌레라 다이어트는 따로 필요 없고 스파게티를 좋아하며 음식 만들기도 즐긴다. 한 해 여섯 주의 휴가 중 절반은 꼭 서울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다. 이것이 발레리나 강수진의 무대 밖 삶이다.
코르 드 발레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라고는 무대 위에서의 역할뿐이다. 공연 때의 긴장까지도 마찬가지다. 그는 언제부턴가 무대에 나가기 전 무대 바닥을 손으로 한 번 탁 치고 포인트슈즈에 송진가루를 '탁, 탁, 탁' 세 번 묻힌다. 그렇게 하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십대에 시작한 발레 인생이지만 원숙의 경지에 다가선 지금까지도 긴장과 무대에 대한 경외심은 여전한 것이다. 발레 슈즈를 가슴에 안고 잠들던 소녀가 세계적인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기까지에는 고난과 역경의 순간이 참으로 많았다. 아마 묵묵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그의 한결같음은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든든한 힘이 됐을 것이다.
우리 발레사에 한 획을 그의 영광은 서울에서 슈투트가르트까지, 그 먼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성실과 인내로 쌓아 간 것이어서 더욱 빛난다. 강수진, 그는 한국 발레의 자랑이다.
.........글/ 이은경(발레 이야기, 열화당)
이름 : | 강수진 |
출생 : | 1967년 4월 24일 |
신체 : | 키: 167cm, 체중: 49kg |
약력 : | 1979년 선화예술중학교 입학, 발레 시작 1982년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 유학 1985년 스위스 로잔콩쿠르 동양인최초 1위 입상 1986년 세계 5대 발레단인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최연소 입단 1987년 '잠자는 숲속의 공주' 요정역으로 데뷔 1998년 '오네긴',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미국 데뷔 2002년 월드컵 기념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내한공연 |
첫댓글 강수지의 발을 보고 할 말이 없다. 레스링선수의 귀바퀴에 굳은 살도 그렇지만, 발레리나의 발이 이렇게까지 심할줄은 상상도 못했다. 짐작한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이 이렇게 다르다. 그냥 오래 오래 강수지의 발사진을 보았다.
제 삶이 부끄러워지는군요 ..!!